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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과 시민혁명

유창주 지음 | 두리미디어


박원순과 시민혁명

유창주 지음

두리미디어 / 2011년 10월 / 303쪽 / 14,000원



Part 1 박원순, 세상을 향해 외치다




백두대간을 걸으며 세상의 소리를 '듣다'

"인생은 늘 새로워야 하는데, 나는 진실로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자문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가끔은 멈추어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비춰보고 앞도 살펴봐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빼곡한 일정 속에서 아침 해가 언제 떠오르는지, 언제 해가 지는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갑니다. 산으로 갑니다."



2011년 6월 22일 희망제작소 홈페이지에 <'원순 씨와 함께하는 백두대간 종주' 대원 모집>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그리고 7월 19일 박원순을 단장으로 한 5인의 종주단은 두 달여 간의 여정을 계획하고 백두대간으로 향했다. 박원순은 백두대간 길에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사퇴 소식을 듣고 출마를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누가 조언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감각으로 선택한 일이었다. 그는 그동안 '혁신과통합' 등 노무현을 계승하는 이들이 결집해서 새로운 정치를 도모하는 모임, 민주당을 중심축으로 하는 야권 단일화 모임, '내가 꿈꾸는 나라' 등 새로운 정치조직을 중심으로 시국 관련 논의를 계속해왔다. 그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스스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왜 서울시장 출마를 결심했는가: 9월 2일 당시 백두대간 종주 중이던 박원순 변호사를 만나 면담한 내용을 보면 그가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결단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마음을 줄 어느 누구도, 몸을 기댈 어느 곳도 없는 처참한 상황이다. 이를 외면하면 난 역사 앞에 죄인이 되고 말 것이다. 내가 겪은 국정원 관련 사건은 내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 (중략) … 국민들의 소망은, 또 세상은 이만큼 앞서 있는데 지금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치리더들의 생각은 19세기나 20세기에 머물러 있다. 그중에서도 인구 1천만 명이 넘는 수도 서울의 지방정부는 잘못된 관행 속에 사로잡혀 있다. 무상급식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닌가. 서울시장이, 아니 서울시 재정이 허용하는 한 하면 되는 거고, 허용되지 않는다면 그 재정을 마련하면서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왜 정치적인 함의가 필요한지 모르겠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볼 때, 서울의 시정이 결코 정치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서울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좀 더 안전하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제대로 건드리지 않고 방치하는 상황이다. 그동안 내가 해온 일들은 사실 정부가 하는 공공의 영역과 다르지 않았다. 정의가 바로 서고 부패가 없고 나눔과 기부가 약동하는 사회, 또 좀 더 합리적인 정책이 만들어지고 창조적으로 실현되는 사회, 이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 바로 내가 해온 일이었다. 서울시장의 역할이란 별도의 준비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일들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박원순을 백두대간에 오르게 했을까. 박원순을 백두대간으로 떠나게 한, '국정원 소송' 사건을 이제 돌아보려 한다. 그 사건이야말로 박원순의 출마 '결단'이 왜 나왔는지를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준 눈물, 국정원 사건의 전말

"원고 대한민국(법률상 대표자: 법무부 장관 김경한), 피고 박원순." 2009년 9월 17일. 이날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로 국가가 개인을 상대로 소송을 건 역사적인 날이었다. 국가정보원이 원고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인 '박원순' 변호사에게 2억 원의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명예훼손을 이유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이고 세계적으로도 선례가 없을 것입니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서울 평창동 희망제작소 본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왜 국정원은 이처럼 역사에 남을 사건을 벌인 것일까?



전대미문의 이 명예훼손 소송은 그보다 석 달여 전인 같은 해 6월 23일자 위클리경향 에 실린 <이종탁이 만난 사람>이라는 인터뷰기사에서 촉발되었다. 그 인터뷰는 6월 10일 오전 희망제작소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박원순 상임이사가 이명박 정부의 국정 쇄신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직후였다. 인터뷰는 박 이사가 시국선언을 하게 된 이유를 묻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박 이사는 이날 이명박 정부의 권위적이고 편향적인 모습에 대해 비판하면서, 풀뿌리 시민단체의 역할이 중요함에도 현 정부는 시민단체를 무시하거나 노골적으로 개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원순 상임이사는 이날 '배제의 정치를 총체적으로 지휘하는 사령부'가 있다며 국정원의 개입 문제를 제기했다. 지금 현 정권에서는 시민단체는 물론 시민단체와 관계 맺는 기업의 임원들까지 전부 조사해 개별적으로 연락해대는 통에 많은 단체가 재정적으로 힘겨운 상태라고 말했다. 6월 18일 오후 2시쯤 기사가 인터넷에 공개되었고, 특히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 이 기사를 받아쓰면서 파장은 일파만파 번져갔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변호사)가 이명박 정부에서 국정원을 통한 민간사찰을 하고 있다고 폭로해 파문이 예상된다." 그 즉시 각 정당에서도 논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9년 9월 14일 국정원은 결국 박원순 이사에게 2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걸었다. 9월 17일, 박원순 이사는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원이 개인이나 민간단체를 불법 사찰한 것으로 의심되는 열다섯 가지 사례를 추가로 공개했다. 또한 박 이사가 수년째 운영하고 있는 아름다운가게와 '아름다운커피' 등의 사업에도 국정원이 잇따라 개입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국정원 직원이 곳곳에서 저에 대해 묻고 다닌 뒤로, 희망제작소 사업이 줄줄이 취소되거나 이유 없이 연기됐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세고 두려운 기관을 상대로 있지도 않은 허위 사실을 주장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쌍방의 대응과 주장은 각종 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과 같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1년 후인 2010년 9월 15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4부는 원고인 국정원의 패소 판결을 내렸다. "박원순 상임이사가 국정원의 '민간사찰 발언'의 진위를 확인하지 않았더라도, 국가에 대한 악의적인 비판으로 보기는 어려우므로 배상 책임이 없다." 국정원이 낸 명예훼손 손해배상 민사 소송에서 박원순 이사가 결국 승소한 것이다. 재판부는 특히 "국가는 업무 정당성이나 청렴성과 관련해 국민의 비판과 감시, 견제를 받아야 하므로 비판 내용이 현저히 악의적이거나 허위일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할 수 있으며, 내용을 입증할 책임은 국가에 있다."라고 판시했다. '박원순 국정원 소송 사건'은 개인적 차원의 일이 아니라 국가 정책에 대해 비판하고 표현할 자유를 국민들에게 되돌려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변화는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Part 2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_ 박원순이 꿈꿔온 세상




박원순의 삶

공부벌레 소년에서 서울대 제적생으로: 박원순은 경남 창녕에서 유복하지 못한 한 농가의 2남 5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경기고등학교로 진학한 박원순은 1975년에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그는 이후 법학과를 선택하려 하였으나 곧 좌절되고 말았다. 서울대에 입학한 지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5월 22일, 학내시위에 단순 가담하였다가 4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곧 제적되었다. 3개월짜리 새내기 대학생이 도대체 얼마나 나쁜 짓을 했길래 깡촌 시골에서 서울대에 진학했다고 벌인 잔치판의 여흥이 가시기도 전에 제적당했을까.



단국대로 옮겨 사법고시 합격: 박원순은 주동자급이 아니니 곧장 복학할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현실 상황은 달랐다. 복학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던 박원순은 예비고사를 다시 치르고 1976년에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사학과를 택한 것은 역사공부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는 법의 사회적 실용성을 강조한 루돌프 폰 예링의 법 이론에 감동받아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1978년 8월에 법원 사무관 시험에 합격하고, 1979년에는 강원도 정선등기소 소장으로 부임하여 1년 넘게 근무했다. 제적된 지 5년여 만인 1980년 1월에 서울대에서 복학조치를 내렸지만 그는 복학하지 않았다. 박원순은 1980년 6월에 사법고시 2차 시험에 합격했고 2년간의 연수기간을 거쳐 검사로 서게 되었다.



그러나 박원순에게 검사직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검사로서 남을 벌주고 사형 현장에 임석하는 것 등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검사라는 직업이 사람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고 사형을 구형하여 억울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는 1년 만에 그 자리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그리고 1984년부터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인권변호사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두환 집권 시기에는 공안사건과 인권침해사건이 속출했다. 1985년 권인숙 성고문 사건, 1987년 박종철 고문 사건 등을 차례로 담당한 박원순은 인권변호사로 승승장구하면서 명성도 얻고 돈도 벌었다. 그런데 그 무렵 인생의 멘토이던 조영래 변호사가 "이제 돈 그만 벌고 외국도 좀 나갔다 오라."라는 말을 남기고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말은 박원순에게 또 다른 인생을 만들어 줬다.



대한민국 기부문화의 시작, 아름다운재단ㆍ아름다운가게: 박원순은 그 후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영국과 미국 하버드 법대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지내며 종일 도서관에서 살았다. 유학을 다녀온 박원순은 참여연대에서 활발한 시민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1999년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돈쓰기 운동'을 기획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공익재단인 아름다운재단 설립을 제안했다. 그리고 2000년에는 '아름다운 1퍼센트 나눔운동'을 시작했다. 2002년, 참여연대가 창립된 지 6년 만에 시민단체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자 그는 그곳을 떠나 아름다운재단으로 향했다. 아름다운재단에서는 기부와 나눔을 위한 새로운 캠페인을 끝없이 이어갔다. 인터넷 경매사이트나 포털사이트 등과 공동으로 '사랑나눔' 캠페인을 벌이는가 하면, 지하철 예술무대에서 음악을 곁들인 기부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MBC와 함께 '365일 따뜻한 세상' 캠페인을 연중 내내 전개하기도 하고, 무의탁 독거노인을 지원하고 저소득 모자 가정의 창업을 지원하는 등 다양하고 새로운 형태의 기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아름다운가게는 2002년 3월에 참여연대 대안사업팀이 독립하면서 얻은 이름이다. 나에게 필요 없는 물건이 누군가에게는 귀한 물건이 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물품을 기부하면 아름다운가게를 통해 판매하여 재활용되게 하고, 그 수익금으로 사회 구석구석 필요한 곳을 밝히는 일을 하는 가게다. 2002년 10월 아름다운가게 1호점이 서울 안국동에 개점했다. 아름다운가게는 2003년 11월에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20만 명이 참여하는 '지상 최대 벼룩시장'을 개최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2008년 7월에는 재단법인으로 독립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가게를 열기 시작했다. 2011년 4월에는 김포에 114번째 아름다운가게가 개점했다. 2002년 1억 원이던 아름다운가게의 매출은 현재 150억 원에 육박하고 있다.



희망제작소 설립과 시민운동의 확장: 박원순의 변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6년 3월 그는 국내 최초의 민간 독립 싱크탱크를 표방하며 '희망제작소'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서울시장에 출마하기 전까지 그의 마지막 직함이던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서 지난 5년여간 박원순은 무엇을 지향해왔을까?



2005년에 그는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7개월간 강의를 했는데 그때 그는 스탠포드 대학 부근 연구소들을 찾아다니며 새롭게 도전할 거리를 찾았다.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결론은 우리 사회에는 총론만 있고 각론이 없으니 각론에 주목하자는 것으로 모아졌다. 아이디어와 자료를 잔뜩 모아 사업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희망제작소 설립 준비를 시작했다.



"참여연대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단체이고,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는 공정한 분배를 위한 단체입니다. 그 단체들이 크게 정치와 경제라는 두 물줄기를 잡아놓으면, 그 다음에는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의제들에 대해 정책적 대안을 내고 그것을 실천해야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여 희망제작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박원순의 말이다. 스스로를 '소셜 디자이너social designer', 즉 사회를 디자인하는 사람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그래서였다. 박원순은 2005년 8월에 희망제작소를 제안하여 2006년 3월에 공식 출범시켰다. 정부나 기업의 출연금 없이 설립된 독자적인 민간연구소로, 실사구시의 실학정신으로 대안 연구와 그 실천을 병행하는 '21세기 신新실학운동'의 산실을 지향하였다.



예를 들어 희망제작소에는 '행복설계아카데미'라는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전문직에 종사하다가 퇴직하거나 퇴직을 앞둔 이들이 봉사와 참여를 통해 자신이 가진 경험과 전문성을 사회와 함께 나누며 새롭게 제2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곳이다. 대기업 임원이 여성단체 활동가가 되고, 중소기업 CEO가 장애아동을 위한 전문사진작가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학교다. 또 다른 프로그램인 '희망아카데미'는 현직 지방자치단체장과 공무원들은 물론 지방의원이나 자치단체장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좋은 시장 학교'나 '남양주 시민참여 행정6급 팀장 교육'을 비롯하여 사회 각계각층에 필요한 교육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다.



희망제작소에서 백두대간 종주 길을 떠난 박원순은 산속에서 비를 만났고, 사람들의 눈물을 보았고, 세상의 소리를 들었다. 안철수 원장과 '아름다운 합의'를 이루기까지의 과정은 세상에 출사표를 던지는 그의 진실한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Part 3 '새로운 서울을 만드는 희망캠프'가 움직이다




안철수와 '아름다운 합의'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9월 1일부터 안철수(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의 서울시장 보권선거 출마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제가 이미 생각을 굳히고 원로들에게도 다 이야기해놓은 상태인데, 안철수 원장이 출마한다는 이야기가 나와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만일 제가 주변에 알리기 전에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제가 먼저 접었을 것입니다." 박원순은 나중에 이렇게 말하였다.



백두대간 종주 중인 박원순은 안철수 원장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출마할 것이라는 답장이 바로 왔다. 박원순은 자신이 출마하려는 이유를 써서 다시 안철수 원장에게 보냈다. 그리고 곧 백두대간에서 내려갈 테니 그때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안철수 원장과 주고받은 이메일에는 이미 안철수 원장이 서울시장 출마를 양보할 듯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박원순이 서울시장 출마의사를 밝힌 것이 기사화되면서 마치 안철수 원장과 자리다툼을 하는 것처럼 언론에 보도되었다.



박원순이 백두대간에서 내려온 날은 9월 5일이었다. 그가 백두대간에서 돌아온 날, 각종 매체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야권 서울시장 후보 지지율 안철수 50퍼센트, 박원순 5퍼센트.' 게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9월 6일, 박원순이 안철수 원장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세종문화회관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생각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아무 조건 없이 제가 출마하지 않겠습니다. 박 변호사님을 잘 아니 더는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변호사님의 의지가 얼마나 굳건한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기존에 보아온 '정치'의 틀 안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결과였다. 20분간의 대화, 그리고 아름다운 합의. 한국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최단 시간에 이뤄진 단일화 논의였다. 안철수 원장 덕분에 박원순에 대한 지지도는 40퍼센트 넘게 급상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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