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모든 역사 - 세계사
이종하 지음 | 디오네
2월의 모든 역사 - 세계사
이종하 지음
디오네 / 2012년 2월 / 238쪽 / 12,000원
2월 1일
1881년 2월 1일_ 파나마 운하 공사 시작
1881년 2월 1일 리몬 만과 파나마 만 사이에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수평 운하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는 1879년 5월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 학술회의의 결과였다. 공사는 수에즈 운하 건설을 성공적으로 이끈 레셉스가 의장이 되어 맡았다. 그러나 막상 공사를 시작하고 보니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에 부딪혀버렸다. 수에즈 운하는 거의 모래와 부드러운 흙으로 이루어진 데다 높이 또한 15m도 되지 않아 비교적 공사가 수월한 편이었다. 그러나 파나마 지협은 비록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좁은 부분이었지만, 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바위와 혈암층으로 이루어진 100m나 되는 높은 고지를 잘라내야 했다. 더구나 가까운 곳에 인구 밀접 지역도 없고 차그레스 강의 홍수와 더운 날씨로 인한 열병 등으로 인해 공사는 진척을 보지 못했다.
1887년에 수평식에서 갑문식으로 방법을 변경하였으나 20년에 걸친 프랑스인들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 버렸고, 장비 및 인력을 철수하게 되었다. 1903년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운하 공사에 관련된 장비 및 자료 일체를 4,000만 달러에 구입하고 10년에 걸친 공사 끝에 1914년 8월 15일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를 완공하였다.
2월 2일
2007년 2월 2일_ 중국 세계 최초로 해저 7,000m 탐사 잠수함 개발 성공
2007년 2월 2일 중국은 세계 최초로 해저 7,000m까지 잠수 가능한 유인 잠수함 개발에 성공하였다. 고래 모양을 본뜬 이 잠수함은 해저 7,000m의 심해에서 버틸 수 있도록 외장을 티타늄 합금으로 만들었으며, 약 5시간까지 해저에서 머무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 3인용 잠수함이다.
2월 3일
1994년 2월 3일_ 미국, 베트남 금수 조치 해제
1994년 2월 3일 미국은 베트남과 국교 정상화를 위한 조치의 하나로 베트남에 적용한 금수 조치를 해제하였다. '금수 조치'는 원래 선박의 입출항을 금지한다는 말이었으나 국가 간의 수출 금지, 통상 금지 조치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특정국을 경제 고립시키기 위해 사용한다.
2월 4일
1948년 2월 4일_ 스리랑카 독립
인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섬나라 스리랑카의 역사는 아리아인 계통의 민족이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오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도시 아누라다푸라는 비옥한 곡창 지대로 1,500년 동안이나 불교문화의 중심지로서 융성하였다. 그러나 1796년 스리랑카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1948년 2월 4일 비로소 독립하게 되었다.
2월 6일
1952년 2월 6일_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즉위
1952년 2월 6일, 부왕 조지 6세의 뒤를 이어 엘리자베스 2세가 영국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1926년 4월 21일 런던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2세는 조지 5세의 조카이자 조지 6세의 장녀였다. 큰아버지인 조지 5세가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동생 조지 6세에게 양위하였으며, 엘리자베스 역시 형제라고는 동생 마거릿 공주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947년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인 필립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1945년에는 스무 살의 나이로 2차 대전에 영국 여자 국방군으로 입대해 직접 참전한 첫 번째 여성 왕족이 되었다. 또 1993년에는 여왕 스스로 왕실의 면세 특권을 포기하고 다른 국민들과 같이 세금을 납부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현재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을 비롯한 16개국과 영국 연방 및 보호령의 여왕으로서, 1개 이상의 독립국을 거느리는 유일한 여왕인 동시에 영국 성공회의 수장이다.
2월 8일
1904년 2월 8일_ 러일 전쟁 발발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일본에게 조선에 대한 지배적인 정치 군사 경제적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일본 제국 정부가 조선에 채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형태의 지도 보호 감독 조치에 대해서도 이를 간섭하거나 방해하지 않기로 합의한다. - 포츠머스 조약 제2조
1904년 2월 8일, 조선과 만주의 분할을 둘러싸고 일본 함대가 러시아의 뤼순 항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며 러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리고 1905년 9월 5일, 러일 전쟁의 패전국 러시아와 승전국 일본 사이에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는 제국주의를 향한 일본의 첫걸음이자 우리 민족에게는 비극의 서막이었다.
일본의 승리에는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는 영국의 도움이 컸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는 북해에 주둔 중이던 발틱 함대를 조선의 동해로 파견하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게 해달라고 영국에게 요청했다. 당시 수에즈 운하의 운영권은 영국이 소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를 거절했고, 러시아는 지구의 반 바퀴를 도는 여정을 시작해야만 했다. 때문에 발틱 함대가 쓰시마 섬 근처에 접근했을 때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제대로 전쟁을 치를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조선의 동해에서 벌어졌던 러일 전쟁은 결국 러시아의 패배로 끝났고, 같은 해 9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는 한반도와 대륙 진출에 대한 일본의 발언권이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공인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로써 조선의 식민지화와 만주국 건설, 중일 전쟁,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태평양 전쟁과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이어지는 광란의 역사가 종결되었다. 또한 러시아에서는 전쟁의 패배로 전국적인 혼란과 시위가 벌어졌으며, 이듬해 1월에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2월 9일
1950년 2월 9일_ 미국, 매카시즘 광풍 시작
1950년 2월 9일, 미국 연방 상원이었던 조지프 매카시는 공화당 당원 대회에서 이와 같은 충격적인 발표로 미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미국에는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나는 공산주의자 297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다." 극단적인 반공주의 혹은 정적이나 체제 반대자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행위를 일컫는 '매카시즘'이란 단어는 이날의 매카시로부터 시작되었다. 매카시가 말한 명부는 언론의 관심을 한 번에 끌었으며, 초미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은 황급히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매카시의 반공 발언은 연이었고, 그가 입을 뗄 때마다 명부의 인원은 늘어났으며, 그의 입에 오른 이름과 단체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직장을 잃거나 투옥되었다. 매카시가 언급한 명부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음에도 그가 이끄는 광풍은 멈출 줄을 몰랐다. 드디어 매카시는 미 육군에도 헤아릴 수 없는 공산주의자와 간첩이 있다며 맹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자 6 25 전쟁까지 겪었던 나라로, 전쟁에서 직접 활약하였던 군 장성들이 여전히 실세였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1952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아이젠하워는 2차 대전의 영웅이기도 하였다.
근거 없는 매카시의 주장에 분노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군 장성들 그리고 슬슬 매카시에게 지쳐 가던 국민들과 그의 비논리적 주장에 맞서기 시작한 언론의 움직임으로 1954년 4월 미국은 상원 공청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공청회 결과는 매카시가 주도했던 광풍의 열기와 달리 매우 허무했다. 지난 4년간 매카시가 주장했던 어떤 발언 하나도 근거가 없었으며, 그가 말했던 '명부'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통해 생방송으로 그들의 자유가 매카시의 거짓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결국 1954년 12월 미국 상원은 그동안의 매카시즘을 종결짓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회복하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오랜 마녀사냥이 끝나고 '매카시즘'이란 단어만을 역사에 새긴 사건이 종결된 것이었다.
2월 11일
1979년 2월 11일_ 이란 혁명 발생
1979년 2월 11일 이란의 팔레비 왕조가 무너졌다. 회교 혁명은 이란 역사상 최초로 민중이 봉기하여 지배자를 교체한 혁명이었으며, 이란 역사상 최초의 공화정이 탄생한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던 최고 지도자가 성속聖俗의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1963년 이란의 팔레비 왕은 국가 개혁을 기치로 6개 항목의 개혁 조치를 국민 투표에 회부하여 이른바 '백색 혁명'을 시작하였다. 혁명의 주된 내용은 토지 개혁, 문맹 퇴치, 사업 종사자에 대한 병역 면제 등이었으며 여성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됐다. 그러나 성직자의 상당수가 지주였고 팔레비 왕의 개혁 정책은 수백 년간 이어 내려온 성직자의 지배적 권위와 특권을 폐지하는 것이었으므로, 곧 성직자 계급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이슬람 성직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토지 개혁은 꾸준히 진행되었고 생활 수준도 향상돼 왕정에 대한 반대가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하였다. 내정의 안정을 확보한 팔레비 왕은 스스로 중동 및 걸프 지역의 경찰 역할을 떠맡았다.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여 군비 강화에 힘썼으며 미국산 무기 구입에 막대한 비용을 소비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러한 친미 노선을 비굴한 외세 의존으로 이해하였으며, 팔레비 왕조의 비민주성과 빈부 격차 그리고 이슬람 전통을 무시한 서구화는 국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저항은 곧 호메이니 지도하에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1976년 후반부터 이란 경제는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 막대한 규모의 예산이 체계적인 계획도 없이 팔레비 왕의 과시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불필요한 건설과 군비 강화에 투입되었으며, 정부 관리의 무능과 부패 속에 물가는 폭등하고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한편 정부는 이슬람 지도자 호메이니가 영국의 간첩이며 동성애자라는 거짓 기사로 국민을 자극했으며, 쿰에서 발생한 학생 시위를 무력 진압하였다. 이에 이스파한 시의 바자르가 항의 표시로 영업을 중지하고 시위에 나섰으나 정부에 의해 다시 무자비하게 해산되는 등 1978년 벽두부터 시위와 유혈 진압의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한편 추방 이후 이라크에 머물렀던 호메이니는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그의 프랑스 망명은 국제적 언론과의 접촉을 쉽게 만듦으로써 이란 반정부 운동이 국제적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호메이니는 국외에서 이란 내 반정부 시위를 지휘하였다. 결국 군인들마저 호메이니를 지지하자 이란의 왕정은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1979년 1월 결국 팔레비 왕과 그의 일가는 이란을 떠나야만 했고, 사실상 민중 봉기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회교 지도자에 의한 이란 신정부 출범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팔레비 정부를 타도하라고 지시하였던 호메이니는 1979년 2월 1일 열렬한 군중의 환호 속에 귀국하였다. 한편 미국은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자 이란 정권이 미국의 중동 패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고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 9월에 발생하여 8년 이상을 끈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미국은 후세인 정권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2월 13일
1974년 2월 13일_ 소련,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 추방
알렉산드로 솔제니친(1918~2008)은 20세기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문예가로 손꼽힌다. 그는 러시아 카프카스에서 태어나 주로 어머니 손에서 자라났다. 로스토프나도누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한 다음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문학과 통신 과정을 공부하였다. 1945년 스탈린을 비판한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8년 동안 감옥과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1962년 탈 스탈린화 정책의 뚜렷한 증거로 문화생활에 관한 정부의 통제 완화에 힘을 얻은 그는 자신의 단편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발표하였다. 이 소설은 스탈린 시대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한 죄수가 겪는 생활을 묘사한 것이었다. 197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솔제니친은 1973년 12월에 파리에서 『수용소 군도』 제1부를 출판하였으나 이듬해 2월 12일에 반역죄로 법정에 서게 되었으며, 이튿날인 1974년 2월 13일 소련에서 추방당해 스위스로 이주하였다.
2월 14일
2003년 2월 14일_ 세계 최초의 복제 양 돌리 안락사
세계 최초의 복제 양으로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돌리가 2003년 2월 14일 폐질환으로 안락사되었다. 돌리는 1996년 7월 스코틀랜드의 로슬린 연구소에서 태어나 2007년 2월에 세상에 발표되었다. 성체 암양의 체세포를 복제한 세계 최초의 클론 동물이었으며, 사망 후에는 에든버러의 왕립 박물관에 박제 전시되었다.
* 1997년 2월 27일 체세포 복제 양 돌리 탄생
1) 수정되지 않은 난자들을 정상적인 양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양으로부터 꺼낸다.
2) 6살 된 숫양의 방광으로부터 꺼낸 조직의 일부 세포를 떼어내 배양 용기에서 키운다.
3)배양된 세포에 영양분 공급을 중단하고 휴지기에 들어가도록 한다.
4) 세포를 난자의 옆에 두고 전기 충격을 가해 세포와 난자가 융합되도록 한다.
5) 융합이 되면 하나의 세포로 되며, 이를 7일간 키운다.
6) 7일간 키운 세포를 어미 양의 자궁에 이식한다.
7) 그 후에는 정상적인 새끼 양처럼 자궁에 착상하게 된다. 그리고 임신 기간(약 150일)을 거친 뒤 출산하다. 새끼 양은 젖샘 세포를 제공한 양과 동일한 유전 정보를 가진 클론이 된다.
2월 15일
2011년 2월 15일_ 리비아, 반정부 시위 시작
2011년 1월 튀니지의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가 분신자살로 세상을 떠난 후,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은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혁명의 물결을 불러왔다. 중동 및 북아프리카의 독재 국가들에서는 재스민 혁명의 뒤를 잇는 반정부 시위가 끊임없이 발생하였으며, 이것은 리비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리비아는 1969년 카다피를 위시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줄곧 카다피 일인에 의한 독재 체제 상태였다. 그러나 2011년의 아랍의 봄과 함께 리비아에도 카다피 독재에 반발하는 반정부 시위가 2월 15일을 기점으로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시민군은 벵가지를 비롯한 리비아의 도시들을 해방시켰다. 이에 대해 카다피 정권은 군부대를 내보내 공격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결국 국제 사회는 리비아로 나토NATO군을 파병해 시민군에 대한 지원을 나섰고, 같은 해 10월 20일 카다피가 사망함으로써 리비아에는 해방이 공식 선포되었다.
2월 16일
1935년 2월 16일_ 미국 화학회사 듀폰 나일론 발명
지난 20세기는 화학 섬유의 시대였다. 대량 생산이 가능한 화학 섬유의 개발은 패션의 대중화를 실현시켰으며, 이 계기를 만든 것은 바로 1935년 2월 16일 발명한 인류 최초의 화학 섬유 나일론이었다. 1935년 미국 듀폰 사의 캐러더스에 의해 발명된 나일론은 1938년에 칫솔로써 처음 상품화되었다. 그리고 1940년 5월 15일, 여성용 나일론 스타킹이 미국 전역에서 일제히 판매되자 뉴욕의 메이시 백화점에서 스타킹을 사려고 몰려든 인파 때문에 14명이나 부상을 당하는 소란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