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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꽃이 아니다

신금자 지음 | 멘토프레스
나는 꽃이 아니다

신금자 지음

멘토프레스 / 2012년 2월 / 347쪽 / 17,000원



제1장 나는 여왕이로소이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품고 나아가리라_ 이집트 제국을 꿈꾼 클레오파트라

이집트 문명의 흐름은 넓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나일 강에서 비롯되었다. 나일 강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사막 가운데를 한 마리 거대한 뱀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지중해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형상이다. 그야말로 고대 이집트의 문명 발상지로 6,700킬로미터의 장구한 용틀임이 아닐 수 없다. 이 강변을 따라 농경도시를 형성하며 이집트는 잘사는 부국이 되었다. 그래서 이집트 문명을 '나일 강의 선물'이라 했고, 나일 강을 '이집트의 젖줄'이라 여겼다.



카이사르를 만나다: 클레오파트라의 역사는 로마의 카이사르(시저)가 정적인 폼페이우스(BC 106~BC 48)와 그 잔당들이 이집트로 숨어들자 그들을 추격하다 이집트에 머물게 되면서 시작된다.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과 공동으로 왕위를 이었지만 사실상 왕국의 실권은 없었다. 게다가 흉작으로 민심마저 흉흉해졌고, 밖으로는 로마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될 형편에 놓여 있었다. 그 첫 시험대가 눈엣가시이자 내시의 좌장인 포티누스와 장군 아킬라스를 해치우는 일이었다. 자칫하면 이 두 신하에게 쫓겨날 수도 있었던 클레오파트라는 상황을 뒤집고 빠져나올 묘안에 골몰하던 중 마침내 기회가 왔다. 이집트 왕궁에 머무는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요청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포티누스와 아킬라스에 의해 철저히 감시당하는 그녀가 내시들을 따돌리고 카이사르를 찾아간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것도 단번에 카이사르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는 파격적인 방법을 써야 하는데 말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숨이 막힐 정도로 조급해졌다.



미모를 겸한 타고난 외교능력: 고대 이집트에서는 남녀가 공동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따라서 클레오파트라도 당시로선 놀랄 만한 제왕학을 공부하며 자랐다. 정치는 물론 예능교육과 승마, 문학, 천문학, 의학수업 등을 다양하게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특히 외국어는 주변 7개국 언어를 두루 구사할 수 있는 끼와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는 여자가 능력으로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결국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비밀리에 궁으로 쳐들어가는 방법밖에 달리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곧 그녀는 심복을 시켜 자기를 자루에 담아 묶고 작은 배에 실어 알렉산드리아 항으로 향하게 했다. 이어 심복은 자루를 둘러메고 '카이사르에게 드리는 선물'이라며 경비를 슬쩍 따돌린 뒤 왕궁에 있는 카이사르 앞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의뭉스런 자루를 풀자 허를 찔린 카이사르도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입니다. 마음에 드시거든 받아주시옵소서." 자루 속에서 왕관을 쓴 미녀가 홀연히 나오자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엷은 천 뒤로 드러난 고운 미소와 자태에 카이사르도 감복하여 그녀에게 매료되고 말았다. 카이사르는 이제까지 그와 함께 했던 그저 예쁘기만 한 여인들과는 다른, 정치를 알고 남자를 아는 그녀의 당찬 면에 눈이 멀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세계 최고의 강자인 카이사르가 충분히 매력적인 사내로 느껴져 내심 좋았다.



그러나 동상이몽이라!: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정적을 몰아내고 그녀의 왕좌를 찾아주되, 이집트의 실권은 자기가 틀어쥐고자 한다. 그리고 이집트의 부를 업고 세계를 제패해야겠다는 야심을 품는다. 클레오파트라 또한 그의 힘을 빌려 실권을 가진 내시 포티누스와 장군 아킬라스를 몰아내는 것은 물론, 카이사르를 사로잡아 그가 쥐고 있는 로마를 이집트의 것으로 만들 기회로 보았다. 그 전쟁 중에 같이 왕좌에 있던 남동생이 죽자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막내 남동생과 혼인했다. 그리고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았다.



로마로 돌아가 독재관으로 추대된 카이사르는 이제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기에 이집트에 두고 온 클레오파트라와 아들 카이사리온을 불러들였다. 그 호화찬란한 로마 입성은 그녀에게 있어 행복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물론 클레오파트라도 로마인들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일까. 카이사르는 로마에 신전을 세우고 그곳에 자신과 클레오파트라의 조각상을 안치했다. 로마인들이 볼 때 그것은 기가 찰 노릇이다. 혹여 카이사르가 왕이 되고 클레오파트라는 왕후, 카이사리온을 그 후계자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러자 브루투스가 반역을 저지른다. 결국 카이사르는 정적이던 브루투스를 키워서 충복으로 믿었지만 그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안토니우스와 악티움 해전: 암살당한 카이사르를 떠나 허겁지겁 이집트로 돌아온 클레오파트라는 남편이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죽인 뒤 세 살짜리 아들 카이사리온과 결혼한다. 이는 여자와 남자를 내세워 통치하되 순수혈통을 잇도록 한 이집트의 결혼 풍습이다. 클레오파트라가 정식 결혼을 한 것은 안토니우스뿐, 나머지는 모두 왕위를 잇기 위해 서열대로 맺어진 결혼이었던 셈이다.



한편, 그녀는 로마의 후계 구도에도 눈을 떼지 않았다. 생전에 카이사르가 친자인 카이사리온 대신 양자 옥타비아누스(BC 63~AD 14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를 계승자로 정해놓았다는 사실은 뭘 의미하는가? 즉,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이자 카이사르의 친자인 카이사리온이 로마인들에 의해 온전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 권력투쟁에 휩쓸려 비명횡사할 수도 있는 일. 마침내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미래를 안토니우스에게 걸어보기로 한다. 사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를 모시고 있을 때부터 클레오파트라를 짝사랑했다. 그가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를 보필하며 그녀를 흠모했지만 드러내지 못한 채 가슴앓이를 한 여인이 아니던가. 어쩌면 그녀는 이를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빠르게 사랑과 정치적 연대를 같이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을 동경하던 안토니우스를 카이사리온의, 즉 이집트의 든든한 바람막이로 여겼으리라. 안토니우스도 클레오파트라의 지원으로 아르메니아 원정에서 승리한 뒤 그 정복지를 뚝 떼어 결혼선물로 주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세 아이를 더 낳았고 로마의 부인 옥타비아(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는 이혼했다. 이 때문에 또다시 로마인들이 분노했다. 설상가상으로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무덤을 이집트에 만들어달라는 유언장까지 공개되는 바람에 로마와 이집트, 두 진영의 전쟁이 불가피해졌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은 시꺼멓게 타들어가고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참패하자 결국 두 사람은 자결한다. 그리고 이집트는 로마에 귀속되었다.



그녀의 꿈과 사랑: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로마를 짓밟는 요부로 취급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할 이집트가 막막해서 최소한 현실적인 외교 감각으로 그녀의 자존감마저 내놓고 로마제국을 이용해 나라를 보전하고자 했다. 당시 이집트는 세계 제일의 부자 나라였다. 하지만 정치와 군사력 수준은 로마와 비교해서 그야말로 게임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산이 없자 안토니우스를 버리고 뱃머리를 돌려 도주한 것만 봐도 그렇다. 이는 사랑에 대한 배신일 수도 있다. 그러나 크게 보면 그 와중에도 클레오파트라는 꺼져가는 나라의 희망을 보려 했다. 그러니 달리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금세 로마의 실세가 된 옥타비아누스와 모종의 연합을 모색하며 나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그녀에게 되돌아온 것은 멸시와 조롱뿐이었다. 언감생심 연합이라니.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로마 개선환영식에 끌어내 구경거리로 삼을 작정이었다. 이를 안 그녀는 마지막 불씨를 살려내지 못하고 힘없이 꺼져갔다.



안토니우스는 전장에서도 클레오파트라를 향한 눈물겨운 사랑을 보여주다 마침내 자결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가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사랑은 이집트였다. 그렇다. 그녀는 분출하는 에너지를 나라와 사랑에 쏟았다. 그 분출의 힘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혹은 규율에서 벗어나 그 제어가 힘들 때 과감하게 자신의 파괴를 초래하는 사랑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이는 결국 그녀가 나라와 사랑을 같은 선상에 놓은 증거가 되겠다.



클레오파트라는 사실 미인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에 밝혀진 사진을 보아 사실인 듯하다. 물론 빼어난 몸매와 화장술이 무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심성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맑은 목소리와 타고난 외국어 실력,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외교전략을 수행하기에 잘 맞았던 것은 아닐까. 클레오파트라는 독립과 식민의 복잡한 미로 속에서 길을 찾아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하다 갔다. 지금도 나일 강과 이집트는 클레오파트라를 기억하고 있다.



제2장 황금빛 드레스에 비극을 잉태하다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다오!_ 탱고처럼 살다간 에비타

강한 리듬감, 부드럽고 다이내믹한 춤이 탱고가 아니었더냐! 탱고는 오로지 추는 사람의 기분에 맡길 뿐이다. 탱고를 추는 사람의 마음이 슬프면 탱고도 슬프다. 탱고를 추는 사람의 마음이 즐거우면 탱고도 흥에 겹다. 뮤지컬 영화 <에비타>에서 맛보았던 탱고가 정녕 그랬다. 사람들은 느릿느릿 발을 들고나며 어깨를 서로 맞대고 애써 눈물을 감추었다. 에비타를 잃은 아르헨티나는 한 달 내내 그녀를 기리며 탱고를 추었다. 농장, 길거리, 허름한 창고 등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를 잃은 슬픔을 삭였다. 예전에 이리 슬픈 탱고를 상상이나 했던가. 어쩌면 어린 나이에 대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진출해 탱고를 배운 에비타의 먼 추억이 되니 더없이 흡족한 애도일지도 모르겠다.



빈민촌에서 태어난 탱고와 에바 두아르테: 탱고는 아르헨티나의 사창가에서 생겨난 도시 빈민층의 음악이고 춤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지 아프리카와 남유럽에서 밀려든 이주민들은 아르헨티나의 원주민들과 많은 갈등을 빚어왔다. 탱고의 원류가 선창가 술집이었듯 원주민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해 떠돌면서 하루벌이로 먹고사는 형편이었다. 거기다 밀려든 이주민들과 함께 가난한 땅에서 살아가자니 하층민들의 삶이 오죽이나 고단하고 우울했을까. 그래선지 탱고는 멀리서 봐도 숨이 막힐 듯 격하고 감정적이다. 외롭고 지친 마음으로 흥얼거리다 자연스레 몸에 밴 그들만의 흥취가 아니리. 딱히 내보일 수 없는 서로의 기분을 조금씩 풀어서 뭉치고 보탠 몸짓일 것이다. 탱고는 그렇게 자꾸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얼결에 그리 통하는가 싶더니 더듬더듬 다듬어져 곧장 아르헨티나 전역을 전염시키며 삽시에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한편, 에바 두아르테(에비타)도 비슷한 시기인 1919년 아르헨티나 시골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농장주와 그 농장에서 요리사로 일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것이다. 이같이 부농인 아버지가 있었지만 서녀인 관계로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고, 아버지 장례식에도 떳떳하게 참석할 수 없을 만큼 서러움 속에서 컸다. 그녀가 쉽사리 탱고에 빠질 수 있었던 이유도 순전히 그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대도시를 동경했다. 그리고 열다섯 살 때 자기 집에 묵고 있던 아저씨뻘 되는 첫 남자에게 떼를 써서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따라나서게 된다.



태생적으로 호기심과 끼가 많았던 에바는 그곳에 가면 분명히 기회를 잡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에바 두아르테가 동경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꿈은 그녀가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여지없이 깨지고, 낯선 곳에서 또다시 혼자가 되어 밤거리를 배회하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그녀는 쉽게 기죽거나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사창가에서 혹은 댄스홀에서 이리저리 섞이며 신분을 차별하지 않는 탱고를 닮았다. 춤출 때 파트너를 바꾸듯, 그녀는 남자를 사귀는 데서도 다분히 사교적이었다. 누구의 품이든 힘이 되는 사람이라면 주저하지 않았다.



후안 페론을 만나다: 어느 날 에바는 아르헨티나 예능인의 지진피해자 구호기금 마련 행사에 참석했다. 그녀의 '너는 내 운명'이 된 후안 페론과의 첫 만남은 그때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군사 쿠데타의 주역인 정치가 후안 페론은 육군대령에 불과했지만,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정계의 실세였다. 마침 부인을 잃고 독신이던 그는 에바에게 다정했다. 자연히 페론 주변에서 많은 질시와 만류가 있었으나 개의치 않는 그의 모습이 그녀는 무엇보다 소중하고 든든했다. 그것이 곧 에바 두아르테에게 큰 힘이 되어 나타났다. 연예계에서 그녀를 슬금슬금 띄워주어 후한 대접을 받았다. 에바는 모처럼 산다는 것이 기뻤다. 그리고 그녀는 크나큰 야망을 품는다. 이 사람을 도와 영부인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은 것은 그녀이기에 가능했으리라.



에바는 언제 그렇게 많은 준비를 했던 것일까. 무모하다 할 정도로 그녀의 생각은 이미 저만치 앞서나가고 있었다. 곧 페론의 정부가 된 에바는 후안 페론을 능가하는 정치력을 보였다. 군부 출신의 페론에게 지배계층인 군부를 버리고 기본적인 인권도 누리지 못하는 가난한 아르헨티나 노동자를 지지기반으로 삼도록 충고하고 부추겼다. 그러나 페론 측은 급한 마음에 충분한 과도기도 거치지 않은 채 강력한 사회개혁으로 중하층 계급과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키워주며 과도한 친노동자 정책을 펴다 보니 대지주들의 반발과 정적을 낳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렇게 경제정책에 불만이 커져갈 즈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한때 나치에 심취했던 페론은 정적들에 의해 투옥되었다.



위기를 기회로: 누군가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에바 두아르테가 그를 지켜낸다. 페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녀가 곁에 있었다. 절망한 그가 차라리 망명해서 편히 살자는 것을 그녀가 막고 설득했다. 그리고 바깥 현장에서는 민중들에게 페론에 대한 정책적 지지를 호소했다. "가진 것 없는 여러분을 사랑하고 나 같은 이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페론이다"라고 외치고 또 외쳤다. 그를 감옥에서 구해내기 위해 앞장섰다. 쇼걸이며 삼류배우였던 에바의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은 걸까. 점차 그녀의 생각이 통하기 시작했다. 그 일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가난한 자들 편에 서서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면 된다. 급기야 그녀와 페론을 연호하며 민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페론이 갇혀 있는 감옥의 병원을 사방으로 에워쌌다. 자칫 폭도로 변할지도 모르는 대중들의 페론지지 압박에 정부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석방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노동자들 앞에서 진정으로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위정자가 되겠노라고 감격어린 연설을 하며 에바를 힘껏 끌어안았다. 석방된 페론은 에바 두아르테와 동거생활을 끝내고 1945년 10월 말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인 1946년, 페론은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페론의 심벌인 에비타의 호소력 있는 연설은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그들은 모두 그녀 편이 되었다. 민중들은 그녀가 없는 아르헨티나를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에비타'는 에바 두아르테와 후안 페론이 결혼하고 난 후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지어준 그녀의 애칭이다.



가난한 자의 성녀, 부유한 자의 창녀: 페론 정부가 들어서자 에바는 권력의 핵심에 서서 또다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늘 거슬렸던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외국 자본을 추방하고 기간산업을 국유화시켰다. 여성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위해 노동법을 개정하고 이혼과 혼인에서의 남녀평등 보장, 무료교육, 의료혜택 등 특별히 여성이나 노동자처럼 힘없는 사람들의 권익보호에 힘썼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광활한 대지에서 생산한 육류와 곡물 수출로 비축해둔 탄탄한 국고를 풀어 노동자의 임금인상과 사회보장제도, 빈민주택 정비에 나섰다. 그리고 기득권자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기부하도록 종종 압력을 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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