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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들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외 지음 | 현문미디어


거인들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외 지음

현문미디어 / 2011년 9월 / 492쪽 / 2,3000원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저자: 잉고 헤르만 - 1932년 독일 보홀트 출생. 뮌헨대학교 등에서 종교사와 교육학을 공부했으며, 뮌헨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마쳤다. 독일의 WDR 방송국에서 편집자로 일했으며, 1997년까지 독일 제2공영방송 ZDF에서 편집책임자로 활동했다. 1997년부터 프리랜서로 라디오방송작가, 칼럼니스트, 출판물 작가로 활동 중이다.

노인과 소녀 - 마리엔바트에서의 연애사건

노인과 앳된 소녀의 연애사건. 이것은 비극일까,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이야기일까? 일흔넷 노인이 갓 열아홉 소녀에게 반한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괴테가 그토록 마음을 다한 열아홉 살 소녀의 이름은 울리케. 괴테의 마지막 연인 울리케 폰 레베초프(Ulrike von Levetzow)이다. 울리케는 라인 강에서 서쪽으로 약 4km 떨어진 프랑스 접경 도시 슈트라스부르크로부터 돌아왔다. 노인과 소녀는 벤치에 앉아 그 도시에서 받은 인상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늙은 학자에게 슈트라스부르크는 각별한 도시이다. 법학을 공부하는 젊은 대학생 시절 사랑에 빠진 연인과의 추억이 곳곳에 배어 있는 장소다. 울리케와 함께 벤치에 앉아 있는 동안 괴테는 당시의 추억과 앳된 소녀의 얼굴이 사랑했던 여인의 모습처럼 보인다. 과거가 현재로 된다.

과연 울리케는 괴테에게 무엇이 행복인지 질문을 한 적이 있을까? 괴테에게는 연인보다 사랑 자체가 더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괴테의 사랑 방식이다. 울리케는 괴테의 이런 사랑 방식을 알아차렸을까? 그녀는 괴테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한다. 그것은 자기방어였을까, 아니면 정당방위였을까? 괴테는 울리케를 향한 사랑이 생애 마지막 사랑의 열정이 될 것임을 안다. 그래서 절망적인 슬픔에 사로잡힌다. 그는 또한 사랑에서 오는 절망감과 사랑의 포기에서 오는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것은 사랑의 아픔을 글로 써서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사랑의 슬픔과 고통을 승화시킨 문학작품이 탄생한다. 그것이 바로 『마리엔바트의 비가』(1823)이다.

어떻게 사람들이 거인을 작게 만드는가? - 후세 사람들이 이해한 괴테

무릇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은 무슨 연유로 자신보다 2백여 년을 앞서 살았던 한 인물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일까? 현재의 세속적인 일상 한가운데에 서서 미래를 생각해야 할 사람들이 왜 과거에 관심을 기울일까? 무슨 연유로 이미 '낡은 시대'를 산 시인이 지닌 정신과 감정을 현재의 시점으로 가져오려는 것일까? 앞에서 언급했던 시인이 거인이라는 것을 눈치 챈 걸까? 바로 그가 세상에서 결코 간과 될 수도 없고 간과되어서도 안 되는 '위대한 업적'을 내놓은 과거의 '위인'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19세기나 20세기를 산 사람들보다 괴테의 인간적인 모습을 이해하는 데 쉬울 수도 있다. 괴테는 이미 오래전에 높은 단상에서 인간이 살고 있는 평지로 끌려 내려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괴테에게서 신화적인 요소들이 이미 오래전에 배제되었다. 정신분석가들은 괴테 영혼의 주름 하나하나를 샅샅이 파헤치고, 그의 영혼을 온갖 프리즘을 통과시켜 분석해 냈다. 사회학자들은 괴테의 신분상 약점을 붙잡고 늘어졌다. 페미니스트들은 괴테를 발가벗기고 외설적인 사내로 만들어 조롱했다. 이론가들은 괴테를 보수적인 반민주주의자로 낙인찍었다. 냉소주의자들은 괴테의 약점을 들춰내어 킬킬거리며 비웃었다. 이들은 괴테에게서 신화적인 요소는 무엇이든 가차 없이 빼앗았다.

이로 인해 잘못된 결과가 생겨났다. 인간 괴테가 보여주는 다양성과 복합성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노년기 괴테의 충실한 조수였던 시인 요한 페터 에커만의 말대로, 괴테는 완벽하게 연마된 다이아몬드처럼 커팅 면마다 항상 새로운 단면과 반사광을 발산하는 인물인데도 말이다. 1984년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 창립자이자 언론인인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심리분석가 쿠르트 아이슬러(Kurt Eissler)가 쓴 『괴테: 정신분석학적 연구, 1775~1786』의 독일어판 서평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거인의 발가락을 쭉 다 펴면 너무 커서 키를 잴 수 없다."

서로 상반되는 두 요소의 동시성이 괴테란 인물의 기본 틀을 형성한다. 이것은 그가 평생을 걸쳐 수행했던 여러 역할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시인이고 극작가이고 소설가이며, 번역가이고 비평가이고 편지를 쓰는 사람이다. 한편 그는 행정 관리이자 외교관이다. 게다가 극장 감독이자 박물관장으로 활동한다. 수채화 화가이자 스케치 화가이며 철학자이면서 정치가이다. 괴테 자신도 이런 사실에 대해 아주 놀라워했다. 그는 말한다. "내 작품은 괴테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집합적인 존재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한때 자살할 생각도 했던 그가 어떻게 정신병적인 불안에서 벗어나고 마음과 정신을 위축시키는 상황에서 다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어떻게 그는 자신의 패배를 승리로 바꾸고, 세계가 그에게서 기대한 것처럼 거인이 될 수 있었을까?

나는 내게서 무엇이 이루어졌을지 모른다 - 실러와의 공동작업

1788년 9월 7일, 괴테는 튀링겐 주 소도시 루돌슈타트의 렝게펠트 가문의 집에서 『도적 떼』(1781),『제네바에서 일어난 피에스코의 모반』(1784),『돈 카를로스』(1787~1788)를 쓴 스물아홉 살의 작가 요한 크리스토프 폰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를 만난다. 실러는 1789년 2월, 법률가이자 문필가로 활동하는 친구 크리스티안 고트프리트 쾨르너에게 괴테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내가 괴테 주변에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더 불행해질 것 같네. 그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조차도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다네.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네. 나는 그가 이례적일 만큼 이기주의자라고 믿네.… 정말이지 그의 정신세계를 사랑하고, 그를 훌륭하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를 미워하네.…"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실러는 괴테라는 존재가 사람의 마음을 매혹하지만, 기가 질려 주춤거리게 만든다는 말을 한다.

1794년, 괴테와 실러는 예나에서 열린 '자연연구회' 학술모임에 참석한다. 학회가 끝난 후 두 사람은 예술과 예술이론, 경험과 이념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때 괴테는 관념에서 출발하고, 실러는 이론적인 이념에서 출발한다. 둘 다 서로에게 명백하게 밝혀야 할 것이 있다고 느낀 것 같다. 실러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적는다. "나는 이번 여름에 마침내 괴테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주일이 채 지나기 전에 서로 만나거나 서로에게 편지를 씁니다. … 그는 예술이론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했고, 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나 나와 동일한 결과에 이르렀습니다." 괴테 역시 훗날 이렇게 말한다. "실러의 자극이 없었다면 정말이지 내게서 무엇이 이루어졌을지 모른다."

괴테와 실러는 거의 10년 세월에 걸쳐 함께 작업을 한다. 두 천재의 이 같은 공동 작업은 문학사에서 유례없는 일이다. 고독이 작가의 진정한 자산이라는 사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지만 말이다. 실러는 괴테에게 자신이 주도하여 창간한 잡지 『호렌(Die Horen)』(1795~1798)을 위해 협력해 줄 것을 부탁한다. 괴테는 "기꺼이 그리고 진심으로"란 말로 『호렌』의 필자이자 비평가로 일할 것을 승낙한다. 그 결과 두 천재 작가는 자신들의 생각을 매우 생산적으로 교환하고 창조적인 문학 활동을 한다. 이것은 '행복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들은 한 시대의 예술과 문학을 만들어 내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중요 문제점들을 간명한 글로 표현한다. 이를 통해 이들은 인간적인 면에서의 차이점, 아니 상반되는 점을 뛰어넘어 인간적으로 서로 가까워진다.

괴테는 실러로 인해 인생의 위기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는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와의 동거와 결혼 그리고 샤를로테 폰 슈타인과의 이별 때문에 바이마르 상류층 사교계에서 고립된다. 마흔아홉 살이 된 괴테는 자신보다 열 살 어린 실러와 대화함으로써 '회춘'을 경험한다. 1798년 1월, 괴테는 실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그대는 내게 두 번째 청춘을 주었고, 나를 다시 작가로 만들어 주었네." 괴테는 실러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만나고 1천 쪽이 넘는 편지를 교환한다. 이런 교류에서 괴테가 경험한 인생의 충만함을 엿볼 수 있다. 1805년 5월 5일, 실러가 세상을 떠난다. 실러의 죽음은 괴테의 충만한 삶의 단절을 의미한다.

죽음으로 둘러싸여 - 거장의 고독

크리스티아네가 세상을 떠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자신과 함께한 인생의 반려자가 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있을 때, 괴테가 보여준 태도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다. 그는 아내에게 아무런 도움도, 아무런 위안도 주지 않는다. 괴테는 불안감과 두려움과 급격한 흥분상태에 사로잡혀 있다. 괴테는 자신이 죽음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모르는 체하려고 애쓴다. 괴테는 지금 고독할 뿐만 아니라 고립되어 있다. 예전에 비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서신을 교환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 그들 중 오랜 친구인 첼터가 있다. 그와의 편지에 자신의 인생에 대해 총평을 한다. "나는 때론 내가 거만하다, 이기적이다 하는 말을 듣는다. 때로는 젊고 재능 있는 사람들에게 시기심을 보인다는 말을 듣는다. 때론 내가 육체적 쾌락에 빠져 있다는 말을 듣는다. 때로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때론 내 조국과 내가 사랑하는 독일인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1832년 3월 22일,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세상을 떠난다. 이로써 하나의 세계가 몰락한다. 병리학자들이 밝혀낸 괴테의 사인은 보통 허리디스크라고 불리는 추간판탈출증, 흉추 경직, 치주염, 부서진 치아, 충치 등. 이 모든 것이 당연할 수 있다. 그러나 당연하지 않은 것은 죽은 자 괴테가 산 사람의 예언자였다는 사실이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저자: 헤르만 글라저 - 1928년 독일 뉘른베르크 출생. 에를랑겐대학교 등에서 독어독문학, 영어영문학, 사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브리스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마쳤다. 펜클럽 회원이며, 베를린 공과대학교의 명예교수로 문화와 인문학에 관해 많은 책을 저술했다.

불멸의 전당으로 들어서다 - 한 작곡가의 신격화

조각상의 인물은 전혀 강해 보이지 않고 다소 땅딸막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반신 누드의 흰 조각상은 응축된 에너지를 발산한다. 조각상은 음악의 거인이 의자에 앉은 모습을 담고 있다. 엄청나게 큰 받침돌 위에 놓여 있는 의자는 신의 옥좌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다. 조각상의 인물은 바로 음악의 거장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다. 작곡가 베토벤의 신격화 작업, 다시 말해 그를 불멸의 전당에 들이는 일은 그가 생존할 때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827년 3월 29일, 빈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서, 즉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첫 정점에 도달했다. 베토벤의 장례식이 거행된 빈의 슈테판 성당에는 2만여 추모객이 몰려들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빈의 전체 인구가 29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대단한 추모 행렬이 아닐 수 없다. 19세기 그의 사후 명성은 점점 더 널리 퍼지게 된다.

판타지 추진력으로서 충족되지 못한 소망 - 본에서의 어린 시절

어떤 예술가의 위대한 업적을 특히 그가 겪은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한 보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해석일 수 있다. 그러나 창조력의 원천이 세상에서의 현실적인 삶에 대한 단념 내지 체념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베토벤의 경우가 정확히 그러했다. 베토벤은 평생 동안 내적 궁핍함과 외적 궁핍함, 정신적 궁핍함과 물질적 궁핍함으로 심한 압박감을 겪는다. 그러나 그는 탁월한 천재로서 자신이 겪은 수많은 어려움을 승화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지녔다. 다시 말해 그는 고통과 번뇌를 극복하고 예술로 발전시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지녔다.

작곡가 베토벤은 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다. 따라서 본에서 보낸 시기는 그에게 있어 인생의 첫 국면이다. 이 시기에 그는 정신적 외상, 즉 정신적 충격과 상처를 겪는다. 그러나 그는 정신적 외상을 음악적 판타지로 승화한다. 베토벤은 부모 집에서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경험한 듯하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깊은 애정과 존경심을 가지고 즐겨 이야기하는 데 반해 아버지에 대해서는 언급 자체를 피한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다. 1787년 3월, 당시 열여섯 살인 베토벤은 음악교습을 받기 위해 빈으로 여행한다. 그는 빈에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영원한 아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만난다. 그는 모차르트 앞에서 피아노 즉흥연주를 했다고 전해진다.

베토벤에게 음악이 가져다준 성취감은 그가 다니던 학교나 그가 사귄 친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다. 그에게 학교나 친구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베토벤은 자신의 제자 카를 체르니(Karl Czerny, 많은 피아노 연습곡을 만들어 오늘날에도 피아노 기초 연습의 텍스트로 사용된다)에게 이야기한다. "나는 엄청나게 연습했네. 대부분 자정이 훨씬 지나서까지 연습했지. 그런 연습 과정에서 나만의 연주기법을 완성했고, 즉흥연주 실력을 시험하고 심화했네. 나는 외로움 속에서 나만의 음악적 판타지가 자유롭게 펼쳐지도록 내버려 두었네."

베토벤은 20대 초반에 이미 음악가로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닦는다. 이로 인해 그는 고립 상태에서 벗어난다. 이는 그의 겉모습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토벤이 살던 집 주인은 베토벤의 옷차림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담녹색 연미복, 버클이 달린 짧은 녹색 바지, 흰 실크나 검은 실크 양말, 굽이 검은 신발, 곱슬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뜨린 가발 …" 베토벤은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인 1795년 홀로 된 모차르트의 부인이 빈에서 개최한 연주회에서 피아니스트로 대중 앞에 첫선을 보인다. 이때부터 베토벤은 피아노의 대가로서 명성을 확고히 한다.

'미적 가상'이란 제국에 사는 몽상가 - 빈에서 명성을 얻다!

1792년 11월, 베토벤은 쾰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의 도움으로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으로 유학길을 오른다. 빈에 유학 온 베토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두 명의 음악 스승들이 있다. 한 사람은 오르간 주자이자 작곡가, 음악교사이자 음악이론가인 요한 게오르크 알브레히츠베르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이며, 또 한 사람은 이탈리아 출신 오페라 작곡가로서 모차르트의 질투심 많은 경쟁자로 알려진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이다. 당시 막 빈슈테판 대성당의 지휘자로 발탁된 알브레히츠베르거는 대위법의 대가로 베토벤에게 대위법을 가르치고, 가톨릭 교회음악에 친숙하도록 도움을 준다. 1766년 빈에 와서 1788년에 궁정 작곡가가 된 살리에리는 베토벤에게 이탈리아 가곡의 작곡법을 가르친다.

베토벤이 빈에 머무른 시기에 도시에는 일종의 알력관계가 있었다. 수도 빈과 군주제 사이에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 관계를 프리드리히 실러의 '미적 국가(Asthetischer Staat)’란 개념으로 특징지어 볼 수 있다. ‘미적 국가’ 개념에는 다음과 같은 확신이 기초를 이룬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롭다. 그런데 인간이 속박당한 채 태어난다면…" 그래서 베토벤은 관념주의적인 비약을 통해 현실정치에 대한 불만족을 문화적 미덕으로 고양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여기 미적 가상의 제국에서 평등이란 이상이 실현된다. 몽상가는 평등이란 이상이 본질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기꺼이 보고 싶어 한다." 이상 세계와 실제 세계는 근본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면, 베토벤에게서 몽상가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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