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 사회란 무엇인가
피터 코닝 지음 | 에코리브르
공정 사회란 무엇인가
피터 코닝 지음
에코리브르 / 2011년 9월 / 432쪽 / 23,000원
인생은 불공평하다릴리 레드베터는 앨라배마 주 개즈던에 있는 굿이어 타이어 공장에서 19년 동안 근무했다. 그녀는 재직 기간 대부분을 관리 주임으로 일했다. 이 분야에서 선도적인 릴리의 이 같은 경력은 여성 근로자로서 중요한 성취라고 할 수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릴리는 남자들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꿋꿋이 유지했으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1996년에는 '최우수 실적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릴리는 처음에는 다른 주임들과 동등한 봉급을 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차이가 났다. 상사의 노골적인 편견 때문에 '초라한' 근무 평가를 받아 승진에서 탈락한 적도 몇 차례 있었다. 1997년 말, 릴리의 급여는 남자 동료들에 비해 15~40퍼센트나 적었다. 릴리의 월 급여는 3,727달러인 데 비해 남자 주임들은 4,286~5,236달러를 받은 것이다. 그러던 중 임금 차별의 실상을 알게 된 릴리는 1964년의 공민권법에 따라 발족한 연방 고용기회균등위원회(EEOC)에 '질문서'를 제출했다. 공민권법 제7조는 직장 내에서 임금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릴리는 재직 당시에는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지만 1998년 후반, 조기 퇴직한 이후 굿이어사를 제소했다.
배심원은 그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법원은 차별받은 급여와 손해 배상, 법정 비용을 회사가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회사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고, 결국 사건은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대법원에서는 5대 4로 굿이어사가 승소했다. 다수 의견을 낸 대법관 새뮤얼 앨리토는 릴리 사건이 "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했다. 법률에 따르면 '차별 행위'가 발생한 지 180일 이내에 EEOC에 이의 제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릴리에 대한 임금 차별은 수년 전에 벌어졌기 때문에 대법원은 릴리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고 판결한 것이다.
승진이나 해고 같은 경우 차별은 종종 희생자에게 그 즉시 분명해 보이지만, 임금 차별은 훨씬 더 은밀하게 진행된다. 그렇지만 작은 차별 행위도 시간이 흐르면 엄청나게 누적될 수 있다. 또 미국의 대다수 회사는 근로자가 동료의 급여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노골적인 규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임금 차별을 파악하기 어렵고, 이에 대한 증거를 찾기는 훨씬 더 어렵다.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자 곳곳에서 항의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도 매체마다 이 사건을 뉴스의 헤드라인으로 뽑았으며 많은 지면을 할애해 이 판결을 공공연히 비난했다. 이 뉴스는 순식간에 50만 개 이상의 웹사이트와 블로그에서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하원에서도 지체없이 이 문제를 주요 안건으로 다뤘다. 1개월 후 캘리포니아의 하원 의원 조지 밀러가 '2007 릴리 레드베터 공정임금법안'을 제출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이 법안은 225대 197의 표결로 하원을 통과했다. 하지만 상원의 최종 표결에서 가결에 필요한 60표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버락 오바마는 이 법안에 찬성표를 던진 상원의원 중 한 사람이다. 이후 오바마는 대통령 선거 때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시켰고, 한 유세에서는 릴리를 연사로 초청하기도 했다. 2008년 대선이 끝난 뒤 새로 구성된 의회에서는 이 법안을 압도적인 다수로 가결했다.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이 최초로 서명한 주요 법안이 되었다.
이처럼 명백히 불공정한 차별 행위는 불행하게도 미국 사회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현상이다. 불공평은 예로부터 인류 역사에서 끊이지 않는 서글픈 현실이다. 그러므로 릴리 레드베터 사례는 낯선 일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 사례는 공정과 불공정의 본질에 대해 많이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불공정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일부는 '형평성의 원리'에서 접근할 수 있다. 수년간 릴리 레드베터의 업무 실적에 대한 처우는 엄격한 양적 분배라는 측면에서 부적절했다. 레드베터 사례에서 두 번째로 배울 수 있는 것은 힘(권력)이 공정성을 좌우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릴리 레드베터의 사례가 보여준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중요한 측면은 그녀를 지지하며 표출된 대중의 들끓는 분노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분노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강력한 암시일 것이다. 이 사건에서 드러난 편견에 수백만 명의 미국인이 불쾌감을 느끼고 그녀를 지원한 것이다.
실제로 심각한 불공정은 권력과 부의 지나친 편재(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말을 빌리면 일부가 '더 많이 차지하려고' 할 때)에서 비롯된다. 이런 불평등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담론의 전통'에서 가장 중요하게 또한 지속적으로 논의된 주제였다. 그러나 진부할 정도로 전형적인 우리의 이기심이나 탐욕과 반대로 우리 대다수에게는 공정성이 살아 움직이는 사회에서 살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가 실현되고 경제적인 혜택이 '공정하게' 분배되며 '상호 이익'이 확고한 원칙으로 자리 잡은 사회, 혜택과 의무가 균형을 이루는 사회에서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얘기다. 이른바 '공정성의 기준'이라는 것은 이런 원칙에 기초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기준이 바로 안정적인 '사회계약'을 달성하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이 계약은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일상적 표현일 뿐 아니라 존중할 만한 철학 개념이다.
공정성에 대한 생각공정성이란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어떤 대우를 받느냐 하는 문제다. 그리고 공정성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나 조직 또는 다른 기관과 우리가 맺는 관계와 그 상호 작용의 측면에서 발생하는 개인적인 문제다. 공정성이란 각각의 당사자가 갖고 있는 욕구와 관심 그리고 권리를 고려해 서로 균형을 맞추는 것을 뜻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문제는 공정한 대우와 함께 모든 당사자를 대하는 방식은 물론 혜택과 손실의 분배에도 형평성을 제대로 반영했는지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최근 폭등한 금값에 영향을 받아 '한몫' 잡을 요량으로 금 굴착 장비를 구입해 금을 캐러 나섰다고 가정해보자. 금을 찾는 데 실패했다면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나는 이런 결과를 불운으로 돌리거나 내가 판단을 잘못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굴착 장비를 판매한 사람이 어디서 금이 나는지 거짓 정보를 내세웠고 그 부추김에 못 이겨 장비를 샀다면, 나는 나에게 '해악'을 끼친 대신 이득을 본 누군가의 의도 때문에 잘못 판단한 셈이 된다. 슬프게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사기 행위가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더 심각한 경우에는 민형사상 문제로 비화해 법정에서 다투기도 한다. 이런 일은 공정성의 기준을 깨뜨리는 것이며 두말할 나위 없이 법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사안적 특수성과 사람들 상호간의 의도 자체가 공정성을 평가하는 결정적인 요소라는 얘기다.
사회심리학 용어를 빌리면 공정성에 대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인지적' 요소와 '정서적' 요소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우리의 감각은 공정성에 대해(우리가 믿기 쉬운 것이 공정하다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주변 사람과 문화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다. 사회적 동물로서 오랜 역사를 간직한 인간이라는 종은 대체로 사회 환경에 몹시 민감하며 주변 사람들을 쉽게 따른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을(특히 다른 사람이 권위적인 인물일 때) 받아들이고 이에 적응하는 경향이 있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공정성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대체로 간략하다. "공평하고 정직하며 불편부당한 대우"라고 정의하기도 하고, “이기심과 편견 그리고 편애로부터의 자유”라거나 “규칙 및 규범과의 일치” 또는 “편견, 부정직, 불의로부터의 자유”라는 정의도 있다. 문제는 물론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공평한 것이고, 무엇이 편견과 불편부당에서 자유로운 것이냐 하는 점이다. 정말 대답하기 까다로운 문제다. “살인하지 마라.”나 “도둑질하지 마라.”와 같이 도덕적으로 절대성을 지닌 명제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전시에 적군을 죽이는 것은 완벽하게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로빈 후드나 조로 같은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행위가 부자에게 훔쳐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이타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끊임없이 항변한다. 이것 역시 똑같이 공정성과 관련된 문제다.
공정성이란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포함된 질과 내용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회적 상호 작용의 과정과 결과를 모두 가리키는 말이다. 공정성은 우리 자신과 상대방에 대한 우리의 기대뿐만 아니라 우리에 대한 상대방의 의도라고 여겨지는 것에도 깊은 영향을 받는다. 비록 공정성에 대해 인간이 느끼는 감각은 강한 원심력을 발휘하는 행동으로 나타나지만, 인간은 동시에 이기심이라는 구심력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자기도취와 자기애가 불평등한 경제권력이나 정치권력과 맞물릴 때, 공정성은 힘을 잃는다. 그리고 불공정이 풍토병이 되면 인간의 집단적 욕구를 해치는 원인이 될 수 있고 사회계약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공정성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아는가? 공정성은 이루기 어려운 이상인 경우가 많지만, 모든 당사자가 공정성 문제에 대해 완벽한 정보를 얻어 어떤 조건에서도 그 결과가 충분히 공정하다고 자발적으로 동의한다면 거의 공정성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다양한 수준의 억압과 착취, 해악이 발생하고 극단적인 경우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난다면 이는 공정성과 거리가 먼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중 일부는 공정성 영역에서 심각할 정도로 둔감하다. 공정성 감각은 타고날 때 조금씩 차이가 나는 특성이다. 이것이 우리 주변에서 공정성에 대한 논란이 수없이 일어나는 이유다.
인간의 본성과 기본 욕구생존 지표의 구성에 포함된 일차적 욕구의 14개 '영역'은 체온 조절, 폐기물 제거, 영양, 식수, 이동 기능, 수면, 호흡, 신체 안전, 신체 건강, 정신 건강, 소통, 사회관계, 생식, 자녀 양육 등이다. 오늘날 생존과 생식의 문제는 그리고 이와 관련한 기본 욕구는 모든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 더욱이 대부분의 경제 활동은 이런 욕구를 충족하는 데 충당된다. '사치품'이라고 일컫는 상품을 생산할 때도 마찬가지다. 모피 코트조차 인간의 기본 욕구에 기여한다. 그걸 입은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값싼 침대와 마찬가지로 대형 침대도 수면이라는 일차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기능에서는 같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일차적 욕구는 경제생활에서 내적인 논리를 제공한다. 이 욕구는 은연중에 경제의 형태를 결정하며 모든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삶을 생존 명령과의 관계라는 틀에서 바라보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인간의 경제 활동은 사실 많은 부분에서 생존을 위한 도구적 수단이다. 경제 활동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간의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물론 일부의 경제 활동은 이 욕구와 별다른 관계가 없거나 전혀 관계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일부 행위는 인간의 적응 욕구에 해로울지도 모른다. 흡연과 약물의 과다 사용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인간의 생존 및 생식 욕구가 다양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극단으로 치닫는 것도 거의 모두 해롭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만약 이 욕구 중 어느 하나를 지나치게 충족한다면 다른 욕구에 해를 끼칠 것이다.
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불공정한가자본주의 경제 이론에 반대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 이론이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 욕구를 부인한다는 점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 이론은 바로 분배 정의의 원칙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 이론은 홉스가 '빈곤의 올가미'라고 말한 것처럼 현대 시장 경제에서 발생하는 많은 현상을 외면한다. 이를테면 빈곤 계층이 소액 대출도 받지 못하거나 열악한 셋집에서 벗어나 자기 집을 마련하기 위해 저축도 할 수 없는 현실을 간과한다. 이런 배경에서 임금 소득보다 금융 소득에, 세입자보다 건물주에게 세금 우대를 해주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론과 실제라는 양 측면에서 근시안적일 때가 많고, 때로는 인간 개개인의 생물학적 명령을 구성하는 기본 욕구를 부인하기도 한다. 근본적인 점에서 인간은 모두 명백하게 '평등한' 존재다. 그래서 사회의 다른 구성원에게 심각한 '해악'을 유발하고 극단적인 빈부 격차를 외면하는 사회는 그것이 어떤 경제 시스템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지극히 불공정하다. 아무리 자존심 강한 자유방임주의자라 해도 이런 시스템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섬뜩한 환경과 극단적 빈부의 격차는 자본주의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서 연유한 것으로서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극심한 불공평을 깨닫게 해준다. 사회주의는 이처럼 야만적인 경제 시스템에 대한 뜨거운 분노였다. 하지만 공상적 사회주의(마르크스 및 엥겔스가 자신들의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해서 19세기 초의 생시몽, 푸리에, 오엔 등의 사회주의에 대해서 부여한 명칭)의 인류 평등적인 이상도 지극히 불공정하다. 극단적 사회주의자들은 종종 '비례적 평등'의 원칙과 공로에 대한 보상을 무시한다. 실제로 사회주의자들은 종종 평등과 공평을 동의어로 사용하며, 절차적 평등과 실체적 평등을 구분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공상적 사회주의에 깔린 기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공상적이라는 점이다. 즉 인간의 본성이라는 현실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삼지도 않고, 집단적 생존 조직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도전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도전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본질적으로 공상적 사회주의는 지극히 불공정하다.
사회주의자들이 공로의 평가에 대해 잘못을 저지른다면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은 노동자를 가능한 한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투입의 대상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크게 잘못하고 있다. 기업 경영의 실무 분야에 대한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최고의 기업은 대체로 노동자를 '이해관계자'로 대하는 조직이라는 일치된 견해를 보여준다. 또 자유 시장 자본주의와 공상적 사회주의 모두 정부의 역할에 대해 비현실적인 태도를 드러낸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는 자기 규제가 가능하다는 순진한 믿음에서 정부의 규모를 축소하거나 일부 제거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에인 랜드나 그로버 노퀴스트 같은 극단적 자본주의자들은 국가를 주로 사기업에 방해가 되는 집합체로 본다. 이들은 민간연합 부문만이 좀더 '효율적인' 사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정부도 때로는 더 뛰어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모두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매우 단순한 견해를 갖고 있다. 잘못된 추정과 치명적일 정도로 파괴적인 일차원적 정책에 영향을 받은 상투적인 주장만 할 뿐이다. 모든 증거에서 드러났듯이 핵심은 인간의 본성이 생각보다 한층 미묘하고 복잡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좀 더 현실적이고 동시에 좀더 공정성을 고려한 측면에서 사회계약을 재정립할 때다. 사실상 현재의 경제 위기는 이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더 이상 마르크스가 '허위의식(혼미한 정신의 과정)'이라고 말한 사치를 누릴 여유가 없다. 프랑스의 지성 앙드레 지드가 바라본 대로 "진실의 색깔은 회색이다."
생물사회적 계약을 향하여사회계약의 개념은 보통 루소와 홉스 그리고 로크 같은 17~18세기의 사회계약론자들과 최근의 존 롤스 같은 학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루소의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발상은 모든 사람이 동등한 목소리를 내고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집단적 의지에 참여해 인류 평등적인 공동체를 자발적으로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홉스는 이와 반대로 무정부적 혼란이 발생하는 자연 조건을 상상했다. 홉스는 상호 자기 보존을 위해 인류의 조상들이 국가의 지배 질서에 개인의 권리를 양도했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로크는 좀더 자비로운 자연 국가를 그리며, 이런 국가에서는 자유로운 개인이 상호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제한된 계약을 만들어내고 나머지 권리도 제한할 것이라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