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물의 마을이 사라진 날
나카하라 잇포 지음 | 에이지21
3ㆍ11 물의 마을이 사라진 날
나카하라 잇포 지음
에이지21 / 2012년 3월 / 224쪽 / 13,000원
물의 마을이 사라진 날
물의 마을 이시노마키 / 이시노마키가 사라졌다: 2011년 3월 11일 14시 46분. 오시카 반도 앞바다 동남쪽 약 130킬로미터 바다에서 9.0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곧바로 태평양 연안을 덮친 거대 쓰나미는 '물의 마을' 이시노마키를 사정없이 삼켜 버리고 말았다. 구 기타카미가와 강가에는 '히요리야마'라는 높이 56.4미터의 작은 산이 있다. 15시 13분. 대형 쓰나미 경보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는 가운데, 몰아치는 눈보라로 뿌옇게 보이던 태평양의 색깔이 돌변했다.
히요리야마 정상에서 '가자미도리'라는 찻집을 운영하던 남성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우르릉하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고 검정색 액체와 같은 암흑색 흙탕물이 마을을 삼켰어요. 바닷바람을 타고 악취 섞인 비린내가 뒤덮었죠." 쓰나미는 눈앞에 흐르는 구 기타카미가와 강을 맹렬한 속도로 거슬러 올라갔고, 히요리야마 경사지에 두 번, 세 번,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부딪혔다.
재해 지역에 도착한 2주 뒤, 내가 이시노마키 시에서 처음 간 곳은 히요리야마였다. 산 정상에 있는 가시마미코 신사 안에는 자원활동가의 텐트가 있었다. 그들은 식수와 식량, 물자를 나눠주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진 후 이미 15일 이상 지난 시점이었지만, 정상 부근에서는 실종된 가족과 친구를 찾으려는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쓰나미가 해안가뿐 아니라 내륙까지 엄습했다는 소식을 듣고 밤에 차를 타고 이시노마키 시청으로 향했다.
우리 딸은 살아 있어요!: 시청은 백화점으로 쓰던 6층 건물을 리모델링해 사용하고 있었다. 1층에는 슈퍼마켓과 카페가 있어서 시민들이 휴식 공간으로 이용했다. 시청 내부는 혼란 그 자체였다. 한 쪽에서 '임상심리사'라고 적힌 작업복 차림의 팀이 주부를 돌보고 있었다. 여성은 무언가에 홀린 듯 같은 말만 반복했다. "찾아주세요. 우리 딸은 아직 살아 있어요!" 쓰나미로 아이를 잃은 이 여성은 아이가 죽었을 리 없다며 애원하고 있었다. 결국 가족들이 부축해서 '사망 신고' 창구 줄 끝에 가서 섰다. 나는 이시노마키의 피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시청 직원들이 그날을 어떻게 맞이했는지 취재를 시도했고, 그때 나는 행정 기능을 상실한 인구 16만 2천 명의 지방자치단체의 모습을 확인했다.
두 개의 대책본부: 지진 발생 당시, 시청에는 200여 명의 직원들이 있었다. 시장인 가메야마 히로시는 출장으로 부재중이었다. 부시장을 비롯한 각 부서의 부장과 간부들이 즉시 재해대책본부를 세웠다. 한편 가메야먀는 밤에 겨우 시청의 수백 미터 앞까지 도착했다. 그러나 시청으로 가는 길은 이미 물에 잠겨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교외의 이시노마키 적십자 병원으로 발길을 옮겨 그곳에 또 하나의 긴급대책본부를 설치했다. 이때 시청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이틀 후 가메야먀는 낚시 장비 상점에서 조달한 보트를 타고 시청에 들어갔다. 백화점 물품 반입구로 사용했던 경사가 선착장 역할을 했다.
사흘간의 피난 생활: 쓰나미에 포위된 '피난 생활'은 사흘간 계속되었다. 당시 시청에는 200명이 넘는 주민을 포함해 400여 명이 갇혀 있었다. 시청 내부의 전기, 수도, 가스가 끊겼다. 물과 먹을 것을 마련하는 것도 문제였다. 그때 한 직원의 기지가 피난민 400명의 목숨을 구했다. 산업부 차장인 미즈노 마사아키는 앞으로 다가올 응급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부하직원에게 지시했다. "1층 슈퍼마켓에 있는 식량과 일용품을 모두 2층 회의실로 옮기게. 내가 책임질 테니." 미즈노의 순간적인 판단으로 이후 쓰나미에 포위되어 생명선이 끊긴 상황에도 400여 명이 3일 동안 살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재해대책본부에 들어오는 소식은 상상을 초월한 참담한 소식뿐이었다. 가메야마는 조금이라도 빨리 침수된 시청에서 탈출하여 식량과 구호물자를 피해 지역에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해졌다.
탈출용 다리를 만들자: 재해 4일째 아침. 기무라 방재과장이 직원들에게 말했다. "건물 남쪽이 하구로야마 산으로 이어진 고지대인데, 어떻게든 저고지대까지 다리를 만들 수 없을까?" 직원 한 명이 아이디어를 냈다. "시청 회의용 책상을 모두 모아봅시다. 책상다리가 1미터 정도인데 만약 모자랄 경우에는 콘크리트 블록이나 목재를 밑에 깔면 될 거예요." 건장한 남자들을 중심으로 탈출로 다리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 작업은 두 시간 정도 걸렸다. 드디어 다리가 완성되었다. 이후 가메야마의 지휘 아래 방한 도구가 시청 내부로 들어왔고, 건강에 문제가 있는 고령자를 긴급 후송했다.
강을 역류한 쓰나미: 태평양에 면한 기타카미가와강 유역의 농촌 지대는 기타카미가와강을 역류한 쓰나미가 제방을 넘어 평지까지 침범했다. 강기슭에 있는 이시노마키 시립초등학교에서 피난하던 어린이 108명 가운데 74명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었다. 교직원 10명도 희생되었다. 거리는 쓰나미의 잔재와 쓰레기, 떠내려 온 나무들로 뒤엉켰다. 심한 악취를 풍기는 진흙이 온 마을을 뒤덮었다. 일본뿐 아니라 세계의 시선이 동일본 재해 지역으로 집중되었다. 그 가운데 희생자와 실종자가 전체의 20퍼센트를 차지하는 이시노마키 시에 자원활동 지원자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시노마키 모델의 탄생
자원활동가, 이시노마키로 향하다: 5월의 황금연휴 기간, 동일본대지진 재해 지역에는 8만 명 이상의 자원활동가가 몰려들었다. 사단법인 피스보트의 재해 자원활동센터의 대표이사 야마모토 다카시가 활동한 미야기 현 이시노마키 시는 재해 이후 당시까지 이미 6만 명의 자원활동가를 받았다. 그 성공 요인은 자원활동가를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 자원활동가가 안심하고 작업할 수 있는 환경, 자원활동가를 지속적으로 모집할 수 있는 노하우 등 3가지로 요약 정리할 수 있다. 야마모토는 4월 중순부터 상황이 급변했다고 말한다. 그때까지 피해 지역에 자원활동가를 파견하는 데 소극적이었으나, 언론이 나서자 '자원활동하러 가자'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야마모토가 속한 피스보트가 도쿄에서 대규모의 재해 자원활동 설명회를 개최한 것도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진지함으로 가득한 모집 설명회: 3월 23일 저녁, 모집 설명회가 열린 피스보트센터가 떠들썩했다. 먼저 야마모토가 피해 지역의 현실과 위험을 설명했다. "아직 피난소조차 식사 배급이 충분히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지에 머무는 기간 동안 필요한 식량, 방한구, 숙박용 텐트 등 생활에 필요한 것은 모두 각자 준비해야 합니다. 자신이 활동하는 데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추고 저와 함께 재해 지역에 가서 활동할 분만 모집합니다." 야마모토는 발표 중간중간에 '자기완결', '자기책임'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자원활동 기간은 기본이 7박 8일이고 최대 2주까지 가능하다. 전체 설명이 끝난 뒤 무작위로 6명을 한 팀으로 나누었다. 팀에서 리더를 한 명 정하고, 리더가 연락을 담당했다. 설명회를 마치고 야마모토는 그곳에 모인 100명의 자원활동가와 이시노마키로 향했다.
누가 이들을 받아들일 것인가?: 이렇게 자원활동 지원자들이 많은데, 왜 다른 피해 지역에서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참고로 현재 재해 자원활동 시스템은, 제대로 운영할 조직이 없었던 한신대지진 때를 교훈 삼아 정비되었다. 대개 재해가 발생하면 피해 지역 지자체의 '사회복지협의회'가 '재해 자원활동센터'를 마련하여 여기서 단체나 개인이 활동한다. 한신대지진 이후의 재해 자원활동의 모델이 된 시스템을 나는 '사회복지협의회의 모델', 줄여서 '사협 모델'이라 부른다. 아무튼 1995년 한신대지진을 계기로 자원활동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1998년에는 '특정비영리활동촉진법(NPO법)'이 시행되면서 자원봉사 등 사회활동을 하는 비영리 단체에게 법인 자격이 부여되었다. 이후 일본에는 수많은 NGO와 NPO가 탄생했다.
재해 자원활동의 수용 주체를 모두 '사협 모델'로 한 결과, 한신대지진을 계기로 만들어진 NGO와 NPO의 수용 주체도 자동으로 사회복지협의회(자원활동센터)가 되었다. 그러나 사회복지협의회는 민간단체이면서도 행정의 외곽단체의 색깔이 강하기 때문에 지원 시 형평성을 우선한다. 원래 NGO는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활동 방침과 재정을 대전제로 하므로 자연히 정부와 NGO는 갈등과 대립이 생긴다. 취재하면서 알게 된 '사협 모델'과 'NGO 모델'의 차이는 이재민의 요구, 즉 수요를 어떤 방법으로 취합하고 해결하는가에 있었다.
사협 모델은 이재민과 행정 각각의 요구를 활동 근거로 하고, 이재민과 개인 활동가를 연결하여 문제 해결을 시도한다. 반면 NGO 모델은 이재민의 요구가 무엇인지 '직접' 그리고 '독자적'으로 조사하여 파악한다. 즉 '요구 찾기'가 활동의 기본이 되고, 각 단체에 소속된 직원과 자원활동가가 문제를 해결한다. 이 때문에 '자기완결형'이라고 한다. 자원활동가를 파견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같지만 요구를 파악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해결 방법이 다양하고 의견을 하나로 모으기 어렵다. 16년 전 한신대지진에서 시작한 일본의 재해 자원활동 문화가 천 년에 한 번 오는 대재앙 앞에서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가? 나는 자원활동가의 시스템을 만든 과정에 초점을 맞춰 취재를 시작했다.
말 그대로 무인 마을: 야마모토는 지진 발생 일주일 뒤 이시노마키 사회복지협의회를 방문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자원활동가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시노마키 센슈 대학에 마련된 자원활동센터의 일부 공간을 빌려 야마모토와 피스보트 직원들이 사회복지협의회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아직 전화선은커녕 전기도 복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야마모토와 함께 이시노마키에 들어간 피스보트의 고바야시 신고는, 피난민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는 식사 배급이 절실하다고 했다.
한편 쓰나미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물이 차지 않은 가옥 2층이나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자택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바야시는 이시노마키에서 활동하고 있던 단체 '메구미 재팬'과 함께 행정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 탐문 조사를 시작했다. 새로운 피난민을 발견하면 전국에서 보내온 원조 물자인 라디오를 전달하고 가장 가까운 배식 장소를 알려주었다. 이 조사를 토대로 고바야시는 재해 지도를 작성했다. 피난민이 어디에 몇 명 있는지를 기록한 지도였다. 이시노마키에 식량 배식을 시행할 때 꼭 필요한 귀중한 자료로, 지자체조차 파악하지 못한 귀한 정보가 되었다.
피해 상황 파악에 난항: 지진이 발생한 뒤, 이시노마키 시는 실종자 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고바야시는 야마모토와 마찬가지로 이 대재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원활동가의 힘을 모으기 위해 '사회복지협의회와 NGO가 연대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시노마키 사회복지협의회의 아베 요시노리 총무계장은 야마모토와 피스보트 직원의 협력을 환영하면서도 한동안 그들의 일하는 모습을 주시했다. 이시노마키에 도착한 이틀째 밤이었다. 재해 지역의 사회복지협의회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 야먀모토는 아베 계장에게 이 재해가 수습될 때까지 피스보트가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베는 회상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어요. 일손이 부족했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우리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필요한 지원 방법을 제안해주니, 이 친구들이라면 함께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야마모토 일행은 자원활동센터에 모인 NGO와 자원활동가 단체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여 이시노마키 사회복지협의회는 전국의 자원활동센터 가운데 가장 먼
저 자원활동가 모집을 시작했다. 이후 야마모토는 도쿄로 돌아가 앞서 말한 설명회를 준비했다.
물이 필요해! / 재해 지역주민의 이해: 재해 발생 2주 후, 참가 단체는 30개로 늘어났다. 야마모토와 관계자들은 사회복지협의회와 상의해 여러 단체가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NGOㆍNPO 연락회'를 조직했다. 단체별로 효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든 것이다. 한편 배식에서 가장 중요한 '식수'를 확보하는 일은 자원활동가의 몫이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바야시는 배식 지원 창구를 개설했고, 이렇게 마련된 배식 전용 전화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편 지역주민들은 자원활동가가 대체 어떤 존재인지,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야마모토는 자신이 '외부인'이란 사실과 현지 사정을 낱낱이 알지 못한 점을 인정하고, 이시노마키에서 통할 수 있는 지원 방법을 모색했다.
이토의 제안 / 분과회의 역할: 이토 히데키는 이시노마키에서 건설회사를 경영하며 개인 자원활동가로 '연락회'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야마모토와 고바야시가 지역주민과의 소통 창구가 없어서 힘겨워하는 걸 보고 도와주고 싶었다. 한신대지진을 비롯하여 나홋카호 석유 유출 사건 등에서 활동한 이토는 NGO나 NPO의 성격과 단체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건설업에서 일한 특성을 살린다면 현지 사정을 빨리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사단법인 이시노마키 청년회의소(JCI)' 이사장을 지낸 적이 있기에 행정과 협조하거나 다양한 정책 제언을 하는 등 이시노마키 시와 소통할 수 있었다.
고바야시가 말했다. "하루 종일 지원자의 전화를 받고 내일 배식 예약을 하고, 그러고 나서 회의를 진행하는 일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 회의가 길어지면서 다음 날 작업에 차질이 생겼죠." 이때 이토는 고바야시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활동 보고는 단체별로 하지 않고 활동 목적 별로 나눕시다. 자세한 작업 내용은 전체 회의 후 분과회별로 공유하도록 하고, 행정과 절충하는 일 같은 현장 정비는 내가 맡겠네." 그래서 이토의 제안에 따라 아홉 분과로 나눴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배식(식량지원) - 이시노마키 시내의 피난소나 주택가에서 식사를 제공한다. (2) 의료지원 - 피난소를 방문해 치료하거나 목욕 도우미, 이재민 재활 치료 등을 담당한다. (3) 이송(이재민 이동 지원) - 피난소나 집에 고립된 주민을 병원으로 이송하거나 일시 귀가 중인 주민을 돕는다. (4) 마음 치유(심리케어) - 피난소에 임상심리사를 파견하고, 또한 자원활동가를 대상으로 이재민을 대하는 방법에 대한 워크숍을 정기적으로 연다. (5) 어린이지원 - 학교에 가지 못하는 어린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일이다. 교사나 보육사가 활동했다. (6) 릴렉스 - 피난소에서 족욕, 접골, 마사지, 이발 등을 했다.
(7) 부흥 마인드 - 마을 전통행사를 다시 열고, 항구도시 '이시노마키'의 축제를 기획해 지역 부흥에 기여했다. (8) 잔해 철거 및 청소 - 쓰나미로 인한 다량의 잔해를 철거하거나 진흙을 청소하는 일이었는데, 중장비가 들어가기 어려운 개인주택은 손으로 일일이 치웠다. (9) 생활 지원 - 임시로 지낼 집을 운영하고, 필요한 물건을 나눠주고,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지원한다.
아홉 분과가 정비되기까지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각 단체는 자신들의 기술에 맞춰 분과에 들어가 협력했다. 분과회에 앞서 열리는 전체 회의에서는 몇 인분의 음식을 나눠줬는지, 몇 채의 집에 잔해를 처리했는지 하는 하루의 성과를 정확한 숫자로 발표했는데, 이 수치는 나중에 합류한 단체나 개인이 활동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회의 시간이 짧아진 덕분에 자원활동 기동력이 높아졌다. 그리고 단순히 단체끼리의 연락과 조율에 그치지 않고 이시노마키의 복구에 책임을 가지자는 뜻에서 이토가 제안해 4월 2일에 연락회 명칭을 '이시노마키 부흥지원협회(이하 '협의회')'로 변경했고, 피해 지역 현지 출신인 이토가 회장을 맡았다. 그 당시 참가 단체는 150개가 넘었다.
앞장서거나 나서지 않는 자세 / 열의를 가시화하는 시스템: 4월이 되자 재해 현장에서는 '협의회'가 단체를 받아들이는 일을 거의 맡아 했다. 개인 자원활동가의 문의는 사회복지협의회의 자원활동센터가 담당하기로 했다. 이처럼 정확한 역할 분담이 조성되자 자원활동가는 수백 명 단위로 늘어갔다. 일반적으로 전국에서 재해 지역으로 모여드는 자원활동가를 받아들이는 일은 각 지자체의 사회복지협의회가 설립한 자원활동센터가 맡는다. 나는 이것을 '사협 모델'이라 부르는데, 이 모델에서는 이재민들의 요구에 따라 미리 등록한 자원활동가를 파견하여 문제를 해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