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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에 관한 10가지 신화

캐머런 스미스 외 지음 | 한승


진화에 관한 10가지 신화

캐머런 스미스, 찰스 설리번 지음

한승 / 2011년 9월 / 252쪽 / 13,000원



적자생존


'적자생존'은 진화론에서 들어온 용어 가운데 일상 대화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말이다.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면, 가젤을 쓰러뜨리는 사자, 상대를 난타하는 권투선수, 서로 뿔을 부딪히는 큰뿔양 등을 볼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는 척을 한다. "보이니? 적자생존이야, 자연의 질서이지."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극적인 경쟁에만 초점을 맞춘 자연세계의 한 면에 불과하다. 초점을 옮기면, 난폭한 경쟁에 지배되지 않는 동식물의 관계로 이루어진 세계가 눈에 들어온다. 예를 들어 포식자가 먹이를 먹는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외에 대다수 동물은 서로 건드리지도 않고 그냥 둔다. 먹는 먹이가 다르면 더욱더 그렇다. 물론 공생도 있다. 먼저 다윈에게로 돌아가자.

다윈은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썼을까?: 1872년 그는 이렇게 썼다. "개체의 유리한 차이와 변이의 보존, 해로운 차이와 변이의 파괴를 나는 자연선택 또는 적자생존이라고 해 왔다." 다윈의 말에 따르면,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은 근본적으로 같다. 둘 다 어떤 집단에서 환경에 잘 맞는 형질을 지닌 개체는 보존되는 경향이 있고, 덜 적합한 형질을 지닌 개체는 죽어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윈이 여기에서 우리가 강자만 살아남는다는 개념과 종종 무심코 연관시키는 야만적인 힘 같은 어떤 특징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다윈은 어떤 구체적인 특징을 적응도와 동일시하여 말한 적이 없다. 따라서 사람들이 무심코 적자생존을 언급할 때 일차 경고를 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혹은 어떤 환경에서의 적자냐고 말이다. 물론 적자는 가장 적합한 자라는 뜻이다. 그러니 적응도(fitness)라는 개념 자체를 살펴보자.

적응도: 집단유전학 관점에서 말하면, 적응도는 기본적으로 당신이 자손을 가질 통계적 가능성, 즉 당신의 개체로서의 유전적 미래에 거는 우주적인 내기이다. 적응도는 근육이나 이빨 크기 같은 생물의 어느 한 신체적 특징이 아니다. 그것은 박쥐든 물소든 대나무든 상관없이 개체의 번식 잠재력을 나타내는 척도이다. 집단유전학자들은 실험실 수준에서 이론적인 적응도를 계산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어느 개체 적응도의 정확한 확률을 계산하려면 수많은 슈퍼컴퓨터를 불철주야 최대한 가동시켜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자손을 가질 확률은 수많은 요인(각각이 선택압이다)에 영향을 받을 수 있고, 그에 따라 적응도 점수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약 10만 년 전에 가족과 함께 살던 네안데르탈인 남성이라고 상상해 보자. 당신의 적응도, 즉 당신이 자손을 가질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는 선택 요인은 무엇일까? 야수 같은 힘은 하나의 자산이지만, 그 힘만 있으면 당신은 정말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당신은 많은 걱정거리를 안고 있다. 저장이라는 개념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던 때라, 당신은 매일 식량을 찾아 동굴 밖으로 나가야 한다. 또 당신이 점심거리가 될 위험도 있다. 현대의 사자보다 더 큰 200킬로그램이 넘는 포식자인 동굴사자가 바깥에 서성거리고 있다. 또 불도 걱정거리이다. 일주일 내내 비가 내리고 있고, 불이 꺼지면 다시 피우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리고 당신은 짝도 찾아야 한다. 분명히 어느 순간에 네안데르탈인에게 미치는 선택압은 무수하며,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고 대개 예측할 수 없다. 객관적으로 적응도를 '한 생물의 번식 가능성'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쉽지만, 네안데르탈인 사례는 그 가능성이 시시각각 변하는 확률값임을 보여 준다. 적응도는 굳어진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적응도는 전체적으로 어느 생명체의 환경에 상대적이며, 거기에서 선택 환경(selective environment)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선택 환경을 조사하면 '적자생존'이라는 모호한 용어의 초점을 더 잘 맞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알아보자.

선택 환경: 적응도를 살펴보는 또 다른 방법은 그것을 당신과 당신의 선택 환경 사이의 적합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덜 노골적인 경쟁 세계에서도 선택이 작용함을 알 수 있다. 당신이 튼튼한 부리와 만성 편두통을 막아줄 뇌를 단단히 감싼 치밀한 머리뼈를 갖춘 딱따구리라고 하자. 당신은 배가 좀 고프다. 나무를 부리로 마구 두드린 뒤 벌레가 있는지 귀를 기울였는데,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것인 단지 청각에 문제가 있을 뿐이며, 당신의 이웃이 소리를 더 잘 듣는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단지 청각 이상 때문에 당신이 벌레를 잡을 기회가 줄어들고, 당신의 건강이 나빠질 수 있으며, 이웃보다 짝을 구할 기회가 줄어들 수 있다. 이 사례에서는 사소해 보이는 환경 요인 하나, 즉 나무껍질 속에서 벌레가 굴을 파고 나아가면서 내는 소리의 크기가 딱따구리 선택 환경의 중요한 측면이다. 이 특정한 선택압이 미묘하다는 점만 보아도 선택 환경이 대단히 복잡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엄청난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해, 당신이 자신의 선택 환경을 개괄하려 한다고 상상해 보자. 당신은 국지적인 압력부터 시작하여,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얼마나 멀리까지? 당신은 자신의 선택 환경을 개괄하려고 시도하다가 돌아버릴 지경이 될 수도 있고, 너무 깊이 생각하다가는 편집증을 일으킬 수도 있다. 비록 기술을 이용하여 몇몇 선택압을 완충시킬 수 있을지라도,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어떤 생물도 고립된 섬이 아니다. 각 개체는 환경특이적 '해결책'을 요구하는 선택압의 복잡한 그물 속에 잠겨 있다.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적응도를 확보해 주는 단일한 적응은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유전학자가 유전자풀의 다양성을 집단 건강의 척도로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개체가 똑같다면, 어느 한 가지 환경 변화, 이를테면 한 질병으로 집단 전체가 괴멸될 수 있다. 따라서 유전적 다양성은 유전적 건강, 파국을 막는 장벽이다.

적자는 살아남을까?: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이 중요한 복잡성을 어떤 식으로 보지 못하게 가리는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 살아남는 것은 적자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변하는 선택압으로 가득한 엄청나게 복잡한 세계에서, 어떤 한 가지 특징(야수 같은 힘)이 모든 상황에서 생존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적합'해진다는 것은 당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있으며, 언제 거기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저 이론일 뿐이다

누군가가 진화는 그저 이론일 뿐이라고 내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이 견해는 미국에서 너무나 흔한 나머지, 진화를 받아들이는 많은 사람조차 그것이 마치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단지 하나의 이론에 불과한 것인 양 생각한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진화가 그저 이론일 뿐이라며 다른 '이론', 즉 창조론과 그것을 치장한 쌍둥이인 지적 설계론을 공립학교에서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교과서의 진화 내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이론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는 점을 간과한다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일상 대화에서 사용하는 이론이라는 단어는 다른 모든 추측이나 직감과 별 다를 바 없는 추측이나 직감을 의미한다. 그러나 과학자가 이론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매우 다양한 사실에 대한 논리적이며 검증된 근거가 충분한 설명을 말하는 것이다. 과학 이론은 추측이 아니다. 한편 과학 분야가 모두 같은 방법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접근 방식은 같다. 우선 과학자는 어떤 대상이나 과정을 관찰할 것이다. 그다음 대상이나 과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혹은 그것이 어떻게 지금처럼 되었는지를 묻는 질문을 확정짓는다. 이어서 지식을 토대로 한 추측인 가설의 형태로 질문에 답하고자 시도한다. 이 가설은 예측을 하고 실험이나 심화 관찰의 결과가 예측에 들어맞는지를 알아봄으로써 검증된다. 그리고 결과가 들어맞지 않으면, 가설은 거부되거나 수정을 거쳐 다시 검증을 받는다. 반면 가설이 마침내 예측과 들어맞으면, 과학자는 다른 과학자가 그 가설을 직접 검증할 수 있도록 그 정보를 공유한다. 그런데 그런 이론도 영구적이지 않다. 이론도 수정될 수 있다.

어쨌든 진화는 진정한 과학 이론이다. 그것은 판구조론이라는 지질학 이론이 지진, 지진해일, 대륙이동, 산맥 형성을 입증하고 설명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뒷받침이 잘 되어 있다. 일부에서는 진화가 과거에 관한 것이므로 예측할 수 없다고 투덜거리면서, 진화는 진정한 과학 이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기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측이 반드시 미래에 관한 것일 필요는 없다. 당신이 분자생물학자이고, 사람이 다른 어떤 종보다 침팬지와 더 가까워 보인다는 것을 관찰해 왔다고 가정하자. 진화 관점에서 그것은 우리가 침팬지와 공통 조상을 지닐 뿐 아니라, 그 공통 조상이 우리와 다른 현생 동물의 공통 조상보다 더 최근에 살았음을 시사한다.

당신은 두 개체가 더 가까운 친척일수록 유전적 공통점도 더 많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육촌보다 사촌과 유전적으로 더 가까운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당신은 우리가 다른 어떤 현생 종보다 침팬지와 유전적으로 공통점이 더 많다고 예측(가설)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로 공통점이 더 많다고 밝혀진다면, 그것은 당신의 가설을 명확히 뒷받침해 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DNA를 연구한 결과는 당신의 예측이 옳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DNA는 침팬지 DNA와 95퍼센트 이상 똑같다.

또 진화론은 종이 오랜 세월에 걸쳐 심하게 변할 수 있으므로, 과거의 생물은 현재의 생물과 달랐다고 말한다.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예전 생물과 현재 생물의 차이가 더 커질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것도 사실임이 드러났다. 최근의 화석은 더 이전의 화석에 비해 현재의 생물과 더 비슷하다. 따라서 예측은 과거에 관해서도 할 수 있으며, 이 역사 실험의 결과는 진화를 뒷받침하는 압도적인 증거가 된다.

진화는 그저 이론에 불과할까?: 우리는 진화가 '그저 이론일 뿐'이라는 말 속에 과학 이론이 무엇인가에 관한 오해가 담겨 있다. 진화는 하나의 사실이며, 진화를 구성하는 세 가지 주된 과정(복제, 변이, 선택)은 관찰 가능하고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때로 진화론 내에서 특정 가설에 대한 견해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진화론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사실 진화론이 너무나 많은 관찰 자료를 너무나 잘 설명하기에, 생물학자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는 이렇게 썼다. "진화론에 비추어 보지 않으면 생물학에서는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

진보의 사다리

1579년 디다쿠스 발라데스는 맨 아래쪽에 놓인 가장 하등한 생명체부터 꼭대기에 놓인 가장 고등한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을 단계별로 체계적으로 배열한 비유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림에서 각 단계는 사닥다리 같은 사슬 모양으로 서로 이어져 있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진화가 사다리 같은 진보를 수반하는 발라데스의 그림과 비슷하다고 여긴다. 마치 자연이 단순한 생물에서 복잡한 생물로 사다리의 단을 올라가서 마침내 진화의 궁극적 목표인 인간에 이르는 '상향' 추구 목적을 내재한 양 말이다. 이런 식의 진화 개념, 즉 궁극적인 목표나 목적이 있는 자연 과정이라는 개념을 목적론이라고 한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온갖 연구를 해 왔지만 진화에서 목적론이 옳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생물의 고등한 단계나 하등한 단계라는 이 개념은 역사가 꽤 오래되었으며, 아마 역사를 한 번 살펴보면 이 개념이 왜 지금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지 설명이 될 것이다.

존재의 대사슬: 모든 인류 사회는 나름대로 사물을 분류하고 여러 범주로 나누어서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을 갖고 있다.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도 다르지 않았다. 생물학적, 지질학적, 신학적 대상을 다 아우르는 원대한 분류 체계가 있었다. 이 체계를 존재의 대사슬 또는 스칼라 나투라(자연의 사다리)라고 했으며, 그것은 우주의 만물을 질서 있게 분류하고 목록을 작성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는데, 가장 불완전한 사물을 사슬의 맨 아래쪽에 놓고 가장 완벽한 존재를 맨 위에 놓은 사다리 같은 계층 구조였다. 존재의 대사슬에서 가장 단순한 형태는 바닥에 놓인 암석과 광물이었고, 그 위에 식물, 이어서 동물, 인간, 더 위에 천사가 있고, 맨 위에 신이 있었다.

그러나 존재의 대사슬은 진화와 무관했다. 진화 개념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모습을 갖춘 것은 1700년대 말이 되어서였다. 존재의 대사슬은 단순히 만물을 적절한 장소에, 신의 원래 계획에 따라 질서 있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배열한 것에 불과했다.

새로워지고 개선된다?: 진화를 상향 추구라고 본다면, 더 최근의 종이 '더 진화했다'거나 역사가 더 오래된 종보다 자기 환경에 더 잘 적응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종이 기존 종보다 더 적합하며, 그것이 진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지구가 6,500만 년 전 공룡(그리고 모든 생물 종의 절반)을 전멸시킨 것으로 여겨지는 소행성의 크기와 비슷한 소행성과 충돌한다면, 모든 생물은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새로운 종이라고 해도, 그런 종류의 참화로부터 몸을 지켜줄 두꺼운 피부나 껍데기를 진화시킨 동물은 없었다. 대규모 격변 앞에서는 다 무용지물이다. 새로운 종이라고 해서 생존을 보장받지는 못한다.

인간의 척도: 우리는 인간의 진화에서 개선이었던 변화를 기준으로 삼아 모든 형태의 진보를 평가하려는 유혹을 피해야 한다. 더 큰 뇌, 직립 보행, 마주 보는 엄지, 장기간의 육아, 언어와 문화의 발달은 모두 인간 계통에서 진보적인 적응이라고 할 만한 특징이다. 하지만 다른 종의 진보를 평가하려면 그들에게 적용할 만한 다른 기준을 사용해야 한다. 인간은 지구에서 가장 지적인 종인 듯하지만, 그것이 불가피한 일은 아니었다. 얼마든지 다른 식으로 일이 전개될 수도 있었다.

침팬지를 닮은 인간의 조상이 숲을 벗어나서 사바나로 옮겨가지 않았다면, 인류 진화라는 전체 과정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초기 조상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면, 지금과 별 다를 바 없는 침팬지가 지구에서 가장 지적인 동물이 되었을 것이다. 비록 인간이 지구에서 가장 지적인 종이 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진화에 내재된 목표의 일부가 아니라 그저 우연일 뿐이다.

큰 그림: 자연의 사다리나 존재의 대사슬 이미지는 진화가 목표 또는 전반적인 방향을 지님을 시사하며, 종종 인간이 그 목표라고 여겨지고는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복제, 변이, 선택에 의도나 궁극적인 목적 같은 것은 없으며, 진화의 다른 모든 메커니즘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다양한 진화 계통에 점진적인 개선이 있었으며,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복잡해지는 쪽으로 진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해도, 아마도 덤불이라는 이미지가 진화라는 큰 그림의 비유로 더 나을 것이다. 사다리나 사슬과 달리, 덤불은 위아래, 좌우, 그 사이의 어디로든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뻗을 수 있고, 줄기로부터 더 멀어질수록 줄기에 가까운 것보다 더 완벽하거나 자기 환경에 더 잘 적응했다는 의미를 담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새 가지가 기존 가지에서 뻗어 나올 수 있다.

자연의 완벽한 균형

오랜 세월 자연 자체가 우리의 소망과 바람을 충족시켜 주고, 생태 군집을 세심하게 관리하고, 자연의 완벽한 균형을 세심하게 유지한다고 우리가 믿은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모든 생물은 진화의 산물이므로, 많은 이들은 진화가 종(더 나아가 생태계 전체)을 드넓고 복잡하고 조화로운 자기 조절계에서 맡은 역할을 수행하도록 다듬는 목적을 지닌다고 느낀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수세기에 걸친 연구를 통해 우리는 이런 의도가 있는 자연의 조화라는 개념이 환각임을, 즉 우리 종의 최근의 선택적 기억이 자아낸 산물임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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