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정운천의 7번째 도전
정운천 지음 | 올림
바보 정운천의 7번째 도전
정운천 지음
올림 / 2011년 12월 / 264쪽 / 13,000원
도전 1_ 고교는 재수, 대학은 삼수1975년 겨울, 나는 고려대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게시판의 명단을 확인하는 순간, 내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75001 정운천'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세 번의 도전 끝에 이루어낸 합격. 그러나 기쁨의 순간은 너무 짧았다. 합격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순간 또 다른 시련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등록금이 없었던 것이다. 314,740원. 쌀 한 가마가 15,000원 하던 시절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든 내 힘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형을 통해 알게 된 '경약산업사'라는 보약회사를 찾아갔다. "스스로 등록금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나는 그곳에서 상무로 재직하고 있는 형님의 친구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내 사정을 들은 상무님은 고맙게도 9,900원 하는 보약 50개를 원가인 3,300원에 외상으로 빌려주었다. 그것을 다 팔면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길로 나는 보약 판매를 시작했다. 친척부터 시작해서 중고등학교 선생님, 선배들, 그리고 이런저런 인연을 통해 알게 된 지인들까지 일일이 찾아다녔다. 등록일까지 한 달, 나는 발이 닳도록 뛰어다녔고, 그런 노력을 하늘이 알아준 것인지, 등록일까지 50개를 모두 팔 수 있었다. 그렇게 등록을 마치고 난 그날 저녁, 나는 쓰러져 사흘을 앓았다. 긴장이 풀리자 몸이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고려대 농업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생활 또한 평탄치 못했다. 1975년 당시 나라는 유신헌법 철폐 시위로 어지러웠다. 학생들이 주축이 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정부는 긴급조치와 함께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그해 11월 나는 군에 입대했다. 훈련소를 거쳐 양구의 백석산 고지에 배치되어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삭풍을 이겨내며 병역의무를 수행했다. 그렇게 3년여의 군생활을 마치고 병장으로 제대하니, 나는 이미 스물다섯의 늙은(?) 복학생이었다.
도전 2_ 땅끝에서 농업에 투신하다군에서 제대해보니 집안은 달라진 게 없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학교 근처에 단칸방을 마련한 나는 복학과 동시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다행히 산학협동재단에서 장학금을 받게 되어 등록금 걱정은 덜었지만, 생활비는 직접 해결해야 했다. 나는 크고 작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없는 시간을 쪼개 공인감정사 시험에 매달렸다. 졸업 후 취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이듬해인 79년 나는 공인감정사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2년 가까이 제대로 영양 섭취도 못하면서 무리하게 생활한 탓에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결국 '폐병 3기'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80년의 5월을 맞은 나는 투쟁에 나서는 동료와 선후배를 보면서도 함께하지 못했다. 온전치 못한 몸도 몸이려니와 홀로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상황이 나의 발목을 붙잡았던 것이다. 그 일은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다. 결국 나는 서울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내려갔다. 진도를 비롯해 완도, 해남, 신안 등 남해안 이곳저곳을 몇 달 동안이나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만난 것이 키위였다. 당시 남해안 일대에는 뉴질랜드에서 수입된 키위 묘목이 보급되고 있었다. 1974년부터 진행된 시험 재배가 성공하자 수입상들이 앞다투어 묘목 보급에 나섰던 것이다.
내가 키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 3학년이던 79년부터였다. 당시 나는 농산물 마케팅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자료를 모으던 중에 그해 뉴질랜드에서 열린 국제과수세미나 관련 자료를 손에 넣게 되었다. 세미나에 참석한 학자들은 2000년대에는 무공해 친환경 재배로 수확한, 영양이 풍부한 과일이 식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대표적인 과일로 키위를 꼽았다. 그러나 10ㆍ26과 5ㆍ18로 어수선한 시국이 이어지고 급기야 전국의 대학에 4개월의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그 와중에 키위에 대한 관심도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남해안을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키위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키위와 직접적인 인연을 맺어준 사람은 둘째 형이었다. 형은 당시 T농산이라는 무역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회사에서도 키위 묘목을 수입 판매하고 있었다. 형은 내게 농학도로서 농촌 실정도 파악할 겸 함께 일해보자고 제안했다. 나는 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형을 도와 묘목 보급을 시작했다.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키위를 소개하고 주문을 받아 묘목을 공급했다. 식재한 농가에는 재배기술과 관리요령을 교육했다. 농학도로서 자부심을 느끼며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채 3년도 되지 않아 벽에 부딪혔다. 과당경쟁 때문이었다. 경쟁이 치열해지자 일부 수입상들이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면 재배가 어렵다는 키위의 특성은 생각지도 않고, 충남은 물론 경기도 지역에까지 마구잡이로 묘목을 팔았다. 농민들 또한 재배 조건은 따져보지도 않고 주당 6,000원씩 하는 비싼 묘목을 사들여 심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묘목이 얼어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큰 피해를 본 농민들이 집단으로 민원을 제기했고, 이는 결국 사회문제로 확대되었다.
사태가 확산되자 다급해진 정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역을 키위 재배 부적합 지역으로 판정했고, '키위는 우리 환경에 맞지 않으니 업자에게 현혹되지 말라'는 공문을 일선 시ㆍ군에 내려보냈다. 그러자 더 이상 묘목 판매가 어렵다고 판단한 수입상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내가 일하고 있던 T농산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82년 장흥군 관산 지역에 공급한 7,000주가 불량 묘목으로 밝혀져 농민들이 집단 반발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1년생 묘목을 2년생으로 판매한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영업부장으로 현장에서 농민을 상대한 형이 곤경에 처했고, T농산에서는 모든 책임을 형에게 뒤집어씌워 파면시켜버렸다. 형을 도와 묘목을 보급한 나도 농민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 후 형은 그동안 보급한 묘목의 사후관리와 독자적인 보급을 위해 삼부무역을 설립했고, 나도 형의 회사에 합류했다. 83년 1월부터 나는 다시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녔다. 농민들을 모아 세미나를 열고 현장교육을 실시했다. 키위야말로 남해안 지역에 가장 적합한 과수임을 설명하고 묘목 주문을 받았다. 그 결과 3만 주의 주문량을 확보했다. 수입을 위해 자금이 필요했지만 새로 설립된 회사이다 보니 자금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서서 서울에 있는 세 사람의 지인에게 1억 원을 빌렸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가 독립하는 바람에 시장을 잃은 T농산에서 방해공작을 벌인 것이다. T농산은 우리가 단체주문을 받아놓은 농협 등을 찾아다니며 저가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농민들을 모아 세미나도 열고 현장교육도 했다. 그만큼 비용 투자가 많았다. 반면 T농산은 우리가 주문받아 놓은 곳만 찾아다니니 다른 비용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묘목과 차별화하기 위해 3년생 묘목을 수입했는데, 뉴질랜드에서 보낸 묘목은 3년생이었지만, 조직배양을 통해 3년생과 같은 상태로 육성한 묘목이라 나이테 상으로는 3년생이 아니었다. T농산은 이 점도 문제 삼았다. 그러자 단체주문을 한 농협에서 계약을 파기하기 시작했고, 한번 시작된 파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게다가 사기꾼으로 고발당해 도 경찰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결국 수입 묘목은 고스란히 재고로 남았고, 회사는 문을 닫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교통사고까지 당했다. 38일간의 병상생활은 나 자신을 뒤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빚은 조금씩 갚아나가면 된다. 그러니 퇴원하는 대로 서울로 올라가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나와 고락을 함께한 농민들, 나를 믿고 묘목을 구입해 심은 농민들이었다. 그들을 내버려두고 나만 혼자 빠져나가자니 양심에 걸렸다.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내가 직접 키위를 재배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에서는 부적합하다고 판정했지만, 남해안의 소득작목으로 키위만한 것이 없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검증을 거치기로 했다. 먼저 3년 전 내게서 묘목을 구입해 심은 농민을 한 분 한 분 찾아다녔다. 성목이 되어가는 나무에는 몇 개씩 열매가 달려 있었다. 그것들을 모아 1,000여 개를 마련했다. 그것을 가지고 용산의 청과시장을 찾았다. 그곳에서 10년, 20년씩 과일을 취급한 청과상인들을 만나 시식을 권했다. 처음 보는 과일을 신중하게 맛본 상인들은 "맛이 괜찮다. 충분히 팔릴 수 있다"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조선호텔과 타워호텔의 주방장을 찾아갔다. 그들에게도 열매를 건네주고 국내에서 생산한 것이니 수입 키위와 맛을 비교해달라고 부탁했다. 주방장은 천천히 음미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수입산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반응을 보고 나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묘목을 보급하면서 재배 적지라고 생각했던 곳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결국 해남을 선택했다. 해남에 자리를 잡은 나는 곧바로 농장 조성에 착수했다. 임대한 땅은 말 그대로 돌밭이었다. 나는 인근에 사는 청년 두세 명을 고용해 함께 농장을 일궜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돌과 씨름하는 나날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농장 조성보다 더 힘든 것은 주변 농민들과의 관계였다. 정부에서 부적합 판정을 내린 키위를 재배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농민들은 더욱 나를 경계하고 백안시했다.
다른 일도 그렇지만 농업은 특히 혼자서 할 수 없다. 농장 조성만큼이나 농민들과의 신뢰 구축이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농장 한쪽에 100여 평의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그중 50평은 농민교육장을 만들고 나머지 50평을 활용해 숙소와 사무실을 만들어, 비닐하우스 안에서 먹고 자며 농민들과 동고동락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5년 5개월을 비닐하우스 천막 안에서 동고동락하는 동안 농민들과 진정으로 하나가 되었고, 농민들의 뜻과 힘을 한곳으로 모을 수 있었다.
한편 해남으로 내려와 키위 재배를 시작한 뒤에도 빚은 언제나 가슴 한 켠에 큰 짐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수입 묘목은 너무 비쌌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는 길은 국내에서 묘목을 생산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중 김기선이라는 사람이 키위의 실생묘를 개발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실생묘는 씨앗을 뿌려 1년 동안 키운 묘로, 거기에 헤이워드라는 품종을 접목시키면 수입산을 대체할 묘목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정부에서 부적합 판정을 내린 뒤라 판매가 어려워지자 저렴한 가격에 처분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김 씨를 찾아가 3만 주를 구입했고, 그 실생묘를 대한종묘 장형태 사장이 저렴한 가격에 묘목 생산을 맡아주었다. 84년에 시작해 85년에는 2만 5,000주의 묘목을 생산했다. 국내 환경에 맞춰 생산된 건강한 묘목이었다. 수입 묘목과 비교해 가격 경쟁력도 높았다. 나는 재배를 희망하는 농가에 묘목을 판매했다. 수입 묘목보다 저렴한 가격에 판매해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국산 묘목 개발이 가져온 수확이었다. 수중에 돈이 모이는 대로 나는 빚 청산에 나섰다. 파산선고 3년째인 86년, 먼저 최 선배에게 빌린 돈 3,000만 원과 3년 동안의 이자 2,700만 원을 갚았다. 이를 시작으로 87년까지 빌린 돈 1억 원과 이자를 모두 갚을 수 있었다.
도전 3_ 위기는 새로운 기회신문을 보고 있던 나는 눈앞이 아찔했다. 1989년 4월 8일, 정부는 농산물 시장개방 예시품목을 발표했다. 그런데 거기에 키위가 포함되어 있었다. 키위는 80년대 초에 식재한 묘목이 자라나 본격적인 수확을 막 시작한 걸음마 단계였다. 그런데 시장개방이라니? 국내산 키위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은 미미해 미국이나 뉴질랜드 키위와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먼저 생산원가에서 차이가 크다. 뉴질랜드나 미국의 생산원가가 킬로그램당 500~600원인 데 비해 우리는 1,500원 선이다. 그러니 키위를 개방품목에 포함시키고 전환작목으로 선정한 정부의 정책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부의 입장이었다. 재배 농민에게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해남에 정착한 이후 나는 마음이 울적하거나 답답할 때면 가까운 울돌목을 찾았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적을 물리친 명량대첩의 격전지가 바로 이곳, 울돌목이었다. 그 때문일까? 진도대교 위에 서서 울돌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답답한 가슴이 탁 트이며 위안을 받곤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법을 찾지 못한 나는 또다시 울돌목을 찾았다. 진도대교의 난간을 붙잡고 서서 세차게 굽이치는 울돌목의 물결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그래, 사즉생이다. 장군에게 12척의 배가 남아 있었다면 내게는 동고동락하는 300여 농민 동지들이 있다. 사즉생의 각오로 힘을 하나로 모으면 되지 않겠는가!'
장군에게서 교훈을 얻은 나는 새롭게 각오를 다졌다. 신뢰를 통해 농민들을 하나로 모으고 사즉생의 정신으로 맞서 끝까지 싸우자고 스스로를 무장했다. 그런 다음 키위를 재배하는 도내 각 지역의 대표농민들에게 연락해서 회합의 자리를 마련했다. 1989년 5월 29일 전남 지역 대표 농민 400여 명이 해남 군민회관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결성된 수입개방대책위원회에서 위원장으로 추대된 나는 대책위의 활동 방향으로 '주체적 창조운동'을 제시했다. 키위는 기껏해야 20억 원대 시장이었다. '시장개방을 철회하라'며 반대투쟁을 벌인다고 해서 이미 발표된 정부 정책이 바뀔 리 없었다.
그러한 판단에서 나는 '주체적 창조운동'을 제시했다. 재배 농민 스스로 주체가 되어 외국 키위와 맞서 싸우자는 것이었다. 정부에는 그런 우리의 노력을 지원하고 뒷받침해달라고 요구하자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 3개항의 자체 결의안을 채택하는 한편, 정부에 대한 5개항의 건의사항을 정리했다. 첫째가 작목 전환을 백지화하고, 오히려 수출전략품목으로 선정해달라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관정시설, 스프링클러, 저온창고 등 품질 향상을 위한 시설 지원 확대와 전문기술 지도를 건의했다.
나는 이 건의사항에 대해 농민들의 서명을 받았다. 그런 다음 나는 연대서명서를 가지고 농수산부를 찾아가 담당자를 만나 전달하고, 농민들의 뜻을 수렴해 정책에 반영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얼마 후 내려온 답변서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다시 진정서를 보내 분명한 답변을 촉구했지만 매한가지였다. 나는 장관과의 면담을 추진했다. 장관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세 번이나 신청했지만 세 번 모두 거절당했다.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을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김식 장관이 전남 강진에 지역구를 둔 지구당위원장이라는 점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강진에도 200곳이 넘는 키위 농가가 있었다. 정치인에게는 표보다 중요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 분들의 표를 부각시키며 지구당을 통해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한 전략이 주효해 마침내 장관과 대면할 수 있었다.
장관과의 만남에서 나는 사즉생의 각오로 나선 재배 농민들의 뜻과 의지를 전달하고, 건의서 내용대로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농민들이 스스로 힘을 키워 시장개방을 극복하겠다고 하는데, 도와주지 않을 장관이 있겠는가? 장관은 그 자리에서 담당국장을 불러 모든 것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장관의 지시는 즉각적인 효과로 나타났다. 두 달이 지나지 않아 키위는 성장작목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991년 1월, 키위는 농촌진흥청에서 선정한 13개 수출전략품목에 포함되었다. 수입개방대책위원회에서는 대책위를 확대해 전국키위농민협회를 창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