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추구
조지 프로흐니크 지음 | 고즈윈
침묵의 추구
조지 프로흐니크 지음
고즈윈 / 2011년 8월 / 360쪽 / 13,800원
미지의 세계에 귀 기울이다수도원에서 생활한 지 이틀째 되던 날 밤, 침묵을 들었다. 나는 예배당에 앉아 있었다. 신도들이 자리를 뜨고 나만 홀로 남았다. 나는 아주 잠깐 문자 뜻 그대로의 침묵을 경험했다. 아이오와 주 더뷰크 소재 '뉴 멜러레이 수도원'에 갔던 이유는 침묵에 평생을 바쳤던 사람들에게서 교훈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토수도회의 한 분파에 속한 트라피스트 수도승들은 침묵만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도 아니고 요즘에는 대화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침묵하며 생활한다. 수도원을 찾았던 것은 트라피스트 수도승의 방식을 배우고 내 생활에 배어 있는 소음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소망 외에도 수도원의 침묵에서 진리를 깨달아 뉴욕에 도입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신학적, 철학적 전통을 담은 책과 글을 챙겨 여행을 떠났다.
침묵 깨닫기: 소박하지만 쾌적한 '뉴 멀러레이 수도원'의 숙소로 돌아와서, 집에서 가져온 책 몇 권을 집어 들고 수도원 안마당에 앉으면 수수한 석재 분수가 있고 두텁게 내려앉은 눈 사이로 나뭇가지들이 빼곡히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에 잠시 쉬면서 긴장을 풀기 위해 온천 휴양지를 찾는 것과 같은 이유로 수도원을 찾은 것은 아니다. 일찍이 사람들은 살고 죽는 이유를 깨닫기 위해 수도승의 금욕적인 삶을 따르고자 했다. 수도승은 한때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이었다. 알버릭 수도사는 매춘이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는 말이 있지만 매춘부가 생겨나기 전부터 수도승이 있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쳤지만 여하튼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말이다.
신학자들은 침묵 추구의 기원을 찾아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 유태인 신비주의자 이삭 루리아가 발전시킨 응축(凝縮, Tsimtsum) 교리에 따르면 침묵의 추구는 우주의 기초를 형성하는 활동이다. 청년 시절 루리아는 나일 강 기슭의 섬에서 홀로 명상하며 침묵을 찾기 시작해서 지저귀는 새,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나무 잎, 타고 있는 장작의 언어를 해석하며 유명해졌다. 나중에 루리아는 팔레스타인의 사페드로 가서 후대까지 전해질 신비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말하고 싶은 진리가 워낙 방대하다는 사실에 짓눌렸던 루리아는 글을 거의 쓰지 않았지만 "입을 벌려 말하려 할 때마다 댐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흘러넘치는 느낌이 들었다."라고 전해진다.
우리 모두에게는 침묵에 도달했음을 알아내는 직관적인 방식이 있다. 우리 인간이 소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연구는 이제 물리학, 생리학 분야에서 심리학과 심리 음향학 분야로 발 빠르게 옮겨가는 추세이다. 인간은 자신이 듣는 소리에 대해 두뇌에서 복잡하게 음을 그려냄과 동시에 정신적인 연상을 함으로써 그 소리를 경험하게 된다. 이라크에 주둔했던 미군 저격병 로버트는 전투 당시 경험했던 침묵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람은 위협이 될 수 있는 모든 소리에 집중하면서 무엇이든 자기 생명을 유지시켜 줄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됩니다. 마치 동물처럼 말이죠."
우리는 왜 들을까"멀리서 딱 하는 소리가 들리면 어떻게 하겠어요?" 톨레도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리케 헤프너가 질문을 던진다. 걸걸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녀가 하는 말을 좀 더 주의 깊게 들을 걸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겠죠?" 나는 과감하게 이렇게 대답해 봤다. "소리의 근원을 찾겠다는 뜻이군요.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소리가 났는지 알고 싶은 거죠. 그래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싶은 거예요. 포유동물에게 귀는 동물 탐지기라서 사냥감의 위치를 눈에 전달하죠. 따라서 귀로 충분한 범위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음원의 위치를 알기 위해 정확한 주파수를 들을 수 있어야 해요. 그에 따라 청각도 진화한 겁니다."
어쨌거나 겉보기에는 침묵 찾기라는 개념 자체가 감각적으로 다소 무의미해 보인다. 형태가 전혀 없는 존재를 추구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인간은 맛이나 냄새가 없는 곳을 찾아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감각을 되도록 적게 사용하는 것이 유쾌한 정도를 넘어 유익하다고까지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의 들을 것이 없다는 개념에 그토록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헤프너가 수행하는 연구의 초점은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이론 즉 동물은 생존하기 위해서 소리를 듣는다는 이론과 생활 유형이 같은 동물은 같은 종류의 소리를 듣는다는 이론에 맞춰져 있다. 이는 결국 두개골 크기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고, 청각 장치는 소리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이론과 같다.
1870년대 중반부터, 소리 위치를 인식하는 능력에 대한 연구 분야에서는 머리가 만드는 '소리 그늘(Sound Shadow)'의 유용성이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 분야의 연구에 공헌한 사람은, 테니스공의 불규칙 비행을 설명해 낸 영국 물리학자 레일리 경이다. 그는 조수들에게 소리굽쇠를 흔들어서 실험을 진행했다. 이 실험을 통해 레일리는 주파수가 높은 소리의 경우 먼저 도달하는 귀에 더 크게 들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반대편 귀로 향하는 음파의 상부 주파수를 머리가 가로막기 때문이다. 레일리는 이런 강도 변화에 '양이兩耳 비율'이란 용어를 붙였다. 두개골이 작은 동물에게는 '작은 스펙트럼 차이'가 필수적이지만 자신의 청력 범위를 넘어서는 소리를 들으면 위험을 연상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침묵 추구의 진화: 귀의 작동 원리의 복잡성은 머리의 측면에 붙어 아무 기능도 하지 않는 듯 보이는 귓바퀴에서 시작된다. 30년에 걸쳐 두개골 크기와 고주파수 청력의 관련성을 연구하면서 자신감이 생기기는 했지만 귓바퀴는 헤프너가 수행하는 연구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녀는 전문 용어를 사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귓바퀴는 독립적으로 소리 그늘을 만들어요. 두개골이 만드는 소리 그늘의 정도를 바꾸면서 방향성 증폭기로 작용하죠. 따라서 소리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이면 더욱 잘 들을 수 있어요." 헤프너가 덧붙였다. "아이들의 청력 상실이 불을 보듯 빤해요. 헤드폰을 사용하면 소리 크기를 인식하지 못하거든요. 커다란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리면 중이는 소음으로부터 반사적으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청각 기관에 압박을 가합니다. 정말 커다란 소리는 사람이 아무리 무언가에 열중해 있다 하더라도 치명적이 되죠."
1961년, 뉴욕에서 활동하는 귀 전문가 사무엘 로젠은 "현대 기계화의 지속적인 공격에 적응"되지 않은 사람들의 청력을 측정하고 싶었다. 로젠은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서 남동쪽으로 1천 Km 가량 떨어진 지역에 거주하는 마반 부족을 찾아갔다.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소음이 적은 지역에 사는 부족으로, 일흔 살의 마반 부족 사람들의 청력이 20대의 미국인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마반 부족의 53%는 뉴욕인의 2%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식별할 수 있었다. 로젠은 "마반 사람들은 서로 90m 정도 또는 미식축구 경기장 길이만큼 떨어져 있어도 낮은 목소리로 그것도 등을 돌리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사항을 나열하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세계가 가능한 한 조용해지려 하기 때문에 인간의 청력이 두드러지게 예민해졌다면 오늘날 고막을 마치 큰 북이나 되는 듯 울려 대는 소리에 거의 매일 노출되는 경우에는 과연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극도로 예민한 인간 청력이 단지 취약점으로만 작용할까? 우리의 예민한 감각은 공격을 받다 못해 결국 아무 소리도 못 듣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될까? 인간의 청력은 인간 역사의 과정에서 뒤바뀌어 온 조건인 자연계의 침묵에 대한 소리의 비율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한, 오감 중 유일한 감각이라 할 수 있다. 청력에 대해 알아갈수록 인간이 의도적으로 소란스러워진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더욱 납득이 가질 않았다.
소음과 삶의 에너지최초의 행상들이 소리를 지르며 제품을 팔러 돌아다니던 시대 이후 쇼핑은 소음과 연관되어 왔다. 고대 시장(많은 수의 현대 시장에 이르기까지)에서 상인은 제품의 성격과 질, 가격을 큰 소리로 외쳤다. 최고의 가격을 가장 크게 외치는 상인이 가장 많은 손님을 끌어 모을 때가 많았다. 기본적으로 폐활량이 승리를 좌우하는 경쟁이었다. 하지만 『선조들이 살던 세상』에서 "친숙한 소음에 묻혀 긴장을 풀 수 있는 곳"이라며 시장을 옹호하는 글을 썼던 어빙 하우를 비롯해서 몇몇 거리 소음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커다란 소음 자체가 인기 대상은 아니었다. 신문들은 20세기 초 뉴욕에서 성행했던 행상을 묘사할 때, "냄새나는", "꼴불견의", "더러운" 등과 더불어 "떠들썩한"이란 형용사를 어김없이 사용했다.
소리의 환희: 예고르 레즈니코프는 파리대학에 몸담고 있는 고대 음악 전문가로 중세 성가와 동굴 탐험을 즐긴다. 그는 1983년, 프랑스에 있는 구석기시대 동굴 르포르텔을 찾아갔다. 레즈니코프는 동굴로 걸어 들어가면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공간에 들어갈 때마다 "그곳의 소리를 느끼기 위해"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었다. 그는 놀랍게도 벽에 동물 그림이 새겨져 있는 장소에서는 콧노래가 더욱 커지고 격렬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즈니코프는 동료인 미셸 도부아와 함께 연구 활동을 하면서 프랑스 피레네 산맥 지대에 그려진 고대 동굴 벽화의 위치가 음향 공명 증가 지점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림이나 무늬가 없는 구석기시대 동굴에는 공명 지점이 거의 없는 반면에 그림이 있는 일부 지점은 소리와 관련지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레즈니코프는 음향상으로 고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석벽과 그림이 교차하는 곳에서 주술사들이 공명 증폭과 메아리를 통해 자신들이 행하는 의식의 감정적 힘을 고조시켰을 것이라고 여겼다.(이와 같은 장소에서 일어나는 공명의 힘은 매우 강력해서 동굴에서 소리를 내면 몸 전체가 공간과 함께 앞뒤로 진동하는 현상을 느꼈다고 함.) 음향효과는 공간 및 그곳에 그려진 형상과 교감을 높였다. 이러한 동시성이 특정 동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주술사의 노력을 뒷받침해 주었을 것이다. 레즈니코프의 발견에 따르면, 동물 그림 근처에서 소리를 지르면 그림 속 동물이 포효하는 듯 보이게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반향과 메아리, 증폭과 공명은 인간의 감정을 끌어올리고 이성을 되도록 억제하기 위한 선사시대 현인들의 계략이었다. 이것이 쇼핑몰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조용한 휴식을어디에 살든 침묵을 찾는 방법은 여럿이다. 다만 의당 그래야 하는 만큼 유쾌하지 않을 때가 많을 뿐이다. 침묵은 여전히 주변에 있지만 지나치게 강조되는 신성한 침묵의 개념과는 동떨어져 보여 외면 받곤 한다. 철조망 뒤로 깨진 유리창 조각이 흩어진 공터, 텅 빈 건물, 시체 안치소는 고요할지 모르나 대체 어떤 대가를 치른 침묵일까? 여가를 즐기거나, 쇼핑을 하려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는 어디든 지독하게 시끄럽기 마련이다. 조금만 내륙으로 들어가면 간혹 지역 주민만이 눈에 들어오고 불현듯 정말 낯선 장소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따라서 이렇게 물어보자. 내가 사는 곳의 내부는 어디일까? 파도와 모래가 끝나는 곳은 어디일까? 아무도 앉지 않는 벤치는 어디 있을까?
별 특징 없이 서 있는 고층 건물의 옥상이 그렇듯, 많은 도시에서 주저앉은 오래된 다리 밑 공간은 일종의 피난처이다. 소도시에서는 인터넷 연결 시설이 부실한 역사협회나 도서관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인기 없는 주제를 다루는 박물관은 어느 곳이든 한적하기 마련이다 주중에 찾아가는 공동묘지도 꽤나 확실한 피난처다. 그저 '문화가 사람들을 모두 어디로 끌어들일까?'라는 질문을 항상 던져보고 그곳에서 등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가라. 맨해튼에서 두 시간 정도 조용히 있을 곳을 찾기는 그다지 녹록치 않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곳 주변 지역은 특히나 짧은 휴식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행운의 장소다.
경배 장소: 자리에서 일어나 엽서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교회로 향했다. 신자이든 아니든 현대의 거대 사회에서는 신에게 불평할 것이 많은 법이다. 하지만 신에 대해 한 가지 인정해야 할 점이 있다. 신은 자신이 경배 받는 장소를 조용하게 만드는 데 대가라는 사실이다. 뉴욕 같은 대도시에 자리한 교회는 대부분 비어 있다. 교회라는 현대 도시의 경배 장소에서 신앙이 모습을 감추면서, 매우 장엄하고 전반적인 침묵이 가득 드리운 엄청나게 커다란 암흑의 장소만이 덩그렇게 남은 셈이다.
나는 51번가와 파크가가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한 성 바르톨로뮤 교회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제단 위에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길게 나있는 아름답고 동굴 같은 곳이었다. 신도 석은 텅텅 비어 있고 교회는 완전히 암흑에 싸여 있었다. 교회를 나와 북쪽으로 몇 블록을 걷다가 5번가에 있는 성 토마스 교회에 들어갔다. 기가 막히게 멋진 곳이었다. 제단 뒤에는 유명한 25m 높이의 장식용 장막이 쳐 있고 그곳에 새겨진 사도들의 모습을 조명이 집중적으로 비추고 있었다. 수백 명은 족히 들어설 수 있는 신도 석에는 기껏해야 대여섯 명만이 앉아 있고 사방이 고요했다. 신도 석에 앉은 나는 대상이 누구이든 나에게 주어진 양질의 침묵에 감사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교회에서 맞은 침묵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 부드러운 침대에서 자면서 누렸던 호사와 같았다.
성 토마스 교회를 나서자 어느덧 자유 시간을 다 써버려 일하러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잠깐이나마 얼마간의 침묵을 누릴 수 있어서, 어느 정도 무기력에서 벗어나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제 소음의 한복판으로 들어갈 채비가 됐다.
방음 전선이제 세상이 내는 소리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전적이고 상업적이며 사회문화적인 이유에서 현대인은 과거 어느 때보다 지속적으로 소음을 경험하고 그러한 소음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우리를 소음의 벼랑 끝까지 미는 새로운 형태의 소음을 억제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왜 그럴까? 활력과 젊음을 생생히 느끼고, 집중력을 살리고, 자유와 속도감을 만끽하기 위해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다른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서 새로운 형태의 소음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침묵해야 할 필요성이 덜해지지는 않는다. 어떻게 소음의 세계에서 발을 뺄 수 있을까? 단순히 소음을 덮지 말고 자기 삶을 소음으로부터 보호하려면 실제로 무엇을 해야 할까?
매우 최근의, 심지어 매우 복잡한 형태의 방음 기술조차도 몇 가지 원칙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물질이나, 일정 거리를 통과시켜 소리를 차단하거나, 두꺼운 커튼처럼 재료에 파동을 흡수시켜 소리를 약화시키거나, 음원을 흡수해서 음파를 전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방음업자들은 돌려 말할지도 모르지만 실수요자의 관점에서 보면 기본적으로 소음을 부수거나 빨아들이는 것이다. 소리는 '물리적인 힘'이라는 방음 분야의 전해 내려온 말에서 차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방음의 기본 원칙을 나타내는 표현들은 대부분 군사 용어의 분위기를 풍긴다. 방음업자들은 시공 전에 '소음의 고립', '소음 경로의 우회 공격', '소리 진동의 상쇄나 약화' 등의 원칙을 말한다. 넓은 의미로 생각해 보면 이 원칙들은 매우 오래 전부터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플러그를 뽑자: 방음의 시작은 소리가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방음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문학상의 표현은, 「오디세우스」에서 배가 세이렌(그리스 신화의 요정. 노래로 선원들을 홀려 죽음에 이끌게 함)이 가까이 다가가자 오디세우스가 선원들에게 밀랍으로 귀를 막으라고 했던 명령일 것이다. 세계 최초의 집단 방음 사건은 불쾌한 소음이 아니라 너무나 유혹적이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소리로부터 선원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에서 비롯되었다. 오디세우스 자신은 귀를 막는 대신 움직이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돛대에 몸을 꽁꽁 묶고, 귀로는 평생 한 번 들을까 말까 한 세레나데를 즐겼다. 이렇듯 초기 방음은 침묵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듣고 싶은 소음이 군중에 묻혀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