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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의 지구사

사라 모스, 알렉산더 바데녹 지음 | 휴머니스트
초콜릿의 지구사

사라 모스, 알렉산더 바데녹 지음

휴머니스트 / 2012년 2월 / 224쪽 / 15,000원



1 초콜릿의 발명_ 카카오에서 탄생한 매혹의 음료



'테오브로마 카카오'라는 학명을 지닌 '초콜릿나무'는 적도에서 남북으로 위도 20도 이내, 그리고 해발 300미터 아래쪽에서만 자란다. 이는 정작 대부분의 초콜릿을 소비하는 나라에서는 이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판 모양의 갈색 초콜릿으로 변하기까지는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 과정에 필요한 노동력과 첨단기술은 한 경제권에 속해 있지도 않다. 초콜릿은 이렇듯 본질적으로 저임금 육체노동과 기계화된 제조 공정, 굶주린 노동자와 세련된 소비자, 자원이 풍부한 적도 인접 국가와 경제력이 막강한 유럽 및 북미권 국가가 뚜렷한 대비를 이루는 근대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근대 이전에는 초콜릿이, 최소한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메소아메리카의 초콜릿

지금 초콜릿 포장지를 장식하거나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초콜릿 역사 속의 신화는 바로 고전기 마야 문명이라는 맥락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마야인들이 카카오를 소비했다는 사실은 여러 자취와 이미지를 통해 확인된다. 예로 화병의 상형문자나 그림 등인데, 펜실베이니아 허시 연구소에서 이 화병들을 검사했더니 몇 세기가 지나도 잔존할 수 있는 초콜릿 성분인 테오브로민(카카오 콩에 존재하는 알칼로이드로 각성작용을 일으키는 물질)의 흔적이 발견됐고 하는데, 대개 무덤에서 출토된 이런 화병에는 음료를 가득 채워서 묻은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메소아메리카에서 초콜릿은 또 다른 기능을 담당했다. 즉 마야와 그 이후의 아즈텍 사람들이 카카오 콩을 금 대용품이나 화폐로 사용했다는 얘기다. 기원전 1세기경에 발베르타에서 모조 카카오 콩이 발견됐는데, 모종의 교환가치를 지니지 않고서는 이런 위조관행을 설명할 길이 없다(먹어치울 것을 위조할 이유는 없으니까). 한편 카카오 콩과 초콜릿이 교환가치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성장과 생산은 일정한 지역에 국한된 반면, 소비는 대륙 전역에서 이루어졌고, 보관이 용이한 데다 화물선이나 텀플라인으로 운반하기도 쉬웠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1519년에 에스파냐가 아즈텍에 첫발을 들이고 나서 불과 2년 후에 테노치티틀란을 약탈한 탓에 우리가 아즈텍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은 대체로, 하지만 결정적으로, 에스파냐 정복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곳을 제대로 이해해볼 틈도 없이 도서관을 비롯한 전체 문명을 체계적으로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아 있는 문헌을 통해, 중세 유럽에 필적하는 사치금지법을 제정해서 고도로 계층화된 사회의 상류층까지 엄격하게 사치를 금했을 만큼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몬테수마 2세(1502~1520년)의 궁중에서 과소비를 한 반면에 중산층은 검약한 생활을 했다는 걸 짐작해볼 수 있다. 이 때 초콜릿은 왕국을 위해 고귀한 희생을 치른 사람에게만 주어졌고, 그마저도 연회 말미에 소량만을 마실 수 있었다. 한편 초콜릿과 피를 관련지어 생각할 만한 증거는 비교적 드물다. 프란체스코회의 수사이자 민속학자인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이 아즈텍의 종교의식에 대해 쓴 글은 초콜릿의 역사를 다루는 대부분의 책에 인용되는데, 제의에서 희생될 사람들이 마지막 춤을 출 때까지 기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카카오와 핏물로 만든 음료를 그들에게 줬다는 내용이다. 그런가 하면 카카오 콩과 인간의 심장을 문학적으로 결부시킨 경우도 있다(카카오 콩은 실제로 심장 모양이다).



정복 이후의 초콜릿

초콜릿에 대한 유럽인들의 초기 반응은 엇갈렸다. 16세기 중반에 니카라과에서 초콜릿을 접한 이탈리아의 역사가 지로라모 벤초니는 "인간이 마실 음료라기보다 돼지에게 더 적합한 것 같다"며 "이 나라에 1년 넘게 있었지만 그걸 마시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그로부터 40년이 지났을 때 예수회 선교사이자 박물학자인 에스파냐의 호세 데 아코스타는 초콜릿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거슬리는 건 거품, 더껑이 같은 기포가 위에 부글거리기 때문"이지만 "……에스파냐 사람들, 특히 에스파냐 여자들은 이것에 중독됐다"고 말했다.



초콜릿 음용은 에스파냐의 정복 이후 몇 세기에 걸쳐 중앙아메리카 전역으로 꾸준히 확산되다가, 17세기 말엽에 이르자 카카오의 문화적 의미도 그만큼 두터워졌고 남녀에 따른 내용은 특히 다채로워졌다.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연구하는 마사 퓨는 〈초콜릿, 섹스, 그리고 17세기 말~18세기 초 과테말라의 난잡한 여인들〉에서 초콜릿을 독살과 주술에 사용했다고 비난받은 여성들의 사례를 나열함으로써 계층에 관계없이 모든 여성과 이 음료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하고 일상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때부터 이미 초콜릿은 나쁜 여자, 집안일을 돌보지 않은 채 늦도록 침대에서 빈둥거리는 여자와 결부되었다. 초콜릿을 여자의 '나쁜 행실'이나 사치, 탐닉 등과 연결 짓는 이런 시각은 현대의 광고에서 꽃을 피웠지만, 지금의 우리처럼 대부분의 사람이 거의 매일 초콜릿을 마시던 사회에 이미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초콜릿은 또 다른 종류의 도덕적 타락과도 관련이 있었다.



근대 초반에 유럽의 가톨릭 신자들은 사순절과 성령강림 축일, 그리고 대림절까지 금식을 해야 했는데, 16~17세기의 가톨릭 신자들은 금식 중에 수프와 죽과 달걀술을 마시곤 했다. 그건 초콜릿의 신학적인 위상도 모호했다는 뜻인데, 초콜릿은 덩어리나 납작한 판의 형태로 운송할 때는 누가 봐도 고형의 음식인 게 분명하지만, 몰에 녹이면 죽이나 수프와 더 비슷해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메소아메리카에 이주한 에스파냐 사람들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초콜릿을 마시는 버릇이 들었던 차에 정의를 구현하려는 바티칸에서 이 새로운 문물과 금식의 관계 설정에 착수했다. 하지만 한동안 불확실성의 시대가 이어졌고, 초콜릿의 의학적 용도와 효력에 대한 논쟁도 겹쳐졌다. 즉 아즈텍의 상인과 전사가 초콜릿 덕분에 다른 음식을 먹지 않고도 며칠씩 강행군을 할 수 있었다면, 초콜릿은 금식기간에 더없이 이상적이거나 (음식을 자제하기 쉬우므로) 오히려 더 철저히 배척해야 마땅했다(금식의 취지는 고통이니까). 어느 쪽이 됐건 그 정도의 효과를 지녔다면 틀림없이 건강에도 영향을 미칠 테고, 어떤 질병이나 증상의 치료에는 도움이 되는 반면에 금기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근대 초기의 의술은 갈레노스의 생리학 이론에 의존했다. 갈레노스는 2세기 그리스의 의학자였지만, 유럽에서는 16~17세기까지도 인간의 몸이 네 가지 '체액'으로 이루어졌다는 그의 이론을 수용했다. 네 가지 체액이란 혈액과 황담즙, 점액 그리고 흑담즙이고, 그에 따라 몸과 성격의 종류가 나뉘었다. 그리고 신체기능의 장애나 질병은 우리 체액의 균형이 깨진 탓으로 여겼고, 그렇기 때문에 치료도 이 균형을 되살리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모든 사람의 몸이 네 가지 체액으로 이루어진 만큼, 거의 모든 음식이 몸의 온도를 높이거나 낮추고 몸에 수분을 공급하거나 몸을 마르게 하는 작용을 했지만, 초콜릿은 이 체계 안에서 확실한 위치를 점하지 못했다. 즉 뜨거운 음료인 데다 심지어 칠리까지 가미할 경우 초콜릿은 누가 봐도 뜨겁고 물기가 있었으므로 당연히 다혈질이었지만, 향신료에 초점을 맞추면 '건조'하기 때문에 점액질이 된다. 하지만 체액에 미치는 영향에 관계없이 모두가 시도 때도 없이 초콜릿을 마시는 현상이 더 이상의 논쟁을 불필요하게 만들었을 뿐더러, 대단히 광범위한 효과들이 보고되었다. 예로 몸에 열이 났을 때 초콜릿을 마셨더니 열이 내려갔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초콜릿의 힘으로 피로와 과로를 너끈히 이겨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속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됐다는 사람이 있고, 잠이 잘 온다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초콜릿은 언제나 적당량을 마셔야 하며 몸에 미치는 효과는 재료와 조제법에 크게 좌우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지만, 한쪽에서는 여전히 건강에 항상 해롭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아예 만병통치약 수준으로 여기는 시각도 존재했다. 초콜릿과 결부된 또 다른 의미는 지금도 초콜릿을 먹을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데, 최종 생산물과 원재료가 모두 강제노동에 의존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초콜릿은 처음부터 가난한 사람이 만들어서 부자가 소비했고, 초콜릿 소비자가 메소아메리카의 주요 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거주하는 경우도 흔했지만, 대륙 간 노예교역에 의존한 것은 17세기에 들어선 이후의 일이었다.



카카오를 처음 작물로 경작한 건 17세기에 브라질의 대서양쪽 해안지역인 바이아의 포르투갈 정착지에서였다. 초기에는 예수회 선교사의 지시에 따라 아메리카 원주민이 카카오 콩을 수확했지만, 북쪽의 에스파냐 식민지에서 수요가 증가하자 서아프리카의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끌려온 노예의 노동력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그 운영방식을 전환했다. 이 맥락에서 설탕이나 담배를 능가하는 카카오의 장점이라면 처리 과정이 워낙 복잡했기 때문에, 밭에서 고된 노동을 하는 장정 외에 어린이와 임산부, 노인에게도 시킬 일이 있었다는 점이다. 즉 카카오는 요람, 최소한 걸음마를 떼는 순간부터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노예의 노동력을 활용(또는 착취)했다고 할 수 있다.



2 초콜릿 하우스_ 초콜릿, 유럽 상류층의 필수품이 되다



초콜릿은 에스파냐를 거쳐 16세기 후반 무렵 유럽에 상륙했다. 유럽으로 처음 넘어왔을 때의 기록을 보면 카카오는 단지 이국적이기 때문에 귀한 물건, 신기한 새의 현란한 깃털이나 코펄(니스, 래커 등의 원료가 되는 천연수) 향 등과 더불어 신세계에서 건너온 진기한 물건 정도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최소한 17세기 전반까지는 유럽 사람들의 초콜릿 소비 형태가 대체로 메소아메리카와 동일했다. 전통적으로 초콜릿에 가미된 바닐라와 칠리, 식용염료 아나토, 그리고 '귀꽃'까지도 전부 카카오와 함께 수입되었는데, 가공된 고체 상태로 운송되는 게 보통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에스파냐에 이어 이탈리아에서도 초콜릿이 널리 퍼지자 진짜 향신료와 장비를 구하지 못하거나 여력이 안 되는 사람들이 대용품을 고안해냈다. 메소아메리카에서 감미료로 사용한 꿀은 설탕으로 대체되었고, 후추나 계피처럼 좀 더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서아시아의 향신료가 칠리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장미 잎이나 오일이 아마존에서 나는 '귀꽃' 대신 사용되었다. 선술집보다는 점잖고, 집에서 마시는 것보다는 사교적인 준 공공장소 성격의 초콜릿 하우스가 런던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50년대 말로 보인다. M. 서리의 초콜릿 하우스는 같은 도시에 생긴 잉글랜드 최초의 커피 하우스보다 10년 늦은 1660년에 문을 열었는데, 옥스퍼드 대학 '동문 인근'에 있었던 이 초콜릿 하우스의 전단에는 '동인도 음료인 초콜릿의 덕목'이라는 조금 엉뚱한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팸플릿에는 "이 기분 좋은 음료를 마시면 건강을 유지하고 질병을 멀리하게 된다"고 장담하고 있었다.



아울러 여자들을 위한 장점은 아예 '여자들이여 이제 더 이상 슬퍼할 필요가 없다네 / 온갖 노력 다했어도 임신을 하지 못했던 이여 / 하늘에서 내린 도움의 손길 같은 / 이 초콜릿을 한 모금만 마신다면 / 얼굴이며 손에 자연의 장막이 드리워 / 밭일하느라 땅콩처럼 갈색으로 변한 아가씨도 / 최고의 미인이 되는 건 이제 시간문제일 뿐 / 이 초콜릿 묘약을 조금이나마 마신다면'과 같은 시로 읊었다. 맛보다 효능을 앞세워 초콜릿을 선전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 시기의 커피처럼 초콜릿 역시 여전히 주방장의 평범한 재료라기보다는 '마테리아 메디카', 즉 약재에 가까웠다. 한편 옥스퍼드 전단에 실린 시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잉글랜드에서 초콜릿이 주로 소비된 장소는 남자들만의 사교장인 초콜릿 하우스였다. 당시 초콜릿은 신분상승을 꾀하는 정치인과 지식인 세계(피프스가 대표적인 일원인)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었다.



18세기 초 초콜릿을 이용한 조리법이 영국 요리책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로 초콜릿 하우스의 메뉴를 집에서 만들었는데, 에스파냐 사람들이 몬테수마 2세의 연회용 음료를 집에서 마시기 시작한 이래 초콜릿 음용 관습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참고로 영국인들은 17세기 말까지도 대부분 한낮에 정찬을 했고, 아침식사는 남은 음식들로 가볍게 먹는 간식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18세기에 들면서 특히 귀족층을 중심으로 정찬 시간이 점점 늦어지더니 끝내 '저녁'을 대신하게 되었고, 그러자 '점심'을 먹을 공백이 생겨났다. 또 만찬이 늦어지자 아침의 비중도 커졌고, 만찬을 기다리기 위한 방편을 넘어 어엿한 식사가 되면서 상류층에서는 오전 10시에 다양한 종류의 빵과 토스트, 플레인 케이크에 커피나 초콜릿을 곁들여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은이나 도자기로 된 아름다운 쇼콜라티에가 만들어진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쇼콜라티에는 18세기 중반의 초상화에서도 종종 눈에 띄는데, 마치 조지 왕조 시대의 귀족적 이상인 온화한 사교성을 상징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18세기 초상화 속에서 쇼콜라티에를 중심으로 모여 앉은 유한가정의 정돈된 풍경만이 이 시기의 문학에 반영된 건 아니었다. 한쪽 끝의 마르키드 사드부터 반대쪽 끝의 제인 오스틴까지 18세기 후반의 문학에서 초콜릿은 거의 예외 없이 사치에 빠져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타락하고 방만한 귀족과 결부되었는데, 17세기 잉글랜드에서 초콜릿 하우스라는 명백하게 남성적인 환경과 결부되었던 초콜릿이 이때부터 여성화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초콜릿의 대중화를 향한 두 가지 진전이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초콜릿 생산이 기계화되기 시작했다는 것, 또 하나는 초콜릿이 다시 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에서 소비되고 생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3 초콜릿 공장_ 기계의 발명, 초콜릿의 대중화



19, 20세기에 식민제국이 형성되면서 초콜릿은 새로운 경로로 유통되고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즉 1800년대에 들어설 때만 해도 기름진 음료였던 것이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지금의 소비자에게 익숙한 우유 성분의 음료수와 고형의 판과 여러 가지 형태로 대량생산되기 시작했다. 또 처음엔 (유럽에서) 가톨릭 성자나 빈둥거리는 귀족과 결부되던 초콜릿이 이런 변모를 거치면서 노동 빈민층에게 건강과 영양을 선사하는 축복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의 정글과 알프스의 풀밭 같은 장소의 이미지를 빌려왔고, 어머니의 사랑부터 보랏빛 소에 이르는 다양한 것과 동일시되었다.



혁명인가 아닌가

19세기 초는 16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확장일로의 오르막을 그려온 초콜릿의 생산과 소비 그래프가 최초이자 아마도 유일하게 꺾인 시기였다. 그런데 바로 이 쇠퇴기에 제작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적인 형태의 초콜릿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초콜릿은 지방 함량이 워낙 높기 때문에 완성된 음료에서 과도한 카카오버터를 걷어 내거나 칡이나 감자, 또는 사고야자 가루 등의 전분을 넣어서 흡수해야 했다. 그런데 1828년에 네덜란드 사람인 쿤라드 반 호텐이 수압식 압착기를 이용해서 초콜릿액으로부터 카카오버터를 분리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 압착기를 이용하면 초콜릿액의 카카오버터 함량을 53퍼센트에서 27퍼센트까지 낮출 수 있고, 쉽게 가루를 내서 음료로 만들어 팔 수 있는 덩어리(케이크)만 남았다. 반 호텐은 그렇게 나온 덩어리에 알칼리염을 추가했는데 (이 과정은 네덜란드 카카오 공장에서 처음 표준 공정으로 정착했다고 해서 지금은 아예 네덜란드 방식이라는 뜻의 '더칭Dutching'으로 불린다), 그렇게 하면 초콜릿이 물과 잘 섞일 뿐만 아니라 맛이 더 부드러워지고 색은 더 짙어졌다. 이는 초콜릿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이로 인해 초콜릿의 형태와 대량생산의 혁명이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걷어낸 카카오버터를 쓸 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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