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을 고백하다
이희진 지음 | 가람기획
의자왕을 고백하다
이희진 지음
가람기획 / 2011년 10월 / 264쪽 / 14,000원
설화와 전설에서부터 엇갈린 의자왕과 계백
있지도 않았던 삼천궁녀
의자왕을 매도한 사례 중, 가장 유명하면서도 황당한 이야기가 이른바 '삼천궁녀' 전설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어릴 때 동화 등에서부터 의자왕과 삼천궁녀 이야기를 접하면서 자란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삼천궁녀와 방탕하게 살며 정치를 돌보지 않아 7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믿는 것이다. 하다못해 동요에까지 '삼천궁녀 의자왕'이라는 가사가 있다. 정보화 사회라는 요즘도 유명 포털 사이트에서까지 낙화암을 검색어로 치면 삼천궁녀의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들이 이를 사실로 여기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단순히 듣는 이야기로만 그치는 것도 아니다. 눈으로 보면서 확인한다고 믿게끔 만들어주는 것도 있다. 바로 '백제의 유산'이라는 식으로 소개하는 유적들이다. 그 중 하나가 이른바 낙화암(洛花岩)이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현재의 부여에 가면 대부분의 관광지가 백제 유적이다. 이 유적 중에는 삼천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이 유명하다. 또 이 낙화암 아래에는 삼천궁녀가 떨어져 죽는 장면을 그려놓은 벽화까지 있다. 관광을 가든 수학여행을 가든, 백제 도읍지 부여에 한두 번 가보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기 눈으로 유적까지 보면 당연히 의자왕이 삼천궁녀와 방탕하게 살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삼천궁녀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점이 이미 상식에 속한다. 적어도 고대에 작성된 기록 중에는 삼천궁녀에 대해 한마디라도 언급한 내용이 없다. 가장 비슷한 기록이라고 해봐야 《삼국사기》〈백제본기〉의자왕 16년에 나오는 다음 내용이 고작이다. ‘봄 3월에 왕은 궁녀와 더불어 주색에 빠지고 마음껏 즐기며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얼핏 보면 의자왕이 궁녀들과 주색에 빠져있던 사실을 확인해주는 기록이 아니냐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궁에 궁녀가 있어 왕이 궁녀와 즐기는 일은 어느 시대 어느 왕에게나 있는 일이다.
바로 이 맹점이 다큐멘터리에서 소개된 적도 있다. 조선시대에도 백여 명에 불과했던 궁녀가 백제에 삼천 명씩이나 있었을리 없다는 점부터 시작해서 기본상식만으로도 삼천궁녀의 존재가 엉터리라는 점을 증명하기는 쉽다. 당연히 있지도 않았던 궁녀들이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의 전설도 사실과 다르다. 그러면 고란사(皐蘭寺)에 그려진 삼천궁녀의 자살 장면은 무엇일까? 화가의 상상력으로 멋대로 그려낸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과거에.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허황된 이야기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 다음에 그려졌을 테니, 기껏해야 몇 십 년도 되지 않았을 수밖에 없다.
또한 낙화암에 가본 사람들이라면 잘 알겠지만, 그곳에 한번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여기서 삼천 명이 한꺼번에 자살하려면 뒷줄에 선 궁녀들은 하루 종일 기다려도 차례가 올지 의심스럽다. 당시 신라와 당나라 병사들이 몰려들어 몸을 더럽힐까봐 자살했다고 알려진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 줄서서 기다릴 여유가 있었을까?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라는 점은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편견의 뿌리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와 전설 대부분이, 백제 멸망의 원인을 의자왕의 타락 때문으로 몰아가고 있다.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요인이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태도의 전통을 따져 보면 뿌리가 제법 깊다는 점이다. 사실 유교가 영향을 준 문화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태도를 가지는 게 당연할 수 있다. 유교적인 역사의식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나라가 망한 원인을 1차적으로 지배층의 도덕적 타락에 있다고 생각한다. 전근대 역사를 기록했던 사관(史官)들은 이러한 성향이 특히 강했다. 그래서 이런 성향을 가진 사관들이 남겨 놓은 기록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관들의 생각을 따라가게 된다.
문제는 이런 사고방식이 편견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유학자들은, 그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공자부터 '도덕성'을 지상과제로 삼는 성향이 있다. 세상사를 파악하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이 맥락에서다. 즉 세상이 잘못되는 이유는 도덕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고, 바로 잡히려면 도덕이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이 기본 논리이다. 역사적 사실을 평가하는 데에도 이 성향은 예외 없이 작용한다. 나라가 잘되면 그 공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지배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반면 잘못되면 지배층이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보게 된다. 사실 도덕지상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지배층이 별로 잘못한 게 없는데도 나라가 망했다고 하기는 곤란할 것이다.
문제는 모든 일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다 보면 잘못하지도 않은 부분까지도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된다는 것이다. 백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지배층의 잘못을 지적해야 하고, 그 중에서도 도덕적 타락은 빠질 수 없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지만 힘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망했다'는 식의 논리는 만사를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에게 달가운 것이 아니다. 그러다 보면 없는 잘못이라도 만들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잘되면 충신이고 못되면 역적'이라는 속담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칭송일색 계백 설화
의자왕에 대한 설화와 전설이 이렇게 논란거리가 되는 데 비해, 계백에 대한 설화는 많지 않다. 나름대로 시사해주는 점도 있다. 백제라는 나라의 멸망에 있어서 계백의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용은 칭송 일색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표뜸과 계백장군'이라는 설화가 그렇다. 내용은 이렇다. ‘계백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호랑이에게서 키워졌다. 어릴 때에는 홍수를 건너 서당에 다녔고, 성장해서는 호랑이의 도움으로 많은 무공을 세웠으며 그가 죽자 호랑이가 석 달 사흘을 울었다.’ 설화라는 것이 그렇듯이, 이 내용을 냉정하게 보면 황당한 이야기다. 호랑이가 사람을 키운 것도 모자라 무공 세우는 것을 도와주고, 계백의 죽음을 슬퍼해 울었다는 이야기 자체가 역사적 사실일 리는 없다.
물론 설화는 만화나 동화와 마찬가지로 이야기 자체의 논리성을 따지지 않는다. 계백이라는 사람이 이런 만큼 뛰어났던 인물이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설화를 백제 유민의 입장에서 비록 전쟁에 진 장수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파악한다고 소개하기도 한다. 능력이 없어서 전쟁에 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백제 유민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백제 유민들의 뜻을 담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계백에 대한 이야기이니 무조건 백제 유민들이 만들어냈고, 그들의 정서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정도는 지적해놓아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의자왕 시대의 실상은 어땠을까?의자왕의 인간성에 대한 당대의 평가와 치적
설화와 전설은 어차피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것만이라면 역사적 진실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만 믿고 의자왕을 무능하고 방탕한 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대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했다는 역사학자들이 나서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의자왕이 실제 역사 속에서 나라를 망친 장본인이라는 인식이 공인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시대 일부 역사 전문가들이 정말 세심하게 연구하고 이런 결론을 낸 것일까? 생각보다 간과한 것도 많고 오류도 많다. 당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깎아내려져 왔던 의자왕의 인간성에서부터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의자왕이 활동했던 당시의 기록에 남아 있던 평가부터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부여륭묘지명(夫餘隆墓誌銘)부터 살펴보자. 여기에는 과단성 있고 침착하다는 명성이 자자했으며, 성품이 고고했다고 적혀 있다. 물롱 이것만이라면 의자왕 아들의 묘지명이니 당연히 무덤 주인의 아버지에 대해 나쁜 말을 쓰지 않았을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편이 당연할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도 평가는 비슷하다. 《삼국사기》에는 '웅걸차고 용감했으며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와는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들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와 당의 기록을 위주로 만든 역사서에 나타나는 내용들이다. 백제라는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음을 힘주어 강조하던 태도에 비해 의자왕 개인에 대한 평가는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후한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 덕분에 후대 사람들 역시 의자왕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백제사 전문가 중에는 바로 이런 점을 인용하며 용맹과 결단, 효제로 표현되고 있는 의자왕의 성품을 사실로 인정한다. 더 나아가 의자왕의 개인적인 성품은 그의 평소 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삼국사기》에서 그의 활동모습을 살펴보면 그 안에 의자왕의 성품이 반영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백제와 신라 누가 몰리고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7세기 의자왕 시대, 백제라는 나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요약해보자면 이런 정도일 것이다. 진흥왕 때 신라에 한강 지역을 빼앗기고 위축되어 있던 나라. 다음 글에서 당시 백제가 처해 있던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삼국 항쟁이 격화된 6세기 후반, 백제는 경쟁국가인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그 입지와 행동반경이 매우 좁았다. 즉 한강 유역을 송두리째 신라에 빼앗긴 뒤부터 줄곧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 고립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백제는 자신을 ㄱ자로 포위하고 있는 신라와의 군사경계선을 돌파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비슷한 내용이 전공서에도 나와 있을 뿐 아니라 교과서에서부터 이런 식으로 나온다.
과연 그랬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과 다르다. 《삼국사기》의 기록만 보더라도 백제가 그렇게 위축되며 약화되어 가고 있었던 상황은 아니었다. 신라가 남긴 기록을 중심으로 쓰여진 역사인데도 그렇다. 우선 당시 백제와 신라의 전쟁 양상부터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이미지는 많이 달랐다. 의자왕대만 해도 8번의 전쟁 중 신라 쪽에서 선제공격을 한 사례는 의자왕 4년의 단 한 번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백제의 선제공격에 의해 전쟁이 터지고 있다. 즉 당시 백제-신라 전쟁의 양상을 보면 주로 백제가 선제공격을 하는 형태였던 것이다. 이 사실이 시사해주는 바가 적지 않다. 보통 국가 규모의 전쟁에서 선제공격으로 전면전을 일으킬 때에는 나름대로 준비가 되어 있고, 자신이 있을 때 감행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의자왕 때에는 대부분의 선제공격이 상대의 성을 함락시키며 일단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의자왕 75%에 해당하는 15년 동안의 흐름이 이렇다. 신라보다 백제가 우위에 서서 주도했던 전쟁이라 해도 큰 문제는 없다. 의자왕 이전이라고 그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의자왕 이전의 백제-신라 전쟁에 관한 사료를 검토해 보아도 선제공격을 가하는 측은 대부분 백제였다. 차이가 있다면 상당수의 공세가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정도다. 여기서 주도권이라 함은 전쟁은 언제 어떻게 시작할지 결정할 권리를 의미하므로 공세의 성공여부는 두 번째 문제다. 이와 같은 점을 감안해볼 때 백제가 선제공격을 가하며 주도권을 잡고 있던 흐름은 성왕 말년의 관산성 전투 이래 백제 멸망 직전까지 유지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반전이 있었다고 본다 하더라도 의자왕 16년부터이다. 이 시점 이후에는 신라가 주도권을 잡고 백제를 공격하고자 했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태종무열왕 6년 4월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 백제가 자주 변경을 침범하므로 왕이 장차 이를 치려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 이 사실을 가지고 주도권 운운하는 건 무리가 있다. 일단 백제를 치려고 했던 이유가 백제 쪽에서 자주 쳐들어오니까 견디다 못해 반격해보려는 것이고, 이조차도 자기 힘이 아니라 당나라의 힘을 빌어보려 했다는 얘기일 뿐이다.
계백을 띄워라무엇 때문에 계백을 각별하게 챙겼을까?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인물 중 백제 사람은 단 세 명에 불과하다. 흑치상지와 도미(都彌) 부부, 그리고 계백이다. 이 중 흑치상지에 대한 기록은 《구당서》와 《신당서》에서 따온 것으로 보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즉 중국 쪽 기록에 중요 인물로 다루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도 수록되었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면 백제 같은 한국 고대국가 계통의 기록에 근거를 둔 인물은 도미 부부와 계백이 남는다. 여기서 도미 부부는 개루왕(蓋婁王)이라고는 되어 있으나, 실존 인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설화적인 이야기 속에 나온다. 이에 비해 계백은 황산벌 전투라는 상당히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연계되어 나온다. 즉 《삼국사기》열전에 소개된 백제 사람 가운데 역사적 의미가 있으면서도 한국 고대국가 계통의 기록에 기반을 둔 인물은 계백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내막을 알고 보면 그렇게만 생각하기가 어렵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삼국사기》는 기전체(紀傳體)라고 한다. 그래서 사건을 시간 순으로 기록하기만 한 편년체와 구별된다. 즉 역사적 사건을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기록한 본기만 있는 게 아니라 지리와 관직에 관한 기록인 지(志), 인물에 관한 기록인 전(傳)이 별도로 붙어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인물에 관한 기록인 열전이 따로 붙어 있는 이유가 있다. 열전에는 본기의 기록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낄 만큼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만 등장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삼국사기》열전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삼국사기》편찬자들에게 소개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있다.
신라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자신들이 멸망시킨 나라의 충신인 계백에 관한 기록을 특별히 챙겼을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비슷한 사례를 보면 쉽게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 중기의 사육신이나 조선 초기 길재, 정몽주 등은 정권을 장악했던 당시 통치자들에게는 끝까지 저항했던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당시 권력의 핵심에서 제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세에는 권력투쟁에서 이겼던 사람들보다 더 유명해졌다. 왜일까? 권력을 잡고 이어나가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기득권을 잡으면 걱정되는 일이 생긴다. 바로 그 자리에서 밀려나는 사태다. 그런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제는 통치자에게 충성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율배반적인 일이다. 자신은 앞서 있었던 정권을 쫓아냈으면서도 자신에게는 그럴 생각하지 말고 충성하라고 해야 하니 말이다.
같은 나라에서 권력투쟁을 하든, 남의 나라를 통치하든 기본적인 맥락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여기서 여러 가지 명분이 나타나지만, 그런 것 중 하나가 충신(忠臣) 띄우기다. 어찌되었건 정권에 충성하는 사람은 일단 훌륭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영웅 모델로서의 충신을 미화해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는 적이었다 하더라도 예외로 할 수가 없다. 오히려 잘 나아가던 정권에 편안하게 충성하던 충신보다 망해가던 정권이나 나라에 끝까지 충성했던 충신들을 더 띄워주어야 한다. 그래야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충성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또 적이라도 훌륭한 행동을 한 것만큼은 높이 평가해준다는 아량을 보이는 의미도 있다. 이래저래 별로 손해 볼 것 없는 영웅 만들기가 되는 셈이다.
칭송만이 능사일까?
계백에 대한 칭송 중 하나가 '명장(名將)'이라는 타이틀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계백을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명장이었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이 다른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군대를 지휘한 장군으로서의 업적을 남긴 인물이니, 명장이었다고 해야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인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계백을 명장으로 여기려는 사람들에게는 불행히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계백의 활약상이라고는 백제의 5천 병력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것밖에 없다. 이 사실만 가지고는 계백의 업적을 칭송하는 데에도 한계가 생긴다. 그러다 보니 바람직하지 못한 경향도 생긴다. 별 이유 없이 명장으로 만들어내려는 유혹을 느끼기 쉽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