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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 혁명

데보라 캐드버리 지음 | 생각의나무


강철 혁명

데보라 캐드버리 지음

생각의나무 / 2011년 12월 / 351쪽 / 15,000원



그레이트이스턴 호


1857년 영국의 저명한 공학자인 이점바드 킹던 브루넬은 런던 동부에 있는 네이피어 조선소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했다. 그의 뒤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배, 그 시대의 레비아단(바다를 혼돈에 빠뜨리는 신화적인 바다뱀)이라고 할 만한 그레이트이스턴 호의 육중하고 검은 선체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레이트이스턴호는 그때까지 인간이 제작한 가장 거대한 동체였고 대영제국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당시 브루넬이 꿈꾼 것은 거대한 증기선이었다. 그의 거함은 길이 213미터, 너비 36.5미터, 깊이 16.6미터에 달하는 규모였다. 8천 마력 엔진이 동력을 공급하고, 6킬로미터에 달하는 돛이 6개의 돛대와 다섯 개의 굴뚝에 걸린 거대한 배였다.



1852년 봄 브루넬은 조선기사였던 존 스콜 러셀과 함께 선박건조를 위한 회사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불길한 징조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853년 러셀의 조선소에서 불이 났다. 피해 규모는 14만 파운드에 달했다. 또한 러셀의 조선소는 선박건조를 진행하기에는 너무 규모가 작았다. 결국 러셀은 인접한 네이피어 조선소를 빌려야 했다. 1854년 선체 건조작업을 시작할 때 영국은 크림전쟁에 돌입했다. 군수물자 공급으로 인해 철재 가격이 급등했다. 러셀은 브루넬과 다른 임원들 몰래 조선소를 저당 잡히고 선박건조를 계속했다. 재정이 위태위태한 상황에서도 강과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하고 어두운 형체는 서서히 세워지고 있었다.



브루넬이 구상했던 선체 디자인 중 가장 혁신적인 부분은 선체의 하부 및 측면을 두 층의 외판으로 만드는 구조인 '이중선체'였다. 선체에는 강도를 높이기 위해 격벽(선내의 구획을 형태화하는 칸막이 벽)이 설치되었다. 1천 명 이상의 리벳공과 조선공이 거대한 선체 건조작업에 참가했다. 많은 아이들이 고용되어 금속을 두드려 형체 만드는 일을 했다. 아이들은 주로 어른이 들어가 일하기엔 공간이 좁은 이중선체 작업에 투입되었다. 이중선체의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 일하다가 한 순간의 부주의로 손이나 팔, 목숨을 잃는 경우가 발생했다. 리벳공과 그의 조수 소년이 사고로 선체의 어느 구역에 산 채로 묻혔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1854년 은행은 러셀에게 더 이상 신용대출을 해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거함을 진수하는 방법을 놓고도 갈등이 빚어졌다. 길이 213미터의 장대한 배를 옆에서 밀어 강으로 띄우려면 문제점이 많아 보였다. 러셀은 재정적으로 파산했고 선체작업은 4분의 1밖에 진행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브루넬은 자신의 작업이 결실을 맺게 하려고 고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는 은행이 조선소를 장악하기 전에 거함을 진수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1857년 11월 드디어 진수작업이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진행된 진수작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 달 동안 실패를 거듭한 끝에 브루넬은 강 위의 예인선만으로는 역부족이고 배를 강으로 밀어줄 더 큰 동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혼자서 세상의 비판에 맞서면서 배를 진수시키는 데 몰두했다.



1858년 1월 마침내 거함의 진수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건조과정에서 이 배가 집어삼킨 돈은 무려 73만 2천 파운드에 달했다. 더 큰 손실은 브루넬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이었다. 1859년 9월 브루넬은 거함의 처녀항해를 준비하던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그레이트이스턴 호는 브루넬 없이 처녀항해를 하게 되었다. 문제는 배를 운항하는 책임자들이 브루넬이 설계한 혁신적인 장치들에 대해 익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시험 항해 도중 그레이트이스턴 호에서 큰 굉음이 나면서 압력을 받은 앞쪽 굴뚝이 확 비틀리더니 거대한 증기구름을 동반한 채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갑판 일부분이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연회실의 화려함은 순식간에 폭발의 재앙으로 변했다. 이 사고로 열두 명이 부상했고 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브루넬은 자신이 사랑하는 그레이트이스턴 호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한 지 6일 뒤에 숨을 거두었다.



1860년 6월 그레이트이스턴 호는 뉴욕으로 처녀항해를 떠났다. 이 항해에서 이 배는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했다. 파도의 골보다 더 긴 이중선체와 가로세로 격벽 덕분이었다. 하지만 불행은 또 찾아왔다. 1861년 9월 그레이트이스턴 호는 리버풀에서 강한 바람과 거센 파도를 만나 침몰 일보 직전까지 가는 사고를 당하였다. 1862년 여름에는 항해 도중 암초에 부딪쳐 바닥이 갈라지는 사고를 당했다. 일련의 사고로 회사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이후에도 배는 대서양을 세 차례 더 오갔지만 손실만 누적될 뿐이었다. 이후 경매를 거쳐 놀이공원으로 사용되던 그레이트이스턴 호는 1888년 고철 처리장으로 끌려가 철거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벨록 등대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의 포스만은 북해의 사나운 폭풍우를 피하려는 선박들에게 항상 안전한 피난처가 되었다. 그러나 포스만으로 진입하는 길목에는 거대한 해저 암초인 벨록이 버티고 있어 매우 위험했다. 수세기 동안 벨록은 해수면 몇 미터 아래 숨어 항해 중인 선박을 기다렸다가 수많은 인명과 선박을 앗아갔다. 18세기 중반 해상운송이 활발해지면서 선박들이 벨록과 충돌하는 사고가 빈번해지자 벨록에 경고등을 설치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물에 잠겨 있는 바다의 암초 위에 어떻게 경고등을 설치해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이처럼 불가능한 것을 꿈꿔온 사나이가 있었다. 로버트 스티븐슨이었다. 그는 암초에 등대를 세워 포스만을 안전한 정박지로 만들고 싶었다. 1799년 폭풍우로 포스만 일대에 있던 선박 70척이 침몰한 것을 계기로 벨록에 등대를 세워야 한다는 요청이 거세졌고, 이를 알게 된 스티븐슨은 등대위원회에 자신의 계획을 제안했다. 벨록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봉화 형태의 등대를 짓는다는 계획이었다. 위원회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스티븐슨은 직접 벨록으로 가서 실측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썰물 때 노출되는 구역의 면적이 길이 75미터, 폭 40미터로 등대를 세우기 충분한 공간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잔잔한 날씨에도 암초 주변의 파도가 매우 사나웠던 것이다. 스티븐슨은 벨록의 환경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엄청나게 튼튼한 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가장 높은 파도보다 더 높은 단단한 건조물을 짓기로 하였다.



오랜 설득 끝에 1806년 등대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스티븐슨은 1807년 5월 등대 건설을 시작했다. 첫 번째 난관은 노동인력을 벨록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그는 인부들이 암초로부터 안전한 거리에 정박한 배에서 생활하다가 암초 위에 임시 막사를 세워 그곳에서 지내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 인부들은 암초에 54개의 구멍을 낸 후 구멍마다 철제 지지대를 끼운 다음 철제 지지대 윗부분을 여섯 개의 15미터짜리 버팀목에 대갈못으로 고정했다. 이들 버팀대들이 임시 막사의 핵심 골조를 이루었다. 스티븐슨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겨울이 오기 전에 임시 막사를 완성하였다.



다음 해인 1808년 스티븐슨은 벨록 한가운데 등대 기초를 구축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60명의 인부가 암초 위에서 북적이며 일을 했다. 고요한 바다와 따뜻한 날씨 덕분에 인부들은 암초를 제때 도려낼 수 있었다. 7월 중순까지 60센티미터 깊이의 기초가 만들어졌고 암초 바닥에 18개의 다듬은 돌을 끼우자 바닥이 평평해졌다. 그 중 가장 큰 주춧돌에 1808년이라고 새겼고 의식을 치르며 제자리에 끼웠다. 암초 표면 전체가 매끄러워지자 등대 건설이 시작되었다. 8월 중순 123개의 맞물린 각석으로 이루어진 첫 번째 층이 세워졌다. 2주일 뒤 두 번째 층이 올라갔고, 9월 들어 세 번째 층이 세워지자 등대의 높이는 1미터가 되었다.

겨울 동안 스티븐슨은 등대의 본체를 이룰 최적의 화강암을 찾았다. 돌을 옮기는 작업은 복잡했고 많은 기술이 필요했다. 그는 선박과 베이시라는 이름의 말 한 필을 사용하여 2,835개의 돌을 사업장에게 암초까지 날랐다. 1809년 6월 등대는 3.6미터 높이까지 세워졌다. 7월 중순 등대는 밀물에도 잠기지 않게 되었으며, 8월 초 등대 높이는 7미터가 되었다. 성난 바다는 끊임없이 인부들을 괴롭혔지만 그들은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해 시즌 작업을 마무리할 때쯤 등대는 밀물보다 5미터 이상 높게 세워졌다.



1810년 5월 다시 작업이 시작되었다. 6월이 되자 등대는 웅장한 만곡을 띠고 19.5미터 높이로 섰다. 7월 21일에는 말 베이시가 마지막 돌을 항구로 끌고 왔다. 7월 말에 스티븐슨은 마지막 돌을 열아홉 번째 층에 놓았다. 쪽빛 하늘과 잔잔한 바다가 그를 둘러쌌고 인부들은 환호했다. 1811년 2월 1일 벨록의 어둠은 완전히 사라졌다. 스티븐슨과 인부들이 목숨을 걸고 이루려 했던 모든 것이 찬란한 빛줄기 속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등대가 완성된 것이다. 등대는 난공불락의 암초에 우뚝 서서 암초의 파괴력을 잠재웠다. 오늘날까지 벨록 등대는 북해에서 찬연히 빛나고 있다. 벨록 등대는 현존하는 가장 오랜 연안 등대다.



브루클린 다리


이스트 강은 미국의 두 도시 뉴욕과 브루클린 사이의 장벽이었다. 서쪽 기슭에 있는 맨해튼의 뉴욕과 동쪽에 있는 브루클린 사이에 흐르는 이스트 강은 조수 해협으로, 너비가 536미터인 바다의 만이다. 해협의 조수는 매우 빠른데 강바닥의 가파른 언덕과 골짜기로 인해 생기는 소용돌이와 해류 탓에 더욱 위험천만했다. 1853년 겨울 토목공학자인 존 어거스트 뢰블링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현수교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뉴욕과 브루클린 사이의 이스트 강에 다리를 놓기로 한 것이다. 그는 주탑 사이의 거리가 487미터에 달하는 현수교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는 고딕 양식의 주탑을 구상했는데, 주탑이 약 24미터 폭의 무게를 감당하도록 도로에서 주탑 꼭대기까지, 그리고 주탑 꼭대기에서 도로까지 오르내리는 케이블을 팽팽하게 설계하였다. 하지만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브루클린과 뉴욕의 정치인들은 그의 계획에 회의적이었다. 현수교는 과거 실패한 경우가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다.



1866년 겨울 이스트 강이 얼어 몇 주 동안 연락선 통행이 막히자 다리를 건설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졌고, 1867년 민간자본으로 다리를 세우기 위해 뉴욕브리지컴퍼니를 창설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책임 토목기사로 임명된 뢰블링은 현수교가 사나운 강풍에 견딜 수 있도록 현수교 바닥 전 구간에 걸쳐 여섯 개의 철제 트러스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그는 케이블은 철이 아니라 강철을 사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것은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강철이 그처럼 거대한 프로젝트에 사용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1869년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뢰블링은 63세였지만 열정적이고 강인했다. 하지만 1869년 6월 그는 아들과 함께 주탑을 세울 지점을 물색하다가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뢰블링이 죽자 그의 아들이 워싱턴 뢰블링이 새로운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워싱턴 뢰블링의 뢰블링의 첫번째 임무는 육중한 주탑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배운 신기술인 공기잠함공법을 사용했다. 잠함은 인부들이 젖지 않고 강 밑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다. 브루클린 잠함은 폭이 51미터, 길이가 31미터에 달하는 엄청나게 큰 구조물이었다. 100명의 인부가 잠함의 깊고 습한 지하세계에서 8시간씩 교대로 일했다. 그들은 바위를 깨고 악취 나는 물질을 강바닥에서 걷어냈다.



잠함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고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871년 주탑의 토대가 완성되었다. 언론은 위험이 도사리는 물밑 지하세계에서 이루어진 그들의 노력을 영광스런 신화로 다루었다. 다음 단계는 뉴욕 쪽 주탑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었다. 뉴욕 쪽은 수심이 깊었기 때문에 잠함병 환자들이 매일 생겨났다. 뢰블링도 잠함병에 걸렸다. 고통스런 작업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우여곡절 끝에 주탑의 기초를 만든 다음에는 주탑을 건설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뉴욕 쪽 주탑에는 9만 톤의 화강암과 석회석이 동원되었다. 높은 곳에서 작업이 이루어지다 보니 사고가 빈발했다. 주탑은 계속 솟아올라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했다.



1873년에는 정착장치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강 양편에서 각각 네 개의 케이블을 팽팽하게 지탱하는 높이 27미터, 폭 36미터, 길이 약 39미터의 석조 구조물을 말한다. 1875년 브루클린 주탑이 완성되었고, 1876년 두 개의 정착장치들이 모두 완성되었다. 이때 뢰블링은 잠함병의 후유증으로 병상에 누워있었다. 그는 아내 에밀리를 통해 다리 건설을 원격 지휘했다. 1876년 여름 두 주탑과 정착장치가 완성되었고, 철선을 설치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1877년 12월 진입로의 일부인 아치 하나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고, 1878년 6월 케이블 가닥을 붙잡는 로프가 끊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일련의 사고로 다리의 안전 문제에 논란이 일었고 건설자금 조달에도 곤란이 생겼지만 작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다리 건설을 둘러싸고 정치적 방해도 있었다. 브루클린 시장 세스 로우가 뢰블링의 해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뉴욕브리지컴퍼니 이사회는 뢰블링을 계속 신임하였고, 1893년 5월 24일 마침내 다리가 완성되어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이사회를 대표해 연설한 윌리엄 킹슬리는 선언했다. "이 다리는 언제까지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것입니다. 바로 뢰블링이라는 이름입니다." 다리가 완성되자 뉴욕과 온 미국이 브루클린 다리로 인해 황홀해 했다. 그들은 미국 기업의 대담성, 그리고 영웅주의와 사랑에 빠졌다. 건설하는 데 14년 걸린 이 대교는 인부 2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존 뢰블링은 생명과 맞바꾸었고 아들 워싱턴 뢰블링은 그늘진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존 뢰블링이 바랬던 대로 다리는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커다란 승리의 상징으로 서 있다.



런던 하수도


1831년 영국 런던에서는 콜레라가 유행하여 6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를 계기로 사람들은 도시의 처참한 비위생적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세기 초,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면서 런던 인구는 250만 명으로 치솟았다. 가난한 가족들은 한 평도 안되는 단칸방에서 8~9명이 생활했다. 그들은 방 한 칸에서 요리하고, 씻고, 자고, 용변을 보았기 때문에 인구가 증가할수록 악취도 더해졌다. 그들의 주거지에는 오물이 쌓이기 시작했고 내용물들이 뜰이나 마당에 흘러넘쳤다. 인구가 증가하고 오물통이 넘치면서 오물이 낡은 하수도로 흘러들어 템스 강까지 이르렀다. 런던은 흘러넘치는 오물통과 무계획적인 하수도 체계로 몸살을 앓았다.



콜레라는 1853년 다시 찾아왔고 수도권사업추진위원회의 책임 토목기사인 바잘게트가 잘못된 하수도 연결망을 근대적 시스템으로 탈바꿈시킬 임무를 맡았다. 그는 수백만 갤런의 오물을 도시에서 치울 방법을 찾아야 할 뿐 아니라 250만 주민에게 최소한의 혼란만 야기하면서 임무를 완수해야만 했다. 이것은 너무 방대한 토목공사여서 단번에 해치워야 했고, 그러면서도 수백 년 동안 지속될 수 있도록 잘 만들어야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현존하는 모든 개울과 배수관은 모두 강 양쪽으로 흘러 내려갔다. 해야 할 일은 강 양쪽에 있는 다양한 높이의 주요 하수도를 옮겨 그 개울들을 차집(막아서 모으는 것)하는 것이다."



이 사업은 총 1,600킬로미터가 넘는 가로하수도와 130킬로미터에 걸친 주요 차집관거가 280킬로미터를 걸쳐 뻗어나가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바잘게트가 설계한 가로하수도의 단면은 달걀 형태였다. 이 독창적인 형태는 최적의 흐름을 제공할 뿐 아니라 하수도에 자정 기능이 있음을 뜻했다. 중요한 점은 이 타원형의 설계가 땅 위 도시의 무게를 견디는 데 필요한 내구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점은 런던 거리가 하수도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대중의 공포심을 누그러뜨리는 데 필요한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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