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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세계사

조지프 커민스 지음 | 시그마북스


잔혹한 세계사

조지프 커민스 지음

시그마북스 / 2011년 12월 / 410쪽 / 16,800원



카르타고는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8세기, 아프리카대륙 북쪽 해안을 따라 항해하던 페니키아인이 건설한 나라다. 이곳에 정착한 페니키아인은 세력을 넓히는 일에 몰두했다. 로마인은 이러한 카르타고인을 무참히 죽임으로써 영속해 나갈 수 있었다. 대량학살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 벤 키어넌은 이 일을 '역사상 최초의 대량학살'이라 칭했다. 로마는 기원전 750년, 테베레 강 연안을 따라 생긴 여러 무역로가 한데 합쳐지는 지점에 건립됐다. 로마인들 역시 세력을 확대하려는 강한 충동이 있었다. 기원전 4세기가 끝날 무렵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정복했다. 그리고 카르타고가 이베리아 반도 및 시실리에 이르는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면서 두 나라는 처음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포에니 전쟁이라 불린다. 포에니 전쟁의 무대는 지중해 연안의 광대한 지역이었다. 고대 역사에서는 가장 오래 지속된 전쟁이자 수백만 명의 병사가 동원된 가장 큰 규모의 갈등으로 기록된 전쟁이다.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섬의 주도(州都) 메사나를 점령하면서 시작됐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이 같은 움직임을 이탈리아 반도 침공을 위한 전략적인 위치 선점으로 해석했다. 이렇게 시작된 제1차 포에니 전쟁은 해상 전투를 중심으로 이어졌고 로마의 승리로 끝이 났다. 기원전 241년, 로마는 시칠리아 섬 전체를 다시 점령한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전혀 다른 형태로 전개됐다. 에스파냐에 대한 카르타고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이를 탐탁해하지 않던 로마는 일단 카르타고와 협상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그 당시 어린 나이에 에스파냐 총독을 맡고 있던 한니발 바르카와 벌였던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가 바로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장으로 꼽히는 한니발 장군이다.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 각국에서 모집한 용병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했다. 이후 로마는 계속된 전투에서 패배에 패배를 거듭했고, 한니발의 부대는 이탈리아 반도 중심부까지 진격했다. 승세가 최고조에 이른 기원전 216년, 한니발은 칸나에 전투에서 단 하루 동안 5만 명에 달하는 로마군을 대파했다. 로마로서는 사상 최대의 패배였다. 카르타고인들이 평원에 무력하게 쓰러져 있던 로마인의 힘줄을 자르고는 다음 날 틈날 때 다시 찾아와 죽인 일은 로마인의 마음속 깊이 잊을 수 없는 치욕으로 새겨졌다.



그러나 카르타고 원로원의 불안정하던 지원이 마침내 끊어지자 한니발도 결국 아프리카 북부로 후퇴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한니발은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패하고 만다. 카르타고가 평화협정을 제안하자 로마는 이를 수용했지만 대신 가혹한 조건을 내건다. 향후 50년간 로마에 엄청난 금액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카르타고가 소유하고 있던 식민지 영유권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그러고도 얼마간 번성했다. 전쟁 후 더 이상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지 않아도 된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기원전 153년이 되자 카르타고는 로마에 전쟁 배상금을 모두 갚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무역 국가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누미디아의 마시니사 왕이 카르타고 서쪽부터 영토를 서서히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카르타고는 로마에 중재를 간청했다. 이에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가 이끄는 로마 측 대표단이 카르타고에 도착했다. 당시 81세였던 카토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국가 재정을 부적절하게 사용했다고 끈질기게 주장하여 결국 그가 자살하도록 만든 사악한 연설가였다.



카르타고에 가득한 평화와 번영을 본 카토는 격분했다. 로마로 돌아온 카토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해 동료 의원들에게 배로 3일이면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이웃국가 카르타고는 부유하며 로마에 해악을 끼치는 나라라고 역설했다. 이후 그는 연설을 할 때마다 "카르타고는 반드시 파괴되어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결국 기원전 149년, 로마는 아프리카 북부를 공격해 푼 항구를 손에 넣는다. 카르타고는 즉시 로마에 항복했고 로마 측이 내건 가혹한 조건을 수용했다. 창과 검, 포위 공격용 무기를 포함한 무기 일체를 포기하고 귀족 자제 300명을 포로로 로마에 보낸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로마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마지막 요구를 제시했다. 카르타고인에게 해안 도시를 버리고 해안에서 10마일 떨어진 내륙으로 이주하라는 것이었다. 조상 대대로 상인 혹은 뱃사람으로 살아온 카르타고인들에게 농부가 되라는 의미였다. 동시에 로마는 무덤과 신전만 남기고 카르타고 시내를 철저히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 굴욕적인 조건은 애초부터 카르타고가 수용할 것으로 기대하고 내건 것이 아니었다. 카르타고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르타고 장군 하스드루발은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이미 모든 무기가 로마의 손아귀에 넘어간 뒤였기 때문에 쇠붙이를 찾아 서둘러 새 무기를 만들어야 했다. 신전과 공공건물은 모두 작업장이 되었고 일반 시민들은 밤낮없이 검, 방패, 투창을 생산했다. 여성은 긴 머리를 잘라 투석기에 사용할 줄을 만들어 내놓았다. 노예는 모두 해방되어 전쟁 준비에 힘을 보탰다.



지중해 쪽을 향해 돌출된 낭떠러지 위에 자리 잡은 카르타고의 땅은 좁은 지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도시 외곽은 높은 방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가장 취약하다고 여긴 서쪽 방벽만 해도 높이가 45피트(13.7미터)에 달했다. 로마군은 2년간 이 고대도시를 공격했다. 4만~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온 로마 집정관은 카르타고가 금세 항복할 것이라 자신했다. 그러나 이 자신감은 잘못된 것이었다. 카르타고인은 로마군이 방벽을 기어오를 때마다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공성전이 그렇게 2년 동안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로마 시민은 점차 인내심을 잃어갔다.



마침내 기원전 147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손자로 입양했던 스키피오 에밀리아누스가 로마군을 통솔해 카르타고 공격에 나섰다. 로마군은 그의 지휘 아래 다시 카르타고 방벽을 향해 다가갔다. 로마군은 방어가 허술한 남서쪽 부분에 맹공을 퍼부었다. 드디어 남서쪽 방벽은 무너져 내렸고 로마군은 물밀듯이 몰려 들어갔다. 그리고 곧이어 세상의 종말이 온 것일 거라고 착각할 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로마군은 활활 타오르는 상점들 사이를 돌진했다. 로마군은 억눌렸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카르타고인이라면 남자, 여자, 아이 가릴 것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찌르고 목을 잘라버렸다. 아기는 화염 속에 내던지고 여성들은 한쪽으로 끌고 나와 강간한 후 죽이거나 내장을 도려내 죽였다.



돌계단은 피로 붉게 물들고 피범벅이 되어 미끈거렸다. 로마군은 검을 아래로 내리꽂고 내장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모두를 죽였다. 지붕에 다다르면 긴 나무판을 이어 옆 건물로 건너가서는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며 광란의 살육 행위를 반복했다. 비르사 언덕에는 이제 시내를 쳐부수고 불태우는 소리에 새로운 소음이 추가되어 울려 퍼졌다. 죽임을 당하는 시민들이 악을 쓰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 이 무시무시한 소음은 로마군이 언덕을 따라 올라가며 살육을 저지른 7일 내내 계속 됐다.



스키피오는 마침내 돌무더기와 불에 탄 목재로 가득한 카르타고의 정복자가 되었다. 스키피오는 화려하고 웅장했던 카르타고를 철저히 파괴하라고 명했다. 카르타고에서 얻은 전리품이 가득 실린 첫 번째 선박이 로마에 당도하자 로마는 격렬한 기쁨으로 가득 찼다. 사실 로마가 카르타고를 철저히 파괴한 사건은 기존의 관행과 상충되는 것이었다. 원래 로마는 포로로 잡은 사람들을 로마 시민이 되도록 끌어들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이 고대 문명과 그곳 사람들을 파괴한 로마의 무자비한 행위는 당시 지중해 주변 국가들 중 로마와 유일하게 대등한 세력을 과시한 카르타고라는 가장 큰 라이벌을 단박에 제거해 버리기 위한 것이었다.



피로 질퍽한 바닥을 헤치며 걷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네




1864년 11월 29일 몹시 추웠던 그날 새벽, 샤이엔 족의 한 여성이 어깨를 담요로 잔뜩 감싼 채 천막 밖으로 나왔다. 주변에는 흰색 원뿔 모양 천막이 100채 정도 서 있었다. 모두 추장 블랙 케틀이 이끄는 샤이엔 족 구성원들이 사는 곳이다. 샤이엔 족은 콜로라도 샌드크리크 지역 동계 부락에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저 멀리서 희미하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별다른 경계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웅웅거리는 소리가 이번에는 좀 더 크게 들려왔다. 버펄로 떼가 다가오는 소리라고 생각한 그녀는 마을에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며 기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분명 뭔가 부서지는 소리, 쿵 하고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라이플 총알이 쌩 하고 날아와 그녀가 서 있던 곳 바로 옆 땅바닥에 박혔다. 부족민들이 일제히 천막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했다. 이어 사람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 탄 군사들이 쉴 새 없이 박차를 가하며 쫓아왔다.



그날 그리고 그 다음 날 일어난 일은 미국 서부 개척 시대 백인과 아메리칸 인디언 사이에서 길고도 잔인하게 이어졌던 그 어떤 갈등보다도 야만적이고 흉포했다. 음산하고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고 바닥에 떨어진 그 첫 번째 총알은 콜로라도 제3연대에서 발사한 것이었다. 이어 벌어진 대량학살로 인디언들은 미국 남북전쟁을 겪은 지 채 몇 년 되지도 않아 백인들과 맞서 죽도록 싸워야 했다.



19세기 초 백인들이 총, 말, 위스키와 모피를 교환하고 싶어 무역상을 선두에 세워 처음 모습을 나타냈을 때만 해도 샤이엔 족은 적개심을 품지 않았다. 1851년에는 라라미 요새 조약이 체결되어 샤이엔 족과 아라파호 족이 플랫 지역과 아칸소 사이의 토지 소유권을 법적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1858년, 파이크스 피크 인근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갑자기 금을 캐려는 사람들이 이 지역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금을 캐려는 사람들에 이어 상인, 농부, 학교 교사, 군인들까지 찾아오면서 이 지역은 점점 확장되어 갔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원주민들의 첫 반응은 환영이었다. 아라파호 족 추장 리틀 라벤은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저는 평화를 보존하고 그들의 법과 질서를 지킬 것을 제 신념을 걸고 맹세합니다"라고 말했다. 리틀 라벤은 이어 기자에게 다만 그 땅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소유지라는 사실을 모두가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전하며 백인들에게 바라는 점도 덧붙였다. "그 주변에 너무 오래 머물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허황된 희망이었다. 백인들은 그곳에 계속 머물렀고 원주민 여성 강간이나 절도 같은 범죄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연방 정부는 포트 와이즈에 샤이엔 족과 아라파호 족을 불러 협의회를 개최했다. 1860년, 샤이엔 족 추장인 블랙 케틀과 아라파호 추장 리틀 라벤을 비롯해 두 부족의 중간 부족장들이 이곳에서 모여 앞으로 콜로라도 남동쪽 보호구역에서 생활하고 옛날부터 전해져 온 사냥터 대부분을 양도한다는 데 동의했다. 미국 정부는 그 대가로 각 부족 향후 15년간 매년 1만 5,000달러씩을 제공하고 가축과 농기구를 구입하여 공급하는 한편, 농업 기술을 지도하기로 했다. 또 인디언들에게 한 사람당 40에이커씩 땅을 제공한다는 조건도 덧붙여졌다.



포트 와이즈 조약이 체결되면서 백인과 인디언 사이에 고조되던 긴장은 일시적인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문제는 그런 조건이 실제로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약이 체결된 이후인 1861년 2월, 미국에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콜로라도와 뉴멕시코 지역에서는 남군의 공격에 맞서고자 용맹하게 북군에 합류하는 자원자가 생겨났다. 특히 목사 출신인 존 치빙턴이 이끄는 중대가 뉴멕시코에서 남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협곡에서 적군의 물자 수송기차 전체를 빼앗아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로 존 치빙턴은 영웅이 되어 덴버로 돌아왔다. 그에겐 콜로라도 지역군 대령 직위가 주어졌다.



치빙턴에게 주어진 임무는 남군의 급습으로부터 콜로라도를 지키는 것이었으나 정작 그는 샤이엔 족으로부터 미국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데 관심이 더 많았다. 이 지역에서 세력이 급성장 중이던 백인들 사이에선 아메리칸 원주민들과의 갈등이 점차 큰 문제가 되고 있었는데 그는 백인들 편이었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백인 정착민들 사이에서 샤이엔 족에 대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샤이엔 족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람 머리 가죽이 묶여 있는 긴 창을 쥐고 말을 타고 다닌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는 샤이엔 족이 정착민들에게 어떠한 폭력도 휘두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는 백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샤이엔 족에게 먹을 것이 부족해졌다는 사실이다. 사냥감이던 버펄로는 빠른 속도로 개체수가 줄었고 백인 정착민은 아메리카 원주민 땅으로 점점 많이 유입되고 있었지만 샤이엔 족 보호구역은 마련되지 않았다. 결국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소유한 가축을 급습하기 시작했다. 이를 막기 위해 군대도 조직되었지만 인디언들이 가까이 접근했다는 사실을 감지했을 때는 이미 가축들이 도살된 채 발견된 경우가 태반이었다.



1863년 후반, 존 치빙턴 대령을 비롯한 덴버 정착민들의 귀에 어떤 소문이 들려왔다. 샤이엔 족 수천 명이 이듬해인 1864년 봄 백인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샤이엔 족을 향한 백인들의 격노, 공포, 편집증은 극에 달했다. 치빙턴 대령은 수하의 기병대를 콜로라도에 보내기 시작했다. 끊이지 않는 가축 도난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기병대는 주변을 돌아다니는 원주민 전사를 발견하면 무장해제를 요구했고 이 때문에 소규모 충돌이 이어졌다. 치빙턴은 대원들에게 계속해서 선동적인 명령을 내렸다. "인디언 포로에 대한 명령을 수행하는 데 어떠한 방해요소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식이었다. 치빙턴 대령은 공적인 자리에서도 그 같은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인디언들은 무언가에 복종하지 못하며 어떤 조약이든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콜로라도에서 영원한 평화와 고요함을 누리려면 그들을 죽이는 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샤이엔 족은 외딴 곳에 사는 백인 정착민들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백인들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었다. 백인 군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인디언 수색작전에 나섰고 어디서든 인디언이 눈에 띄기만 하면 죄를 묻지도 않고 죽여 버렸다. 마침내 1864년 9월, 인디언 추장들이 평화를 구하고 나섰다. 그리고 신뢰의 징표로 백인 포로들을 대동하고 덴버로 와서 에반스 콜로라도 주지사와 치빙턴 대령에게 협상을 요청했다. 인디언들은 이제 싸움에 지쳤으며 다른 백인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군대의 보호를 받고 싶다는 입장을 전했다. 이들에게 돌아온 대답은 포트 리옹에서 40마일가량 떨어진 동계 야영지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군대가 필요할 경우 보호해 주겠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양측은 악수를 하고 함께 사진 촬영까지 마친 뒤 헤어졌다. 누가 봐도 우호적이었던 이 회담 이후에도 치빙턴 대령은 샤이엔 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구실만 찾았다. 그리고 에반스 주지사는 결국 연방 정부로부터 단기 복무 군인들로 구성된 연대 조직을 허가받고 필요한 자금도 제공받았다. '제3연대'로 불린 이 연대는 주로 덴버 지역 온갖 게으름뱅이들과 말썽꾼들로 구성되었다. 치빙턴은 이들을 활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치빙턴의 야망과 성격은 이후 이어진 유혈사태를 이끈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는 콜로라도에서 정치적으로 성공하려면 샤이엔 족을 전멸시키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 확신했다. 이 때문에 그는 샤이엔 족이 평화를 위해 직접 찾아왔었다는 사실을 무시하기로 결심하고 1864년 11월 14일, 이들에게 '벌을 내리기 위한' 원정을 떠나기에 이른다. 원정길에는 700명의 군사가 동원됐다. 대부분은 제3연대였고 콜로라도 제1연대 소속 3개 중대도 함께 출발했다. 치빙턴은 샌드크리크를 향해 곧장 나아갔다. 아칸소 강변의 한 야영지에서 잠깐 행군을 멈춘 치빙턴은 동료 장교, 시민들과 저녁식사 자리를 가졌다. 처빙턴은 식사를 마친 후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음, 난 피로 질퍽한 바닥을 헤치며 걷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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