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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사용 설명서

다니엘 벤사이드 지음 | 에코리브르


마르크스 사용 설명서

다니엘 벤사이드 지음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 279쪽 / 14,000원



어떻게 하면 수염 기른 공산주의자가 되는가




1818년 5월 5일 독일 트리어 시에 있는 유태계 마르크스 집안에서 건장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판사였다. 어렸을 때부터 마르크스는 김나지움 시절에 쓴 「직업선택에 관한 젊은이의 성찰」이라는 논문에서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냈다. 1835년 대학생이 된 마르크스는 술집과 시인 클럽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열정적인 데다 논쟁을 좋아하고 유목민 기질이 농후하던 그는 빚 때문에 소송을 당하는가 하면, 결투와 철학은 양립 불가능하다는 아버지의 잔소리에 결투를 단행하기도 하였다. 1938년 마르크스는 본을 떠나 베를린으로 간다. 그리고 1941년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다. 당시 독일은 반동적이고 편협한 신앙의 틀을 강조하는 국가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대학의 미래를 암울하게 생각한 지식인들은 언론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르크스도 23세의 나이에 《라인 신문》 기자로 데뷔했다. 그가 언론 자유에 관해 쓴 최초의 기사는 굉장한 파문을 일으켰다. 1943년 《라인 신문》이 검열에 걸려 발행이 금지되자 마르크스는 고국을 등지기로 결심하고 파리로 망명길에 오른다.



1843~1845년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독일 이민 노동자 집단과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 집단과 만난다. 그곳에서 공산주의자임을 자처했던 엥겔스를 만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교류하면서 마르크스의 철학적, 정치적 변신은 속도를 더한다.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 역사적 창의성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를 실험실에서 제작한 "학문과 사회적 법칙"으로 대체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미래를 설계하면서 사회적 활동을 자신들 고유의 창의성으로, 해방의 역사적 조건을 환상에 불과한 조건들로 각각 대체했다. 프롤레타리아를 하나의 계급으로서 점진적이고 자발적으로 조직하는 대신 하나부터 열까지 그들이 만들어낸 조각을 통해 조작한 사회로 대체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동조하는 공산주의는 '계획서에 담긴 상상 속의 낙원'이 아니라 '기존 질서를 제거하는 실재적인 운동'이었다. 『1844년 파리 초고』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사유재산제 폐지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이라고 정의했다. 1947년 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민자가 주축이 된 '정의로운 자들의 연맹'에 가입했다. 그해 6월 런던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연맹 이름은 '공산주의자 연맹'으로 변경되었고,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연맹의 구호는 '모든 국가의 프롤레타리아들이여, 단결하라'로 바뀌었다. 11월에 개최된 연맹의 두 번째 총회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선언서 작성 임무를 맡았다. 1848년 2월 『공산당 선언』이 인쇄될 무렵, 파리에서는 혁명이 한창이었다. 바야흐로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 도처를 휘젓고 다니는 시절이었다. 베를린의 애송이였던 마르크스는 이제 턱수염을 더부룩하게 기른 건장한 장년이 되었다. 게다가 그는 공산주의자였다.



왜 신은 죽었나




『기독교의 본질』에서 포이어바흐는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포이어바흐는 "철학은 사상 속에서 변형되고 발전해 온 종교에 불과하다."는 점을 입증해 보였다. 또한 그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관계를 이론의 뼈대로 이루는 원칙으로 삼음으로써 그는 진정한 유물론을 창시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란 이 세계 밖에 쭈그리고 앉은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생산하고 교환하고 투쟁하고 사랑하는 사회 속에서의 인간을 뜻한다.



마르크스는 1844년부터 이미 신앙과 인위적 낙원의 탄생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조건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민중을 위한 행복이라는 환상으로서의 종교의 폐지는 민중의 실재적인 행복을 위한 필연적인 요구다. 민중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더 이상 환상을 품지 않도록 종용하는 것은 민중으로 하여금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단념하도록 종용하는 것이다." 종교비판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제한적인 목표를 추구한다. 그 목표는 인간으로부터 환상을 제거한다. 인간의 눈꺼풀을 덮고 있는 콩깍지를 걷어냄으로써 실망한 인간, 비로소 이성에 도달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을 모색하도록 하는 것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의 내세가 사라지면 속세의 진리를 확립하고 신격화되지 않은 세속적인 형태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소외를 밝혀내는 일이 역사적 임무도 대두된다.



관조적, 추상적 무신론에 대한 비판 입장을 고수한 마르크스는 "종교적 감정 그 자체가 사회적 생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 포이어바흐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정신은 자연의 산물이며, 그 반대는 성립할 수 없다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은 부르주아의 사회적 관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의 유물론은 '인류 사회 또는 사회적 인류에 대한 역사적 관점에 입각한 새로운 유물론'으로 극복해야 한다. 이 같은 새로운 사회적 유물론, 즉 추상적 무신론에 대한 지양은 공산주의로 귀착된다.



"신을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무신론이 이론적 인본주의의 발전 형태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을 부인하는 공산주의는 인간 고유의 특성으로서 진정한 인간적 삶을 요구한다. 공산주의는 실천적 인본주의의 발전단계이다. 무신론이 종교와 배제를 매개로 하는 인본주의라면,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의 배제를 매개로 하는 인본주의이다." 정치적 또는 민주적 공산주의는 국가의 제거, 인간 소외의 극복 그리고 인간 자신으로의 회귀를 추구한다. 그런데 "필요를 대하는 인간의 본성을 잘 알지 못하고 그로 인해 오염되고 그 영향력 아래 놓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유재산의 긍정적 극복과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 본성의 실재적 전유로서 공산주의란 인간이 사회적 인간, 다시 말해 인간적인 인간으로 온전히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공산주의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갈등,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 실존과 본질, 객관화와 주관화, 자유와 필연, 개인과 종 사이의 투쟁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왜 투쟁인가, 지겹지도 않은가




마르크스가 1840년대 초반에 밀고 나간 공산주의는 하나의 철학적 사상, 곧 살과 뼈가 없는 유령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파리의 근교에 밀집한 노동자들의 혼란스러운 모임과 많은 독일 이주자 사이에서 이 실천적인 운동과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을 발견한다. "공산주의 노동자들이 단결할 경우 그들은 우선 이론을 정립하거나 선전을 하려고 든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이와 같은 행동을 통해 사회 전체라는 새로운 필요를 전유한다. 그리고 이때 하나의 운동에 불과했던 것이 목표로 승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하나가 된 프랑스 사회주의 노동자들에게서 이 실천적인 운동의 가장 훌륭한 사례를 발견한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계급에 따른 사회 분화는 노동의 분업에서 발생한다. 도구 사용 덕분에 생산성이 잉여분을 발생시켜 이를 축적하는 수준에 도달하면, 그 사회적 잉여분을 축적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사제들을 필두로 하는 특권 계급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노예제도가 되었건 농노제도가 되었건 착취 관계는 즉시 눈에 띈다. 현대 노동계약에서 이 같은 폭력과 구속력은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 마르크스에게서 계급에 대한 단순한 정의, 사회 직능별 범주에 따른 통계표 따위를 찾으려 한다면 헛수고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에게 계급이란 상호대립적인 관계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계급은 투쟁을 통해 정의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계급투쟁이란 전략적이면서 사회적이다. 아니 사회적이라기보다는 전략적인 개념이다.



『자본론』 1권은 착취관계를 집중 조명한다. 이 관계는 노동자와 노동자가 사용하는 생산수단, 농부와 토지 등이 분리됨으로써 초래된다. 생산이라는 영역을 놓고 볼 때, 착취 관계는 계급 관계를 감싸고 있는 뼈대일 따름이다. 이 같은 체제(자본주의)에서는 "생산을 발전시키기 위한 모든 수단은 생산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변질되며, 그렇게 되면 생산자는 부분으로 쪼개진 인간 또는 기계의 맹장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다." 반대로 "생산수단은 생산자에게 생산에 관한 과학적 권력을 적대적인 힘으로 대립시킨다." 그리고 "강요된 노동이 창의적인 노동을 대체하고, 생산자의 삶 전체를 노동시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자본의 유통(자본을 투입한 초기 투자에서 상품의 생산과 소비를 거치며 이윤의 실현으로 바뀌는 과정) 문제를 다룬 『자본론』 2권에서는 임금 문제를 통해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라는 새로운 변수를 도입한다. 특히 직접 생산에 관계하는 노동이냐, 간접적으로 생산에 관여하는 노동이냐 아니냐 같은 개념을 도입한다. 『자본론』 3권은 자본주의 생산 전반을 다룬다. 따라서 유례없는 추상적 자본이 밟는 궤적을 비유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경쟁을 벌이는 다양한 자본 전체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주력한다. 이 수준에서 계급 관계는 비로소 '총제적인 노동자'와 '총체적인 자본' 사이의 갈등으로 극명하게 나타난다.



어떻게 유령이 뼈와 살을 갖게 되었으며, 그 유령은 왜 미소 짓는가




스무 해 전쯤 《뉴스위크》는 의기양양하게 마르크스의 죽음을 톱 기사로 실었다. 하지만 유령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2008년 세계적인 자본주의 위기가 닥치기도 전에 "마르크스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금융 위기의 주범인 이윤 추구 경향을 비난하고,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 없는 사물들에게 현실성과 권력을 부여하는 신화처럼 작용할 수 있는지를 오래전에 밝혀낸' 마르크스에게 경의를 표했다. 왜 마르크스는 부활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우리와 동시대인이다. 그는 자본을 바라보며 느끼는 양심의 가책을 상징한다. 그가 자본에 관한 몽타주를 작성하던 당시만 해도 자본의 해악이 이제 막 드러나기 시작한 초창기였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은 전 지구를 유린하는 살인마가 되어 버렸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지구상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번역된 책이다. 이 책은 비인격적인 '사회적 권력'으로서 자본의 놀라운 성장성을 근원에서부터 포착한다. 이 책이 지닌 무시할 수 없는 시사성은 다음 일곱 가지 주장으로 요약된다.



첫째, 세계 시장 형성은 계급투쟁까지도 세계화시킨다. 부르주아는 끊임없이 생산 수단 혁명을 시도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착취와 지배라는 사회적 관계로 꽁꽁 묶인 이런 식의 진보는 자본이 지닌 파괴적 속성에 의해 여지없이 무력화되고 만다. 이러한 모순은 오늘날 우리가 세계화라고 부르는 현상 속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둘째, 계급투쟁이야말로 역사를 발전시켜 온 비밀이다. 이 문장은 신의 섭리에 의해 미리 기록된 보편적 역사냐, 인간에게 세계의 정신과 운명을 드러내 보여주는 역사냐를 두고 벌어진 철학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셋째, 소유의 문제는 사회운동의 근간이 되는 문제이다. 이는 모든 형태의 소유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 가하는 착취에 토대를 둔 전유 방식을 문제 삼는 것이다. 타인을 박탈함으로써 얻는 소유, 즉 지배당하는 자의 노동과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하는 소유만이 폐지해야 할 대상이다. 넷째, 가장 우선적인 목표는 정치권력의 장악이다. 이런 생각은 순수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정치 행위와 적당히 거리를 두는 실험적 사회주의라는 환상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다섯째, 각국의 프롤레타리아는 국가라는 편협한 울타리를 뛰어넘어 단결해야 한다. 교환의 세계화는 결과적으로 계급투쟁의 세계화를 초래한다. 이것이 바로 세계주의의 요점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지향하는 해방은 국가라는 테두리 내부에서 시작되지만, 대륙을 넘어 세계 수준으로 확대될 때에야 제대로 꽃을 피울 수 있다. 여섯째, 행위임과 동시에 과정으로서 새로운 혁명은 영속적인 혁명이다.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의 성과를 평가하며, 프롤레타리아가 국가 권력을 쟁취할 때까지, 프롤레타리아 연합이 단 한 개의 나라가 아닌 이 세계 모든 나라에서 전진하는 날이 올 때까지 혁명을 영구히 계속하는 것이 임무라고 선언했다. 일곱째,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은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다. 공산주의를 익명의 집단에 바친 개인의 희생으로 간주하는 반동적인 입장과는 달리 『공산당 선언』은 공산주의를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결사라고 정의한다.



왜 혁명은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지 못하는가




하나의 세계는 소멸하는데, 새로운 세계는 이제 겨우 태어날까 말까 한다. 두 세계 사이에서 필연적인 것과 가능한 것은 합류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혁명의 슬픈 운명이다. 마르크스는 1848년 일어난 사건들에 비추어 이를 예감했다. "혁명은 우리가 원하는 시기보다 앞서서 일어날 수 있다. 혁명가들에게 식량 구입에 신경을 써야 하는 일만큼 최악의 상황은 없다." 엥겔스는 한층 직설적인 방식으로 이를 말했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민중에게 떠밀려 아직은 시기상조임을 우리 자신이 그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를 실험해야 한다."



혁명은 일치하는 않는 시간들을 연결한다. 그러므로 어제의 임무와 내일의 과업이 혁명 안에서 서로 포개진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은 불안정하며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고 변모를 거듭할 수 있으므로 부르주아 혁명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다, 혹은 사회 혁명이다, 국내 혁명이다 하는 식의 단순명료한 정의로 축소할 수 없다. 성공의 기회를 확실히 잡기 위해서 혁명 운동가들은 처음엔 공식적인 정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되 기존 사회와 조화를 이루는 인물들의 색깔을 가져와야 한다. 요컨대 혁명은 지배계급이 활동하는 공적인 무대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은 결코 시간을 지킬 수 없다. '너무 늦었거나'와 '너무 이르거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느라 꼭 알맞은 때를 알지 못한다.



마르크스에 대해 사람들은 식민정책이 진보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현대화의 한 형태라고 주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식민 정책을 찬양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는 그의 세계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그에게 역사는 직선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갈림길과 분기점으로 이루어진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사회 혁명이 일어날 빌미를 제공했다면, 그건 영국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인도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축적 과정이 초래하는 고통을 건너뛰게 해주었으며, 이로써 인도를 수구주의에서 깨어나게 한 덕분이다. 착취와 억압 시스템이 아무리 오래도록 지속된다 해도 마르크스의 눈에 진보와 재앙은 치명적으로 얽혀 있다. 이것이 바로 역사를 정치적으로 사고해야 하며, 정치를 혁명적으로 사고해야 하는 이유이다. "혁명은 과거에 대한 모든 미신에서 벗어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임무를 개시할 수 있다. 예전에 일어난 혁명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내용을 감추기 위해 역사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19세기의 혁명은 죽은 자들일랑 그들의 무덤으로 고이 보내주고 자신만의 고유한 목표를 실현해야 한다. 과거엔 수사학이 내용을 능가했다면, 이제는 내용이 수사학을 능가해야 한다."라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무에서 갑자기 솟아오르거나 순전히 신의 의지에 의해 생겨나는 종교적 기적과 달리 혁명은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이유라는 것들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예상하지 않았던 시기에 찾아온다. 약속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혁명에 따른 깜짝 효과는 클 수밖에 없다. 주역들마저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하는 바람에 어울리지 않는 배역을 소화해야 하는 위험부담도 배제할 수 없다. 법칙이 아니라 투쟁을 생각하는 사상가였던 마르크스는 그러므로 역사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정치적 행동을 생각하는 전략적 사상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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