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심다
박원순, 지승호 지음 | 알마
희망을 심다
박원순, 지승호 지음
알마 / 2009년 4월 / 430쪽 / 13,000원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 깡촌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박원순왕복 30리를 걸어 등교하는 7남매 중 여섯째
지승호(이하 지) 30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등교하셨고, 그것이 지금의 체력을 길러주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서 7남매 가운데 여섯째며, 대구에서 버스로 두 시간을 들어가 다시 걸어서 20리를 더 들어가는 시골인 경남 창녕에서 자라셨는데요. 어린 시절 기억이 남아 있으신가요?박원순(이하 박) 예, 맞습니다. 과거를 추억하는 시간은 별로 없죠. 바쁘게 지내니까요. 나이가 들면서 가끔 그런 생각이 절로 떠오르기도 하는데, 사실 아주 어릴 때 기억은 별로 없고요. 심지어 초등학교 졸업사진조차 없어요. 아주 시골이어서 사진관도 사진기도 없었어요. 왕복 30리를 걸어 다니는 것이 어린 나이에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날씨가 얼마나 추웠는지 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어요. 쇠죽 끓이는 솥뚜껑 위에 신발을 올려두면 읍내까지 걸어갈 때 발이 따뜻합니다. 처음에는 데운 덕에 따뜻하고, 나중에는 땀이 나니까 계속 따뜻하죠. 아버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기억이죠.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지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경우, 보통 가족의 희생이 따르는데요. 큰누님과 매형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미안함 때문인지 여성친화적인 활동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박 아무래도 그런 게 있죠. 변호사 해서 돈 좀 많이 벌었으면 누님이나 동생한테 집이라도 한 채 사주고 그럴 만하잖아요. 형편이 조금 나아지려고 하는데 시민운동 하고, 인권변호사 하면서 그것을 못해준 게 늘 미안하죠. 다만 제가 그러지 못했지만 지금 그런대로 살고 있고, 집은 못 사줬지만 저를 조금은 자랑스러워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생각해야 제 마음이 편할 거고요.(웃음) 저 때문에 공부도 못하고 농사만 뼈 빠지게 지은 동생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신라 향가, <제망매가祭亡妹歌>에 가을 단풍이 낙엽이 되어 서로 흩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같은 가지에 태어나 가는 곳 모르겠구나."라고 했는데, 우리 남매도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면 오빠 노릇을 제대로 해보겠다고 용서를 빌었어요.
석 달 동안 양말 한 번 안 벗었어요 - 서울대생이 된 촌놈 박원순의 공부법석 달 동안 양말 한 번 안 벗었어요
지 고등학교 진학한 다음에 환경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은데요. 부모님과 떨어져서 지내셔야 했고요. 박 1년 재수를 했는데요. 나중에는 독서실 같은 데서 3개월을 지냈어요. 다른 애들은 라면도 끓여 먹고 잘도 지내던데, 그런 친구들은 거의 3수, 4수 하더라고요.(웃음) 애들은 의자 몇 개 놓고서 반듯하게 잠도 잘 자요. 저는 책상에 살짝 엎드려 조금씩 잤죠. 3개월 동안 양말을 한 번도 안 벗었어요. 그랬더니 땀이 차서 발바닥이 하얗게 뜨더라고요. 나중에는 영어와 국어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웠습니다. 문제집도 다 외웠어요. 그래서 무슨 문제가 나올지 다 아는 경지가 됐죠. 그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입학한 지 3개월도 못 돼 수감되다
지 시위에 단순 가담한 것 아니었습니까? 4개월씩이나 사셨는데요.
박 그때는 그랬어요. 제가 구속된 사건을 오둘둘사건, 김상진열사추도식사건이라고 하는데요. 이 사건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을 반대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선포한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으로 잡혀간 것입니다. '긴급조치 9호'는 그 당시 유신헌법을 비방하거나 그것을 비판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처벌하도록 규정한 비상조치였습니다. 그때 100명 이상이 구속되고 한심석 서울대 총장과 시경 국장, 요새로 따지면 서울경찰청장인데, 두 사람이 옷을 벗었어요. 정부 당국에서는 그 정도로 심각한 도전으로 봤기 때문에 저 같은 단순 가담자도 보통 훈방이나 일주일 정도 구류를 살게 하면 될 일인데, 정식으로 구속한 거죠.
검사 그만두고 공부하고 싶었어요 - 6개월 만에 사표 쓴 청년 검사 박원순
감옥 생활을 마치고 나오면 금세 복학이 될 줄 알았던 박원순은 해가 바뀌어도 복학이 되지 않자 방황을 하게 된다. 당시 분위기로 봐서 대학에서도 제적생을 받아주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듬해 다시 대입시험을 치르고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한다. 입학 후 법원 사무관 시험에 합격한 그는 휴학을 하고, 강원도 정선에서 등기소장 겸 즉결심판소장으로 1년간 근무한다. 그 후 다시 사법고시를 준비하여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그는 성적이 비교적 상위여서 판검사나 변호사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사회를 좀 더 가까이, 현장에서 보기 위해 검사를 지망했다.
사람 잡아넣는 일이 재미없는 청년 검사 박원순
지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검사를 지망하신 겁니까?
박 판사는 너무 예견되는 것이고, 거기는 공부의 연장선일 수 있거든요. 그런데 검사는 사회를 좀 더 가까이서, 현장에서 보는 위치이기 때문에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검사가 안 될 수도 있었어요. 검사가 되기 위해 면접을 봤거든요. 그때 검찰국장이 면접을 보면서 '데모 안 할 거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데모할 것 같으면 법원 사무관을 했겠느냐?'고 대답했던 것 같아요. 그것은 재미로 물어봤던 것 같고, 이미 그분들 판단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겠죠. 검사를 하면서 데모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 1년 만에 검사를 그만두게 된 데에는 스스로 생각했던 검사상과 현실이 달랐기 때문인가요?박 처음부터 평생 검사를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제가 보기에도 하기 힘든 경험인 것 같아 해봤는데요. 검사는 결국 사람을 잡아넣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이게 뭐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웃음) 검찰 조직에 내 청춘을 묻고, 검사로 내 청춘을 보내기는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서 6개월 만에 사표를 냈는데, 검사장이 1년은 일단 해보라고 했어요. 이 양반도 나중에 인사이동에서 물먹었어요. 그래서 제 사표를 받아줘서 1년 만에 그만뒀죠.
검사 그만두고 공부하고 싶었어요
지 검사 시절 억울한 사연이 있는 범죄자의 경우 오히려 변호를 하셨다고 했습니다. 억울한 고문 피해자나 법률 피해자들을 겪어본 경험 때문에 인권변호사가 되신 건가요? 박 그런데 제 뜻이 이미 그런 데 있지 않았어요. 공부도 많이 하고 싶었고, 변호사를 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막상 해보니까 이것도 너무 바쁜 거예요. 변호사 개업 광고를 냈을 때, 공부하겠다는 약속도 넣었던 것 같아요. 제 학문을 위해서도 노력하겠다는 말을 했는데, 보통 변호사 광고 내면서 그런 얘기는 안 하잖아요. 형사, 민사, 가사 사건 전문가라고 광고하지.
구석구석에서 할 일이 쏟아지는 원순씨 - 인권변호사 박원순, 시대의 영웅들을 변론하다'법'으로 야만과 맞서다
지 본격적으로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박 1983년에 개업을 했거든요. 1983, 84년은 시국이 엄중했지만 사건은 없었어요. 그러다가 1985년 후반기에 민청련사건을 시작으로 사건들이 생겨나서 1986, 87년에는 사건이 홍수가 났습니다. 1984, 85년 들어서는 제가 조영래 변호사님이 하는 사건에는 거의 같이 변론을 하게 됐어요. '망원동수재사건(1984)'이라든지, '구로동맹파업사건(1985)', 그다음에 '부천서성고문사건', 거의 모든 것을 같이했죠. 그러면서 조영래 변호사님한테 엄청 많이 배웠습니다. 인생의 스승 몇 분 가운데 한 분이지요. 이분은 탁월한 통찰력이 있는 분입니다. '부천서성고문사건'은 이상수 변호사가 먼저 관여한 사건인데, 자기가 그것을 꿰차더라고요.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릴 사건이라고 처음부터 규정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셨어요.
인권변호사, 시대의 영웅들을 변론하다
지 그 외에 기억나는 사건은 없으신가요? 보도지침사건, 구로구청사건, 건대사태도 맡지 않았습니까? 알려지지 않았거나 본인에게 의미 있는 사건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박 제가 변론서를 쓴 사건들은 특별히 기억에 남고, 많이 배웠죠. 풀빛출판사에서 나온 '『한국 민중사』사건'이라든지, '민족미학연구소사건'이라든지, '미문화원사건', '말지사건(보도지침사건이라고도 한다)', 그다음 개별 사건이지만 쭉 변론서를 쓴 게 있습니다. 보통 변론서까지는 잘 안 쓰거든요. 변론서를 쓴 사건들은 변론서를 쓰기 위해 해당 기록은 물론이고 유사 사례, 외국 경험까지 연구를 해야 합니다. 그때 당시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죠. '현실 법정에서는 변론을 해봐야 무죄가 나거나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결국 국민과 역사를 향해서 피고인들의 진실과 우리의 주장들을 얘기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변론서를 많이 쓰게 된 거죠.
지 인권변호사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거나 보람 있었던 일은 어떤 일입니까?
박 솔직히 말하면 그때 일부 숨겨준 사람들도 있었어요. 우리 집에 당시 민주화운동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었던 '장기표' 씨도 잠깐 와 있었고요. 그런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상당했죠. 악몽을 꾸기도 했어요. 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변호사나 다른 사람들이나 차별성이 없잖아요. 물론 '이돈명 변호사님'이 감옥에 가기는 했지만, 변호사를 데려다가 고문을 할 수 있었던 그런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변호사는 일선에 선 사람들을 돌보는 후방지원군이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권변호사가 중심에 설 일이 아니라 우리가 변론했던 그 시대의 영웅들이 중심이 되어야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우리가 중심에 서게 되었어요. 법치주의가 회복되고, 법률이 무기로 가능한 시대가 왔거든요. 그게 말하자면 참여연대 시절입니다.
앞으로 나아간 2보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 밖에서 본 한국, 밖에서 한 궁리1987년의 민주화 열기로 인해 국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으나 당시 민주화운동의 리더였던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의 분열로 인해 그해 말 치렀던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을 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주기에 충분했고, 그 이후 (세계의 한 축이던)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은 그것에 경도되지 않았더라도 다른 세계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좌절감에 빠져 있을 무렵 조영래 변호사는 박원순에게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고 오는 것이 어떠냐?'는 조언을 했고, 박원순은 1991년 8월, 영국으로 떠난다.
앞으로 나아간 2보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지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때 느꼈던 심정과 비슷한 정도로 후퇴한 면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동안 우리가 만들어왔던 것은 무어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으십니까? 박 외형적으로 보면 뭐랄까, 인권이라든지 사회적 투명성이라든지, 절차적 참여의 문제라든지, 시민사회의 역할이라든지, 표현의 자유라든지, 이런 것에 있어서 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당장 권력의 초기 상황에서는 그럴 수 있지만 세월이 1년 지나고 2년 지나면서 이런 분위기는 바뀔 거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국민들은 한번 맛본 자유를 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람들이 흔히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옛날 전두환 시대가 좋았다.'고 말하지만 막상 전두환 시대로 가면 견디기 힘들거든요. 우리가 이룩한 일정한 민주주의적 성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요즘 느끼는 것은 '역사가 일직선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요. 늘 그렇잖아요. 2보 전진했다가 2보 후퇴하기도 하고, 때로는 3보 후퇴해서 3보 앞으로 가기도 하는데요. 우리가 성취한 2보 앞에서 당장은 잠깐 후퇴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그 2보 앞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죠. 시민사회나 구성원들의 노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지면 사람들이 '경제, 경제' 하고, 경제를 위해서는 다른 것을 양보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막상 후퇴가 일어나고 나면 불편해지고 저항하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법 만들기, 좋은 법 지키기
지 외국에 나가면 한국을 더 사랑하고 더 잘 보게 된다고 하는데요. 밖에서 본 한국 시민사회의 모습은 어떻던가요? 박 저는 두 가지를 느꼈습니다. 하나는 인권이 우리만 악화되어 있고, 우리가 최악인 줄 알았어요.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도서관에서 한국말을 가르쳐주면서 도서관 자료도 보고 복사도 하고 그랬는데요. UN이 주도해서 만든 '국제인권협약'이라는 게 있어요. 이 협약에 따라서 국가가 내는 리포트가 있고, 그 나라의 인권단체들이 내는 카운터 리포트(감시 보고서)가 있어요. 정부가 제출한 보고서의 심사 과정에서 인권단체가 독자적으로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정부 기관의 잘못을 바로잡는 건데요. 그것을 보니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온 세상에 인권 문제가 심각하더라고요. 남미도 그렇고, 아시아도 그래요.
또 하나는 선진국일수록 인권단체의 카운터 리포트 분량이 많아요. 말하자면 자기 정부에 대해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는 거죠. 후진국일수록 그런 것이 없습니다. 북한의 경우 "조선민주주의인권공화국은 노동자의 낙원이고, 인권 문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딱 한 장짜리예요. 물론 카운터 리포트 같은 것은 없죠. 우리나라가 세계인권협약에 가입한 이후 우리도 카운터 리포트를 내기 시작했는데요. 지금은 굉장히 잘 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인권단체들이 살아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한국이 민주국가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맥주 구걸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 대한민국 안 걸리는 데가 없는 '박변 주소록'과 참여연대
박원순 변호사는 귀국 후 학자, 변호사, 운동가들과 함께 참여연대 설립을 논의하게 된다. 박원순의 말대로 그것은 환상이자 운명의 결합이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해석과 방향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사회과학자들, 이전 방식의 저항운동이 아닌 새로운 사회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운동가들, 현 사회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세우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 될지 고민하고 있던 법률가들, 그들은 자연스럽게 참여연대를 통해 결집된다. 이른바 민중운동 진영에서는 참여연대를 두고 개량적 운동이라며 세분화된 백화점식 운동으로 폄하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들은 참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참여연대의 역사를 시민운동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중심에 박원순이 있었다.
맥주 구걸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지 공부하면서 생각했던 것과 막상 시민단체를 운영하면서 느낀 부분이 달랐을 텐데요. 이론과 현실 사이에서 차이도 느꼈을 것 같습니다. 박 예. 그런 거야 당연히 있죠. 제가 많은 제도와 변화를 위한 아이디어를 외국에서 가지고 와서 한국 사회에 적용하고 실천해왔는데요. 실제 적용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구조도 다르고, 역사적 전통도 달라서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었어요. 그래도 인간이라는 존재가 너무나 유사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많이 깨달았죠. 어느 사회든지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 선하다고 믿어요.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악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거든요. 그런 것을 사전에 견제하는 시스템이 미국의 제도들입니다. 그런 제도들은 대부분 한국에 적용시킬 수 있었어요.
모금만 하더라도 참여연대 초기에 호프집을 여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호프집을 열어서 수익을 높이려면 맥주를 사와서는 안 되거든요. 기부를 받아야 되는데요. 찾아보니까 고등학교 선배 중에 주류회사 상무가 한 분 계셨어요. 찾아가서 얘기했더니 다섯 박스를 주겠다고 해서 그것 가지고는 안 될 것 같다고 했더니 그거면 충분하다는 겁니다. 박스의 개념이 우리랑 달랐던 거죠. 그래서 행사하고 보니까 오히려 맥주가 많이 남았어요. 그때 그 재벌회사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맥주 구걸까지 하게 된 내 신세가 참 초라하더라고요. 하지만 한신 장군이 동네 부랑자의 바짓가랑이에 들어가서 기꺼이 굴욕을 감수했듯이 제 한 몸 작은 굴욕을 느낀들 세상을 바꿀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생각으로 다녔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