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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프

피터 프링글 지음 | 휴머니스트
바빌로프

피터 프링글 지음

아카이브 / 2011년 12월 / 532쪽 / 28,000원



모스크바, 1905년 12월



190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을 지키던 황제의 근위병들이 전제군주제의 폐지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평화시위를 향해 발포함으로써 러시아혁명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산업화를 틈타 소작인 신분에서 신흥 사업가로 급부상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했듯, 바빌로프의 아버지인 이반 일리치도 차르의 통치 시대가 이미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어머니인 미하일 로브나는 일곱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셋은 어려서 죽었다. 따라서 실제로는 두 딸 알렉산드리아와 리디야, 그리고 두 아들 니콜라이와 세르게이를 슬하에 둔 셈이었다. 아이들의 출생증명서에는 '모스크바 유산계급(Moscow bougeois)'이라고 기록되었다.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불길한 예감과 두 아들의 과학에 대한 열정에도,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가업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겠다는 생각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두 아들을 아카데믹 김나지움이 아닌 모스크바의 국영 상업학교로 보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니콜라이와 세르게이는 과학에 푹 빠져 있었다. 니콜라이는 식물을 채집하고 자신의 식물표본실까지 만들었으며, 연못들을 찾아다니며 개구리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다.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원래 의학을 전공하려고 했다. 러시아의 10대 대학 중 한 곳에 진학하여 그의 누이들처럼 의사가 되고 싶었는데, 국영 상업학교는 대학 입학에 필요한 라틴어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의과대학을 포기하고 화려한 정원조경과 신고전주의풍의 웅장한 3층 건물을 자랑하는, 모스크바 외곽의 페테롭스키 농업학교에 등록했다.



페트롭카와 카탸



1900년, 생물학자들은 1865년에 처음으로 발표된 멘델의 유전법칙을 재발견했다. 나중에 유전자라고 불리는, 생식세포에 저장된 유전입자에 관한 멘델의 이론은 30년 동안 외면되었다. 그러다 세기 전환기에 과학자들이 이 이론의 논리적 타당성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그의 논문이 재발견되면서 유럽과 미국에서 유전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시작된다. 각종 교육기관은 경쟁적으로 멘델의 이론에 기초한 동식물의 육종 기술을 가르쳤다. 모스크바에서 이 새로운 학문의 선두주자는 '페테롭카'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진 페테롭스키 농업학교였다. 1906년 가을, 바빌로프는 이 학교에 첫발을 내딛었다.



입학한 지 불과 한두 달도 지나지 않아 바빌로프는 학교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 중 한 명이라는 명성과 함께 페테롭카의 스타로 떠오른다. 이 무렵 바빌로프의 일기장에는 성공에 목말라하지만 실패 가능성도 있는 한 젊은이의 내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네게 가능한 것만 행하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만약 네가 이루고 싶은 무엇인가를 할 수 없다면 결코 용서받지 못하리라." 당시부터 이미 과학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나는 과학을 간절히 원한다. 나는 과학을 사랑한다. 과학만이 내 삶의 목적이다. 과학 속에서만 우리는 열정을 경험한다." 그리고 과학은 지상에서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는 더 노력하고 "여러 곳을 기웃거려 얕은 지식만 쌓을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온전히 집중하라."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잡아나갔다.



학창 시절의 바빌로프는 깡말랐지만 아주 잘생긴 청년으로, 유난히 수줍음을 잘 탔다. 그러다가 한 여학생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녀의 이름은 예카테리나 니콜라예프 사하로바였는데, 학교에서는 '카탸'라고 불렸다. 그녀도 자신을 향한 관심이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녀는 특히 학문에 대한 바빌로프의 남다른 각오와 열정을 높이 샀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애틋한 사랑의 감정은 없었다. 카탸는 바빌로프가 자기회의에 빠질 때마다 도왔으며, 그 대가로 바빌로프는 그녀가 갖지 못한 무엇인가를 줄 수 있었다. 그건 가족과 가정이었다. 그들은 1912년 모스크바에서 결혼했다.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두 사람은 유럽으로 향했다. 그것은 바빌로프를 진정한 과학자로 다듬어줄 여행이었다.



다윈의 도서관에서



야심찬 진화 이론을 전개했음에도 다윈은 유전의 메커니즘 혹은 살아 있는 유기체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변이들의 근원은 설명하지 못했다. 케임브리지대학의 식물학연구소에 도착하여 세계 식물학의 지성소至聖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바빌로프는 감격에 겨워 한동안 멍한 상태로 서 있었다. 다윈의 개인 서재였다. 그의 발길은 먼저 19세기에 활동한 유럽 식물채집자들의 희귀본들로 향했다. 한 권씩 집어들고 대충 훑어보니, 거의 매 쪽마다 다윈이 직접 주석을 달아놓은 게 아닌가! 바빌로프는 자신의 내면에서 탐구자로서의 본능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나라고 못할 것도 없지." 다윈의 "창조적 여정, 종의 진화에 관한 이론을 세상에 내놓기 전에 거쳐야 했던 그 지난한 과정"을 그도 똑같이 밟아나가고 싶었다.



그 시기에 이루어진 유전학 대가들과의 토론을 통해 바빌로프는 모든 생물학의 중심 주제인 유전과 변이의 문제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면서 학문적으로도 성큼 성장했다. 젊은 바빌로프는 새로운 지식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나이차에도 불구하고(그의 대화 상대는 대부분 자신보다 족히 한 세대는 앞선 사람들이었다) 그는 동등한 예우를 받았다. 유명 연구소들을 하나하나 섭렵해가는 동안, 이 러시아 젊은이는 유럽 생물학의 우상들과 만난다는 사실에 장소를 옮길 때마다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어서 바삐 고국으로 돌아가서 러시아의 생물학을 유럽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일념에 안달이 나있었다.



혁명과 내전



1917년의 혁명은 절대왕권에 대한 봉기이자, 동시에 제1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폐해와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대한 항거였다. 그해 2월, 황제(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임시정부가 통치권을 넘겨받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했다. 그런 대혼란의 와중에 바빌로프는 볼가 강에 위치한 곡물 항으로서 내전 당시 군사전략 도시였던 사라토바에서 농학 교수가 되었다. 러시아의 비옥한 흑토 농업지대 가장자리에 위치한 그곳에서 장래의 기근을 막기 위해 절실히 요구되는, 생산력이 더욱 강한 작물들을 육종하면서 자신의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바빌로프는 새로운 열정으로 무장한 채 페트롭카 농업학교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이미 확고한 인생목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기 혁명을 이루어내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작은 씨앗들을 온전한 작물들로 키워내고, 그러한 작물들을 이용하여 러시아 농업, 아니 전 세계의 농업을 개선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계획의 종착지는 충분한 식량 보급을 통한 인류 생존의 보증이 될 터였다. 인생은 짧으므로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는 게 그의 좌우명이었다. 정치 구조가 어떻게 변하든 그것은 지고한 임무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할 뿐이며, 정치적 소요로 말미암은 위험이나 불편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원대한 이상은 고도의 집중과 엄밀한 과학적 연구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페트로그라드, 까마귀들의 도시



1921년 봄, 바빌로프는 일단의 사라토프 연구원들을 이끌고 페트로그라드로 영구 이전했다. 내전이 끝나고 혁명의 성공 여부를 가름하는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페트로그라드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대규모 시위와 동맹파업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내전 당시부터 시행돼온 식량징발제의 폐지를 요구하고 있었다. 볼셰비키 정부는 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으로 곡물과 소비재의 자유거래가 합법화되면서 농촌 지역들은 비교적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런 개혁 조치도 1921~1922년의 대기근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페트로그라드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1889~1966)는 절망감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서쪽 나라에는 아직도 겨울 해가 방실거리고,

지붕들은 햇살을 받아 즐겁게 반짝인다.

그러나 이곳에는 집집마다 죽음의 신이 내려앉아,

까마귀들을 불러 모은다. 보라 저 까마귀 무리를.





페트로그라드 역 플랫폼에서 바빌로프는 예의 활기찬 모습으로 연구원들을 독려해가며 귀중한 식물표본들을 하차시켰다. 그에게 과학은 전쟁, 기근 혹은 풍요와는 무관하게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었다. 그가 이란과 파미르 고원에서 수집해온 희귀한 밀과 호밀 씨앗이 포함된 종자 컬렉션만 해도 화물칸 하나를 거의 채울 정도였다. 거기다 각종 참고도서, 과학저널, 현미경 그리고 기타 장비까지 더해졌으니 짐을 내리는 것만 해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몇 대의 마차에 짐을 나눠 싣고 네프스키 대로로 향했다. 짐마차 행렬은 다른 시대의 웅장한 유물들을 지나치며 상대적으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응용식물학연구소 사무실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신경제정책이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러시아인의 기업가적 재능을 일깨우면서 서민들의 생활도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치유책은 될 수 없었다. 갑자기 도입한 자유로운 곡물 거래로 러시아 역사상 최악으로 기록되는 대기근을 막아내기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1921년에는 풍작이 예상되었지만 가뭄으로 농작물이 망가졌다. 긴 여름으로 밀이 시들어버리는 바람에 수확량은 전쟁 이전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3,620만 톤에 불과했다. 레닌은 자존심을 꺾고 외국의 원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특히 미국이 많은 식량을 보내왔다. 1세대 후에는 앙숙관계로 변할 국가에서 받은 원조가 바빌로프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신생 소련 정부는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게 된다.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의 농업 현황을 살펴본 후, 비옥하지만 생산력이 낮은 러시아 농지에 적합한 씨앗을 구해오라는 것이었다.



백금 주괴



유전학 이론은 원래 유럽에서 발전했다. 하지만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 과학자들은 유럽 수준을 따라잡는 것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추월했다. 당시 컬럼비아대학의 토머스 헌트 모건 초파리실험실은 세계 유전학 연구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모건은 무수한 돌연변이를 찾아냈으며, 그 결과 염색체가 유전의 매체라는 확신에 도달했다. 같은 시기에 미국 전역의 곡물 육종 실험경작지에서는 멘델의 유전법칙에 의거하여 콩, 밀, 면화, 옥수수, 담배, 감자의 신품종을 개발하고 있었다. 레닌은 과학, 그중에서도 특히 농업 과학이 문제해결의 열쇠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적 체계를 바탕으로 새로운 품종을 실험하고 개발하는 것만이 러시아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바빌로프의 지론과도 정확히 일치했다. 레닌의 후원에 힘입어 바빌로프는 작고 초라한 응용식물학연구소(나중에 레닌그라드연구소로 바뀜)를 거대한 식물 육종 제국으로 키워나가게 된다.



1921년 7월, 농업위원회는 바빌로프에게 국가 차원의 임무를 부여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다가오는 봄에 파종할 최상 품종의 씨앗들을 구해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종자 구입 대금의 지급 방법이었다. 그들의 선호품은 백금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백금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품귀 현상까지 벌어졌다. 특히 영국과 미국이 주요 소비국이었다. 이 두 나라는 폭약이나 대포의 장약 같은 군수품으로 백금을 필요로 했다. 또한 백금은 전기 전화 전신 무선통신 등에도 이용되었는데, 그 주요 생산국이 바로 러시아였던 것이다. 바빌로프는 순금 루불과 백금 주괴를 챙겨들고 미국으로 출발했다.



4개월 동안에 바빌로프는 뉴욕에서 식용 작물 변이에 관한 자신의 새로운 이론을 강의했으며, 워싱턴에서는 장차 미국 대통령직에 오르게 될 허버트 후버가 수장으로 있는 미국 식량청(ARA)과 여러 차례 회합을 했다. 미국 식량청은 당시 전 세계 나머지 국가들의 경우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양의 구호 식량을 소련에 제공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1,0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하루를 넘길 수 있는 양을 한꺼번에 보내기도 했다. 미국 농무부에서 그는 유명한 식물탐험가인 데이비드 페어차일드와 마이어의 보고서들을 검토한 후, 그들의 컬렉션이 너무 무계획적이고 비체계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전 세계 주요 농작물의 기원중심지들을 찾아야 한다는 자신의 이론에 비추어 "(그들의) 노력은 현장 연구에서 요구되는 일관된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라고 평했다.



바빌로프가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하자마자 미국에서 보낸 화물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2,000여 종에 달하는 씨앗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빌로프는 즉시 작업에 돌입했다. 2년도 되지 않아 그는 당시 3개에 불과하던 실험경작지를 12개로 늘렸다. 북극에서 중앙아시아 국가들까지, 그리고 발트 해에서 시베리아와 대서양 연안까지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에 실험경작지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바빌로프는 여전히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는 모스크바의 고위 간부들에게 직원들의 월급, 일당 노동자의 임금, 말 구입비 등에 필요한 돈이 바닥났다며 선처를 호소하는 편지를 계속 썼다. "이처럼 어렵고 불투명한 상황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라고 그는 적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1924년



바빌로프는 미국 여행을 통해 세계 전역을 대상으로 한 식물 원정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그는 이제 자연이 제공하는 가장 풍성한 실험실인 유전자 다양성 중심지를 찾아 아프가니스탄, 북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원정길에 나선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민란이 잦고 외국인에게 적대적인 위험 지역이었다. 1924년 6월 19일, 바빌로프는 최초의 러시아 과학원정대를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했다. 식물학자로서 아프가니스탄을 탐사한 러시아인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힌두쿠시 산맥 건너편 영국령 인도와의 접경지대에서 유럽에는 알려지지 않은 독특한 품종의 밀과 호밀을 발견했다. 과일과 채소의 표본을 채집하고 면화의 씨앗을 모았다. 특히 멜론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하지만 진짜 보물은 빵밀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빵밀의 다양성 지역이었다. 그는 7,000여 개에 달하는 종자 샘플을 수집하여 러시아로 돌아오게 된다.



그가 아프가니스탄에 나가 있는 동안, 농업위원회는 바빌로프의 뉴욕 사무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관리책임자인 보로딘을 해고해버렸다. 바빌로프는 정치적인 상황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는 보로딘에게 곧 복직될 테니 염려 말라는 편지를 띄웠다. (씨앗을 추가로 구입하려면 그의 힘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결국에는 그들도 당신의 존재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 하지만 이곳의 어수선한 정국 때문에 당장은 확답을 드릴 수가 없군요. 물론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말미에 개인적인 부탁을 덧붙였다. "맡겨둔 돈(백금 주괴)으로 만년필 서너 자루만 사 보내주면 고맙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한 자루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다 닳아버렸답니다." 그는 다음 원정을 위해서 새로운 만년필이 필요했던 것이다.



맨발의 과학자



그는 여전히 전 세계에서 수집한 자신의 종자 컬렉션이 러시아 기근이라는 재앙을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떤 찬사나 포상도 없었다. 그해도 작황이 좋지 못했다. 레닌그라드연구소 및 여타 실험경작지들의 일부 회의적인 연구자들은 바빌로프의 원대한 계획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1927년 여름에 이르기까지 바빌로프는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1898~1976)라는 인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리센코는 아제르바이젠의 한 식물 육종 실험경작지의 말단 직원으로 가축 사료와 영양소가 풍부한 봄작물용 천연 퇴비인 녹비綠肥를 사용하여, 파종한 녹색완두가 무사히 넘기는지를 확인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러다 1927년 8월 7일, 느닷없이 당의 공식 일간지 《프라우다(Pravda)》가 리센코를 극찬하는 특집기사를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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