파지아 쿠피
파지아 쿠피 지음 | 애플북스
파지아 쿠피
파지아 쿠피 지음
애플북스 / 2012년 3월 / 376쪽 / 16,000원
1. 계집애
나는 아프가니스탄의 전통 무슬림 가문에서 태어났다. 나는 아버지의 23명의 자녀 중에서 19번째 자식이다. 어머니는 두 번째 부인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아버지가 나이가 한참 어린 일곱 번째 아내를 새로 맞아들인 것 때문에 상심해 있었다. 내 아버지 와킬 압둘 라만은 아프간 산악지대에 있는 바다흐샨 지역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부족 장로 겸 지역사회 지도자였다. 예로부터 지역사회 지도자로서 공익을 위해 힘쓰는 게 우리 집안의 전통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12살 때부터 부족 지도자의 역할을 하면서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관장하였다. 국왕에게 요청하여 바다흐샨의 험준한 산악 지역에 길을 놓은 것도 아버지였다.
아프간에 민주주의가 시작되자 아버지는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지역 주민들을 대변했다. 아버지의 아내 중 한 명을 제외한 모두는 정치적 결혼이었다. 그는 이웃 부족 지도자의 딸과 결혼하여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가장 신뢰하였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모든 살림을 맡겼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흠모했지만 그가 새로운 신부를 맞을 때마다 상심하였다. 나를 임신하였을 때 어머니는 병약한 상태였다. 아이를 너무 많이 낳아 몸이 지쳐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나를 들판에서 낳았다. 출산 후에 그녀의 생명이 위험했기 때문에 다들 어머니를 구하려고 정신없는 동안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아무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난 강보에 싸여 뜨거운 태양 빛을 받으며 하루 종일 들판에 누워 있었다. 당시 태양 빛에 난 상처가 너무 심해 십대가 된 이후에도 내 얼굴에는 데인 상처가 남아있다. 그날 신이 왜 나를 살려주셨는지 모르겠다.
2. 어렸을 적에
나의 유년기는 산지에 밝아오는 새벽처럼 황금빛이었다.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은 영화 속 장면처럼 아련하다. 내가 자란 쿠프 계곡은 아프간의 스위스로 알려져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나귀 울음소리, 졸졸졸 강물 흐르는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떠오른다. 집 앞쪽에는 어머니가 가꾸어 놓은 정원이 있었다. 우리는 필요한 모든 야채와 과일을 키워 먹었다. 그 시대 대부분의 아프간 여인들처럼 어머니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부엌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자고, 요리하고, 자녀들을 건사했다. 거기에서는 그녀가 최고 권력자였다. 우리는 부엌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잤다. 아내와 딸에게는 방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머니는 우리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와의 결혼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머나먼 나라의 왕과 여왕들, 명예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전사들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창밖에 떠 있는 달과 별을 바라보았다. 올케 언니가 도착하던 날이 기억난다. 그녀는 12살 때 오빠와 결혼했다. 그때 올케는 어머니가 아침마다 옷 입는 것을 도와줘야 할 정도의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그게 아프간 여자의 운명이었다. 여자들은 적당한 상대가 나타나면 결혼을 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집안의 수치로 여겼다. 누구도 거기에 도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나는 그런 기준들에 도전하며 한계를 깨뜨리고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 '듀크타락'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여자답지 못하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경멸이 담긴 말이다. 5살 때 나이 많은 사촌 하나가 날 듀크타락이라고 부르면서 차 한 잔 내오라고 시켰다. 사람 가득한 방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대답했다. "차를 가져올게요. 하지만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방 안에 있던 모두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3. 참혹한 죽음
1978년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했다. 몇 년 뒤 무자헤딘이라는 아프간 무장 조직이 바다흐샨 북부에서 생겨나 소련에 저항했다. 수도 카불에서는 친소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아민 대통령은 소련을 등에 업고 공포정치를 지휘했고 고문과 체포를 일삼았다. 정부는 아버지에게 고향으로 내려가 무자헤딘이 더 이상 날뛰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아버지는 무자헤딘이 자신의 지역인 바다흐샨 출신이니 그들의 불만을 들어주어 정부와 협력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믿었다.
고향에 돌아온 아버지는 마을 장로들을 데리고 무자헤딘을 설득하기 위해 반군 캠프로 출발했다. 그들은 반나절을 달린 끝에 파미르 고원의 가장 높은 지점에 도착했다. 그런데 갑자기 무자헤딘이 나타나 아버지를 납치해 갔다. 이틀 후 그들은 아버지의 머리에 총을 쏴 처형하였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은 마을에 빠르게 전해졌다. 이슬람 문화에서는 사후 24시간 이내에 시신의 얼굴이 메카를 향하도록 장례를 치러야 한다. 시신을 가져오기 위해 목숨을 걸려는 남자들은 없었다. 용기를 보인 건 여자들이었다. 고모가 사람들을 이끌고 마을과 반군 캠프 중간쯤에 버려져 있던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왔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시신은 그가 너무나 사랑했던 쿠프 계곡과 메카를 향한 채로 우리 집 뒤쪽 봉우리에 매장되었다.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모든 것의 상실을 의미했다. 우리의 삶, 풍요로움, 존재 이유가 모두 사라졌다.
4. 새로운 시작
남편의 죽음은 어머니의 마음을 찢어 놓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더 단단해졌다. 그녀의 타고난 리더십은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족들을 관리하고, 생필품을 나누고, 아이들의 운명을 결정한 것도 모두 어머니였다. 재혼 혼담이 많이 들어왔지만 어머니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모두 거절했다. 장례를 치르고 얼마 뒤 반군들이 쳐들어왔다. 그들은 가재도구를 약탈하고 무기가 숨겨진 곳을 대라고 언니와 올케를 총으로 두들겨 팼다. 어머니는 무기가 있는 곳을 알고 있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무기를 내주면 더 이상 우리를 보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무자헤딘은 우리 가족이 살아 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의 지휘관은 부하들에게 우리를 처형해도 좋다고 승인했다. 다음 날 그들이 또 들이닥치자 어머니는 날 움켜잡고 축사로 달려 들어갔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숨기려고 똥 더미를 쌓아올렸다. 숨 막히는 배설물 냄새가 아직도 생생하다. 산 채로 매장된 기분이었다. 반군이 물러간 후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정부군이 통제하는 지역으로 도망을 쳤다. 큰 오빠가 파이자바드에서 경찰소장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파이자바드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나는 7살이었다.
큰 오빠가 얻어준 집에서 나는 다른 여자애들이 학교에 가는 모습을 보았다. 다들 똑똑하고 영리해 보여서 나도 그들과 같아지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어머니에게 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래, 파지아 잔, 학교에 보내줄게." 오빠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나는 학교에서 꾸준히 1~2등을 차지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나는 자신만만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가끔 TV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영국의 마가렛 대처나 인도의 인디라 간디 총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두 여인은 오늘날까지 나의 정치적 영웅들이다. "어떻게 일개 여자가 나라를 이끌 수 있단 말인가?" 11살 때 오빠가 승진해서 카불로 보직 발령을 받았다. 우리는 오빠와 함께 이사를 갔다. 카불은 매혹적인 대도시였고 그곳에서 살았던 3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5. 다시 시골로
1989년 소련군이 물러가자 공산 정부의 수장인 나지불라 대통령이 체포되고 무자헤딘이 정권을 잡았다. 당시 나는 가족들과 파이자바드에 머물고 있었다. 카불에서는 무자헤딘 세력 간의 권력 투쟁으로 내전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카불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나는 파이자바드에서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 다니려면 부르카를 입어야 했다. 어머니는 부르카를 입혀 보내도 십대의 딸이 무자헤딘 남자들의 눈길을 잡아끌까 봐 두려워했다. 집 밖에서 무자헤딘의 청혼을 거절하면 심각한 결과를 각오해야 했다. 학교에 다닌 지 한 달쯤 지나 배다른 오빠 나디르가 나타났다. 15년 전 집을 떠났던 그는 무자헤딘 지휘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무자헤딘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사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친지들로부터 무킴 오빠가 카불에서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나는 가족들과 상의한 후 어머니를 비롯한 모든 가족이 카불로 옮기기로 하였다. 미르샤카이 오빠가 그곳에서 경찰국장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카불에서 오빠가 우리를 맞아 주었을 때 눈물이 터졌다. 오빠 집 거실 선반 위에는 무킴 오빠의 사진이 있었고, 액자에는 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아프간에서 사진을 꽃으로 장식하는 것은 애도의 표시다. 그날 저녁, 슬픔이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켰다.
6. 정의가 사라질 때
무킴 오빠는 23세의 키 크고 잘 생기고 똑똑한 카불의 법대 대학생이었다. 그는 침실에서 암살자의 총탄 세례를 받았다. 이 사건은 내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내 인생에서 오빠의 영향력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오빠는 나의 공부를 격려해 주었고, 내가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에 대해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느낌이었다. 미르샤카이 오빠가 경찰 간부였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무자헤딘과 정부가 싸워대고 있으니 경찰이 제 힘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프간은 전쟁 중이었고 전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그런 상황에서 무킴 오빠의 죽음이 살인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매일 수백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고, 여자들이 겁탈당하고, 집들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고, 정의는 더욱 부족했다. 무슬림인 나는 신이 우리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언제 살고 언제 죽을지도 그분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확신도 내 인생에 일어나는 고통스런 사건들과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견뎌내기 쉽게 해주지는 않는다. 나는 이제 사랑하는 사람을 인사도 없이 떠나보내는 것이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왜냐고 물어보아도 소용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 시절에는 그게 우리 삶이 방식이었을 뿐이다.
7. 내전
나는 카불에서 예전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오빠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카불은 어떤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여러 구역으로 분리되었다. 공동 정부의 지도자들이 권력 쟁취를 위해 서로 투쟁하면서 시내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아프간 국민들은 매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총을 든 남자들이 거리를 배회하면서 아무에게나 총을 쏘았다. 나는 영어 수업을 듣기 위해 택시를 이용했는데 로켓포의 표적이 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택시가 없을 때는 어둠 속에서 2시간을 걸어 집으로 왔다. 젊은 여자 혼자 다니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총알과 로켓포뿐만 아니라 강간의 위험까지 있기 때문이다. 오빠와 언니들은 내가 위험을 감수하며 수업에 가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그들은 어머니가 왜 매일 밤 위험한 곳으로 사랑하는 딸을 보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 후 어머니는 무킴 오빠의 무덤과 가까운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집 주변에서 전투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위험한 지역이었지만 어머니는 매일 오빠의 무덤을 찾았다. 어느 날 미르샤카이 오빠의 친구가 나타났다. 그는 즉시 우리에게 떠나자고 했다. 어머니는 떠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몇 시간 후 마음을 바꾸었다. 음식을 사러 나갔다가 전날 밤 무자헤딘이 우리 집 근처에 들이닥쳐 여자들을 겁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안전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딸의 순결과 존엄성만큼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전투가 벌어지는 위험한 지역을 뚫고 카불에 있는 오빠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 일을 계기로 어머니는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지만 내게 쏟아 붓는 관심만은 여전했다. 영어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고집하고, 내가 집에 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 무자헤딘이 권력을 위해 싸우고 있는 동안 아프간의 또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세력이 자라나고 있었다. 훗날 전 세계를 뒤흔든 탈레반이었다.
8. 그녀를 잃다
그즈음 고향 마을 출신 남자가 내게 청혼하고 싶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하미드라는 남자였는데 나는 그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니의 병상을 지키고 있었을 때 바다흐샨 남자들이 병문안을 왔다. 그중에 하미드가 있었다. 잘생기고 지적인 얼굴에 호리호리한 몸을 지닌 청년이었다. 내게 관심을 갖고 있는 구혼자의 외모가 매력적이라 은근히 기뻤다. 손님들이 떠난 후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파지아 잔. 네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게 이 엄마 소원이야. 그 남자가 마음에 드는구나." 어머니는 내 눈에서 반응을 찾았고, 내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활짝 웃음 지었다. 난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시시각각 기운을 잃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의 주치의가 나를 불렀다. "이제 어머니를 댁으로 모셔 가야 해요."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느 날 밤 이상한 꿈을 꾼 나는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매트리스에 누운 어머니를 살펴보았다. 어머니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다. 오빠가 코란을 들고 마지막 인사로 코란 구절을 읽어드리려 했다. 나는 그만두라고 소리쳤다.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6개월 동안 슬픔에 빠져 살았다. 이런 나를 본 오빠가 내게 영어공부도 하고 컴퓨터 수업도 들으라고 했다. 18세 때 나는 대학입시 준비반에 들어갔다. 의대에 들어가 의사가 될 생각이었다. 하미드 집안에서 나에게 청혼하려고 몇 번 왔는데 오빠들은 매번 거절했다. 하미드 집안이 부유하지 않고 생활방식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 이유였다. 우리 집안 전통이 결혼을 해서 정치 인맥을 넓히는 것인데 하미드의 집안은 그만한 힘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는 대신 자유를 선물 받고 싶었다. 19세 때 나는 대학입학시험에 통과해 의대에 들어갔다. 영어 교사 일을 하면서 돈도 벌었다. 어머니의 빈자리는 여전히 큰 구멍으로 남아 있지만 고통은 이제 참아낼 만하게 둔화되었다.
9. 어느 평범한 목요일
9월의 어느 평범한 목요일이었다. 그날 나는 언니와 함께 시장에 나갔다. 내가 마음에 드는 머리 스카프와 튜닉을 걸쳐 보고 있을 때 언니가 농담을 했고, 난 웃음을 터트렸다. 가게 주인이 말했다. "아가씨들, 내일은 그런 차림으로 시장에 나올 수 없을 테니 오늘 마음껏 즐겨요. 내일 탈레반이 온대요." 그날 밤 라디오에서 충격적인 소식이 흘러나왔다. 정권을 잡고 있던 마수드 장군의 세력이 카불에서 달아나 판지셰르 계곡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다른 많은 정부 관료들처럼 경찰 간부인 오빠도 도망갔다. 마수드가 퇴각한 지 몇 시간 뒤에 나지불라 전 대통령이 살해되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유엔 보호 구역 안에 머물고 있던 그를 탈레반이 억지로 끌어내어 처형한 것이다.
카불을 점령한 탈레반은 박물관을 약탈하고 아프간 땅의 역사를 반영하는 문화 유물 수천 점을 파괴했다. 탈레반은 학교와 대학 건물들을 불태웠다. 책을 불사르고 문학을 금지했다. 나는 학교가 폐쇄되었으니 나올 필요가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여자들이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 카불에서의 삶은 한순간에 변해버렸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많은 것들이 없어졌다. 일주일 동안 아무 데도 나가지 못한 상황이 계속되던 중에 오빠에게서 편지가 왔다. 파르완 지방으로 옮겨 피신해 있다고 했다. 나는 카불을 탈출하기로 하였다. 차를 몰고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을 우회하여 12시간 동안 차를 몰아 파르완에 도착했다.
10. 북쪽으로
우리는 파르완으로 가서 숨어 지냈다. 하지만 탈레반이 세력을 계속 넓히고 있어 파르완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우리는 북쪽으로 가는 피난 대열에 합류했다. 이로써 의사가 되려 했던 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카불에 돌아가는 대신 풀리쿰리라는 지역에 머물며 요리하고 청소하고 차를 마시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파괴된 도시였던 카불은 탈레반이 들어오면서 죽은 도시로 바뀌었다. 시민들은 사소한 잘못 때문에 체포되고 두들겨 맞았다. 종합 경기장에서는 새로운 스포츠가 성행했다. 공개 처형이었다. 간통하거나 도둑질한 자들은 환호하는 군중 앞에서 손이 잘리거나 돌멩이 세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