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없는 교육 개혁
데이비드 타이악 외 지음 | 럭스미디어
학교 없는 교육 개혁
데이비드 타이악, 래리 큐반 지음
럭스미디어 / 2011년 9월 / 316쪽 / 15,000원
프롤로그_ 과거로부터의 학습우리는 이 책을 원래 '이상향을 향한 땜질(Tinkering toward Utopia)’이라고 이름붙였다. 그 이유는 거의 세속적 종교에 가까운 교육에 대한 미국인들의 과한 믿음과 교육 현장에서의 완만한 변화 사이에 긴장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1세기 이상 동안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젊은 세대를 향상시켜 미래를 완벽하게 준비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의 실제 개혁이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상향(Utopia)’과 ‘땜질(Tinkering)’이라는 단어는 각각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상향적 생각은 그림의 떡으로 비하되기도 하지만, 비전이 있는 생각으로 칭송받을 수 있다. 땜질은 단순한 점증적 발상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일상적 문제에 대한 상식적 해결책으로 칭송받기도 한다. 땜질적 발상과 이상향적 생각의 긍정적 예와 부정적 예는 수많은 교육 개혁의 기록을 만들어 냈다.
우리가 교육 개혁이라는 말을 할 때에는 인식하고 있는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을 수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학교를 변화시키려는 계획적 노력을 의미한다. 가끔은 광범위한 사회적 위기가 교육 개혁을 초래하기도 하고, 때로는 개혁이 전문가에 의해 주도된 내부적 개선책이 되기도 한다. 문제에 대한 진단과 대안으로 제시되는 해결책은 시간에 따라 바뀐다. 그러나 내용이 무엇이던 간에 개혁은 문제 발견, 해결책 고안, 새로운 정책의 채택, 제도적 변화의 수반 등의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현재 직면하고 있는 교육 개혁의 긴급한 상황에서, 왜 교육 개혁의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교육 개혁을 바라는 사람은 누구나 다음 두 가지 면 때문에 역사에 사로잡힌다. 모든 사람들과 제도는 역사(과거의 사실)의 산물이다. 또한, 모든 사람들은 현재와 미래에 어떤 선택을 할 때 알게 모르게 역사를 아울러 사용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만들어갈 때 역사의식을 가지고 실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니라 그들의 역사 인식이 얼마나 정확하고 적절한가에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상황의 맥락과 복잡함에 충분히 주의하여 추론하는지, 비유는 타당한 것인지, 과거의 대안적 해석이 미래에 대하여 어떻게 다른 비전을 가져올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역사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교육 개혁을 평가하도록 한다. 선거 일정에 따른 단기적인 필요나 예산, 연구비, 언론 보도, 개혁 전문가의 명성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떤 개혁은 시행 직후 성공으로 여겨지지만, 밝게 반짝거리다가 곧 스러지는 반딧불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교사를 대신하는 교수법 도구로 과학기술을 채택하려는 계속되는 시도가 바로 이러한 예이다. 어떤 개혁은 단기적으로 볼 때는 의문투성이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효과적인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헤드 스타트(Head Start, 저소득층 유아들을 위한 종합적인 교육 및 건강 프로그램)의 긍정적인 효과는 참여자들의 저학년 시절보다는 청소년 시절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근본적 제도의 변화나 뿌리 깊은 사회적 부정의不正義의 제거를 목표로 하는 개혁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한 세대나 그 이상의 기간이 소요될 것이다.
진보인가 퇴보인가"교육의 이상향이 가시권에 들어왔는가?" 1931년, 미주리 주의 교육가인 W. W. 카펜터가 던진 질문이다. 그는 '그렇다'고 자답했는데, 그 이유는 미국이 계속된 진보를 통해서 모든 아이들에게 적절한 교육을 시킨다는 목적에 거의 다다랐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추구하기 위하여 "우리는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실험을 하고 있고, 그 결과는 다음 세기의 교육을 결정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카펜터는 유별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교육계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거의 원리에 가까운 두 가지 의견을 피력하였다. 진보는 학교교육의 원칙이고, 더 나은 학교교육은 더 나은 사회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여론은 바뀌었다. 과거 100년간 공교육이 진보했다는 것만큼이나 최근에는 공교육이 퇴보하고 있다는 것이 자명하게 받아들여진다. 갤럽이 공교육에 대한 여론조사를 체계적으로 시작한 1969년 이후 교육이 중단 없이 진보한다는 믿음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교육에 대한 비판이 늘어날수록, 학교와 교사에 대한 여론은 해마다 나빠졌다. 시민들은 1974년에는 학교를 'B-기관'으로 평가했고, 1981년에는 'C-기관'으로 평가했다. 1978년 41%의 미국인들은 당시의 학교가 그 예전보다 나빠졌다고 했고, 단지 35%만이 예전보다 좋다고 응답했다. 5년 후, 《뉴욕타임스》의 연구에서는 두 의견이 36:36으로 동률을 이뤘다.
교육이나 사회에서 진보와 퇴보에 관한 생각은 관점에 따라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거나 오류로 보일 수 있지만, 논란의 소지가 매우 큰 부분이다. 고문처럼 괴로운 것으로 기억되는 20세기가 '인간 진보의 시대'라고 여겨지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처럼 진보라는 것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고 한 집단과 다른 집단을 비교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기대와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상태가 좋아지는 것이지 나빠지는 것인지에 대한 평가도 다르다. 만약 한 집단의 상태가 좋아졌다면 다른 집단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누군가가 얻었다면 다른 쪽은 잃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빈곤층 가정의 자녀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도록 하는 교육 확대는 한때 고등학교 교육이 중산층의 삶을 보장해 준다고 믿었던 가정들에게는 권리가 침해당하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누구를 위한 진보인가?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남부 지방의 흑인 같은 최하위층 사람들조차도 학교교육의 질이 어느 정도 나아진 것을 경험했지만, 국가 통계 속에 보이지 않고, 진보적 행정가들의 낙관적인 수사 뒤에 감춘 것에 대한 탐색은 교육 기회의 커다란 불공평의 차이를 드러낸다. 이러한 불공평은 거주지, 가족의 직업과 수입, 인종과 성별, 신체적/정신적 장애 여부로부터 비롯되었다. 20세기 중반의 미국 공교육은 거의 비슷한 공립학교들로 된 좋은 교육제도라기보다는 축적되어 온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반영하는 이질적이고 불평등한 기관들의 집합이었다. 모든 미국인들은 교육을 통해서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인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공통된 믿음이 있었지만, 교육을 통한 혜택은 각자에게 불평등했다.
공교육이 계층과 무관해야 한다는 공식적인 입장과는 달리, 고등학교 내에서 노동계층 학생과 상위계층 학생들은 다른 경험을 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1940년대 일리노이 주 엘름타운 고등학교는 사회계층에 따라 옷걸이도 분리되어 있었다. 이는 공식적인 학교 정책 때문이 아니라 학생들의 관습에 의한 것이었다. 교실에서도 학생들은 대학진학반과 일반반을 두고 불공평한 교육을 받았다. 성적과 직업에 대한 지도 역시 가정의 지위를 반영해서 이루어졌다. 1940년 갤럽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40%의 미국인들(대부분이 저소득층이었다)이 "교사들은 돈 있고 좋은 지위를 가진 부모의 자녀들을 선호한다."는 진술에 동의했다.
누구를 위한 진보인가? 재학률의 증가나 학생 1인당 예산지출의 증가 등 전반적인 경향이 아무리 인상적일지라도 진보적인 행정가들에 의해 상명하달식으로 이뤄진 고르지 않은 '진보'를 생각해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중반 하류층 가정들은 평등한 교육이라는 이상향이 지평선 저 멀리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기회균등으로부터 소외된 많은 사람들은 힘을 합쳐 새로운 학교 정치의 장을 열었다. 교육의 기회균등을 위해서 사회가 공정한 분배를 하도록 요구했다. 그들은 군나르 뮈르달(Gunnar Mrdal)이 '미국인의 사도신경'이라고 불렀던 '모두를 위한 자유, 평등, 정의, 공정한 기회'를 실현하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러한 희망의 수사와 진보의 교리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었을까?
성찰
학교교육의 진보와 퇴보에 대한 관념들은 매우 정치적이다. 정책결정자들의 눈을 멀게 하기는 했지만, 진보와 퇴보의 원리는 교육 개혁에 일관성과 추진력을 주었다. 19세기 공립학교 옹호자들은 공교육 체계를 만들기 위해 시민들을 설득하기 위한 수많은 수사들을 사용하였다. 진보적 행정가들은 개혁에 대한 그들의 과학적 계획이 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두 개의 명백한 개혁의 행진에도 불구하고 대열에서 낙오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 낙오자들은 희망이라는 낯익은 수사를 사용하라며 교육적 평등을 이루기 위한 사회적인 운동을 조직하기도 했다.
개혁에 대한 비평가들이 학교는 나빠진 적이 없다고 말할 때 개혁에 대한 옹호론자들은 학교가 나아진 적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했을 것이다. 우리는 둘 다 주장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공교육은 우리 사회의 가장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공적 기관으로 남아 있다. 게다가 사회적 병리 현상의 증가 속에서 교사들은 지난 세기에 기대되었던 것보다 훨씬 업무를 잘 수행하였다. 동시에 학교는 학생들이 사고할 수 있도록 잘 가르쳐야만 하는 것이 자명하다. 그것은 약화된 경제를 살리기보다는 광범위한 공익적 목적을 위함이다.
학교교육에 대한 낙관과 비관은 모두 좋은 교육이 개인과 사회에 결정적 요인이라는 계속된 확신을 반영한다. 최근에 미국인들 중 4/5가 학교가 개인의 성공에 극단적으로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의 9/10의 사람들이 미국의 미래를 위해 세계 최고의 교육제도를 만드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따라서, 당면 과제는 학교교육이 중요하다고 시민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교육이 사회적 진보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은 아직도 굳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학교교육의 향상을 위한 타당한 정책을 만들어서 걱정하는 대중의 지지를 유도하고 개혁이 의지해야 하는 교사들의 헌신을 이끌어낼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어떻게 학교가 개혁을 바꾸었는가사람들은 흔히 '어떻게 개혁이 학교를 바꾸었는지'를 묻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질문과 정반대로 '어떻게 학교가 개혁을 바꾸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몇몇 혁신적인 조치들은 학교의 제도적인 실체와 맞닥뜨리면 사라져 버리는 듯하다. 오래 지속된 개혁조차도 원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혁을 발의한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진화하기 때문에 원래 계획대로 수행되고 유지되는 개혁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정책입안자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바뀌게 된 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이라며 애석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듯한 또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목적과 계획을 가설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개혁이 계획된 대로 되지 않을 때 나름대로 이유를 댄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자들을 비난한다. 과학기술자들은 자신들의 정책은 괜찮았는데 자신들이 의도한 대로 수행해야 할 교육자들의 능력이 부족해서, 조금 좋게 말하자면 그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추측할 것이다. 사회를 개선하는 데에 학교를 이용하길 원하는 일부 사회개혁가들은 교육자들이 개혁을 제멋대로 취하고 왜곡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활용했다고 비난할 것이다. 이런 이유들은 공공의 선을 고려하기보다는 연구기관들의 편협한 이익이나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한 관료들의 고상한 꿈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준다.
교육을 통해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자는 미사여구를 만들어 내는 것이 학교를 통해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보다 쉽다. 몇몇 가정학자들은 가정학이 이혼율을 낮추고 가족을 지탱해 주며 여성으로 하여금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이 화이트소스를 만드는 법을 배우고 바느질을 배우는 동안에도 현실에서는 이혼율이 높아져 갔고 가족의 양상은 바뀌었으며 여성들은 사회적 활동을 하게 되었다. 개혁은 이따금 실행되는 과정에서 풀어낼 것으로 기대했던 어려운 문제들을 단지 조금씩 갉아먹을 뿐이다. 거의 언제나 학교가 개혁을 바꾸어 왔기 때문에 학교개혁에서 사람들이 '성공' 또는 '실패'라고 부르는 것이 무슨 뜻인지 살펴보는 게 유용할 것이다.
어떤 개혁이 '성공'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일이 어려운 것처럼, 학교가 어떻게 개혁을 변화시켰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상당히 복잡한 일이다. 우리는 개혁을 틀이 정해져 있는 정책으로 보기보다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실제적인 영향에 따라 평가하고, 거기에 따라 다시 틀을 바꿀 수 있는 어떤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실용주의자인 듀이가 제안하고 실제로 해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진보주의 교육학자들이 서로 연결된 과제들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잘못된 학생들의 행동 습관을 너그러이 봐주는 것을 보고 자신의 진보적인 원리들을 재조정했다. 목표와 실습은 끊임없이 상호작용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성찰
교육 개혁을 합리적으로 계획한 개혁가들은 때때로 자신들이 정책을 제대로 만들기만 하면 학교를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원래 계획에 얼마나 충실한지, 정해 놓은 결과를 내는 데에 얼마나 효과적인지, 얼마나 오래가는지에 따라 성공을 가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이고도 상명하달식 접근 방식은 학교가 개혁을 바꾸어 나갈 때 교사들이 교수법의 잡종을 만들기 위해 '실행 전략'으로 사용하는 수많은 방법들을 무시하게 된다. 새로운 제도는 교육기관의 과거 기록을 말끔히 씻어내지 못했다. 오늘날 구조조정과 분권화를 옹호하는 사업가들은 거의 한 세기 전에 사업가들이 승인했던 중앙집권체제의 결점들을 지우려고 애쓰고 있다. 합리적인 계획가들은 학교를 위한 계획이 있었고 그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다 싶으면 현직 교사들을 비난할지도 모르지만 학교가 쉽게 찍혀 눌리는 것은 아니다.
학교도 눈에 띄지 않는 방법으로 자주 개혁한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교실 수업현장에서 교육을 개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현명한 전략은 무엇일까? 개혁 정책들은 이미 만들어진 계획이 아니라 원리와 일반적인 목표, 경험 속에서 다듬어지고 학교 혹은 교실마다 다른 상황에서 구체화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물론 잠재적인 문제들이 있다. 정책이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면 의무가 줄어드는 것인가? 절충하거나 닥치는 대로 만들어진 잡종이 생길 가능성은 없는가? 두 가지 질문 모두 답은 '그렇다'일 것이다. 그러나 교사들이 서로 협력하고 정책가들과 함께 목표와 전술을 나누며 진척 상황을 살피면서 장애를 극복한다면 학교 개선을 위한 이러한 접근방법이 더 잘 들어맞을 것이다.
물론 변화를 위한 이러한 전략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부분적으로는 경험에 비추어 끊임없이 목표와 결과를 재평가한다는 듀이의 실용주의적 개념에 기초한 것이다. 학습을 개선하기 위한 운동은 종종 공유되는 일반적인 원리와 융통성 있는 실행에 기반을 두어 왔다. 그러나 '교수법의 과거'의 힘을 등한시하고 기본적인 제도의 형태, 즉 학교의 핵심적인 역할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틀인 '수업을 바꾸는 어려움'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왜 학교교육의 기본틀은 변하지 않는가마치 교실의 모양처럼 학교교육의 기본틀은 수십 년이 지나면서도 놀랄 정도로 안정된 모습을 유지해 왔다. 시간과 장소를 나누고 학생들을 분류해서 교실에 배치하고 '과목'에 대한 파편적인 지식을 전수하며 배웠다는 증거로 학점과 학년을 주는 방식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1902년에 듀이는 학교가 조직된 방법을 해체하려는 시도는 '비교적 교육적인 목표와 이상의 바깥에 있으며 무관한 것'이라며 반대했다. 사실 그는 "학생을 향한 기계적인 수업 방식이 실제로 전 체계를 좌지우지한다."고 말했다. 수업의 기본틀이 계속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표준화된 구조적인 형태를 변화시킬 방법을 모색해 왔던 개혁가들을 놀라게 하고 좌절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