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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스

G. J. 마이어 지음 | 말글빛냄
튜더스

G. J. 마이어 지음

말글빛냄 / 2011년 9월 / 756쪽 / 25,000원




프롤로그_ 보스워스 전투 1485년 8월 22일

보스워스 전투(Battle of Bosworth Field)에 참전했던 수천 명 가운데 단 한 명도 이 전투에 관한 증언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어떻게 봐도 이 전투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잉글랜드의 부유한 귀족이자 왕가의 핏줄을 이어받은 버킹엄 공작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 자신의 이름이 아닌 헨리 튜더의 이름을 내세워 서투르게 잉글랜드의 왕 리처드 3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스 브르타뉴의 프랑수아는 헨리가 잉글랜드로 쳐들어갈 수 있도록 소규모 함대와 군사를 지원해주었다. 헨리의 배가 플리머스 항에 도착했을 때 버킹엄은 전투에 패해 처형당하고 반란은 이미 끝나 있었다. 헨리는 그 소식을 전해 듣고 곧바로 달아났다.



프랑스로 돌아온 헨리는 다시 배를 마련하고 용병을 모아서 군대를 다시 꾸려 웨일스 남서부의 밀퍼드 헤이번에 상륙했다. 그런데 전장에는 또 다른 군대가 있었다. 스탠리 가의 군대였다. 스탠리 가는 귀족으로 승격된 지 2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이미 주요 세력이 된 가문이었다. 그들이 할 일은, 한쪽이 이기기를 기다렸다가 지는 쪽을 공격하여 전리품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어느 편에 서 있느냐에 따라 이 모든 일은 꿈처럼 혹은 악몽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순식간에 리처드는 수천 명을 거느린 왕에서 난도질된 살덩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믿기 힘든 운명의 반전으로 헨리 튜더는 잉글랜드의 왕 '헨리 7세'가 되었다.



Part 1 지나친 튜더 가의 행운 1485~1532



헨리 튜더의 행운

헨리 7세의 위대한 유산: 헨리는 운명이 가져다준 커다란 기회를 포착해 성공으로 이끌었고, 남은 인생을 바쳐 그동안 자신이 이룬 것들을 조심스럽게 통합해 나갔다. 매사에 빈틈이 없었던 그는 보스워스 전투 전날을 통치 기간의 첫날로 기록하여, 전투 당시 자신에게 맞선 모든 이들에게 반역죄를 적용했다. 헨리 7세는 교회의 권력도 빼앗았다. 잉글랜드에서 주교직은 왕실에 공헌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되었다. 따라서 왕에게 충성하는 데 익숙하고 자신의 지위가 왕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정치인들이 교회의 지배 계급을 장악하게 되었다. 귀족들은 프랑스의 왕이 더 이상 예전처럼 약하지 않다는 사실은 모르고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유럽 대륙으로 쳐들어가 잃어버린 가문의 재산을 되찾고 싶어 했지만, 헨리는 전쟁을 피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헨리 7세의 유산 중 오늘날 사람들의 머릿속에 가장 선명히 기억되고 있는 부분은, 그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법을 악용하여 부유한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은 탐욕스러운 왕으로 유명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판은 완전히 옳다고 볼 수는 없다. 헨리는 전혀 구두쇠가 아니었으며, 왕실에 상비군이 없고 비상시에 귀족들에게 전력을 의지하는 오랜 관행도 점점 무너지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국고를 채우는 일은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그는 겨우 52세였지만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잉글랜드 백성들 앞에 나타난 사람은 건강을 되찾은 헨리 7세가 아니라 그와 이름이 같은 아들이었다.



헨리 8세의 등장: 17세의 '헨리 8세'는 잉글랜드 역사상 거의 90년 만에 처음으로 경쟁자 없는 정권 교체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이러한 정권 교체만 봐도 헨리 7세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뤄냈는지 알 수 있다. 왕이 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대는 없었다. 대포의 출현으로 인해, 오랫동안 방어에 꼭 필요했던 중세의 춥고 어두운 석재 요새는 공격에 취약해져 곧 사라졌다. 새로 발명된 대포는 기술적으로 불완전하고 옮기기도 힘들며 사용하기에 안전하지는 못했지만 이 무기 덕분에 중앙정부는 반란을 일으키려 하는 이들보다 훨씬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갑자기 온 왕국을 통치하게 된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즉위하기도 전에 결혼함으로써 독신생활을 청산했다.



그가 이렇게 빨리 결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주 가까운 곳에 아름답고 교양 있는, 왕비가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죽은 형의 미망인이자 스페인 왕 페르디난도의 딸인 캐서린이었다. 헨리 7세 통치 말기의 어둡고 우울하던 왕궁에 이제는 음악과 춤과 웃음이 넘치기 시작했다. 왕실의 중심에는 행복한 왕과 왕비가 있었다. 젊은 왕은 지적 수준이 비슷하면서 자신보다 훨씬 더 경험 많고 성숙한 왕비에게 푹 빠져 있었다. 백성들은 헨리가 어떤 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는지 알지도 못했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수년간 음울한 시간을 보낸 그들은 이제 열정적이고 활기 넘치는 젊은이가 왕위에 올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잉글랜드에 새로운 아침이 밝은 것 같았다.



왕의 중대사

앤 불린의 치명적 매력: 즉위 20주년에 가까워졌을 때 헨리는 국가 재정과 상관없는 문제에 부딪혔다. 이 문제를 이루는 요소는 두 가지였는데,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나는 캐서린 왕비가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 나이 든 중년의 뚱뚱한 부인이 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헨리 7세가 짙은 눈동자에 가느다란 목을 지닌 젊은 앤 불린(Anne Boleyn)에게 열렬히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헨리는 자신이 옳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울지 추기경은 대법관으로 처음부터 헨리의 편에 서 있었다. 몇 년 후 헨리와 울지는 캐서린과의 결혼에 먼저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헨리였다고 공언했다. 이 모든 계획의 뒤에는 앤 불린이 있었다.



1520년대 중반, 앤의 언니 메리는 왕의 정부가 되었다가 몇 년 만에 연금을 받고 버려졌고, 아버지는 귀족으로 승급되어 로치포드 자작이 되었다. 앤 자신은 결혼을 하지 못한 채 독신으로 살게 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1526년, 헨리가 왕비와의 결혼에 대한 회의감에 빠지면서 그의 관심은 다른 모든 여인을 제치고 앤에게만 집중되었다. 헨리는 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랑의 화살을 맞았다"고 고백한 적도 있다. 헨리는 앤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그녀를 단순한 잠자리 상대가 아니라 왕비로 맞아들이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의 육체적인 결합은 수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왕의 정부가 됨으로써 얻는 이익이 얼마나 제한적일 수 있는지를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그녀가 헨리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헨리는 잉글랜드의 수석 대주교인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왕과 왕비의 결혼 무효화를 선포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헨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를 지체 없이 보냈다. 1527년, 교황의 잉글랜드 특사인 캄페지오가 잉글랜드에 도착하기 몇 달 전에 헨리는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판결을 받지 못하면 잉글랜드 교회와 로마 교황청과의 오랜 관계를 끊을 수도 있다고 협박하듯 말했다. 왕과 교황 간의 분쟁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울지는 헨리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좌절과 혼란

결혼 무효화 공판: 런던의 블랙프라이어스 수도원에서 처음으로 공판이 열렸다. 공판은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6월 18일, 캐서린의 대리인들이 출두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캐서린이 직접 법정에 나타났다. 그녀는 교황에게 편지로 호소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교황의 특사들에게 이 공판 자체가 불합리하며 자신에게 전적으로 불리하므로 아무런 진술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애원인 동시에 도전이기도 했다. 헨리에게는 좌절과 혼란이 잇따랐다. 휴정되기도 전에 공판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공판이 진행되던 중 그는 잉글랜드의 모든 주교들이 이 결혼에 대한 문서에 서명하고 날인했으므로, 그들은 적어도 이 결혼의 타당성이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교 중 한 사람인 존 피셔는 "왕과 왕비의 이 결혼은 그 어떤 힘으로도 무효화할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으며, 이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다"고 말했다.



완성

헨리와 앤 불린의 비밀 결혼: 1532년 말이 가까워지면서 두 개 현안의 진행 속도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는 별개의 사건이었던 왕의 이혼 소송과 교회에 대한 공격이 서로 얽히게 되었다. 헨리는 앤 불린에게 펨브로크 후작이라는 높은 작위와 이에 어울리는 후한 수입, 그리고 장래에 그녀가 '남자 상속자'를 낳으면 작위와 유산을 물려줄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렇게 아량을 베푼 이유는 앤이 결국 마음을 바꿀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앤이 왕의 아들을 낳는다면 그들 모두의 미래가 보장될 수 있다. 앤의 임신은 왕이 추진하고 있던 모든 일의 진행 속도를 한층 더 높여주었다. 앤이 낳을 아들을 적자로 만드는 일이 당장 시급해졌다.



결혼식은 비밀에 부쳐졌다. 앤의 뱃속에 아이가 생겼을 때 이미 앤과 헨리는 결혼한 상태였던 것처럼 날짜를 속이기 위해서였다. 헨리는 간절히 원하던 부인을 얻었고 그녀의 뱃속에는 그의 아이가 있었다. 남은 일은 그녀와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캐서린과의 결혼이 무효화될 때까지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교황은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이 적법하다고 확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괴롭히고 회유하려는 헨리의 집요한 시도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파문이라는 것이 무기가 될 수 있는지는 헨리도, 교황인 클레멘스도 알 수 없었다. 이런 시나리오가 완성되기 위해 남은 일은 하나뿐이었다. 앤이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그러나 9월 7일,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다. 아이는 헨리의 어머니 이름을 물려받아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Part 2 몬스터(1533~1547)



첫 번째 희생자

왕위 계승법과 성직자 복종법: 왕조의 미래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었고 엘리자베스의 탄생은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못했다. 이제 40대가 된 왕은 남자 상속자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주교 총 대리였던 크롬웰의 지시에 따라 왕위 계승법(Act of Succession)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이 법의 승인으로 인해 합법적으로 왕의 첫 번째 결혼을 무효화하고 두 번째 결혼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판결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처벌할 수 있는 방어벽도 갖추게 되었다. 왕을 위해 의회가 승인한 법은 이것뿐만 아니었다. 의회는 성직자 보호법(Act the Submission of the Clergy)을 제정해, 2년 전 헨리가 성직자 협의회로부터 받아낸 모호한 항복을 법적으로 정당하게 만들었다.

교회의 권위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헨리는 백성들이 자라면서 줄곧 지니고 있던 신앙과 관습과 생각들을 하나둘씩 폐기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가 일으킨 변화들을 옹호하게 하고 그 변화의 정당성을 믿는다고 맹세하도록 강요한 것은, 잉글랜드에서 이전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개인의 진실성에 대한 공격이었다. 백성들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불만을 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러한 불만들은 금방 터져 나오지는 않았다. 반면 왕의 추가적인 계획들은 금방 실현되었다. 이혼을 반대하던 켄트의 수녀와 관련자들을 잔인하게 처형한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거의 신과 같은 지위

캐서린의 죽음: 1536년 초, 캐서린은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킴볼턴 성에 유폐된 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녀는 딸의 방문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은 그 청을 거절했다. 어쩌면 그는 단지 캐서린의 마지막 소원마저 거절함으로써 한때 왕비였던 그녀를 벌하겠다는 비열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물론 헨리의 현재 부인은 그의 거절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앤 불린은 캐서린과 이제 스무 살이 되어 혼기에 접어든 메리의 존재를 자신의 위치와 딸 엘리자베스의 미래, 그리고 앞으로 낳게 될 자식들의 미래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며칠 후, 나이 들고 지치고 슬픔에 잠긴 캐서린은 50세가 된 지 3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앤 불린의 몰락과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 아이러니컬하게도 캐서린의 죽음으로 앤은 더 취약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로마 교회의 시각에서 앤은 왕의 부인이 아니라 정부였고, 헨리는 부인과 사별했으니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재혼할 수 있었다. 몇 달 전부터 헨리는 앤의 시녀 중 한 명인 제인 시모어에게 공공연하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앤이 임신했다는 사실에 비하면 그런 일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캐서린의 장례가 치러진 1월 29일에 앤은 유산했다. 태아는 4개월 된 아들이었다. 헨리는 그녀를 위해 자신의 왕위를 위태롭게 할 마음이 없었다. 이제 그의 결혼은 전 세계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인정받아야 할 일이 아니라, 골치 아픈 문제이자 위험의 근원, 그의 안전을 가로막는 벽과도 같았다.



5월이 되자 그는 행동을 개시했다. 앤은 간통 혐의로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다. 그녀와 함께 남자 다섯 명도 기소되었다. 앤의 파멸은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고 어쩌면 그녀를 벌하고 싶어 한 남편, 그리고 국제 정세의 변화로 인해 벌어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앤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때때로 발작적인 웃음이나 울음을 터뜨리곤 했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은 왕비다운 침착한 태도로 단호하게 결백을 주장했다. 5월 19일, 참수형을 당하기 직전에 앤은 이렇게 기도했다. "나의 군주이자 주인인 왕을 구원하소서. 그는 경건하고 고결한 왕입니다."



헨리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앤이 처형된 다음날 아침, 헨리와 제인은 둘 다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고 따라서 먼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5월 30일에 결혼할 예정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이번에도 헨리는 예비 신부에 푹 빠져 있었다. 20대 후반의 그녀는 지적인 여인이었다. 그러나 헨리는 신체적인 면에서 이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한때 멋진 청년이었던 왕은 이제 체중이 심하게 불어나 있었고 만성 두통과 악취 나는 궤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1536년 여름의 잉글랜드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헨리의 최후

헨리 치세 말기의 폭정: 수도원에 대한 횡포는 1539년 5월 의회에서 제2차 수도원 해산법이 통과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1536년 이후로 몰수된 모든 교회 재산과 앞으로 몰수될 모든 교회 재산을 법적으로 왕실의 재산이라고 규정하는 법이었다. 1540년 봄이 되자 잉글랜드와 웨일스에는 이제 단 하나의 수도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잉글랜드의 여러 학교와 병원들, 그리고 노인과 빈민을 돌보는 시설이 갑작스럽게 무너져 이후 수세기 동안 되살아나지 못했다. 이 모든 일들을 벌이는 동시에 헨리는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전 세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숭배하고 순례하는 성지들도 파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물론 이를 통해 얻은 정치적인 이점도 있었다. 가장 세력 있는 가문들에게 수도원의 약탈품을 나누어주고, 또 다른 가문들에게는 약탈품을 받아 세력을 키울 수 있게 해줌으로써, 그는 자신이 한 일들을 지지해줄 강력한 지지층을 확보했다. 그로 인해 후대 왕들은 백 년 동안 재정난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헨리는 훗날 군주제가 무너지는 데 공헌한 셈이 되었다.



폭군의 최후: 잘못을 저지르면 자신에게 대가가 돌아온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1547년 1월 27일, 어느 용감한 시종이 헨리에게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며 고백성사를 하고 싶은지 묻자 헨리는 자신이 지은 죄가 실제보다 훨씬 더 크다 해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고 대답했다. 신앙만 있다면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분명 헨리 본인은 기꺼이 자신이 한 일들을 통해 심판을 받고자 했겠지만, 아마도 그리 좋은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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