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
B. R. 마이어스 지음 | 시그마북스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
B. R. 마이어스 지음
시그마북스 / 2011년 12월 / 216쪽 / 14,000원
PART 1 북한의 문화사식민지 시대, 1910~1945년
남한과 북한 학생들은 근현대사를 배울 때, 일본이 1905년에 한반도를 침략해 40년간 본토의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려 하다가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물러갔다고 배운다. 이런 역사관은 한국에 관한 글을 쓰는 대다수의 외국인들에게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은 이보다 더 복잡하다.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국민의 지지를 끌어모으기 위해 새로 창간된 한국어 신문들을 이용했지만, 이들은 일제가 조종하는 선전기구를 제압하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일제는 조선인의 자부심을 억압하는 대신 그것을 유리하게 이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선전은 고대 조선인과 일본인의 조상은 한 뿌리였으므로, 후손들도 혈통이 같으며 똑같이 자애로운 통치자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즉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당시의 지배적인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더구나 너무 오랜 세월 중국의 그늘 밑에서 기를 못 펴던 조선 문화에 대한 옹호자 행세까지 했다. 그래서 '조선이 대일본의 일부라는 것'을 명심하게 하는 한편 일본은 조선인들이 자신의 '지방'과 '방언', 심지어는 태극기까지 소중히 여기도록 권장했다. 그러나 조선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단군신화를 되살림으로써 이런 선전운동에 맞서려고 했다.
반면에 선전에 더 많이 노출되고 신체제의 혜택을 누리던 지식계층은 대체로 당국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박수칠 일이 점점 줄더니 1945년 초부터는 선전에 절망적인 어조를 드러냈다. 3월에는 "만약 이 전쟁에서 우리의 운명이 역전된다면… 그것은 모든 인류의 비극이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라고 《매일신보》에서 경고했다. 그러나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고, 이를 계기로 소련은 일본과 전쟁을 치를 용기를 얻었다. 히로히토가 그 유명한 항복문을 읽어 내려간 8월 15일,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로 깊숙이 진군하고 있었다.
소련 점령, 1945~1948년
1945년,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일본 통치 이전의 삶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소련과 미국도 일제의 잔재로부터 그들의 정신을 원상복귀시킬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저 해방된 조선인들이 일본을 증오하는 것을 보고 예전부터 그들이 그래 왔을 것이라는 속단을 내렸다. 소련은 겉으로는 공명정대함을 내세우면서도 지체 없이 인쇄기, 출판사, 그리고 라디오 방송국에 대한 소유권을 이제 갓 태어난 노동당에 넘겼고, 그 결과 당 일간지 제1호(오늘날 《노동신문》이라 알려진)가 1945년 9월에 첫선을 보였다. 소련 해방군을 기리기 위한 평양의 국민대회를 라디오 방송함으로써 1945년 10월 14일에 가동했다. 그날 연단에 오른 조선인 중 붉은 군대의 대위 계급장을 단 평양 출신의 33세 김일성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새로운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를 담당하는 자들에게는 여러 문제가 제기됐다. 김일성이 한편으로는 조선인이 지닌 순수함의 화신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뛰어난 혁명 전사로 내세워져야 했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해결책은 정권을 힘, 절제, 지혜를 포함하고 있다는 방향으로 민족의 덕목을 재구상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를 위해 일제 교육을 받지 않은 평양의 소수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던 고려인 시인 조기천은 김일성을 전투 사이사이에도 소련의 역사책을 읽은 뛰어난 전략가로 묘사했다. 김일성의 이미지로 뿌리를 내린 것은 바로 어머니형(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통달한) 이미지였다.
전쟁과 재건, 1948~1966년
1948년 8월 13일,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했고, 이에 평양의 소련 관리들은 단일 국가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김일성에게 권력을 양도했다. 그리하여 9월 9일, 정식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48년 말, 소련 군대는 한반도에서 철수했고, 그들이 떠나자마자 김일성은 모스크바에 이 나라의 무력통일을 위한 지원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조선인민군대는 삼팔선을 넘어 기습 남침을 감행함으로써 나중에 '조국해방전쟁'이라 불리게 될 전쟁을 시작했다. 이런 전쟁은 어느 국가에서든 외국인 혐오증을 불러일으켰을 테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식민지 시절 이후로 핏줄에 기초한 민족주의적 사고에 깊이 젖어 있던 북한에서는 중국 동맹국조차 적대적으로 인식되었을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그러나 김일성 정권에게는 소련을 모델로서 모방해야 할 다른 이유들이 있었다. 그들은 훨씬 인구가 많은 남한과 스스로를 차별화하고 해외로부터 지속적인 경제적·외교적·군사적 지원을 보장받아야 했다. 그러나 동유럽 외교관들은 이미 평양의 외국인 혐오증에 대해 본국에 보고하기 시작했다. 길거리에서 욕을 먹고 아이들에게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한 외국인들도 있었다. 유럽인과 결혼한 여성은 이혼 압력을 받거나 평양에서 추방되었다. 1965년에는 흑인이었던 북한 주재 쿠바 대사가 크게 욕을 보는 사건이 있었다. 나중에 한 고위 관료가 그 대사에게 "대중의 교육수준이 아주 낮습니다. 친구와 적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지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정권이 주입시키려 한 바였다.
문화혁명에서 김일성 사망까지, 1966~1994년
1966년, 중국의 지도자가 문화혁명을 시작하면서 베이징과 평양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확실히 김일성은 마오쩌둥에 대한 열병이 자기 주민들을 감염시키고, 이 때문에 베이징이 쿠데타나 침입을 기도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이것은 단순한 편집증이 아니었다. 조지 오웰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은 '근대역사를 재창조하려면 세뇌나 협박이 필수'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개방된 사회에서조차 민족주의적인 신화 만들기가 얼마나 쉽게 진행되는지를 알려면, 일본제국을 패망시킨 미국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이 매년 광복을 기념하는 남한 시민들을 보면 된다. 그러나 북이든 남이든 민족주의자들은 한반도가 결코 외국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고 믿지는 않는다.
북한 정권은 주체사상에 나타나는 인본적인 기본적 주장들, 즉 '인간이 만사의 기본이며, 인간은 그 창조성과 자주성을 부여받았다'에 동의한다는 의지를 보여준 적이 없다. 물론 한 이데올로기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이비 이데올로기라고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점은 북한 정권은 주체사상을 진지하게 표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대중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는 주체의 중심 개념이 지도자의 보살핌 보호가 필요한 취약한 어린이들을 보살피는 어버이 수령을 찬양하는 개인우상화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사의 주인이기는커녕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이 버는 것에 대해서도 북한인들은 지도자에게 감사해야 하는 처지다. 개인숭배 열기가 고조된 이래로 김일성은 아버지요, 노동당은 어머니요, 인민은 자식이라는 식의 주장은 '북한은 확대된 유교의 가족'이라고 주장할 만하다. 실은 절반만 유효하다는 사실이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은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뉴스 아나운서들은 그가 '과로로 돌아가셨다'며 울부짖었다. 요란한 곡소리가 전국의 도시와 광장을 진동시켰다. 대부분의 성인들은 정말 슬픔에 잠겼던 듯했다. 아니면 최소한 그들이 알고 있던 유일한 지도자가 사라진 미래를 두려워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김일성이 그때 사망한 것이 정권에는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만약 그가 몇 년 더 생존했더라면 경제 파탄이 그의 명성에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겼을 것이다. 실제로 1995~1997년의 기근은 김일성이 사망할 때까지 그가 혼자서 백성들을 먹이고 입혔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고난의 행군, 1994~1998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북한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그의 아들이 뒤를 이을 거라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었다. 김정일은 1994년 7월, 사망한 아버지를 대신하지 않는 형식으로 권력을 공식적으로 승계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김일성은 북한의 '영원한 주석'으로 남아 있다. 한편 식량 생산은 계속 줄어들었다. 1994년말이 되자 평양 밖에서는 배급 제도가 거의 기능을 멈췄다. 그렇게 되자 김정일 정권은 초기에는 김일성이 죽기 전 마지막 몇 달 동안 이룩한 기록적인 수확을 부각시킴으로써 위기를 부인하려 했다. 그러나 정권은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가는 완전히 신뢰를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그래서 김정일은 몇 개월간 몸을 사린 후, 1995년 침울한 모습을 한 채로 국가 방위에 모든 시간과 힘을 쏟을 수밖에 없는 '선군' 정권의 우두머리로 나타났다.
세계가 놀랐던 것은 이런 사태가 정권의 지지를 크게 손상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탈북자에 따르면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인민들이 너무 굶주려서 정치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북한 정권은 전체적인 식량 부족 정도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기근이란 말 자체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경제 붕괴에 대한 김정일의 책임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대신 기상 악화와 미국의 제재조치, 게으른 중간급 간부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현실을 왜곡하는 선전이기는 해도 주민들이 믿기에는 진실성이 충분히 있었다. 특히나 미국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민족의 피해의식을 일깨움으로써 정권에 대한 지지를 강화시켜 나간 것이다. 기근 당시 '미국과의 전쟁을 했으면' 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고 많은 탈북자들은 기억하고 있다.
해방기, 1998~2008년
최악의 식량 위기가 끝난 1998년 무렵, 공식 매체는 "정권 붕괴에 대한 미국의 꿈을 좌절시켰다."며 김정일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북한과의 화해를 위해 '햇볕정책'을 표방하는 김대중 대통령과의 회담에 응했다. 햇볕정책은 김정일의 군대와 핵개발에 도움을 주면서도 그를 난처한 상황에 내몰리게 했다. 그는 남한이 더 우호적인 관계를 원한다는 사실을 좀처럼 인정할 수가 없었다. 남한이 미제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그렇다고 남한 대통령을 계속 비방함으로써 원조의 흐름을 끊어놓는 위험을 무릅쓸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남한 선전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조선중앙통신>으로 하여금 남한에 대한 비방을 중단하도록 했다. 하지만 외부의 눈에 덜 띄는 선전방송에서는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의 사회주의 포기를 설득하려고 평양에 왔지만, 오히려 김정일의 지략에 말려들어 북남협력에 동의했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기근에서 회복했다고 해서 예전처럼 내부적 안정을 완전히 회복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 북쪽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계속 밀수한 중국 TV로 눈을 돌렸고 밀수한 휴대폰으로 이주자들과 소통했다. 심지어 DMZ 근처에서는 남한의 TV 방송을 훔쳐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국의 주기적인 단속에도 불구하고, 농촌의 시장에서는 남한의 비디오와 DVD가 활발히 거래되었다. 그 결과 남한이 잘 산다는 사실은 북한 내에서 순식간에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 되어버렸다. 이 사실을 부정해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전기구는 2000년에 드러내놓고, 남측 인민들의 생활수준이 더 높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의 번영은 김정일의 '선군 정책' 덕택이라고 교묘하게 주장했다. 이 정책 때문에 미국은 한반도에서 또 다른 파멸적인 전쟁을 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위기에 처한 북한, 2008년 이후
그러나 2000년 1차 정상회담 이후 이뤄진 정보차단벽의 붕괴는 상황을 바꿔놓았다. 더 이상 김정일은 남한 주민에게는 중재자 행세를 하면서 북한에서는 남한의 대표단들에게 거들먹거리며 주인 행세를 하는 묘기를 부릴 수가 없었다. 김정일은 북한 주민들이 자신을 보는 이미지를 먼저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이루어진 그들의 첫 만남에서 만면에 미소를 띤 노무현 대통령이 악수를 하러 다가왔을 때 김정일은 바위처럼 꼼짝도 안 하고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상회담은 통일을 향해 노력하겠다는 양측의 합의를 확인하고 끝이 났지만, 이미 남한 국민들은 회담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햇볕정책에 대한 불만은 2007년 11월 한나라당 후보가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정일 정권은 남한 내부의 반미 좌파 세력의 요란한 외침과 눈에 띄는 존재감을 잘못 해석하여 이명박 후보의 당선에 대한 여론 조사원들의 예측을 믿지 못했기 때문인지 남한 TV가 2007년 11월 선거결과를 발표했을 때 확실히 당황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외부의 여러 언론에 접근할 수 있는 남한에서는 어느 누구도 투표 집계 과정에 의혹을 제기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명박 후보가 부정선거를 했다고 북한 주민에게 억지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남측 동포들이 친미성향의 후보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남측 동포들이 한반도 통일을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 혹은 남측 동포들이 김정일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뭔가가 있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고, 이 두 가지 가정은 북한의 공식적인 세계관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2009년 9월, 한 대만 관광객이 주민을 보살피는 김정일뿐만 아니라 '젊은 대장'을 모시게 된 것을 축하하는 내용의 벽보를 사진기에 담았다. 그 대장의 이름은 김일성 가계에 속하는 이름들을 표시할 때만 쓰는 붉은 잉크로 명기되어 있었다. 바로 '김정은'이었다. 이 후계자가 어떤 종류의 나라를 물려받게 되든 간에 그것은 공산주의 국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2009년 4월에 비준되고 그해 가을에 공개된 수정헌법은 공산주의에 대한 말을 언급하지 않으며 그 대신 새로운 기본 원칙으로서 '선군 사회주의'를 내세웠다. 한반도 최초의 '국방 정권', 즉 일제 정권에 대한 이념적인 애착을 이 이상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외부 세계가 앞으로도 북한을 '강경 공산주의' 국가로 잘못 볼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다.
PART 2 북한 선전을 통한 북한의 이해조국과 신화
2006년 5월, 남한과 북한의 장성들이 두 나라 사이의 해상분계선 재조정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예비 소회담에서 남한의 대표단장은 남한의 농부들이 다른 나라의 여자들을 신부로 맞아들인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불쾌감을 드러내며 "우리 민족은 항상 순수한 혈통을 매우 중시해 왔습니다. 우리의 특이성이 사라질까 걱정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남한 대표는 단지 "한강에 잉크 한 방울 떨어진 것과 같은 극소수의 결혼에 불과한 것이기에 대다수 국민이 민족 정체성을 지켜나가기만 하면 괜찮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북한의 장군은 문화적 독자성보다 인종적 순수성에 더 관심을 기울이며 "고대부터 우리 조국은 풍요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땅이었습니다. 절대 잉크 한 방울의 오염 물질도 용납해서는 안 되지요."라고 대답했다. 그의 말은 사실 공식 이데올로기와 완전히 일치한 말이었다.
흰색은 평양의 지배적인 색조다. 그래서 평양에는 하얀 콘크리트 광장, 흰색이 아니면 최소한 밝은 색의 돌로 지어진 건물들, 그리고 긴 치마를 입은 흰색의 처녀 조각상이 눈에 많이 띈다. 이런 것들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도시 중심부에 허용했던 중공업 시설이 전혀 없는 도시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이다. 평양은 눈에 덮인 모습으로 그려지거나 촬영될 때가 많은데, 북한에서 눈은 순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흰색은 공식 문화 전반에 걸쳐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으며, 조선인이 조선 문명의 가장 초기 단계부터 '고결한 도덕성'을 보여주었다는 주장을 강조하고, 민족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 색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북한 주민들은 민족이 천성적으로 선하게 태어났다고 추측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