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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모든 역사 - 한국사

이종하 지음 | 디오네
2월의 모든 역사 - 한국사

이종하 지음

디오네 / 2012년 2월 / 236쪽 / 12,000원



2월 3일



1876년 2월 3일 -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다

서양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19세기 중·후반에 값싼 원료와 새로운 상품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세계로 활동 반경을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소위 제국주의 단계를 말하는데 영국은 1840년 중국에서 아편 전쟁을 일으켜 강제로 중국의 문호를 열었다. 1854년 미국도 페리 제독을 보내 함포 시위를 벌여 일본을 강제로 개항시켰다. 그런데 정작 조선을 개항시킨 것은 이들 서양이 아니라 그들을 흉내 낸 일본이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경영에 몰두했고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개척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국은 남북 전쟁 직후라 다른 곳으로 쉽게 눈길을 돌릴 처지는 아니었다. 이에 이른바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속히 근대 국가로 이행하던 일본은 조선과 근대적 국교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서의 서식이 다르다는 이유 등으로 조선에 거부당하였다.



일본에서는 한동안 사이고와 이타가키 등을 중심으로 정한론이 들끓었다. 이 문제는 아직은 내치가 더 중요하지 외국과 전쟁을 벌일 단계가 아니라는 오쿠보 등의 반대로 일단 잠복하였다. 하지만 유신 과정에서 도태된 일본 무사층의 불만을 밖으로 분출시킬 필요가 있었고 또 각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보상받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조선의 문호 개방은 절실히 요구되었다.



1873년 조선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대원군이 실각하게 되자 일본은 1875년 통교를 위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지만 교섭은 성립되지 않았다. 이에 일본은 측량을 빙자하여 군함 운요호 등 3척을 보내 동래 앞바다에서 함포 사격을 하며 무력 시위를 벌였고 함경도 영흥만까지 북상하였다가 다시 남하하여 일본으로 돌아갔다. 다시 3개월 뒤 운요호를 강화도에 출동시켜 초지진을 포격하고 이어 영종도의 영종진을 포격한 후, 그곳에 상륙하여 약탈과 살상을 저지르고 돌아갔다.



이렇게 무력 도발을 감행한 뒤 일본은 왜관의 거류민을 보호하고 운요호에 포격을 가한 책임을 묻는다며 강화도에 8척의 군함을 파견해 위협을 가하며 개항을 강요하였다. 이를 두고 조선 정부는 갑론을박을 벌였는데 결국 신헌을 대표로 보내 일본의 구로다와 회담케 하였다. 그 결과 협상 15일 만인 1876년 2월 3일 강화도 연무당에서 '병자수호조약'이라고 불리는 12개 조항의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었다. 이어 5개월 후에는 수호 조규의 조항을 보완·첨가한 '수호조규부록'과 잠정적인 통상 협정이라고 할 수 있는 '조일무역규칙'이 조인되었다. 이 3가지를 우리는 강화도 조약이라고 부르는데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이다.



그러나 이 조약은 근본적으로 타율적이고 불평등한 것이었다. 영일 조약을 그대로 모방한 이 조약으로 조선은 부산·원산·인천 등 3개 항구를 개방하고 일본이 자유롭게 조선 연해를 측량하여 지도를 작성하는 자유를 보장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인에 대한 치외 법권과 조선 내에서 일본 화폐의 통용, 무관세 무역도 허용하였다. 반면 조선인이 일본에서 누릴 권리에 대해서는 거의 규정된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일본은 우리에게 얻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낸 셈이었다.



조선은 이 조약을 계기로 그동안 굳건히 견지해 왔던 쇄국의 빗장을 풀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문호를 개방해 구미 각국과 연속적으로 국교를 맺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불평등조약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자주적인 민족 국가의 건설로 연결되지 못하고 정치·경제적으로 외세에 예속되어 이후 근대화가 아닌 식민지의 길을 걷게 되었다.



2월 5일



1886년 2월 5일 - 노비 세습제를 폐지하다

왕이 윤음을 내렸다. 우리나라의 내수사와 중앙 각 관청이 노비를 소유하고 전해 내려오는 것을 기자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임금이 백성을 볼 때는 귀천이 없고 남녀 구별 없이 하나같이 적자다. 노다 비다 하여 구분하는 것이 어찌 일시 동포한 뜻이겠는가. 내노비 36,974명과 사노비 29,093명을 양민이 되도록 허락하고 승정원에 명을 내려 노비 문서를 모아 돈화문 밖에서 불태우도록 하라.

『순조실록』 권 2



노비는 전근대 사회의 최하층 신분으로 보통 종이라 불리는 존재였다. 노비奴婢에서 奴는 사내종을 비婢는 계집종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 노비 제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조선의 법률에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데려다 노비로 삼는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시대의 노비는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되는데 공노비는 16세에서 60세까지 역을 부담하였다. 역의 종류가 노역인가 아니면 현물 납부인가에 따라 그 성격이 다시 구별된다. 사노비는 주인의 토지 가옥과 더불어 중요한 재산으로 간주되어 매매와 양여, 상속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주인의 호적에 올라 나이, 부모의 신분 등이 기재되었는데 성은 없고 이름만 있었다. 주인은 사노비를 죽이는 경우에만 관청에 보고할 뿐 그 외에는 어떤 형벌도 가할 수 있었다. 반면에 노비는 모반이 아닌 이상 주인을 고발할 수 없었으며 만일 고발하는 경우 윤리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간주하여 교살되었다.



사노비가 반드시 주인과 함께 거주하는 것은 아니었다. 주인과 직접 같이 살면서 의식주를 제공받고 잡역과 농경에 종사하는 솔거 노비도 있지만 독립적으로 외부에 거주하면서 신공만을 바치는 외거 노비도 있었다. 동일한 상전 소유의 솔거 노비와 외거 노비는 주인의 의사에 따라 서로 교체될 수 있었다. 노비에 따라서 재산을 소유하는 것도 가능하였고 심지어 노비가 노비를 소유하는 경우도 있었다. 재산을 상속하는 것도 보장되었으나 자식이 없는 경우 공노비는 국가 기관이, 사노비는 그 소유주가 상속권을 행사하였다.



우리나라 노비 제도의 가혹성은 무엇보다도 그 세습성에 있었다. 이것은 고려 시대부터 계속되어 부모가 모두 노비인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고 부모 가운데 어느 한쪽만 노비라도 그 자녀는 노비의 멍에를 써야만 했으며 그것은 다시 대를 이어 반복되었다. 이 때문에 이익이나 유형원 같은 실학자는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폐지를 주장하였다.



16세기 이후부터는 노비제가 다소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정부의 재정이 극도로 악화된 사정이 있었다. 명종 때 경상도 지역이 혹심한 재해를 당했지만 국가가 구제를 감당하지 못하고 민간에 손을 벌렸다. 이때 곡식을 납부하는 대가로 공 사노비에게 제공한 당근이 바로 면천이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군량미의 조달을 위해 납속은 더욱 유행하였다. 또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을 이용하여 군공을 세우고 면천되는 일도 잦았다.



조선 후기에는 부역을 담당할 인구가 부족하여 국가에서는 그 타개책으로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을 도입하였다. 원래 노비와 양인이 결혼하면 그 소생은 무조건 노비가 되는 게 원칙이었다. 그러나 노와 양인의 여자가 혼인하면 이제 그 소생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양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 법은 집권 세력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 입장에 따른 번복을 심하게 겪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노비제는 사회 변화의 추세에 따라 그 유지의 필요성에 대해 강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가령 노비를 양인으로 해방시켜 군포를 징수하면 차라리 경제적인 이익이 된다는 것이었다. 18세기 후반에는 아예 노비라는 명칭 자체를 없애자는 주장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정조 후반에는 내시 노비 혁파론이 제기되었는데 주로 노론 측이 주장했다. 정조와 남인 측은 여기에 부정적이었다.



결국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노론 측은 내시 노비를 혁파하고 그들을 양인으로 상승시켰다. 그 뒤 고종 23년(1886년 2월 5일)에 이르러 노비의 세습제를 폐지한다는 하교가 내려졌고 이어 노비 소생의 매매 금지와 자동적으로 양인이 될 수 있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리고 고종 31년 갑오개혁을 단행하면서 노비제 자체를 완전히 폐지해 버렸으니 이것은 신분제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던 중세 봉건 사회의 해체를 의미한다.



2월 6일



2003년 2월 6일 - 생명 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안 확정

2003년 2월 6일 '생명 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안(생명 윤리법)'이 정부안으로 확정됐다. 이 법안은 체세포 복제 허용을 요구해온 의학 과학계의 의견을 일부 받아들인 것으로 난치병 치료 목적의 체세포 복제를 허용했다. 생명 윤리법은 인간 복제 행위는 금지하고 치료 목적의 줄기 세포 연구는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2000년 1월 생명 윤리 법안 제정 계획이 발표된 이후 유전자 복제 연구와 관련하여 과학계 종교계 사회단체 간에 심각한 논란이 제기되면서 진통을 겪은 후 새로운 법안이 나오게 된 것이었다. 시행령과 규칙에 따르면 불임 치료법 개발을 위한 배아의 연구는 허용되지만 정자 난자의 상업적 유통은 금지된다. 또 병원과 벤처 기업 등 유전자를 검사하는 기관은 모두 보건 복지부에 신고해야 하며 해마다 정확도 검사를 받아야 한다.



2월 9일



1971년 2월 9일 -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발표

1972~1976년 사이에 추진될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1971년 2월 9일 발표되었다. 1962년에 시작된 경제 개발 계획은 성장 여건의 조성과 양적 성장에 치중하였으나 3차 계획은 질적 충실화를 기하고자 하였다. 계획의 주요 목표는 산업 구조의 고도화, 국제 수지의 개선, 주곡의 지급, 지역 개발의 균형 등 성장과 안정의 균형을 추구하였다.



계획의 추진 결과 철강, 기계, 전자 공업, 조선 공업 등 중공업의 성장으로 산업 중 중화학 공업의 구성 비율이 상승하여 자본재의 자체 충당률이 높아졌다. 또한 민간 부문의 기업 활동이 촉진되었고 신흥 공업국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76년에 수출이 78억 1천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2000년 2월 9일 - 뇌사 공식 인정

우리나라에서도 뇌사가 공식적으로 인정됐다. 정부는 2000년 2월 9일 국무회의를 열어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하고 장기 매매를 임의로 알선하거나 교사하면 2년 이상 징역에 처한다고 발표했다. 시행령은 장기 기증자 및 이식 대기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국립 장기 이식 관리 기관에서 통합하고 관리함으로써, 장기를 이식받을 사람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선정토록 했다.



1971년 핀란드가 처음 뇌사를 공식 인정한 미국, 영국, 일본 등 16개국이 뇌사를 공식 인정했다. 그동안 무법 상태에서 행해졌던 뇌사자 장기 기증이 합법화되면서 뇌사자 장기의 배분에서 효율성과 형평성을 꾀할 수 있게 되었다.

2월 10일



1951년 2월 10일 -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발생

1951년 2월 10일 경남 거창군 신원면 내탄 부락 골짜기에서 양민 136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공비 토벌 작전을 벌이던 11사단 9연대 3대대 군인들이 마을 주민에게 공비와 내통했다는 누명을 씌워 무차별 학살한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인 11일에는 박산 개천가에 500여 명의 주민을 몰아넣고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모두 죽였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6·25 전쟁 중 일어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그동안 사망자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4·19 이후 대검찰청의 재수사가 이루어지면서 무고한 양민이 학살된 사건이었음이 밝혀졌다.



1927년 2월 10일 - 조선어 연구회, 『한글』 창간

1927년 2월 10일 조선어 연구회는 국어의 이론적 연구와 한글 보급을 위하여 동인지 『한글』창간호를 발행하였다. 『한글』은 국어학 전문 연구 논문을 주로 싣는데 편집 겸 발행인은 신명균이 맡았다. 『한글』은 1928년 10월까지 제9호를 발행하고 재정난으로 휴간되었다. 그러다가 1932년 5월 1일 다시 기간지의 창간호로 하여 월간으로 내다가 1979년 제163호부터 계간으로 발행되고 있다.



조선어 연구회는 주시경의 제자들이 주가 되어 조직한 민간 학술 단체로 1931년 조선어 학회로 바뀌었고 1949년 9월 현재의 한글학회로 개칭하였다. 이 학회에서는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확정·발표하였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국어 표기의 준거가 되고 있다. 그 뒤 1980년 8월 전면적으로 수정하고 개편한 '한글 맞춤법'을 발표하였으며 국어사전 편찬 사업을 계속하였다. 또한 한글만 쓰기 운동, 국어의 순화운동, 한글의 기계화 운동을 꾸준히 벌이고 있다.



2월 11일



1896년 2월 11일 - 고종과 왕세자, 아관 파천 단행

"나는 대신들을 권력으로부터 몰아낼 가장 간단한 방법은 고종이 비밀리에 궁궐을 떠나 우리 공사관으로 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이 계획을 고종에게 직접 털어 놓았지만 그는 주저하였다. 자칫 실패하여 더 큰 궁지에 몰릴까 두려워해서였다. 나는 더 이상 궁궐에 머물러 있으면 매일 암살의 위협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수차례 설득하였다."



조지 알렉산더 『Balance of Intrigue』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의 조선 개입을 저지하고 또한 청나라로부터 요동반도를 할양받아 대륙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독주를 우려한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은 이른바 삼국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도록 요구하였다. 일본은 영국·미국·이탈리아의 협조를 얻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지만 이들의 소극적 반응으로 실패하였다. 결국 일본은 요동반도의 점유를 포기하였다.



이 사건을 지켜본 조선의 정계는 술렁대기 시작했다. 열강 앞에 일본의 무력함이 드러나자 더 이상 일본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삼국 간섭을 주도한 러시아의 지위는 강화되었다. 또한 그동안 친일파에 눌려 있던 명성황후 세력과 친미·친러 경향을 드러냈던 정동파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실권자였던 박영효가 반역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급히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내각의 개편이 이루어져 김홍집이 박정양을 대신하여 내각의 수반이 되었다. 새 내각의 면면을 살펴보면 친미·친러파가 요직을 장악하여 친일 세력은 급격히 몰락했다.



마침내 일본에 의하여 육성한 훈련대도 해체될 위기에 놓였다. 조선이 더욱 친러적 성향을 띠자 초조해진 일본 공사관은 미우라를 중심으로 천인공노할 흉계를 꾸몄다. 1895년 음력 8월 20일 미우라는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시해하였다. 바로 을미사변이었다. 이를 통해 일거에 세력을 만회한 일본은 다시 친일 내각을 출범시켜 단발령 등의 급진 개혁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국모의 시해로 인해 극도로 악화된 반일 감정에 불을 지른 격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자연히 경비가 소홀해졌고 이 틈을 타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려는 음모가 진행되었다.



드디어 2월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는 궁녀들이 타는 가마에 몸을 숨긴 채 궁성을 빠져나가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을 아관 파천이라고 부른다. 파천이 성공한 후 김홍집 등은 곧 체포되어 경무청으로 끌려가다 군중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새로이 조직된 친러 내각은 친일파를 역적으로 단죄하고 단발은 자유의사에 맡겼다. 그리고 의병은 속히 생업으로 돌아갈 것을 호소하였다. 그 밖에 23부의 지방 제도는 한성부와 13도로 개편되고 호구 조사도 재정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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