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
에냐 리겔 지음 | 착한책가게
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
에냐 리겔 지음
착한책가게 / 2012년 2월 / 320쪽 / 15,000원
아이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기: 읽기와 쓰기 배우기
"네 공책을 보여주렴." 토마스는 반응이 없다.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수업이 끝난 뒤 토마스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선생님도 네 나이였을 때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쓴 글을 소리 내어 읽지 못했단다." 토마스는 눈물을 보이며, 공책을 내밀어 보였다. 날짜별로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읽을 수 있게 쓴 글은 하나도 없었다. 토마스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다. 요사이 우리 학교 신입생 가운데 읽기와 쓰기에서 어려움을 겪는 학생이 20퍼센트에 이르기도 한다.
토마스와 교사가 틀린 문장으로 가득한 이야기가 적힌 공책을 앞에 놓고 앉았다. 선생님이 공책을 덮으며 말한다. "오늘 네가 생각한 이야기를 내게 말해주겠니?" 처음에는 더듬더듬, 그러더니 점점 자연스럽게 토마스는 검치호와 영양의 우정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종이에 적으면서 이야기를 듣는다. 토마스가 이야기를 마치자 선생님은 그 종이를 토마스에게 건네준다. "내일까지 네 힘껏 이대로 따라 써오렴." 이튿날 토마스는 최선을 다해 끼적거린 글을 선생님에게 제출했다.
초등학교에서 학생 대부분이 제대로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교육은 더 이상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왜 그럴까? 읽기와 쓰기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곳은 가정이다. 아이들이 집에서 읽기와 쓰기가 정말 중요하고 쓸모 있으며 심지어 달콤한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하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스스로 배우려 한다. 반대로 집에서 어른들이 되도록 쓰기와 관련된 일을 줄이고자 한다면 어떨까? 오늘날 대중매체도 이 같은 안타까운 현실을 부추기고 있다.
담임선생님은 쓰기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에게 효과가 있는 방법을 토마스에게도 적용해보기로 했다. 바로 수업시간에 타자기를 갖고 들어간 것이다. 이내 토마스는 타자기를 쳐보겠다고 맨 먼
저 자원했고, 자기 글을 한 글자 한 글자 쳐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 치고 나서 토마스는 처음으로 친구들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읽겠다고 손을 들었다. 토마스는 더듬더듬 자기가 쓴 글을 다른 아이들 앞에서 읽어내려 갔다. 토마스는 반 친구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한 해가 끝날 무렵에는 이렇게 발표한 글들을 엮어 하나의 책으로 만든다. 토마스의 글도 함께 엮어내게 될 것이다.
글쓰기의 동기: 읽기와 글쓰기에 흥미를 잃은 아이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즉, 벽보, 학급일지, 아이들이 쓴 희곡을 연극으로 공연하기, 교사와 학생 간의 편지교환 등이 그 예다. 또 아이들이 쓴 글을 직접 책으로 엮는 방법도 있다. 자신이 쓴 글들 중 상당수가 '공개적으로 제시되거나 출판'되기 때문에, 아이들도 '바르게'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글쓰기에 약한 아이들에게 '교정'을 보도록 하는 것 또한 글쓰기 연습을 할 동기를 불러일으키기에 좋은 예다.
타자기 하나로 시작된 일이 토마스와 그 반 아이들에게 오전시간의 중요한 일과로 자리 잡았다. 이내 교실 앞 공간에 타자기를 하나 더 놓았는데, 이는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가 다른 아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곧이어 담임선생님은 그 옆에 필요한 장비를 모두 갖춘 작은 인쇄소(인쇄시설이 있는 작은 공간)를 마련했고, 아이들은 인쇄기술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하나하나를 정렬하고, 제대로 놓였는지 거울에 비춰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러고 나서 인쇄판을 정비하고 잉크를 칠한 뒤 시범으로 한 장을 인쇄한다. 인쇄물을 보고 다시 한 번 확인해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바로잡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판단되면 50에서 100장을 인쇄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완성된 인쇄물은 걸어두어 말리고 활자들은 깨끗하게 닦아 다시 상자에 넣어둔다.
2주마다 '자유글쓰기'를 한 작품씩 쓰고, 이 과정을 거쳐 선정된 글들이 인쇄, 출판된다. 아이들이 쓴 글을 모아 책으로 엮는 과정은 일주일가량 걸리며 학급 아이들 모두가 참여한다. 첫 번째에 실린 글은 토마스가 많은 정성을 들여 쓴 '검치호와 영양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침내 이 학급의 모든 아이들은 자신들이 쓴 스물다섯 개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게 다가 아니다. 이 책은 그 뒤 마인츠 소책자 박람회에서 성황리에 판매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같은 자유글쓰기야말로 '아이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방식이다.
읽기를 하나의 사건으로 연출하기: 얼마 전부터 헬레네 랑에 학교에서는 '책 읽는 밤' 행사를 열고 있다. 학생들이 자기 교실에 이부자리를 마련해놓고 다 함께 저녁식사를 한 뒤 교사가 책을 읽기 시작한다. 반 시간쯤 지날 무렵 한 아이가 선생님이 읽던 책을 이어받아 읽는다. 또 다시 다른 아이가 연이어 읽고, 그 뒤를 또 다른 아이가 잇는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이렇게 읽는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 같은 책을 읽다가 적어도 몇몇 아이들은 심심치 않게 그 이야기에 매료된다. 집을 나와 한 섬에 숨어 있다가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를 따라 여행하는 허크의 이야기 말이다. 만일 내가 집을 나와 이러한 모험을 떠난다면 어떨까?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놀라실까, 화를 내실까, 아니면 슬퍼하실까? 이런 식의 책 읽는 밤을 보내면서, 아이들은 종종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해 텔레비전으로 접하는 모험이야기와는 다른 어떤 경험을 하게 된다. 책 읽는 밤을 보내고 난 이튿날 아이들이 전날 읽었던 책을 끝까지 읽고 싶어 선생님에게 빌려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와 더불어 '책 소개하기'라는 것도 있다. 우리 학교의 초등과정 수업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2주마다 서너 명의 학생들이 같은 반의 다른 아이들에게 책 하나씩을 소개하는 것이다. 자유글쓰기에서처럼 여기에도 하나의 의식이 치러진다. 책 소개는 책의 제목과 저자를 소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 뒤 짤막하게 책의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아이들에게 책 내용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을 골라 읽어준다. 바로 이 부분에서 아이들은 가장 정성을 많이 기울인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어주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같은 반의 다른 아이들이 이렇게 소개받은 책에 흥미를 느껴 자기가 직접 읽게 되는 것이다.
책 읽기라는 문제를 넘어, 읽은 것을 어떻게 소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 또한 매우 중요하다. 학생들은 보통 10학년이 될 때까지 독서일지를 작성하는데, 여기에 책에 대한 자기 감상을 상세히 기록한다. 소감을 간추려 적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이어질 내용을 상상해보고, 읽은 글을 희곡으로 바꾸어보고, 저자에게 편지를 쓰거나 학교의 독서수업 때 저자를 초대하기도 한다. 9학년의 한 교사는 먼저 학생들에게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변신〉의 첫 문단을 읽어준 뒤, 각자 그 뒤를 이어 이야기를 지어보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스물다섯 개의 이야기는 교정과정을 거친 뒤 인쇄, 출판하여 나중에 학교 축제에서 판매되었다. 10세에서 16세의 아이들을 위해 학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과제 중 하나가 바로 '읽기와 쓰기를 배우는 학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읽는 것(처음에는 글자를, 그 다음에는 글을, 그 다음에는 그 글 뒤에 숨은 뜻을, 그 다음에는 적어도 몇 개의 맥락을 파악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거나, 자신의 생각과 의견 그리고 주장이 무엇인지 말하고 쓰는 능력을 키우지 못한 아이는 위험집단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이런 아이들은 앞으로 다가올 삶의 과정에서 그리 많은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읽기'와 '쓰기'는 죽은 사회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끊임없이 정확하게 비판적으로 '읽는 것'을 배운 사람은 혼잡스러운 텔레비전 영상이나 심지어 이른바 '진실'을 말한다고 하는 인쇄 매체를 안심하고 대할 수 있다. 관청에서 날아오는 얽히고설킨 단어나 끝없이 긴 문장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도 참여하여 공동설립한 시민단체가 낸 성명서에 대해 명철한 판단력으로 반기를 들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용기 있고 기꺼운 마음으로, 분명히 이해할 수 있고 정확하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대중 앞에서 '말하고' 또한 '쓸'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다투고 화해하기: 민주주의와 책임의식 배우기
요나단과 알렉산더는 서로 미워했다. 그 누구도 이들이 분노에 차서 서로 달려드는 것을 말릴 수 없었다. 몇몇 교사들은 요나단을 다른 반으로 옮기자고 했다. 이 아이는 자기 반 아이들 사이에서도 소외되고 있었다. 두 아이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면 다른 아이들은 보통 알렉산더 편을 들었다. 반 아이들도 반복되는 싸움에 지쳐 있기는 마찬가지였고, 유일한 해결책은 요나단이 사라져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학급 아이들 모두가 함께 짊어져야 할 책임을 쉽사리 거두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 날 나는 반 아이들과 둘러앉아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되겠다. 이 싸움이 너희 반을 망가뜨리고 있구나."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알렉산더와 요나단에게 가운데로 나와 일 미터 정도 사이를 두고 서로 마주보고 앉아 똑바로 쳐다보도록 했다. 둘 다 내켜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했다. 둘러앉은 아이들에게는 침묵하면서 앉아 있는 두 아이를 위하는 마음으로 평화롭게 화해를 이끌어낼 방법을 함께 생각하도록 부탁했다. 그렇게 한 뒤에 두 아이에게 내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나는 서로 상대방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동을 한번 흉내내보라고 시켰다.
요나단과 알렉산더는 아마 그 자리를 뜨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아이는 이미 내 제안에 동의한 상태였고 반 친구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요나단은 왼손잡이인 알렉산더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 따라 해 보였다. 몇몇 아이들이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만일 내가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알렉산더는 즉시 요나단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 대신 알렉산더는 근시인 요나단이 자기 안경을 닦고 그것을 어설프게 콧잔등에 얹는 모습을 풍자하는 것으로 맞받아쳤다. 또다시 몇몇 아이들이 웃었다.
다음으로, 서로에게 그래도 좋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했다. "네 청바지가 마음에 들어."라고 알렉산더가 말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요나단이 눈물을 보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저번에 네가 그림을 멋지게 그렸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과제가 남아 있었다. 매일 아침 반 아이들이 요나단과 알렉산더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둘러싼 가운데 두 아이가 서로 하루를 축복해주는 말을 주고받을 것과, 쉬는 시간에 두 아이가 너무 가까이 있지 않도록 반 친구들이 지켜봐 주는 것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 한 시간가량 유지되던 화해의 분위기가 깨지고 말았다. 요나단은 악수를 하지 않으려고 완강하게 뒷짐을 지고 있었고, 알렉산더 또한 자기도 악수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반 아이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조마조마해하고 있었다. 나는 지난 번에 두 아이가 나의 당부대로 하겠다고 한 약속을 일깨워줬다. 결국 불편하고 지루한 몇 분이 흐른 뒤 요나단과 알렉산더는 다시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날 이후로 적어도 학교에서만큼은 두 아이 사이에 싸움박질은 일어나지 않았다. 요나단과 알렉산더는 끝까지 악수하는 것을 어색해하고 불편해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저 형식적으로 하는 인사를 넘어, 시험 잘 보라는 얘기나 테니스 시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라는 등의 인사도 주고받게 되었다. 매주 학급 전체 혹은 몇몇 아이들이 수행할 과제가 주어졌고, 반년 뒤 요나단과 알렉산더는 '화산'을 주제로 함께 발표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4년이 흐른 뒤 알렉산더는 나에게 요나단과의 적대관계는 그저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라고 말해주었다.
핵심내용을 기억하고, 성찰적ㆍ이성적 사고를 하며, 지식을 분류하고 통합하는 등의 능력을 키우는 것은 기본적으로 학교교육이 지향해야 할 바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학교는 그 이상의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사회 안에서 타인을 배려하고 여럿이 힘을 모아 공부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학교가 아니면 어디서 배우란 말인가? 학교 말고 어디서 아이들이 민주주의 의식을 체득할 수 있겠는가? 학생들은 일상에서 어떻게 하면 공동체 내에서 자기 책임을 다할 수 있을지, 어떻게 자기 능력과 힘을 자기 자신뿐 아니라 공공의 이로움을 위해 쓸 것인지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회적 책임감을 키우는 교육을 행하고 있는 학교가 너무도 적다.
스스로 청소하기: 쓰레기를 예로 들어보자. 학교 청소부가 쓰레기를 치워주는데, 학교는 사실상 건물정비나 학습 자료에 책정될 예산을 삭감해가며 이 돈으로 청소부를 고용한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왜 자기 학교를 스스로 청소하지 않는가? 우리 학교에는 교실, 학생생활나눔터 그리고 복도 등의 공간이 있는데, 우리 학교는 학년별로 각기 '구역'을 나누어주어, 각 구역마다 백 명의 학생과 여덟 명 정도의 교사가 책임을 지고 이 공간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또한 학습하기 좋은 분위기로 만들 책임을 지도록 한다. 방학 중에도 말이다. 이렇게 한 결과 아이들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다. 오늘이 만일 자신이나 자기 짝이 청소하는 날이라는 것을 알면, 아이들은 주변 환경에 더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 어디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는지, 행여 망가진 것은 없는지를 살피고 서로서로 알려준다.
청소가 항상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학생들 중에는 간혹 청소하는 법을 몰라 따로 가르쳐줘야 하는 경우도 있다. 세면대를 단 한 번도 닦아보지 않은 아이도 있다. 집에서는 이런 일을 가사도우미나 어머니가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청소를 시킨 조치는 뜻밖의 반발에 부딪혔다. 사실 학생과 교사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자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관료주의에 사로잡힌 교육청이 이를 막아선 것은 뜻밖이었다. 결국 학생 위생문제가 걸려 합의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즉, 복도 계단과 화장실은 사설 청소기관에 위탁하기로 한 것이다. 청소에 관한 우리 학교의 방침이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심지어는 독자란에 우리가 아이들을 강제로 "부려 먹는다"는 비난조의 글까지 올라왔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자기 생활반경 안에서 환경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도록 하고 싶다. 학교에서 청소를 해본 아이들은 나중에 학교를 벗어나서도 자기 주변 환경에 세심히 신경을 쓰고, 길거리 아무데나 쓰레기 버리기를 주저하지 않겠는가?
학급회의: 학교는 각 이해집단 사이의 끝없는 논쟁으로 학업이 지장을 받거나 심지어 뒷전으로 밀려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어떠한 제도적 틀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 학교에서 '벽보'와 '학급의회'는 이를 위한 두 가지 핵심적인 제도로, 프랑스 교육학자인 셀레스탱 프레네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제도이다. 학급의회는 벽보를 바탕으로 열리는데, 벽보에는 모든 학생들이 한 주간을 지내면서 자기가 원하는 사항이나 건설적 제안, 비판 혹은 갈등상황 등을 적어 넣을 수 있다. 회의는 회의 진행자가 "벽보에 적힌 내용을 중심으로 오늘의 학급의회를 개최하겠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시작된다. 회의 진행은 보통 임기당 두 명이 함께 맡아 한다. 교사는 옆에서 벽보에 적힌 첫 번째 내용을 가리킨다. "토비아스가 내 정강이를 세 번이나 발로 찼다." 이것을 쓴 사람이 먼저 상황 설명을 하고, 이어 토비아스가 자기 입장을 밝히면 다른 아이들도 발언권을 갖고 개입한다. 더는 새로운 발언이 나오지 않고 논조가 반복되기 시작하면 회의 진행자가 해결방안을 내놓는다. 회의를 마무리 지으며 진행자는 당일 회의 때 논의되지 못한 내용이 있는지 검토하고, 이를 다음 회의로 넘길 것을 공표한다.
처음에는 자기가 적은 내용이 그날 다루어지지 못하면 화를 내거나 실망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점점 어떻게 하면 주어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배우게 된다. 회의가 혼란스러운 분위기에서 끝나버리는 경우도 생기나, 이 역시 하나의 자연스런 과정이다.교사는 자기 반 아이들이 실제로 학급의 내부 문제와 갈등 상황을 주체적으로 해결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북돋아줘야 한다. 어떤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결국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행위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다수결의 원칙만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좀 더 근본적인 차원의 원칙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강자가 약자를 강압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며, 우리 학교에서 폭력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등의 원칙 말이다. 특정한 행동원칙이 집단 내에 자리를 잡으면, 그때부터는 생산적인 토론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