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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이종묵, 안대회 지음 | 북스코프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이종묵, 안대회 지음

북스코프 / 2011년 8월 / 367쪽 / 18,000원



유배의 섬을 찾아서




먼 옛날부터 유배는 사형 다음 가는 무서운 형벌이었다. 중죄를 저지른 자를 차마 죽이지 못해서 먼 곳으로 격리시키는 형벌이 유배였다. 유배형은 은나라 때부터 기록에 등장하는데, 진나라와 한나라 때부터는 사형, 도형, 장형, 태형과 함께 다섯 가지 형벌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삼국사기』에 유배 기록이 보이므로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되었다. 조선 시대 유배의 형벌을 받은 관리는 의금부에서 맡았는데, 유배지에 이르면 해당 관아에서 적당한 집을 골라 머물게 했는데 이를 거정이라 했고, 그 장소를 적소 또는 적거지라 불렀다. 유배를 온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계를 꾸리게 되어 있으므로 가족이나 친지, 벗의 도움이 없으면 매우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였다. 특히 중죄를 범한 경우 노비의 신분으로 떨어져 천민처럼 노역에 동원되기도 했으므로 그 삶은 더욱 고단하였다.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에도 유배의 형벌을 받은 이가 많았지만, 조선 시대처럼 많지는 않았다. 15~16세기 벼슬아치 네 명 가운데 한 명꼴로 유배를 당한 사실로 볼 때, 그 시대 이름난 벼슬아치 치고 유배를 경험하지 않은 이는 거의 없었다고 해야 할 정도이다. 더구나 시대가 뒤로 가면 갈수록 유배의 장소는 서울과 더 멀어졌고, 아예 바다로 둘러싸인 섬으로 정적을 내몰았다.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에도 섬으로 유배된 문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육지에서 그리 멀지 않거나 자족적인 경제가 이루어지는 큰 섬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육지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조그마한 섬으로 유배를 보내 아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내몰았다.

정쟁이 심해질수록 정적을 향한 미움과 탄압이 심해져서 위리안치(圍籬安置)라는 추가 조치까지 적용되었다. 위리안치는 머무는 집의 지붕 높이까지 가시나무를 둘러쳐 외부와 완전히 격리시킨 제도이다. 개구멍 같은 작은 틈으로 먹을 것을 넣어 주어 목숨을 연장하도록 했으니 인간을 격리시키는 제도로는 참으로 가혹하고 처참한 형벌이었다. 이 형벌은 연산군 때 처음 시행되었다. 유배는 대부분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무기 징역형이었기에 다시 돌아간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 절망의 땅에 도착해서는 자연스럽게 유배의 고통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고통의 노래 사이사이에 임금을 그리는 연군의 노래가 많이 섞여 있다. 그 노래가 임금의 귀에 들어가 자신을 다시 서울로 불러 주리라는 한 가닥 희망 때문이었다. 물론 유배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연군의 노래는 점차 잦아들었다.

그렇다고 유배지가 고통과 절망의 땅만은 아니었다. 몇몇 유배객은 유배의 체험을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몸과 안식과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기회로 삼기도 하였다. 바쁜 일상에 휘둘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여유도 얻지 못하다가 유배를 와서야 산수를 즐기는 호사를 누린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절망의 섬에서 안식과 평화를 얻고 때때로 그 느낌을 문학으로 드러냈다. 반면 절망의 상태에서 모진 목숨을 지탱하다가 그 분한 마음에 허무하게 생을 마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쿠테타가 일어나 하루아침에 권좌에서 쫓겨나 교동에 유배되었던 연산군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연산군이야 폭군의 이름을 벗을 수 없겠으니 분할 것은 없다. 그러나 권력 다툼의 와중에서 신하들에게 의해 폐위된 광해군은 더욱 먼 제주도로 쫓겨 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으니, 그보다 원통한 일이 있겠는가? 조선 최후의 선비 최익현은 나라를 사랑한 죄로 이국의 땅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비분과 강개 속에 음식을 끊었다가 이역의 땅에서 숨을 거둔 그의 삶과 정신도 유배의 역사에서 기억해야 하리라.

또 억울하게 섬에 갇힌 분노를 학문으로 승화시킨 일도 유배지는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는 발분하여 침식을 잊었기에 그 같은 학문과 저술이 있었고, 사마천은 정의를 위해 싸우다가 망측한 형벌을 받았지만 발본을 통하여 불세출의 저서『사기』를 지었다. 정치적 좌절은 발분의 계기가 되고 절망스런 유배의 섬은 위대한 학문을 이룬 성지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유배가 없었다면 조선 학문의 폭과 깊이가 그만큼 이루어졌을까 의문이 들 정도이다. 정약용의 강진 유배가 없었다면 그 방대한 학문은 이루어질 수 없었으리라. 그가 강진에 유배되어 있을 때 더 큰 죄를 입은 형 정약전이 흑산도에 유배되지 않았다면 『현산어보』와『송정사의』가 나올 수 있었을까?

아름다운 우리의 섬들은, 옛날에는 사람을 유폐시키는 유배지로 활용되었다. 섬은 그때나 지금이나 섬사람들의 고향이다. 주민들이 보는 섬과 유배객들이 인고와 시련의 땅으로 보는 섬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섬과 그 섬에 있었던 수많은 옛 사연과 정보는 섬 주민이 아니라 유배객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고 현재까지 전한다. 그들이 보고 말한 것에 편견과 왜곡이 있다 해도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살펴볼 가치가 있다. 우리가 유배객의 자취를 따라 섬을 찾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업보의 섬, 왕의 유배지



교동도와 연산, 광해




예성강과 임진강, 그리고 한강이 만나 형성된 삼각주가 커져 생긴 서해의 섬 교동도, 척박하고 외로운 절도라기보다 비옥한 평야가 있어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풍요로운 섬이다. 강화도에서 뱃길로 50여 분이면 도착하는 교동도는 예전에는 인천보다 이름이 높던, 제법 세가 있던 고을이었다. 이름난 선비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교동의 아름다움을 알린 사람은 고려의 대문호 목은 이색이다. 이색은 14세 때 교동에서 가장 높은 화개산 아래 산 적이 있다. 그의 붓 끝에서 아름다운 교동의 풍광이 거의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끝없는 바다 위 푸른 하늘 나직한데

나는 듯 빠른 배, 해는 서산에 지네.

산 밑에 집집마다 막걸리를 거르고

파 썰어 회를 치니 닭이 횃대에 오르네.



「교동에서」, 『목은시고』 권6



그러나 이 아름다운 섬 교동도는 포악한 군주와 얽힌 업보의 땅이다. 이곳은 바다로 둘러싸인 절도이면서 한양과 가까워 감시가 쉽다는 이유로 쫓겨난 왕과 죄를 지은 왕족의 유배지로 자주 이용되었다. 최충헌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가 쫓겨난 고려 희종을 비롯하여, 흥선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왕족들이 교동도로 유배를 당하였다.

악행의 업보를 치른 연산



쿠테타로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 대접을 받지 못한 사람이 셋이 있다.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이 그들이다. 숙부(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노산군은 훗날 단종으로 그 지위를 돌려받았지만, 연산군과 광해군은 조나 종이 아닌 군으로 남았다.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가 신하들에게 쫓겨나 섬에 갇힌 채 최후를 맞아야 했으니, 고통은 더욱 심하였으리라. 그러나 그 고통이 업보라면 어찌하겠는가? 쫓겨난 두 임금은 섬으로 유배 가서 섬에서 죽었다. 그들의 자취가 어린 곳이 강화군에 딸린 교동도이다.

1506년 9월 2일 연산군은 즉위한 지 12년 만에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 교동도로 유배되었다. 연산군은 붉은 옷에 띠도 두르지 않은 채 내전에서 나와 땅에 엎드려 목숨을 살려 준 은혜에 감사하였다. 평교자를 타고 선인문과 돈의문을 나올 적에 갓을 숙여 쓰고는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교동 가는 길에는 노인과 아이들이 달려 나와 앞다퉈 손가락질하면서 통쾌하게 여겼다. 나인 네 명, 내시 두 명, 반감 한 명만이 그 길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위리안치의 형벌을 받았다.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중죄인을 엄중히 가두는 형벌인 위리안치는 중국에서는 시행된 사례가 보이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만 시행되었다. 밥을 나르는 하인만 작은 개구멍으로 출입하도록 허용했으므로 유배라고는 하지만 감옥살이나 다름이 없다. 공교롭게도 연산군 자신이 역사에서 처음으로 위리안치의 형벌을 시행한 사람이다. 갑자사화(1504)에 연루된 젊은 관리를 절해고도로 보낼 때 위리안치하도록 가중하여 처벌하였다. 자신이 만든 위리안치의 제도에 그 자신이 갇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배지로 떠난 연산군을 두고 백성들은 노래를 지어 비웃었다. 간신배로 낙인이 찍힌 김안로의 『용천담적기』에 나오는 노래이다.

충성이 사모인가 / 거동이 교동인가

흥청 운평 어디다 두고 / 가시 밑구멍으로 가는가



연산군은 관리들의 사모에 충성이라는 두 글자를 모두 써 붙이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했는데 관리의 모자인 사모와 속인다는 뜻의 사모가 음이 같기에, 사실은 충성이 아니라 사모가 되었다는 뜻이다. 둘째 구절은 연산군이 방탕하여 사방팔방으로 거동하기를 좋아하더니 결국에는 교동으로 가게 되었다고 비웃었다. 흥청과 운평은 기생의 벼슬이다. 연산군은 음악에 뛰어나면서도 미모가 으뜸가는 기생을 뽑아 궁중의 악대로 구성하고 그 이름을 운평이라 하였다. 운평 가운데 왕의 사랑을 받은 이들을 흥청이라고 불렀다. '흥청망청'이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하였다. 가시 밑구멍은 곧 위리안치한 곳의 개구멍을 뜻한다. 방언에서 '가시'는 처를 가리키는 각시라는 뜻도 되므로 운평이나 흥청과 같은 고운 여자는 어디 두고 각시 밑구멍으로 숨었느냐고 다시 비웃는 것이다.

연산군은 평소에 한없이 잔인하여 형벌과 죽임을 당해도 거리낌이 없을 줄로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정작 유배지로 떠날 때 겁에 질려 벌벌 떨었고 교동에 가는 도중에 배가 바람에 흔들리자 혼비백산하였다. 관아에 도착했을 때 둘러 선 병졸들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엎드려 땀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 나약한 꼴이 소문이 나서 각시 밑구멍으로 간다고 놀린 것이리라.

그러나 연산군의 각시는 교동으로 함께 가지 않았다. 부인 신씨(愼氏)는 따라갔다가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 여겨 아예 함께 가지도 않았으니 연산군은 부인에게도 버림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연산군이 가혹한 위리안치를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이 한때의 국왕을 일반 사대부 범죄자와 같이 취급하지 않았고, 또 연산군을 혈육이라 여겨 옷가지나 먹을 것을 보내 주기도 하였다. 그 소문을 들은 부인 신씨가 함께 교동으로 가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했다고도 한다.

교동으로 간 연산군은 석 달 만에 31세의 나이로 그 곳에서 죽었다. 『중종실록』에는 연산군의 동정에 대한 보고가 실려 있는데, 연산군이 역질로 몹시 괴로워하여 물도 마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눈도 뜨지 못한다고 하였다. 구중궁궐에서 귀하게 지내다가 하루아침에 바닷가의 초라한 집에 살자니 절로 병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연산군은 역질로 11월 8일 세상을 마감하였다. 죽을 때 신씨가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긴 것을 보면 그래도 조강지처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신하에게 쫓겨난 왕, 광해



교동의 업보는 광해군에게로 이어진다. 광해군은 임진왜란(1592~1598)때 세자로서 국난을 극복한 후 어렵게 왕위에 올랐지만, 배다른 형제들이 왕위를 엿볼까 전전긍긍하였다. 그래서 생모는 아니지만 공식적인 어머니였던 인목대비를 서궁에 감금하였고. 적장자였던 아우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또 임해군과 능창군 등 형제들을 교동으로 유배 보내 그곳에서 죽게 하였다. 그 업보로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도와 교동도로, 다시 제주도로 떠돌다가 죽었다.

광해군은 서인들에 의하여 왕위에서 쫓겨난 후, 인륜을 팽개치고 난정을 베푼 몹쓸 임금으로 매도되었다. 대륙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청과 실리 외교를 펼친 임금으로 재평가된 것은 현대에 와서 연구자들이 새롭게 빛을 비춘 덕이다. 인조반정(1623) 이후 역사 기록에 나타난 광해군은 철저하게 나쁜 임금이었다. 『춘향전』에서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이 변학도를 풍자해 지었다는 시가 사실은 광해군을 향한 것이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조경남의 『속잡록』에 그 시가 실려 있다.

맑은 향 나는 맛난 술은 천 사람 짜낸 피요,

가늘게 썬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일세.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구나.



암행어사 출두 장면에서 이도령이 지었다고 하여 유명한 작품이다. 명나라 장수 조도사가 한양에 왔을 때 광해군의 실정을 풍자해 지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누가 썼든 광해군의 학정을 풍자한 시임에는 변함이 없다. 당시 잡채상서니 김치정승이라는 말이 세상에 나돌았는데 잡채와 김치를 바치고 총애를 얻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렇듯이 광해군과 연관된 일은 모조리 비리로 도배되었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국왕을 몰아낸 세력이 광해군을 악행의 화신으로 몰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1623년 3월 12일 신하들의 쿠데타로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났다. 광해군과 세자는 민가로 도망가 숨어 있다가 잡혀 왔다. 3월 14일 정식으로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과 원수지간인 인목대비는 광해군이 저지른 죄 서른여섯 가지를 낱낱이 들고 죽이려 했으나 인조가 대비를 달래어 목숨만은 부지하게 하였다. 3월 23일 광해군은 아내 유씨와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인조는 왕비와 그가 총애하던 여인들에게 광해군을 따라가도록 했다. 인조의 마음 한구석에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있었던 듯하다.광해군이 강화도에 머물던 곳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지만 강화도의 읍성 안쪽에 있던 관아 근처로 추정된다. 그런데 『인조실록』(1624년 2월 14일)에 따르면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이괄이 광해군을 옹립할까 걱정되어 광해군을 바닷길로 해서 호서지역으로 옮겼다고 한다. 사태가 진정되자 바로 강화도로 데려왔다. 그후 후금의 공격이 임박하자 조정에서는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을 가야한다고 생각해 1627년 1월 20일 광해군을 교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4월 8일 기록을 보면 얼마 후 다시 교동에서 나와 강화도의 서쪽 포구인 정포로 유배지를 옮겼으며,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강화의 읍성 안으로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광해군은 이리저리 괴롭게 끌려 다니는 죄인의 신세가 되었다.

광해군은 인조에게 늘 또 다른 쿠데타의 명분을 줄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 그래서 광해군이 외부 사람과 서신을 주고받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감시하였다. 그럼에도 1628년 3월 무렵 광해군을 복위하고자 한 사건이 일어나 조야가 시끄러웠다. 이듬해 4월에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정이 이러하자 조정에서는 광해군을 아예 절도로 보내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병자호란이 터졌다. 1637년 강화도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광해군은 다시 배를 타고 교동으로 들어가야 하였다. 청이 광해군을 내세워 무슨 일을 꾸밀까 우려한 때문인 듯하다. 그래도 안심하지 못한 조정에서는 제주도로 영영 보내 버렸다. 광해군은 제주로 향하는 배를 타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바람에 비가 날려 성위에 뿌리는데

백 길 높은 다락 후텁지근 바다 음기.

푸른 바다 노한 파도 날은 저물고

푸른 산 슬픈 빛은 가을빛을 띠었네.

고향 생각에 왕손의 풀은 신물이 나고

객지의 꿈은 왕도의 물가에서 자주 깨네.

고국의 흥망은 소식조차 끊기었기에

안개 낀 강 외로운 배에 누워 있노라.



『인조실록』에는 1641년 7월 10일 광해군이 제주도의 유배지에서 사망했다는 기사와 함께 이 시를 실어 놓았다. 교동에서 제주로 떠날 때 지은 작품이라 밝혔으나 여러 기록을 고려하면 교동에서 강화로 옮긴 다음 다시 제주로 갈 때 지은 시로 보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 강화도의 낡은 성을 나서 푸른 바다로 길을 나설 때 도성의 대궐이 절로 그리웠을 것이다. 정작 광해군은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몰랐다. 배에 사방으로 장막을 쳐서 바깥을 보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도착한 후 제주임을 알고 "어쩌다 이곳에 왔는가?"라고 장탄식을 하면서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였다 한다. 광해군은 왕위에 있던 15년보다 더 긴 18년의 세월을 절해고도의 가시덤불 덮인 집에서 살았지만 그래도 67세로 천수를 누렸다. 폐위된 부인 유씨는 계해반정이 일어난 그해 죽었으니 외롭게 끈질긴 목숨을 유지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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