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는 없다!
데이비드 에러너비치 지음 | 시그마북스
음모는 없다!
데이비드 에러너비치 지음
시그마북스 / 2012년 2월 / 544쪽 / 18,000원
예언이 되어버린 이상한 쪽지
1919년 유럽과 미국에서 『시온 장로 의정서』라는 책이 유포되었다. 이 책에는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사건들과 기존 질서를 뒤엎는 데 두드러진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유태인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다룬다. 구체적으로는 현존하는 모든 권력(제국, 왕국, 교회)을 파괴하고 다윗의 후손인 유대인 전제 군주가 다스리는 새로운 세계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야심찬 목표와 함께 지령과 관련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책이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유대인 제국을 건설하려면 계층 간 증오를 조장하고, 전쟁을 선동하고 혁명을 부추기며 전통적 가치를 훼손하는 자유주의를 조장해야 한다. 자유주의가 팽배해지면 사회주의를 시작으로 볼셰비키 사상이 도래하고 그렇게 되면 국가는 사라지고, 세계는 새로운 질서를 절실히 원하게 된다. 바로 그때 세계를 대표하는 진정한 정부(유대인)가 나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의정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919년 이 책의 보급판을 만든 사람은 전직 독일 육군 장교 고트프리트 추어 벡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을 손에 넣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1897년 8월 스위스 바젤에서 제1회 시온주의자 회의가 열렸다. 이 비밀회의를 주재한 사람이 시오니즘의 창시자인 테오도어 헤르츨 박사이다. 회의가 끝난 후 유대교 장로들의 특사가 그날 회의의 강연 원고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프리메이슨 집회소에 비밀리에 전달하였다. 그날 집회소에는 러시아 비밀경찰 요원과 원고를 필사할 정예 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특사를 돈으로 매수하여 의정서를 하룻밤 동안 빌려서 필사했다. 다음 날 특사는 원본을 가지고 자취를 감추었고, 문제의 필사본은 러시아로 옮겨져 번역과 연구를 위해 학자들의 손에 맡겨졌다는 것이다.
시온의정서는 출간된 후 다양한 반응을 일으켰다. 독일의 전임 황제 빌헬름 2세는 시온의정서를 보고 연합군의 선전과 달리 제1차 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 그가 아니라 다른 누구(유대인)라는 점에 안심했다. 의정서는 독일의 젊은 독자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책 내용이 다른 사람들이 말하고 다니거나 이미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승전국에 속한 나라들도 시온 의정서를 묵살하지 않았다. 영국의 《타임스》는 이 책에 대해 "나라 전체가 독일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안간 힘을 썼는데, 그 결과가 고작 유대인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 시대로 접어든 것이란 말인가?"라고 평했다. 《모닝 포스터》지는 시온의정서를 뒷받침 하는 『세계 불안의 원인』이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하였다.
시온의정서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도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920년 6월 《시카고트리뷴》지는 "트로츠키가 앞장서서 유대계 급진주의자들의 천하를 만든다. 볼셰비키 사상은 이런 책략의 도구일 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미국에서 시온 의정서를 널리 알린 건 자동차 왕 헨리 포드였다. 반전주의자였던 그는 시온의정서 내용이 포함된 『국제적인 유대인』이라는 책의 출판을 지원했고, 이 책은 미국에서만 50만 부가 팔려나갔다. 당시 헨리 포드는 《뉴욕 월드》와의 인터뷰에서 의정서의 내용과 세계정세의 변화가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이 말을 할 즈음 시온의정서의 진짜 실체가 밝혀지고 있었다.
1921년 《타임스》의 특파원 필립 그레이브스에게 한 러시아인 망명자가 접근했다. 그레이브스가 미스터 엑스라고 부르는 이 망명자는 오랫동안 시온의정서를 연구한 사람이었다. 미스터 엑스는 차르 시대의 전직 비밀경찰 요원으로부터 1860년대 출판된 것으로 보이는 프랑스어로 쓰인 『졸리』라는 고서를 하나 사들인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미스터 엑스는 이 책을 읽다가 자신이 읽고 있던 구절과 시온의정서에서 봤던 내용이 어딘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두 책을 비교한 결과 미스터 엑스는 시온의정서가 『졸리』의 내용을 아주 쉽게 바꿔 써놓은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레이브스는 미스터 엑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시온의정서의 종말'이라는 기사를 썼다.
시온의정서는 누군가에 의해 『졸리』라는 책을 바탕으로 새로 만들어진 문서임이 밝혀진 것이다. 그렇다면 의정서는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사실 의정서가 목표로 했던 시장은 러시아였다. 러시아에서 전제 정권을 유지하길 원하는 측이 개혁 세력과 벌이는 전투에서 무기로 쓰려고 만든 것이다. 러시아 보수 세력이 개혁 정당과 유대인과의 연관성을 활용하기 위해 권력 논쟁에 종교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덧붙인 것이다. 러시아에서 시온의정서가 등장했던 시기는 니콜라스 2세가 입헌 군주정을 약속하는 등 10월 개혁 선언을 억지 춘향 격으로 선포했을 때였다. 이때 차르 정당의 수장은 의정서의 등장에 맞추어 "유대인들 때문에 황제가 어쩔 수 없이 그런 사악한 선언을 했다."는 말을 퍼뜨려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집단 학살이 일어나도록 부추겼다. 이후 1933년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나치는 시온의정서를 글자 그대로 진실이라고 믿었다. 나치는 당 차원에서 시온의정서의 판권을 사서 『유대인 문제 안내서』란 책자를 제작하였고, 이를 독일 학교에서 필독서로 만들었다. 허구의 문학작품이 수백만 명에 이르는 학생들을 위한 고상한 역사적 진실로 변형된 셈이다.
사악한 기적
1937년 1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법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야기의 전말은 이렇다. 1931년 8월 소련 화학공업 중앙관리국장 유리 레오니도비치 퍄타코프가 독일을 공식 방문했다. 퍄타코프는 레닌 사망 이후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권력을 놓고 대립할 때 트로츠키 편에 섰던 인물이다. 독일 방문 기간 중에 그는 스탈린에 의해 독일로 추방된 트로츠키의 아들 셰도프를 비밀리에 만났다. 이 자리에서 셰도프는 퍄타코프에게 스탈린을 권좌에서 밀어내는 데 가담해 줄 것을 요청했다. 퍄타코프가 동의하자 셰도프는 스탈린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파괴 전략을 제안했다. 이것은 태업이나 파업, 테러 행위를 통해 사회주의 국가의 성과를 훼손하는 전략이다.
몇 달 후 1931년 12월 모스크바의 사무실에서 퍄타코프는 별난 편지를 한 통 받았다. 편지를 가져온 사람은 셰스토프였다. 판사들에 따르면 셰스토프는 베를린에서 셰도프에게 편지를 건네받은 다음 신발 속에 감춰서 왔다고 한다. 트로츠키는 이 편지에서 퍄타코프에게 음모에 필요한 책무를 일깨워줬다. 반 스탈린 세력을 규합하고, 경제적 방해 행위에 가담할 것 등이 중요한 책무였다. 1935년 퍄타코프는 트로츠키의 진정한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오슬로에서 트로츠키를 직접 만났다. 이 자리에서 트로츠키는 자신이 독일 정부와 협정을 맺었다고 말했다. 협정에 따라 독일이 군사력을 사용하고, 트로츠키파가 조직적으로 파괴와 암살 공작을 펼치면, 러시아에서 스탈린에 반대하는 세력이 이들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트로츠키의 지령을 받은 퍄타코프는 러시아로 돌아와서 동지를 규합하고 공장에 대한 파괴공작을 계획하고, 유명 인사들의 암살 목록을 준비하다 1936년 9월 11일 비밀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이 퍄타코프의 전 부인 집을 급습하여 그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문서를 찾아낸 것이다. 퍄타코프는 처음에는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다가 9월 들어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이후 벌어진 재판에서 퍄타코프를 비롯한 피고인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트로츠키의 지시를 받은 파괴 공작원이며 외국 파시스트 세력과 공모한 죄인들이라는 검사의 주장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재판 결과 퍄타코프를 비롯한 피고인들은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많은 러시아인들은 이 재판을 보고 볼셰비키 사상의 핵심부에서 고발과 자백이 나왔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재판과 관련하여 공산당 내에 깔린 정서는 이런 것이었다. 적이 우리 주위에 쫙 깔려 있으니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자가 있으면 그자가 적일 확률이 높다. 그러니 그자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과거 발생했던 철로 사고나 생산량 미달 같은 것도 누군가 음모를 꾸민 탓에 발생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자세히 조사를 해 보아야 한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구소련의 비밀경찰 기록들이 공개되었을 때 모든 진실은 밝혀졌다. 이 재판이 누군가 꾸민 것이라는 사실이다.
비밀경찰 기록에 따르면 퍄타코프는 셰도프나 트로츠키를 만난 사실이 없다고 한다. 재판에서 나온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죄가 없는 피고인들이 그렇게 침착하게 법정에서 순순히 죄를 자백하였을까? 답은 재판 때마다 소련 비밀경찰이 사용하는 조직적인 심문방식에 있었다. 피고인들은 심문받는 동안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당했기 때문에 사법부가 시키는 대로 법정에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어떻게 자백을 이끌어 내었는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쟁점은 어떻게 소련 사회가 이렇게 기이한 진술을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느냐는 점일 것이다. 분명 러시아인들은 겉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자백의 진실성은 의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작곡가 유리 샤포린의 아내는 퍄타코프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 쓴 일기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재판에서 최악은 피고인들이 보여준 그 솔직함이었다."
좌파를 겨냥한 음모들
미국 언론인이자 반전 조직인 AFC(미국우선위윈회) 회원 존 플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루스벨트가 고의적으로 일본의 공습을 부추겼다면서 루스벨트의 이중성에 대해 열변을 토했던 인물이다. 이후 그는 계속해서 반전 운동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괴롭혔는데, 심지어 할리우드가 전쟁을 지지하는 정서를 조직적으로 주입하는 조직으로 변절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친구인 제럴드 나이도 1941년 8월 할리우드 대형 영화사들이 여론을 간섭주의 쪽으로 몰고 가려는 선전활동의 거대한 엔진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미국 상원은 영화산업에 대한 청문회를 실시하였다. 청문회에서 그는 "많은 영화가 관객의 마음속에 증오를 심어주고 감정을 자극하여 전쟁을 요구하게 만드는 데 이용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3년 뒤 존 플린은 반전운동을 모략하는 세력들이 공산주의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하였고, 이에 대해 의회가 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미국 공직 사회에 사악한 공산주의가 영향을 뻗치고 있으며, 이들 무리가 고의적으로 미국을 분열시키려 책동하고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 시점부터 플린은 공산주의와 그 연합 세력으로 보이는 도당들을 주요 표적으로 삼았다.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플린은 『미국인들이 베를린을 차지하지 못한 이유』라는 작품에서 루스벨트가 1945년 2월 얄타협정에서 스탈린에게 은밀히 약속한 탓에 소련이 독일의 절반과 유럽의 절반을 점령할 수 있었다며 루스벨트를 비난했다. 루스벨트를 권력에 미친 주전론자, 공산주의를 연모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미국 우파는 뉴딜 정책은 또 다른 형태의 공산주의이기 때문에 이 정책을 옹호한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에 동조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어 1938년 5월에는 공산주의 타도를 목적으로 하원반미활동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위원회는 공산주의 전선으로 의심되는 약 640개의 단체, 438개의 신문, 280곳의 노조로 구성된 명단을 작성하였는데, 이 명단에는 미국자유연맹과 보이스카우트까지 포함되어 있다. 전쟁이 끝난 후 1947년 반미활동조사위원회가 부활되었고 위원회는 영화감독, 프로듀서, 배우들을 줄줄이 소환하여 이들이 공산당원인지의 여부를 심문하였다. 당시 위원회가 제시한 혐의는 공산주의자들이 영화 산업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을 이용하여 영화에 담긴 정치적 메시지를 좌우하여 왔다는 것이다. 또한 1950년 존 매카시 의원이 상원에서 장장 8시간에 걸쳐 비난, 암시, 과장, 연좌, 독설을 동원하여 미국 정부와 트루먼 행정부에는 국익에 반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공산당원들과 공산당에 동조하는 이들로 가득 차 있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이처럼 1950년대 미국에서 공산당 음모 이론을 만들고 퍼뜨린 피해망상적인 미국인들은 자신이 감시당하고 음모의 피해자가 되며 배반당하고 완전히 파멸될 운명이 될 것 같은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과거 20년 동안 미국 정치에서 일어났던 거의 모든 일에 반대하며, 루스벨트 같은 사람을 싫어한다. 바로 존 플린이나 맥카시 의원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의 해법은 악마의 농간을 루스벨트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매카시즘은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으로 패배한 이들이 재현한 환각이자 죽은 대통령에 대한 부관참시 격의 복수였다.
죽은 신들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자동차 행렬 속에서 텍사스 주 댈러스 시를 천천히 지나가던 중 두 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비록 사후 신화가 그를 일종의 당대 성인의 위치까지 올려놓았지만 살아있을 때 케네디는 일도 많고 탈도 많았다. 대외적으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쿠바 침공, 베트남 전쟁에 대한 개입 확대 등이 있었고, 국내적으로 흑인 민권에 더 많이 관여하였고, 조직범죄 소탕에 주력했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젊고 역동적인 대통령이 살해되자 전 세계 사람들은 자기 일인 양 큰 충격을 받았다.
1964년 9월 워런 위원회(케네디 암살 사건 진상 조사 위원회)는 케네디의 암살은 오스월드라는 사람의 단독 범행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대다수 미국인들은 케네디 암살에 뭔가 음모가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위원회의 공식 발표 내용에 의문을 품는 회의론은 전염성이 강했다. 1960년대 중반 관련 기사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이론에 이론이 쌓이고, 책이 잇달아 출간되었다. 1970년대 무렵에는 케네디 살해 음모설이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질 정도였고, 젊은 식자층에서는 워런 위원회가 법률상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나돌았다. 케네디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열망이 싹트면서 가정주부들은 조사원으로 변신했고, 언론인들은 전 세계를 누비는 전략가로 변신했고, 인문학 교수들은 범죄 병리학 전문가가 되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캘리포니아 라졸라 대학 교수 리처드 포프킨이다. 그는 원래 자신의 관심 분야였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천년왕국설을 연구하는 대신 케네디 대통령의 살인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누구든지 워런 보고서를 읽어보면 정황 증거로 볼 때 오스월드의 단독 범행이라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는 텍사스 주 교과서 보관소에서 일했는데 저격 이후 그곳 6층에서 그의 소총이 발견되었다. 목격자들은 6층 창가에서 남자 한 명을 봤고 소총의 총렬도 봤으며 총소리도 들었다. 오스월드는 저격 사건 후 행방이 묘연한 유일한 직원이었는데, 곧 극장에서 체포되었다. 누군가가 해병대 출신이자 소련으로 망명한 전력이 있는 오스월드에게 암살을 부추긴 게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혼자서 그 일을 했다는 사실에 심각하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음모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처음부터 오스월드가 단독으로 행동했다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이 증거를 문제 삼는 이유는 공식적 발표를 믿기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그건 바로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합당한 기준으로 따져볼 때 단독 범행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포프킨 교수는 위원회의 공식 발표에 이의를 제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실상 두 명의 분리된 오스월드가 있다는 새로운 이론을 내세웠다. 한쪽은 진짜 불운한 오스월드이고, 다른 한쪽은 살인 용의자 오스월드라는 것이다. 당연히 살인 용의자는 정보국 요원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