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공간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 지음 | 에코리브르
인간과 공간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 지음
에코리브르 / 2011년 8월 / 424쪽 / 27,000원
1부. 공간의 기본적인 분류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 개념
공간 자체는 자연적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당시 철학자들이 구분한 4원소(불, 공기, 물, 흙)는 각자 속한 일정한 장소가 있어서 언제나 그곳으로 가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원소는 방해받지 않는 이상 각기 자신의 장소로 진출하려고 한다. 어느 것은 위로 가고, 어느 것은 아래로 가며, 다른 것들도 6방위의 나머지 방향으로 가려고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아주 낯선 공간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간을 균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공간 내부에서 부분과 종류들을 구별했으며, 나중에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위와 아래, 앞과 뒤,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뉜 방향이라고 불렀다. 현대의 용어로 말한다면 이는 인간의 몸에 의해 주어진 좌표계이고 바로 이것이 공간을 분류한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규정들이 인간에게 상대적으로 적용될 뿐만 아니라 원래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 방향들(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은 우리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이 방향들은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자리 잡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위치를 바꾸면 위가 아래가 되고, 오른쪽은 왼쪽이 되며, 앞은 뒤가 된다. 그러나 자연에서는 모든 방향이 제각기 정해져 있다. 위는 임의의 방향이 아니라 불꽃과 가벼운 물체가 이동하는 방향이다. 아래도 임의의 장소가 아니라 흙과 무거운 물체가 있는 곳이다. 따라서 방향은 위치에 의해서만 구별되지 않고 그 작용을 통해서도 구별된다.
위와 아래와 관련해 공간은 원래 나뉘어 있고, 원소들은 그 안에서 각자 소속된 위치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힘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이상 그곳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와 관련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간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고유의 힘'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즉 공간이 "일정한 작용을 가한다."고 말한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공간은 내적인 힘이 퍼져 있는 공간이고,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역장(力場)이 연상되는 공간이다.
공간은 자신을 채우고 있는 사물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네 가지 '원소'만 가지고 이 사고를 전개했다. 하지만 이 사고는 본래 공간 속에 존재하면서 자기 본연의 장소를 가진 사물 하나하나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엔 인간의 공간 질서도 이 사유의 틀에 들어맞는다. 인간의 공간 질서는 다시 인간 주변의 사물에 각자의 공간을 지정하면서 동시에 포괄적인 우주 질서에 순응한다.
일상에서 쓰이는 공간 관련 용어와 용어의 역사
독일어에서 공간이라는 말이 정관사나 부정관사와 함께 쓰일 때는 집의 일부를 의미할 때뿐이다. 즉 이 경우 공간은 방과 부엌, 그리고 여타의 "공간"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다. 이때 공간은 집을 구성하는 단위를 말한다. 이런 의미의 공간은 집에서 벽으로 분리되어 각기 다른 목적에 이용되는 독립적인 부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거 공간, 사무 공간, 부속 공간 같은 말을 사용한다. 모임 공간은 아주 특이한 경우이다. 모임이 야외에서 진행될 때는 모임 광장이나 모임 장소라고는 말해도 모임 공간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이 예를 보아도 공간은 언제나 건물의 일부, 즉 바깥 세계와 격리된 빈 곳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부. 넓은 세계넓은 곳, 낯선 곳, 먼 곳
무한히 넓은 공간으로의 진출: 무한대로 나아가려는 이 시대의 커다란 열망은 천문학적 사고가 열어놓은 관점에 열광했다. 그야말로 하늘의 공간에 도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콜럼버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을 기초로 한 공간의식의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을 품고 에워쌌던 폐쇄된 유한 공간은 와해되고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무한히 넓은 세계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 경험한 우주인의 무한성은 지리상의 발견과 마찬가지로 훨씬 위험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었다. 우주의 광대함은 공허도 의미했다. 초기의 감격이 사그라들고 각성이 시작되면서 외로움이 느껴졌다. 이 공간에 처한 인간의 극한 외로움이었다. 그로부터 겨우 몇 십 년 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고 말했다.
좁음과 넓음: 넓다는 개념부터 설명하자. 이 말의 의미는 반대 개념을 살펴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넓은 것의 반대는 좁은 것이다. 옷이나 신발은 꼭 끼거나 클 수 있다. 옷이나 신발이 그것을 착용한 사람의 몸이나 발로 적절히 채워지지 않아 주변이 헐렁하면 크다고 말한다. 반대로 그 사람이 뚱뚱해지면 옷이나 신발은 너무 낄 수 있다. 거주 공간도 넓을 수 있다. 반대로 너무 가까운 곳에 신축 건물이 올라가면 전망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좁은 전망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좁은 계곡에서 평지로 나가면 시야가 넓어진다. 좁은 거리와 골목길이 있고, 바다 양옆에 육지가 바짝 붙어있는 해협이 있다. 반대로 널찍한 장소와 널찍한 경관도 있다. 또 무한히 넓은 바다라는 말도 사용한다. 공간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좁거나 넓을 수 있다. 좁음은 언제나 자유로운 움직임을 제한하는 외피와 관련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옷이 몸에 조이면 몸에 꼭 낀다고 하고, 집도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활동 공간을 제공하지 못하면 좁을 수 있다. 반면에 넓다는 것은 이런 방해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낯선 곳: 낯선 것의 반대는 아는 것, 익숙한 것, 일반적으로 '내 것'이다. 낯선 것은 언제나 나의 본질과 모순되어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나의 안전을 위협하는 "다른"것이다. 아이들에게 낯선 사람이란 곧 모르는 사람이다. 아이들이 오랜 기간 낯선 사람을 나쁜 사람이란 뜻으로도 이해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러한 근원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아는 것은 좋은 것이고 모르는 것은 나쁜 것이다. '낯선 곳'의 개념의 중심에는 변함없이 공간 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 과거의 어법에서도 낯선 사람들이란 자신의 출신지에 살지 않는 사람, 외국인을 뜻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익숙한 세계에서 낯선 환경으로 내던져진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과 사물에 대해 가지고 있던 당연하고 익숙한 느낌은 사라진다. 우리가 사는 집에 낯선 사람이나 낯선 세력이 침입할 수 있고, 우리 자신의 삶도 우리에게 낯설어질 수 있다. 헤세는 낯선 이의 섬뜩한 힘이 인간을 전율케 하는 악마적인 모습으로 어린아이의 친숙하고 든든한 공간에 침투하는 모습을 인상 깊게 묘사했다. 그럴 경우 인간은 불안해하면서 외로움을 느낀다.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문화는 낯선 것을 새로 수용하고 습득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그러나 낯선 것이 지나치게 영향을 미치고 새로 받아들인 남의 것이 내 생활을 질식시키는 과잉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적응력과 습득해야 할 낯선 것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먼 곳: 먼 곳은 본질상 갈 수 없다. 신비롭게 유혹하는 먼 곳에 대한 채워질 수 없는 동경만이 남을 뿐이다. 갈 수 없는데도 인간은 거기에 가고 싶어 하고, 먼 곳은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인간을 잡아끈다. 먼 곳에 대한 동경은 인간의 본질 깊숙이 자리 잡은 방식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인간은 먼 곳에서 무엇을 찾을까? 낭만주의자들 가운데 특히 노발리스의 글에 먼 곳에 대한 동경은 "내면으로 가는 신비로운 길"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그것의 최종 목표는 귀향이라는 점이 가장 뚜렷이 나타나 있는 것 같다. 고향에 대항 향수와 먼 곳을 향한 동경은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우리는 양자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게 아닌지 물어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바깥으로 나가 먼 곳에서 찾는 것은 바로 자신의 깊은 본질이다. 이로써 우리는 먼 곳에 대한 동경이 탄생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도보여행과 오솔길
도보여행: 도보여행이란, 조급해하지 않고 한 장소에서 그와 비슷한 다른 장소로 여유 있게 걸어가되 그 자체가 목적인 이동을 말한다. 인간이 어느 시대에나 오늘날과 같은 도보여행을 한 것은 아니다. 지난날 편력하던 수공업자 도제나 유랑 생활을 하던 학생들은 우리가 말하는 도보여행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배움을 얻기 위해 낯선 곳으로 떠났고 모험을 즐기는 마음으로 세상을 알기 위해 길을 떠났다. 요즈음 말하는 도보여행, 즉 그 자체가 목적인 도보여행은 근대 문화 비판의 산물이다. 정처 없음과 연결되는 도보여행의 특징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보여행자는 전망이나 경치가 좋은 곳에서 멈춰 선다.
오솔길: 도보여행자가 흔히 이용하는 오솔길 모양도 도보여행의 특성과 일치한다. 오솔길을 지방도로나 특히 현대의 자동차 도로와 대비해 보면 그 본질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지방도로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길이다. 지방도로는 주변 경관에서 잘려 나와 그 목적에 맞게 특별히 만들어졌다. 반면 오솔길은 풍경을 따라 굽이지고 장애물을 비켜가면서, 도로 건설자라면 단호하게 개입해 파괴했을 지형에 순응한다.
3부. 안식처로서 집집의 의미
세계의 중심으로서 집: 인간은 지구상에서 어느 곳에도 특별히 매여 있지 않게 된 까닭에 고향을 잃어버렸다. 인간은 위협적으로 달려드는 세계에서 영원한 망명자가 되었다. 이것이 현대인이 직면한 위험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이 위험에서 인간의 과제가 탄생한다. 인간이 자신의 공간에서 다시 중심을 찾는 게 중요하다면 인간의 본질 실현이 그런 중심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면, 인간은 더 이상 중심을 주어진 것으로 보지 말고 스스로 만들어내야 하며, 자발적으로 중심에 서서 모든 외부 공격을 막아내야 한다. 이로써 중심의 창조는 인간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그리고 그 과제는 인간이 자신의 집을 짓고 거기에 거주함으로써 실현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집과 내적인 관계를 구축해 집이 우리에게 든든한 발판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거주: 거주란 특정한 장소를 집으로 삼아 그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거기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맨 먼저 생텍쥐페리가 『성채』에서 거주의 의미를 강조했다고 여겨진다. "나는 커다란 진실을 발견했다"고 적은 그는 "사람들이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 사물이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는 그들이 사는 집의 의미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거주는 다른 여러 행동들과 비슷하게 내키는 대로 저지르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행위이며 인간과 세계의 관계 전체를 결정하는 행위이다. 인간은 집에 거주하면서 자신의 참된 본질을 실현할 수 있다.
안도감의 공간: 집은 인간에게 든든함을 주는 곳이다. 따라서 거주의 문제는 집의 문제로 압축된다. 인간은 집에서 자유롭고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고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체험공간에서는 집의 경계를 이루는 담, 혹은 일반적으로 거주 구역의 경계선으로 인해 불연속의 요인이 발생한다. 이로써 공간은 뚜렷하게 구분되는 두 영역으로 분리된다. 집의 담은 대규모 일반 공간으로부터 특별하고 사적인 공간을 떼어냄으로써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으로 구분한다.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이라는 두 영역은 체험 공간 전체 구조의 기본을 이루고, 나아가 인간 삶의 기본이 된다.
살기 좋은 공간
살기 좋은 집의 본질의 몇 가지 특성은 금방 추려낼 수 있다. 우선 주거 공간은 격리된 인상을 주어야 한다. 인간에게 바깥세상으로부터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이 집의 과제라고 한다며, 이는 주거 공간의 양식에서도 표현되어야 한다. 공간의 크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커다란 공간은 자칫 안락하지 못한 느낌을 주기 쉽다. 비교적 작은 공간은 아늑해 보이지만 너무 작으면 오히려 답답한 인상을 받게 된다. 공간에 가구를 비치하는 방식도 중요하다. 가구는 휑한 느낌이나 너무 꽉 찬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공간을 채워야 한다. 공간에 비치된 가구에서는 그것을 애정을 갖고 구입해 간수하고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어야 한다. 공간을 살기 좋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 내뿜는 분위기이다. 편안하고 친근한 타인의 집은 오로지 매력으로만 우리를 사로잡지 않는다. 그런 곳은 친근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 자신을 되찾게 함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킨다.
4부. 공간의 여러 관점들호돌로지적 공간: 길이 열어주는 공간
거리: 우선 수학적 공간과 비교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에 부합할 듯하다. 우리는 주변 공간을 얼마든지 수학적인 방법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공간을 정확히 측량하고, 각 지점 간의 거리를 미터와 센티미터 단위로 정확히 표시하며, 이것을 설계도나 지도에 일정한 비율로 그려 넣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벽, 창문, 문, 경우에 따라서는 가구들까지 표시된 건물의 평면도가 탄생하고, 도로와 광장이 표시된 도시의 설계도, 산맥과 도시와 강이 그려진 한 나라의 지도, 그리고 지구본이 탄생한다. 이 모든 것에는 위치 관계가 기입돼 있고 특히 거리가 정확하게 표시돼 있어서 필요할 경우에 지도를 보고 해독할 수 있다. 비율에 맞게 공간을 모사한 지도로 일정 지역에서 방향을 가늠하기도 한다.
레빈의 호돌로지적 공간: 레빈(독일 출신의 미국 형태심리학자)이 도입하고 사르트르가 수용한 호돌로지적 공간과 거리라는 개념은 매우 투명하고 생산적이다. '길'을 뜻하는 그리스어 "오도스"에서 유래한 호돌로지적 공간은 길이 열어주는 공간을 의미한다. 호돌로지적 공간은 근본적으로 추상적이고 수학적인 공간과 대조를 이룬다. 수학적 공간에서 두 지점 사이의 거리는 양 지점의 좌표에 의해서만 결정되므로 그 사이에 놓인 공간의 구조와는 무관한 객관적인 수치다. 반면 호돌로지적 공간은 인간이 구체적으로 살아가고 체험하는 공간에서 우리가 목표점까지의 다양한 도달 가능성이라고 표현했던 요소가 추가되면서 나타나는 변화를 포함한다. 그래서 두 지점을 잇는 최단 거리인 직선 대신 레빈의 표현에 따르면 "최상의 길"이 등장한다. "최상의 길"은 여러 가지를 뜻할 수 있는데, 그 길에 대한 인간의 다양한 요구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호돌로지적 방향은 내가 호돌로지적 길에 있는 목표점에 가려 할 때 첫 걸음을 떼는 순간 접어들어야 하는 방향이다. 만일 우회로를 통해서만 그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다면 호돌로지적 방향은 기하학적 방향과 크게 다를 수 있다. 레빈도 강조했듯이, 최상의 길은 사물의 관계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고 인간의 마음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진다. 만일 최단 거리의 길에서 불쾌한 사람을 만날까봐 두렵다면 나는 우회로를 택해 다른 길로 갈 것이고 이때는 이 길이 최상의 길이 된다.
샤르트르의 공간: 인간은 그의 체류지에서 시작되는 길의 체계에 의해 "위치가 결정된다."고 샤르트르는 조금 딱딱한 표현을 사용해 말한다. 이 길은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것을 넘어 무엇보다 타인의 존재를 통해 의미를 얻는 장소와 연관된다. "인간은 장소와의 관계, 즉 그곳의 위도와 경도를 통해 위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공간을 통해 위치가 결정된다." 세계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마음속에 떠올린 타인과 그를 이어주는 수많은 길이다.
낮 공간과 밤 공간
낮 공간: 눈을 뜨면 낮 공간이 내 앞에 활짝 열린다. 나는 뚜렷한 윤곽을 가진 사물을 볼 수 있고, 사물들을 떼어놓는 거리도 인지한다. 또 나는 사물들만 보지 않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빈 공간도 본다. 거기에는 내용이 채워진 부피 있는 물체도 있고 빈 공간도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하는 일목요연함이다. "밝은 공간은 넓은 의미에서 사회화된 공간이다." 만일 이 공동성에 완전히 노출되고 싶지 않다면, 거기에 홀로 쓸 수 있는 사적인 영역, 공간의 공공성에서 물러나 숨어들 수 있는 은신처를 마련해야 한다.
어스름한 공간: 낮 공간에 있던 투명함과 일목요연함이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 존재했던 지평선도 단계적으로 없어진다. 여기에 속하는 것이 황혼과 안개, 그리고 이와 유사한 현상들이다. 나는 이것들을 간단히 어스름한 공간이라고 부르겠다. 어스름한 수평적 공간으로는 맨 먼저 숲을 들고 싶다. 숲에서는 사물 자체가 시선을 방해한다. 즉 나무줄기, 덤불, 가지, 나뭇잎 따위가 일종의 내부 공간 같은 좁은 영역에 인간을 가두면서 시선을 가로막는다. 그래서 시선은 겨우 몇 미터 정도만 숲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을 뿐 더 나아가지 못하고 나무줄기 사이에서 사라진다. 숲의 성격은 바슐라르가 인용한 프랑스 현대 시인의 글에 이렇게 적혀 있다. "숲에 특색은 닫혀 있는 동시에 사방으로 열려 있다는 점에 있다." 으스스하게 옥죄는 듯한 숲의 성격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어스름, 즉 반투명함도 숲의 본질에 속한다. 개개 사물은 뚜렷한 윤곽을 잃고 사방으로 들어찬 매개물에 흡수된다. 게다가 어딘가에서 좔좔거리는 소리까지 들리면 개별 소리들은 이 불특정한 상황에서 하나로 합쳐져 어둑하고 몽롱한 인상을 풍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