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
틱낫한 지음 | 불광출판사
화해
틱낫한 지음
불광출판사 / 2011년 10월 / 240쪽 / 13,000원
제1부 내 안의 아이를 어루만져 주는 지혜깨어 있음
불교심리학에서는 마음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하나는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저장식이다. 의식은 능동적으로 알아차리는 마음이다. 서양심리학에서는 이를 '현재마음'이라 부른다. 깨어 있음의 에너지를 키우려면 능동적으로 알아차림, 즉 의식을 우리의 모든 활동에 두어야 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그것과 진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차를 마실 때도 시내를 운전할 때도 또렷하게 깨어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다. 걸음을 걸을 때는 지금 걷고 있음을 내가 알아차리고, 숨을 쉴 때는 숨 쉬고 있음을 자각한다. 한편 저장식은 뿌리식이라고도 하며 우리 마음의 근간이 된다. 서양 심리학에서는 이를 '무의식'이라 부른다. 여기에는 과거의 경험이 모두 저장되어 있다. 저장식은 새로운 것을 학습하고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 마음은 몸에서 분리되어 있다. 그러니 때로는 하루 종일 무언가 활동을 하고 다녀도 의식이 전혀 함께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저장식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운전을 하면서도 우리의 의식은 천 개도 넘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길을 잃거나 사고를 내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한다. 이 경우 저장식은 독자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해하기 쉽도록 마음을 집에 비유하자면, 저장식은 지하실이고 의식은 거실이다. 화, 슬픔, 기쁨 등의 심리 현상은 씨앗의 형태로 지하실 속에서 쉬고 있다. 우리에게는 화의 씨앗, 절망의 씨앗, 분별의 씨앗, 두려움의 씨앗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깨어 있음의 씨앗, 자비의 씨앗, 이해의 씨앗이 있다. 저장식은 씨앗의 총합이자 그 모든 씨앗을 보존하고 유지하고 있는 토양이다. 그 씨앗들은 내부 깊숙이 머물다가 자신과 접촉하는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는 순간 화를 일으키거나 기쁨, 슬픔을 가져온다. 그때 그 씨앗은 괴물처럼 단번에 쑥 자라서 거실 즉 의식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면 그것은 더 이상 씨앗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심리 현상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 화를 일으키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 우리 내부에 있는 화의 씨앗을 건드리면, 그 씨앗은 폭발적으로 자라나서 '화'라고 일컬어지는 심리 현상으로 나타난다. 불교에서 '현상'이라는 것은 많은 조건들이 한데 모여 창조되는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의 손, 꽃, 탁자, 집도 모두 현상이다. 나의 화는 심리 현상이다. 불교심리학에서는 51가지 씨앗이 51가지의 심리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화는 그중 하나다. 저장식에서 화는 씨앗이라 불린다. 의식에서 화는 심리 현상이라 불린다.
화의 씨앗이 우리 거실로 올라와 심리 현상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깨어 있음의 씨앗도 함께 찾아내서 그 씨앗 역시 거실로 올라오도록 초대하는 일이다. 이제 우리집 거실에는 두 개의 심리 현상이 있다. 이것이 바로 화에 깨어 있는 일이다. 깨어 있음에는 항상 어떤 대상이 있다. 깨어 있음으로 걸을 때 그것을 걷기에 깨어 있다고 한다. 깨어 있음으로 음식을 먹을 때는 먹기에 깨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화에 깨어있는 것이다. 깨어 있음이 화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감싸 안는다.
우리가 하는 수행은 '둘이 아님(또는 다르지 않음)'의 원리에 근간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 화는 우리의 적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다. 깨어 있음은 화를 억누르거나 화와 싸우기 위해 거기 있지 않고, 화의 존재를 인정하고 화를 보살피기 위해 거기 있다. 마치 형이 아우를 돌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깨어 있음의 에너지는 화의 에너지가 거기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화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모성이다. 우리는 언제든 깨어 있음의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다. 단지 깨어 있는 호흡을 하고, 깨어 있는 걸음을 걸으며, 깨어 있는 미소를 짓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깨어 있음의 씨앗을 만나게 되어 화의 존재를 인정하고 감싸 안을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지금 무엇을 하든 당신의 내면을 성찰하라. 요리든, 청소든, 걷기든 그 무엇이라도 지속적으로 깨어 있음의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면에 있는 깨어 있음의 씨앗이 더욱 튼튼해진다. 깨어 있음의 씨앗 속에는 '집중'도 들어 있다. 깨어 있음과 집중, 이 두 가지 에너지를 통해 우리는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깨어 있음이 하는 일: 깨어 있음이 하는 첫 번째 일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과 싸우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안의 아이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 상처받은 아이를 처음 알아보았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저 그 아이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인사를 건네라. 그뿐이다. 그 아이는 슬플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아차리면 우리는 그저 숨을 쉬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숨을 들이쉬며 나는 슬픔이 내 안에 나타났음을 알아차리네. 안녕! 잘 있었니? 나의 슬픔아! 숨을 내쉬며 나는 나의 슬픔을 잘 보살펴 주려네."
내 안의 아이를 알아본 후 깨어 있음이 하는 두 번째 일은 그 아이를 안아 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유쾌한 수행이다. 우리의 감정과 싸우는 대신 자기 자신을 잘 보살피기 때문이다. 깨어 있음은 자신의 단짝인 집중을 데리고 온다. 내 안의 아이를 알아보고 부드럽게 안아 주는 처음 몇 분간 마음에 위안을 느낄 것이다. 다루기 힘든 감정은 여전히 거기 있지만 우리는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는다.
내 안의 아이를 알아보고 안아 준 후에 깨어 있음이 하는 세 번째 일은 다루기 힘든 감정을 달래 주고 완화해 주는 것이다. 이 아이를 그저 포근히 안아 주는 것만으로도 힘든 감정을 달래고 편안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격앙된 감정을 깨어 있음과 집중으로 감싸 안을 때 우리는 이 심리 현상의 뿌리를 볼 수 있다 고통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말이다. 사물의 근원을 알 때 고통이 줄어든다. 그러므로 깨어 있음이 하는 일은 고통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완화해 주는 것이다.
깨어 있음의 에너지에는 집중의 에너지뿐 아니라 통찰의 에너지도 들어 있다. 집중 에너지는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모으도록 해준다. 집중 에너지와 함께할 때 깊이 보는 에너지가 강력해지고 그를 통해 통찰도 가능해진다. 통찰에는 언제나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힘이 담겨 있다. 깨어 있음이 거기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깨어 있음을 생생히 지속시키는 법을 알고 있을 때 집중 역시 함께한다. 그리고 집중을 생생히 유지하는 법을 알고 있을 때 통찰이 찾아온다. 깨어 있음의 에너지가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이 보도록 하여 통찰을 얻게 해주고 그를 통해 내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우리의 두려움도 함께 태어났다. 어머니 자궁에서 보낸 열 달 동안 우리는 따스한 안정감을 느꼈다. 우리는 그 무엇도 할 필요가 없었다. 너무나 편안했다. 하지만 태어나는 그 순간 모든 것이 극적으로 달라졌다. 탯줄은 끊겼고 우리는 스스로 호흡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우리의 폐에는 물이 차있었지만 첫 숨을 쉬기 위해서는 그 물을 밀어내야만 했다. 살아남느냐 마느냐가 그 첫 숨에 달려 있었다. 바로 여기서 원초적 두려움이 생겨났다. 어린 핏덩이인 우리에겐 팔다리가 있었지만 쓸 줄 몰랐다. 누군가 우리를 돌봐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 원초적 두려움과 함께 원초적 욕망도 왔다. 홀로 남겨진다는 두려움과 살아야 한다는 욕망이 혼재했다. 자라서 어른이 된 지금도 그 원초적 두려움과 원초적 욕망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
두려움과 욕망은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다. 우리는 죽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한다. 살아남도록 도와줄 누군가를 욕망한다. 우리는 매순간 그 사람이 오기를, 도와주기를, 보호해 주기를 바란다. 욕망을 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욕망이 실은 원초적 욕망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원하고, 새로운 직업을 원하고, 더 많은 돈을 원한다. 그렇다고 이런 것들을 얻고 나면 욕망이 멈추는가? 아니다. 욕망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우리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소유했다: 부처님께서는'만족하기'라는 수행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조건들은 이미 다 갖추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이 수행은'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더 소유할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가진 행복의 조건들을 모두 확인해 보자. 우리는 지금 당장 행복해지고도 남을 만큼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제 무언가 구하기 위해 달리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욕망하는 대상을 손에 넣었다고 행복해지는가? 분명히 또 다른 대상을 향해 달릴 것이다. 평화와 안정감을 충분히 느낄 때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가족이 어깨를 스치는 작은 집이면 족하다. 더 큰 집은 필요 없다. 미래로 달려가서 두세 가지 조건을 더 움켜쥘 필요가 없다. 지금 가진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이런 스타일의 삶을 선택했다면 당신은 지금 당장 행복해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돈과 권력이 많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주변을 둘러보라. 돈과 권력을 충분히 가진 사람들이 과연 행복한가? 스트레스와 외로움으로 여전히 깊은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돈과 권력은 해답이 아니다. 우리는 깨어 있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과거'라는 감옥에 갇혀버리다: 저장식은 과거의 영화가 항상 연속 상영되고 있는 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기억과 트라우마, 고통은 모두 저장식에 저장되어 있다. 과거는 지나갔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과거의 이미지는 여전히 남아 있고, 우리는 가끔씩 과거로 되돌아가 당시의 고통을 다시 체험하곤 한다. 우리는 과거라는 감옥에 갇혀 버리는 경향이 있다. 과거는 더 이상 여기 없으며 기억은 단지 과거를 담은 영화나 그림일 뿐임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그 영화들은 연속 상영되고 있고, 그 화면을 볼 때마다 고통이 엄습해 온다. 가령 우리가 지금 영화관에 있다고 하자.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며 이것이 진짜 이야기라고 믿기도 한다. 심지어 울기까지 한다. 그 고통과 그 눈물은 진짜다. 하지만 영화 속 그 사건은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지 않다. 단지 영화일 뿐이다. 스크린 가까이 다가가 화면을 손으로 만져보자. 거기에는 아무도 없고 단지 명멸하는 불빛만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생생한 고통과 우울한 감정을 실제로 느낄 수 있다.
내 안의 아이가 여전히 과거에 얽매어 거기 있음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그 아이를 구출해 내야 한다. 우선 자리에 편안히 앉아 자신을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두고는 내안의 아이와 대화를 시도하라. "사랑하는 어린 동생아. 이제 우리가 다 자랐다는 것을 너도 알아야 해.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자신을 지킬 수도 있단다."
고통에서 배운다: 우리가 고통을 이해할 때 자비와 사랑도 따라온다. 행복은 이해와 사랑과 연민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해와 자비는 고통에서 태어난다. 고통을 이해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아무도 비난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자비로워진다. 그러므로 고통은 유용한 존재다. 고통을 다룰 줄 모른다면 우리는 아마 고통의 바다에서 익사할 것이다. 하지만 고통을 다룰 줄 안다면 고통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즐거움을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려고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이 때로는 유용한 존재라고 마음에게 가르쳐 줄 필요가 있다. 고통 덕분에 이해심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해하기 때문에게 우리는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다. 이해와 사랑이 없다면 행복은 없다.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고통을 안아 주고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사실 고통이 없다면 행복도 없다. 진흙이 없으면 연꽃도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고통을 받는 방법을 안다면 고통을 받아들여라. 그런 마음자세를 가지는 순간 당신은 이전만큼 고통스럽지 않다. 그리고 고통에서 행복이라는 연꽃이 피어날 수 있다.
다섯 가지 유념하기: 부처님은 우리 모두에게 두려움의 씨앗이 있다고 말했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 두려움을 억누르고 깊은 어둠 속에 가둬 둔다. 우리가 두려움의 씨앗을 알아보고 두려움을 안아 주고 깊이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처님은 '다섯 가지 유념하기'라는 수행을 주셨다.
1. 나는 늙도록 태어났다. 나는 늙음을 피할 수 없다.
2. 나는 아프도록 태어났다. 나는 질병을 피할 수 없다.
3. 나는 죽도록 태어났다. 나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4. 나에게 귀중한 모든 것과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변하도록 태어났다. 그들과의 헤어짐을 피할 길은 없다. 나는 그 무엇도 가질 수 없다. 나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5. 오직 내 행동만이 진정한 내 것이다. 나는 내 행동의 과보(果報, 인因으로 생기는 결과를 과果, 연緣으로 생기는 결과를 보報라 함)를 피할 수 없다. 내 행동은 내가 서 있는 바탕이다.
두려움의 씨앗을 이렇게 초대할 때 우리는 화를 더 잘 보살필 수 있게 된다. 두려움은 화에 생명력을 준다. 두려움이 있을 때 평화는 없고 대신 화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나온다. 잘 모르는 것 역시 화의 일차적 원인이 된다.
내 안의 아이를 치유하다
어린 시절 우리는 매우 연약했고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았다. 아버지의 얼굴에 엄한 표정이 서리면 우리 마음은 불안했다. 엄마가 심한 말을 하면 마음에 생채기가 났다. 어린아이였던 우리는 마음속에 많은 감정이 있었지만 그것을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때로 그 감정을 말로 표현했지만 주위 어른들이 우리말을 듣지 못했다. 들어주지도 않았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고향인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서 그 어린 아이에게 말을 걸을 수 있다. 그 아이가 하는 말을 들어 주고 그 아이에게 직접 대답해줄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 아이를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다. 이제 그 아이에게 돌아가서 그 아이를 위로하고 사랑하고 보살펴야 한다.
명상을 통해 5살 아이를 만나기: 이 명상은 앉아서 해도 되고 걸으면서 할 수도 있다. 조용한 곳, 당신이 편안하고 긴장을 풀 수 있는 곳, 그것은 적어도 5분 정도는 방해 받지 않고 오롯이 있을 수 있는 곳을 선택하면 된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이렇게 자신에게 말한다.
(숨을 들이쉬며) 나는 나를 5살 아이로 본다.
(숨을 내쉬며) 나는 내 안에 있는 그 5살 아이에게 자비로운 미소를 보낸다.
처음에는 전체 문장을 전부 말해야 하지만, 익숙해지고 난 후에는 아래처럼 핵심어만 말해도 된다.나, 5살 아이
자비로운 미소
내 안에 있는 그 5살 아이는 우리의 자비와 관심이 많이 필요하다. 매일 몇 분이라도 시간을 내어 자리에 앉아서 이 명상을 수행하면 좋을 것이다. 내 안에 5살 아이가 여전히 살아 있고, 그래서 그 아이를 보살펴 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대화를 계속하다 보면 그 아이는 우리에게 조금씩 반응을 보이며 점점 기분 좋아한다. 아이가 기분이 좋으면 우리도 기분이 좋고, 그때 우리는 더 큰 자유를 느끼게 된다.
내 안에 있는 그 아이가 단지 나뿐인 것은 아니다. 부모들 역시 어린 시절 고통을 받았다. 성인이 된 후에도 부모들은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자녀들도 고통 받게 했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으로 상처를 받았을 뿐 아니라 자녀들까지 그 고통의 피해자로 만들었다. 우리가 지금 내면의 고통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우리 역시 그 고통을 아이들에게 전해 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부모는 다 한때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5살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