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리더들 식량을 말하다
나승렬 지음 | 지식공간
세기의 리더들 식량을 말하다
나승렬 지음
지식공간 / 2012년 1월 / 358쪽 / 20,000원
01 하나의 나라가 세워질 때는
중국 공자
백성의 믿음이 없다면 나라도 없다: 하루는 제자 자공이 정치에 대해서 묻기에 이렇게 대답해주었습니다. "식량을 풍족히 하고(足食), 군비를 충족하게 하고(足兵), 백성을 신뢰하게 하여야 한다(民信)." 오늘날로 치면 경제력, 국방력, 국민 지지도가 정치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자공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재차 물었습니다. "부득이하게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이 중에 무엇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자공은 현실 감각이 뛰어난 자입니다. 자칫 냉정한 정치인이 되기 쉬운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자공이 정치가 지닌 따뜻함에 대해서 알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으로 '군사'를 꼽았습니다.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면서까지 군비를 확충하는 것은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자공은 다시 물었습니다. "부득이하게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이 둘 중에 무엇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예상되었던 질문이었습니다. '다음은 식량을 버려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국민을 설득하지 못하는 경제 정책은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자공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백성의 믿음이 없다면 나라가 서지 못하는 법이다."
자공은 속으로 '군사가 없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고, 식량이 없으면 백성도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을지 모릅니다. 물론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사람이 나라의 근간이 백성이요, 백성의 믿음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과연 그는 정치를 하는 사람일까요? 정치를 하는 자는 무릇 소통해야 하고, 공감대를 만들어야 하고, 그리고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조선 세종대왕
경복궁에서 농사를 짓다: 왕위에 오른 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저는 평생을 부족한 것 없이 넉넉하게 누리며 살아왔고 지금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강력한 왕권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이 힘을 어떻게 쓰는 것이 바른 도리인지 고민했습니다. 가장 위에 있는 제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산등성이와 계곡을 타고 낮은 곳으로 흘러가서 세상만물을 이롭게 하듯 제가 가진 이 힘은 백성에게로 향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생활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저는 백성의 생활상을 돌아보고, 농사짓는 모습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해가 질 때까지 뼈 빠지도록 농사를 지어도 고작 입에 풀칠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백성이 중국 농법에 의존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풍토가 다르면 말도 달라지는 법인데 어찌 농사짓는 방법이라고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는 1429년에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토록 지시했습니다. 종자의 선택과 저장, 토질 개량법, 모내기 방법, 나아가 각종 작물의 재배와 생산, 보관, 유통까지 농사와 관련된 세세한 일을 다 알아야 했습니다. 경복궁 안에 밭을 만들게 하고 제 손으로 보리씨를 뿌렸습니다. 지게에 똥거름을 지어 직접 날랐습니다. 그리고 무럭무럭 자라는 보리의 생육을 관찰했습니다. 잘 모르겠다 싶을 때는 김포의 노련한 농부를 불러 농사일을 묻기도 했습니다. 백성들과 지방 수령들이 제 뜻을 이해하고 노력한 덕분에 {농사직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02 국가의 힘은 국민으로부터 국민의 힘은 땅으로부터
미국 펄 벅
땅을 잃으면 끝장이야: 1800년대 말 선교사이던 양친은 어린 저를 품에 안고 중국으로 건너오셨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는 지방의 한 작은 도읍이었습니다. 그곳의 농부들은 늘 가뭄과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그곳의 자연은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른 바람이 불 때도, 메뚜기 떼가 바람을 타고 날아올 때도 그들은 대지를 굳건히 지키며 잡초처럼 끈질기게 고비를 이겨냈습니다. 저는 그들의 생명력을 글에 담고 싶었습니다. {대지}는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이 소설에는 비옥한 땅의 소중한 가치와, 중국 민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의 근면한 노동과 검소한 생활, 그리고 현실을 직시하고 위기를 극복해내는 중국인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주인공 왕룽은 삶의 고비 고비를 넘길 때마다 땅의 고마움에 눈을 뜹니다. 그는 땅밖에 믿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 뙈기 두 뙈기 땅을 늘려갑니다. 설령 자식들이 굶주릴 때에도, 어린 여식 영양결핍으로 피골이 상접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결코 땅만큼은 팔지 않았습니다. 잠깐은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을지언정 땅이 없으면 굶어죽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대지} 마지막 부분에는 왕룽의 자식들은 '아버지는 구세대야. 땅은 더 이상 소용이 없으니 팔아버리자'고 하지만 이에 왕룽은 분노를 토해냅니다. "우리는 땅에서 나왔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너희도 땅만 가지고 있으면 살 수 있어. 아무도 땅을 떼어가지는 못하니까." 왕룽의 말 속에는 그가 평생토록 깨달은 한 가지 진리가 숨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지더라도 땅이 지니는 소중한 가치는 변함 없음을 말입니다.
로마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마의 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개혁 정책은 시대를 뛰어넘는 훌륭한 지혜의 소산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급했습니다. 원로원은 강했고 그들 형제는 약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정책은 언젠가는 쓰이기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약 70년 뒤 저는 집정관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실업대책의 성격도 띠고 있는 농지개혁법을 부활시켰습니다. 농지개혁법의 부활로 땅을 잃은 농민들은 국유지를 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 로마 본국에는 빌려줄 수 있는 토지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부득불 속주에 있는 토지를 분배하여 농민들을 이주시켰습니다. 남부 프랑스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그리고 코린트 등지로 농민 이주 러시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카르타고와 코린트 등으로 이주한 농민들은 세대주 기준으로 약 8만 가구에 이르렀습니다. '로마의 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 로마에 필요한 것은 외연을 넓히는 일이 아니라 안으로부터의 부단한 개혁이었습니다.
인도 마하트마 간디
물이 스며들 듯이 농민의 삶으로 들어가라: 인도에는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농부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인도 전역을 누비며 농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농촌에는 교육이 필요했습니다. 계몽과 위생, 공중보건 등의 정책이 시급해, 도시의 혜택 받은 사람들에게 달려가 농촌 개선에 힘을 보태 달라고 호소하는 것으로 청장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1936년 65세의 나이에 저는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는 농촌으로 이주했습니다. 물도 없고, 전기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농촌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필요한 것은 외부의 손길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구제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타인의 의존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스스로 일어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물자를 내 손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1사1촌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농촌의 자립을 돕기 위한 뜻 있는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리더의 현실 참여가 중요합니다. 리더가 현장으로 들어가 그 어려움을 몸소 체험하는 것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촌에 대한 관심과 봉사는 현대의 리더에게도 필요한 덕목입니다. "간디는 공직에 취임하거나 부를 가진 적이 없었고, 군대도 지휘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억을 움직일 수 있었다." 비결이 무엇일까요? 농촌을 살리는 길은 농민에게 달려 있습니다.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라는 책에서 저는 농부는 땅의 소금이며, 당연히 땅은 부재지주가 아니라 직접 농사짓는 농부(자작농)가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부재지주는 땅을 파고 흙을 돌보는 일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이는 곧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03 국가의 정책은 머리가 아닌 국민의 삶으로부터
중국 덩샤오핑
집단농장·개인농장이든 식량증산이 중요: 10억 인민에게 필요한 것은 밥이지 이념이 아니었습니다. 집단 농장이든 개인 농장이든 생산성을 높여서 먹고살 수 있을 만큼 식량을 증산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인민 대중이 기꺼이 바라는 것이라면 당연히 그 정책을 채택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만입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黑猫白猫, 원래 덩샤오핑은 黃猫白猫로 표현) 쥐만 잘 잡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1978년 우리는 실험적으로 안후이성과 쓰촨성에서 자작농을 육성하는 사업을 벌였습니다. 농업생산책임제로 불리는 농촌개혁정책이었습니다. 실제로 생산량이 느는 등의 성과가 나타나자 우리는 이 사업을 확대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정책의 핵심은 농민들에게 자율적으로 일하도록 하고, 그 수확물을 각자가 갖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국가로서는 비용도 들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당과 국가에도 혜택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정책은 아니었습니다. 중국 농민들은 수천 년 전부터 자신의 땅을 경작해 왔습니다. 약 2천7백 년 전 제나라 명재상 관중도 토지의 소유권을 명확히 해야 농업의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말했습니다.
1980년 이후 농촌개혁은 급속도로 전국에 확산되었습니다. 인민공사(人民公社, 집단농장을 포함하는 중국의 지방조직)의 땅을 전부 개별 농가에 재분배하도록 했습니다. 농민들은 그들의 땅에 곡물 외에 환금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그 땅을 가축이나 어류양식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농민의 소득이 증가하게 되고 농업생산성도 올라갔습니다. 예컨대 밀과 쌀 같은 미립(微粒) 곡물은 특별한 경우에 먹는 귀한 식품이었으나, 1984년 이후 과거 주식이던 옥수수, 수수, 고구마와 같은 거친 곡물을 대신하여 밀이 주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경제도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했습니다. 개혁과 개방정책이 중국 발전의 동력입니다. 이런 개혁과 개방정책에 힘입어 드디어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10억 인민이 굶주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필리핀 페르난드 마르코스
쌀 수입국으로 전락, 참으로 부끄럽다: 한 국가의 리더로서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1960년대만 해도 필리핀은 가나는 물론, 한국보다도 훨씬 잘 사는 나라였습니다. 국제미작연구소가 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필리핀은 1년에 3모작을 할 수 있을 만큼 농사짓기 참 좋은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1970~80년대 제가 장기 집권을 하면서 농업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했습니다. 관개수로를 충분히 확충하지 못했고, 생산물의 국내 운송을 위한 도로망도 건설하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농업용수 부족으로 때로는 높은 유통비용으로 농촌은 조금씩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농촌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났고, 농촌은 황폐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필리핀은 농지개혁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집권층과 상류층은 부패하여 국민통합도 매우 힘들었습니다. 불과 40여년 만에 필리핀은 농업강국에서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쌀 생산이 부족하여 외국에서 쌀을 수입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더구나 외화가 부족하여 식량난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농업을 중시하지 않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필리핀 국민에게 진심으로 참회합니다.
04 국민의 더 큰 행복을 위하여
시애틀 인디언 추장
향기로운 들꽃은 우리의 누이: 우리 인디언의 자연관에 의하면, 만물은 우리 모두를 통합시키는 혈액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1854년 미국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이 조상대대로 살아온 땅을 팔라고 했을 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들이 총을 들고 와서 빼앗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늘을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요? 어떻게 대지의 온기를 사고판다는 말인가요? 신선한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소유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팔 수 있다는 말인가요?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 또한 우리의 일부분입니다. 향기로운 들꽃은 우리의 누이이고 사슴과 말,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입니다. 바위투성이 산꼭대기, 강의 물결과 초원에 핀 꽃들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이 모든 것은 하나이며 한 가족입니다……."
언젠가 여러분 또한 우리가 한 형제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구상 모든 생명체는 물론 4대 원소라고 부르는 흙, 물, 불(햇빛), 바람(공기)까지 모두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20세기 미국의 환경론자이자 {모래군의 열두 달}의 저자 알도 레오폴드와 {침묵의 봄}을 쓴 레이첼 카슨 모두 저와 생각이 같습니다. 왜 그들이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는 이제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 당연한 사실을 그저 몸으로 느낀 것뿐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몸을 통해 있는 그대로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베트남 틱 낫한
깨달음이란 상추 재배와 다르지 않다: 저는 베트남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프랑스 남부 보르도 지방의 농촌마을에서 공동체마을, 일명 매화마을을 만들어 생활과 명상수행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넓은 포도밭과 해바라기 밭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농촌마을입니다. 이 명상공동체에서 우리는 농사일을 합니다. 다만 살생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다른 생명체를 죽이면서까지 생산량을 늘리지는 않습니다.
명상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도 도피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과정입니다. 명상은 우리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 다스림을 돕습니다. 명상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기도 합니다. 깨달음이란 접시 닦는 일이나 상추를 재배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은 밭과 같습니다. 이 마음의 밭에는 사랑과 열정, 폭력과 미움 등 좋은 씨앗과 나쁜 씨앗이 공존합니다. 늘 긍정적인 씨앗에 물을 주려고 애써야 합니다. 농사일은 우리가 마음을 다스리는 데 큰 힘이 됩니다. 또한 우리의 감성지수를 높여 정서를 순화시키는 등 교육적인 역할을 합니다.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된 현대사회에서는 농업의 정서 순화기능에 더욱 주목해야 합니다.
러시아 표트르대제
주말마다 농촌별장 다차로 떠나는 러시아 사람들: 텃밭이 딸린 농촌별장인 러시아의 다차야말로 도시민들에게 전원생활과 농사일을 통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곳입니다. 18세기 저는 러시아 귀족들도 유럽의 귀족들처럼 전원생활을 향유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차를 짓도록 했습니다. 러시아 귀족으로 하여금 농촌지역에 별장을 짓도록 하고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다차는 귀족들의 안식처이자 문화가 태어나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다가 1958년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모든 주민들에게 평균 토지면적 150평과 주택면적 9평 규모의 다차를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요즈음 러시아의 주말은 도시에서 다차가 있는 농촌으로 가는 차량행렬이 줄을 잇습니다. 자연스럽게 농촌과 도시의 교류도 일어납니다. 전원에서 채소, 과일이나 버섯을 친환경적으로 재배하면서 여가생활을 즐기므로 도시민들의 정서가 많이 순화됩니다.
05 보다 나은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프랑스 자크 시라크
농민 없는 국가는 없습니다: 저는 파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전형적인 도시인입니다. 그러나 1972년 40세의 나이에 정계에 입문하면서 처음 맡은 자리는 농업농촌개발부 장관직이었습니다. 1950년대 전후 복구과정에서 유럽은 미국에 정치적, 경제적으로 의존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장관직에 올랐을 때는 유럽에 제2의 도약이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유럽이 미국과 대등한 나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농업부문부터 힘을 길러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유럽공동농업정책 개혁을 위한 회원국 간 협상테이블에 참석하여 '녹색유럽'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녹색유럽'만이 우리를 완전히 독립되고 경쟁력 있는 국가로 한 단계 올라서도록 도와주리라 믿었습니다. 당시 유럽경제공동체는 공동농업정책이라는 큰 틀 안에서 농업을 지원하고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정책은 수년 뒤부터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해 197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미국과 경쟁관계에 들어서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