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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말하다

아웅 산 수 지,앨런 클레멘츠 지음 | 북코리아


희망을 말하다

아웅 산 수 지, 앨런 클레멘츠 지음

북코리아 / 2011년 10월 / 488쪽 / 19,000원




서문

이 책이 어떻게 해서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하기란 좀 복잡하다. 하지만 몇 가지 설명을 드리는 것이 지금의 버마 위기가 전개된 양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내가 처음 버마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은 197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7일짜리 단기비자를 발급받아 버마에 첫발을 디뎠다. 불교 승려로 계(戒)를 받을 수 있을지, 또 사찰에 머물면서 불법(佛法)을 연마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내가 버마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고대 불교문화의 보존지라는 것, 전국에 산재한 5천여 사찰에 대략 백만여 명의 비구와 비구니가 살고 있다는 정보가 전부였다. 하지만 나는 이내 그 나라가 또한 네윈(Ne Win) 장군이 지배하는 전체주의적인 '테러국가'임을 발견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62년 3월,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이후, 네윈 장군이 이끄는 새로운 혁명의회는 헌법을 중지시키고 나라 밖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즉각 국가를 봉쇄하였다. 스스로 '버마식 사회주의 노선'이라 부른 고립주의 정책을 촉진하면서 그는 외국기자들을 추방했다. 또한 대부분의 산업시설과 경제기구들을 국유화하고 언론을 장악했으며, 공포와 진압과 고문에 기반을 둔 경찰국가를 수립하였다.



그 후 비자가 만료되자 나는 버마를 떠나야 했다. 하지만 꼭 다시 돌아와서 스님들의 지도 아래 2,500년 전통의 불교를 수련하고픈 소망을 이루겠다고 결심했다. 마침내 1979년, 나는 장기 '승려' 비자를 발급받았다.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받은 것이다. 그 후로 8년간 랭군의 사찰에 머물면서 최고의 시간들을 보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에 나는 국가적 긴장이 고조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오래지 않아 나는 비자 연장을 거부당하여 절을 떠나 미국으로 되돌아왔다.



그 후 1988년 3월, 소규모의 버마 학생들이 근본적인 정치적 변화를 촉구하며 랭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이 항거는 단 한 번의 무력 진압으로 41명의 학생들이 부상당했고, 또 그들은 모두 경찰의 호송 차량 안에서 질식사했다. 버마 독립운동 지도자인 아웅 산 장군의 딸 아웅 산 수 지는 영국인 학자인 남편 마이클 에어리스 박사와 두 아들 알렉산더 그리고 킴과 함께 옥스퍼드에 살고 있던 중, 그해 3월 말 운명적인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어머니가 심각한 뇌졸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23년간 해외에 거주하면서 정기적으로 버마를 방문해왔지만, 이제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곧장 랭군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편 1988년 7월 23일, 네윈 장군은 돌연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자신의 정당인 미얀마 사회주의 계획당(MSPP)을 사임하고, 미얀마의 정치적 미래를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전국이 놀라고 환호했다. 하지만 독재정치에서 민주주의로의 권력 이양이 신속히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은 이내 좌절되고 말았다. 네윈의 동료 당원들이 그의 제안을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자 수백만의 격분한 시민이 전국에서 평화 행진을 벌였다. 한편 이러한 시위가 여세를 몰아가자 네윈에게 충성하는 군사령관들은 수천 명의 정예부대를 파견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이들 부대는 학살 명령을 수행했다. 그런데 이 숨 막히는 어둠에서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솟아났다.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한 것이다. 1988년 8월 26일, 랭군의 슈웨다공 사원 근처 광장에 어림잡아 50여 만 명의 사람이 참석한 집회에서 아웅 산 수 지는 민주주의 투쟁에 뛰어들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이 위대한 투쟁은 온전한 민주주의 의회 정치를 바라는 국민의 강렬하고도 깊은 열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딸로서 나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무관심한 채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운동은 막대한 지지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 후 1988년 9월 18일, 민주적인 변화가 임박한 것처럼 보이자 '은퇴한' 독재자 네윈은 다시 나라를 집어삼키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막후에서 군대를 조종했다. 그러고는 국법 질서회복위원회(SLORC)로 알려진 21명의 군사령관 집단에게 버마의 통치권을 넘겨주었고, SLORC는 계엄령을 복원시켰다. 이 계엄령에는 4인 이상이 모일 경우 무조건 투옥하고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하며, 군사재판이 민사법정을 대신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1990년 봄, SLORC는 국민의 분노를 진정시킬 요량으로 '자유롭고 공정한 다당제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공포했다. 그러자 석 달도 채 지나기 전에, 선관위원회에 등록한 정당만도 2백 개가 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유력 정당은 아웅 산 수 지와 그녀의 최측근 동료들이 세운 민족민주연맹(NLD)이었다. 하지만 군부가 민주정당 지지자들을 악랄하게 괴롭히자 목격자들과 민주지도자들은 SLORC가 제시한 화해의 표현들이 거짓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그러는 사이에 1989년 7월 20일, 아웅 산 수 지는 가택연금에 들어갔고, 다른 정당의 지도자들도 수감되었다.



1990년 5월 27일, 마침내 선거가 실시되었고 아웅 산 수 지가 이끄는 NLD당은 유권자의 80퍼센트 이상의 지지를 받아 485석 중 392석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SLORC는 약속대로 권력을 이양하는 대신에 선거에서 당선한 국회의원 다수를 투옥하고 전국적인 탄압을 자행하였다. 그러자 일부 인사들은 나라를 떠나 망명하였고, 또 다른 이들은 침묵을 택했다. 그처럼 격동의 나날들을 보내며 버마 내부에서는 지면에 일일이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일이 벌어졌다.



그 가운데 한 가지 사실이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1995년 7월 11일, 무려 6년간의 억류 끝에 아웅 산 수 지가 석방된 것이다. 1995년 10월 나는 버마에 재입국했고, 그해 12월 녹음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녀의 자택으로 갔다. 정확히 3시 30분, 문이 열리더니 그녀가 방으로 들어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이제 이 책을 진척시켜 나가야죠." 나는 녹음 버튼을 눌렀다.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조국에서 우리는 여전히 죄수입니다




앨런: 여사께서는 버마의 민주화 투쟁에 뛰어드실 때, 슈웨다공 사원에 집결한 50만 명의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의 발자취와 유산을 따라 …… 자유를 위한 투쟁에 참여하겠다."고 연설하셨습니다. 아울러 "내가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말하는 것은 버마의 정치적 진정성을 위해 일어선 사람들 전부를 존경한다는 뜻입니다."라고도 말씀하셨고요. 여사님께서 말한 정치적 진정성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수 지: 정치적 진정성은 정치를 할 때 그저 꾸밈없이 정직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정치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을 기만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앨런: SLORC의 '정치적 진정성'은 어떻습니까?



수 지: (웃으며) 글쎄요. …… 때로 사람들은 SLORC가 과연 정치적 진정성의 뜻을 알고나 있을까 의아해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해서 국민을 속여 왔기 때문이지요.



앨런: SLORC의 집단 심리를 어떻게 보시나요?



수 지: 전체적으로 그들에게서 받은 인상은, 그들이 소통의 의미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들은 국민이나 반대파와 일체 소통하지 않아요. 심지어 자신들끼리도 서로 소통하는지 궁금할 정도입니다.



앨런: 1988년 SLORC 쿠데타가 일어났을 무렵, 수십만 명의 난민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버마 학생들이 이 나라를 빠져나갔습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 중 다수가 굶주림으로 혹은 죽을병을 앓으며 심신이 약해져 있는데 말이지요. 그런 시민에 대해서는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수 지: 우리가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바로 그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곳을 안전한 땅으로 만들지 못하면 그들이 어디로 돌아올 수 있겠어요?



앨런: 어제 여사께서 공개 강연을 시작하시기 전에 랭군 대학의 한 학생이 제게 직설적으로 다음과 같이 묻더군요. "버마의 민주화 운동이 비폭력을 고수하기보다는 무장투쟁에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학생에게 제가 여사께 여쭈어보겠다고 말했습니다만…….



수 지: 나는 무장투쟁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기를 휘두르는 데 능한 자가 권력도 휘두른다는 관례를 따르게 될 테니까요. 민주화 운동이 무력을 통해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누구든지 더 많이 무장한 자가 이길 것이라는 생각이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에서 떠나야 합니다.



앨런: 이 나라에는 여사 자신은 물론이고, 총알과 총검 앞에서 기꺼이 비폭력으로 행동하는 용감한 젊은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외람되지만 적어도 3천 명의 사람들이 죽는 결과가 빚어졌습니다. 여사께서는 한 번도 무력 침공 앞에서 비폭력 행동주의의 효과에 대해 의심해본 적이 없으십니까?



수 지: 네. 나도 알아요. 그것이 종종 더 느린 길이라는 것을. 왜 우리의 젊은이들이 비폭력은 통하지 않을 거라고 느끼는지도. 특히 버마의 권력 당국이 반란 집단들과는 대화하려고 하면서도, 무장하지 않은 NLD 같은 조직과는 대화하지 않으려고 할 때 더욱 그런 느낌이 들겠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무기만 소지하고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겁니다. 나는 그런 종류의 태도를 권장할 수 없어요. 우리마저 그걸 부추긴다면, 결코 끝나지 않을 폭력의 악순환이 영속될 테니까요.



앨런: 버마 인구의 80퍼센트가 시골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고, 그들 대부분은 농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활 여건은 어떻습니까?



수 지: 진짜 고통스러워요. 먹을 쌀이 없어서 삶은 바나나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이래요. 그들이 정부에 파는, 아니 강제로 팔아야 하는 쌀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자유 시장에 사서라도 채워야 해요. 그런데 정부가 쌀을 살 때는 시장 가격보다 낮게 고정가로 매입하니 농민이 손해를 보는 거지요.



앨런: 버마가 자유를 얻은 이후에 활동하게 될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모습은 어떨 것 같으십니까?

수 지: 나는 버마에서 우리가 겪은 것과 같은 종류의 정신적 외상을 경험한 모든 나라가 진실과 화해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해요. 일단 국민이 진실에 접근할 기회를 얻기만 한다면 진정으로 복수심에 불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진실에 접근할 기회가 거부당하니 분노하고 증오하는 거지요.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국민을 화나게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SLORC와 우리의 가장 큰 차이지요. 우리는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일이 하등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앨런: 수 여사님,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가택연금 기간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우리 조국에서 우리가 수인(囚人)이라는 것을 세계가 알도록 해야 한다." 여사께서 석방되신 지 몇 달이 흘렀습니다. 정말 변한 게 아무것도 없나요?



수 지: 한 가지 있네요. 우리가 우리 조국에서 여전히 수인이라는 것을 세계가 더 잘 알게 되었지요.

진실은 강력한 무기입니다




앨런: 이곳 여사님의 나라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특히 그 진실이 당국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국가에 반(反)하는 범죄로서 처벌대상으로 간주됩니다. 그런데 '진실'이 왜 그토록 위협적일까요?



수 지: 진실의 힘이 대단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점에 아주 위협을 느끼지요. 진실은 강력한 무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진실은 정말 강력합니다. 강력한 것들이 보통 그렇듯이 진실도 어느 입장에 서 있는가에 따라 위협이 되기도 하고 용기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진실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은 아주 강한 확신을 얻을 거예요. 진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거짓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은 위협을 느끼기 마련이지요.



앨런: 상황이나 결과와 상관없이 항상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직은 언제나 최선의 방책일까요?



수 지: 네, 정직은 최선의 방책입니다. 그냥 숨김없이 정직해야 해요. 이것이 제가 항상 견지해온 방식이에요. 물론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모든 걸 낱낱이 이야기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질문을 받았을 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때도 있지만, "당신에게는 말하지 않겠다."고 쌀쌀맞게 대할 때도 있지요. 이를테면 군사정보부가 나를 심문하러 왔을 때, 나는 대답하지 않겠다는 말만 했어요. 내가 만약 대답을 하면, 다른 사람을 연루시키게 되니까요. 그들은 나를 도와준 사람이 누군지 색출하러 왔거든요. 그러니 내가 대답하면 그분들을 잡아갈 게 아니겠어요?



앨런: 그렇다면 여사의 경우에는 진실을 말하는 기준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인가요?



수 지: 네, 속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대답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앨런: 정직하라는 도전에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나 가족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나 직장을 잃는 것이나 심지어 고문을 당하는 위험까지도 감수하라는 의미가 포함되나요?

수 지: 속임수를 쓰면 잃는 게 더 많습니다. 그건 확실해요. 하지만 대가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지요. 그러나 이 부분에서도 기만의 결과보다는 정직의 결과를 받아들이기가 언제나 더 쉬운 법입니다. 정직의 결과는 긴 안목으로 보면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닌 반면에, 누군가를 속이게 되면 평생토록 그 대가가 따라다니게 되거든요.



우리는 함께 민주주의의 길을 갑니다




앨런: 여사님의 일생을 되돌아볼 때, 한 개인으로서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가장 중요한 경험과 개인적 교훈은 무엇인가요?



수 지: 내가 삶에서 배운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괴로움을 안겨주는 것은 언제나 스스로 지은 악행이라는 사실이지요. 다른 사람이 나에게 행한 일은 중요하지 않아요. 이렇게 생각하는 건 내가 자라온 방식 때문일지도 몰라요. 어머니는 나에게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원칙을 철저히 주입시키셨지요. 나 자신의 경험으로 봐서도 그 원칙이 옳다는 게 입증되었고요. 또한 다른 사람을 향해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나에게 아무 짓도 저지를 수 없어요. 말하자면 겁을 줄 수 없지요. 내가 보기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를 중단하면 진짜 고통이 찾아오는 것 같아요.



앨런: 여사의 삶에 가장 큰 의미나 목적의식을 제공한 것은 무엇인가요?



수 지: 현재로서는 물론 민주주의라고 하는 대의지요. 그런 점에서 보면, 나는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한번은 NLD 당원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런 시대를 살아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행운으로 생각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정의와 타인의 복지를 위해 일할 기회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류의 기회는 아무 때나 또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런 기회는 간절히 바란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해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일할 수 있으니까요.



앨런: 좀 더 명백한 진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SLORC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한 정치 전략으로 그리고 순전히 자기네 정당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부정부패를 활용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들의 부패가 어떤 기능을 하며 어떻게 확산되는지를 조명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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