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의로 천하를 얻다
진수, 진화승 지음 | 팩컴북스
진수 지음
팩컴북스 / 2011년 8월 / 664쪽 / 27,000원
사마의_ 잔인한 야심가 사마의는 삼국시대 말기 위나라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촉한의 제갈량과 재기를 겨룰 만한 최고의 책략가이자 정치가이다. 이렇게 중요한 인물인데도 『삼국지』에서는 사마의 전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의 사적은 『삼국지』 내 다른 사람들의 전기에 산재해 있기 때문에 찾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전서』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전'이 아니라 황제에 관한 기록인 '기'로 분류되고 있다. 그의 자손이 위나라를 대신한 진나라 황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진나라 황제의 고조로 『진서』의 첫 머리 1편 「선제기」에 놓여 있다. '선제'는 사마의의 후손들이 황제가 된 뒤 추존한 호칭이다.
사마의는 후세에 음모가라는 인상을 남겼다. 그의 평생 행적을 보면 조조와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조조처럼 성격이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사마의는 음험하고 교활하며 무정하고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권모술수를 부렸는데, 제갈량이 지혜로운 책략가였다면 사마의는 권모술수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사마의의 자는 중달이며 하내 온현 사람으로 중원의 고위 호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영천 태수를 지냈고 부친 사마방은 낙양령, 경조윤을 지냈다. 조조가 낙양 북부위였을 때 사마방은 조조의 상관이었다. 사마의는 팔형제 중 둘째였다.
그는 장차 맞수가 될 제갈량보다 두 살이 많았는데 젊었을 때부터 사해에 이름을 날렸다. 조조 수하의 대신 최염이 그를 '총명하고 사리에 밝고 강단 있는 데다 영특하다'고 칭찬을 하자 인재를 아끼던 조조는 사마의를 자신의 수하로 부리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사마의는 가문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환관'의 후예인 조조를 우습게 여겼다. 결국 거듭 사양을 하며 자신이 중풍에 걸려서 정상적인 거동도 할 수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병을 핑계 삼아 거절하는 방식은 사마의가 자주 써먹는 권모술수였다. 후세에 원세개 같은 모략가들은 그를 따라했다. 병을 핑계 삼는 것은 중국식 권모술수의 한 방법이 되었다.
조조는 쉽게 남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 사마의의 병세를 몰래 살펴보라고 시켰다. 사마의는 그럴듯하게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건안 6년(201)에 있던 일이었다. 당시 조조는 관도대전을 마치고 창정에서 원소를 격파한 뒤 군사를 이끌고 여남에 가서 유비를 토벌하는 중이었다. 유비는 남쪽의 형주 유표에게 의탁해 있었고 조조는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사마의는 몇 년간 병을 핑계 삼다 건안 13년(208)에는 어쩔 수 없이 나와 조조의 승상부에서 '문학연'이란 속관이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사마의가 조조와 상극인 운명인지 그가 조조의 곁으로 온 그 해에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참패를 맛본다. 물론 조조도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간사한 조조는 나중에 교활하기로는 자신을 능가하는 사마의에 대해 경계하게 된다.
조조는 사마의가 기이한 상이란 소문을 들었다. 사마의가 '낭고상'이라 몸은 앞으로 향한 채 머리를 180도 돌려 뒤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괴상한 사람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조가 사마의를 시험해 보았더니 정말 그래서 매우 놀랐다고 전한다. 조조의 측근 화흠은 조조에게 이런 말은 한 적이 있다. "사마의는 매처럼 노려보고 이리처럼 돌아보는 자라 병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 국가에 큰 화가 될 것입니다."
한번은 조조가 서너 마리의 말이 여물통에서 풀을 먹는 꿈을 꾸었다. 여물통을 의미하는 '조(槽') 자가 '조(曺)'와 같은 음이라 조조는 매우 불쾌한 데다 어렴풋이 불길한 느낌까지 받았다. 조조는 꿈속의 말 서너 필이 사마의 부자 셋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꼬투리를 잡아 그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교활한 사마의는 조조의 아들 조비를 방패막이로 삼았다. 사마의는 갖은 수를 써서 조비와 교분을 쌓았다. 조조가 매번 손을 쓰려고 할 때마다 조비가 나서 그를 보호했다.
조조의 모든 좌절을 사마의의 탓으로 돌리는 데에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사마의는 조조 밑에 있을 때 비범한 전략적 재능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조조가 장로를 투항시키고 처음 한중을 평정했을 무렵, 사마의는 조조에게 유비가 촉지에서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틈을 타 단숨에 해치우고 서촉을 평정하라고 제안했다. 당시 사마의를 별로 개의치 않았던 조조는 '욕망에는 끝이 없다'면서 지나친 욕심이라고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나중에 유비가 성도에서 한중왕으로 칭하자 조조는 대노하며 전 병력을 다 쏟아 토벌하려고 했다. 그때 사마의는 냉정하게 오촉 연맹의 허점을 분석하며 두 나라의 관계를 이간질해 유비를 양측에서 공격한다면 한중, 서천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조조는 그의 계책대로 해서 한중을 얻지는 못했지만 유비에게 형주를 잃고 군영이 불에 타는 참패를 안겨 주었다. 조비가 한나라를 찬탈하고 제위에 오르자 사마의는 그와의 교분 덕분에 순탄한 길을 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조조, 조비의 시대에 사마의는 칩거하고 있는 이리와 같았다.
사마의의 군사적 재능은 제갈량과의 대항전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당시는 이미 조비의 아들 명제 시기였다. 제갈량은 기산에서 북벌을 시도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당시 위나라는 사마의가 주도하고 있었다. 제갈량은 군사 전략 면에서 사마의를 능가하지 못했다. 이점은 제갈량 본인도 인정했다. "내가 걱정하는 자는 오직 사마의 한 사람뿐이다."
결국 마지막 교전에서 제갈량은 군사를 오장원에 주둔시키고 사마의와 위남에서 전쟁을 벌였다. 원정을 나온 제갈량은 매번 군량 보급을 걱정했다. 사마의는 이 점을 알고 장기전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제갈량이 싸움을 걸고 자극을 해도, 심지어 여자의 옷을 보내 치욕을 주어도 사마의는 냉정하게 철저히 수비만 하고 싸움을 하지 않는 전략을 고수했다. 결국 아무런 대책이 없던 제갈량은 전선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토사구팽, 쓸모가 다하면 버림을 받는다. 강력한 맞수가 사라진 뒤 사마의는 위나라 정권에서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사마의와 조상은 위나라 명제로부터 임종할 때 자식을 부탁받은 대신들이었다. 제왕 조방이 제위에 올랐지만 대권은 위나라 종실의 조상 수중에 떨어졌다. 조상은 처음에는 사마의를 존중했지만 아랫사람의 부추김에 넘어가 곧 사마의에게 칼날을 겨눌 태세를 취했다. 사마의는 다시 병이 든 척했다. 그것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기회를 기다렸다가 치명적인 반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사마의의 사실적인 꾀병 연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조상의 측근 이승이 형주 자사로 임명되어 작별 인사를 빌미로 방문했는데, 사마의는 중풍에 걸려 정신을 놓은 척하며 말도 횡설수설하고 노망이 난 척했다. 결국 이승은 사마의가 진짜로 병에 걸렸다고 믿었다. 그는 그 사실을 고하며 사마의가 안쓰러워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조상이 경계심을 늦추고 수도를 떠나 고평릉에 가서 조상들에게 제를 올릴 때 사마의는 병상에서 일어나 '있는 힘을 다해 병사를 거느리고 낙수에 놓인 부교까지 가서' 성공적으로 조상의 정권을 뒤엎었다. 위나라의 대권은 이렇게 사마 씨 일족에게 돌아갔다. 조조가 예전부터 걱정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모략가로서 사마의는 교활할 뿐 아니라 잔인하기까지 했다. 사마의는 처음에 대권을 잃은 조상에게 부잣집 늙은이처럼 편안하게 지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은 나중에 죄명을 붙여 조상은 물론 삼족까지 멸했다. 심지어 막 태어난 어린아이, 시집간 여동생, 누이, 조카딸 등 아녀자까지도 봐주지 않고 모조리 없애 버렸다. 『진서』「원제기」의 기록에 따르면 사마의가 대권을 얻은 뒤 다른 사람이 자신의 권세를 탐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는 『현석도』라는 위서에서 소가 말의 뒤를 잇는다는 뜻의 '우계마후牛繼馬後'란 구절을 보고, 장수 우금이 사마 씨를 대신할 거라고 여겨 우금을 죽이기로 마음먹고는 우금의 꼬투리를 잡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을 시켜 두 종류의 술을 함께 담을 수 있는 특별한 술주전자를 만들게 했다. 사마의는 우금을 주연에 초대했다. 먼
저 자신이 독이 없는 술을 마신 뒤 몰래 주전자를 건드려 독이 든 술을 우금에게 따랐다. 우금은 어찌된 영문인지 알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세상을 떠났다.
사마의는 조상이 위나라 황제 조방과 함께 고평릉으로 제사를 지내러 간 틈에 대권을 탈취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자손들이 능을 방문했을 때 비슷한 일을 당할 것을 염려해 죽기 전 능을 방문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고 능묘에 고분을 만들거나 나무를 심지 말 것, 나중에 죽은 가족을 합장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사마의의 자손들은 그의 유조를 철저하게 따랐다. 따라서 진나라 황제의 능묘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아 고고학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강유_ 마지막 승부사 강유의 아버지는 지방의 장군이었는데 강유가 어렸을 때 강족 등 소수 민족의 반란을 평정하러 나갔다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를 잃은 강유는 어머니를 의지해 살아갔다. '열사'의 자식이었던 강유는 성년이 되었을 때 중랑이라는 관직을 수여받고 살고 있던 군의 군사에 참여했다. 강유는 어릴 적부터 공명심에 불타 몰래 수많은 강호의 무사들과 사귀며 일반 백성들과 다르게 행동했다. 그는 남몰래 자신의 밑천을 쌓고 있던 셈이다.
건흥 6년(228), 촉한 승상 제갈량이 위나라 정벌에 나섰을 때 강유는 직속상관인 천수 태수 마준을 따라 출정에 나갔다. 도중에 촉한 대군이 국경을 위협하자 모든 현이 촉군에 투항했다는 소문을 듣고 마준은 매우 심란해 하며 강유도 변심했을까 봐 걱정했다. 결국 마준은 강유를 비롯한 부하들을 버리고 밤새 하규로 도망을 갔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태수가 보이지 않자 수하들은 황급히 그의 행방을 물어물어 하규성 아래까지 쫓아왔다. 수비군은 그들이 촉한에 투항했다고 의심하며 성문을 굳게 닫고 못 들어오게 했다. 어쩔 수 없이 강유를 비롯한 수하들은 고향 기현으로 돌아갔지만 그곳에서도 그들을 받아 주지 않았다. 막다른 길에 몰린 이들은 제갈량 진영에 투항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의 나이 스물일곱으로 제갈량이 초려에서 나온 나이와 똑같다.
그것은 분명 도박과도 같은 행위였다. 제갈량은 투항한 장수를 절대로 죽이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강유를 비롯한 사람들은 위나라의 지방 말직 군관에 불과했다. 제갈량의 눈에 들지 안 들지는 미지수였다. 결국 강유는 게임에서 이긴 셈이었다. 사람을 볼 줄 아는 제갈량은 강유를 얻고 매우 기뻐했으며 그를 군사 방면의 후계자로 정하고 5, 6천 명으로 이루어진 정예병 중호 보병을 훈련시키도록 했다. 또한 촉한 대신 장예와 장완에게 이런 서신까지 보냈다. "강유는 군사에 뛰어난 자입니다. 담량도 있고 용병의 깊은 뜻도 잘 이해하고 있지요. 한나라에 마음을 두고 두루 재주를 겸비한 자입니다. 군사를 다 가르친다면 궁으로 보내 황제를 알현하도록 하겠습니다." 즉시 강유를 황제 유선에게 보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유선도 특별히 마음에 들어 하며 천수의 말단 군관이었던 강유를 단숨에 중감군, 정서 장군으로 승격시켰다.
강유는 한결같이 촉한에 충성했다. 강유는 제갈량 곁에서 6년을 일하며 그로부터 유익한 가르침을 많이 얻었다. 제갈량이 세상을 떠났을 때 강유는 그의 영구를 성도로 모셔 왔다. 그 후 우감군, 보한 장군에 올라 군사를 통솔했고 또 평양후란 작위까지 받았다. 강유는 제갈량의 북벌 사업을 이어받아 몇 차례나 전쟁을 벌였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제갈량이 여섯 번 기산에서 출병했다면 강유는 아홉 번 중원 토벌에 나섰다'고 말하곤 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한 뒤 강유의 세상이 된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강유는 스승만큼 순조롭게 풀리지 않았다. 제갈량이 눈을 감은 뒤 촉한의 군권과 정권은 모두 장완에게 돌아갔고 그 후에는 다시 비의와 동윤이 이어받는다. 그동안 강유는 군사 대권을 장악하지 못해서 일부 군사만을 이끌고 서쪽 정벌을 몇 차례 나갔을 뿐이다. 그가 병사를 이끌고 출정을 나갈 때마다 실권을 장악한 비의가 여러 방면으로 제약을 가했다. 강유가 크게 병사를 일으키고자 할 때마다 비의가 제지하고 따르지 않아 그는 결국 만 명에 불과한 병사밖에 얻을 수 없었다. 비의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내세웠다. "우리는 승상에 훨씬 미치지 못합니다. 승상이 중하를 평정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차라리 보국안민하고 사직을 지키며 그와 같은 공적을 위해 능력 있는 자를 기다리는 것이 낫습니다. 일거에 승패를 결정하는 요행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만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중에 후회한다 해도 소용없겠지요."
물론 강유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그는 군사가의 입장에서 북벌을 단순하게 생각했다. 매년 위나라 정벌을 벌여 나중에는 촉한의 경제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객관적으로 볼 때 북벌전은 국력을 심각하게 축내고 있었다. 제갈량은 군사적인 입장보다는 정치적인 시각에서 모든 문제를 고려했었다. 경제적인 문제에 관해서도 강유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강유가 너무 큰 무리수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비의의 신임을 얻을 수 없었다.
연희 19년(256), 장완과 비의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강유는 대장군에 오르며 정식으로 촉한의 '3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적국의 하급 군관 출신인 대장군은 제갈량에 비해 군대 내에서 위신이 없었다. 강유는 대장군이 된 후 처음으로 군사들을 이끌고 출정을 나가며 진서대장군 호제와 상규에서 집결하기로 했다. 그런데 호제가 약속을 어기고 오지 않는 바람에 강유의 군대만 오지인 단곡까지 가게 되었다. 결국 위나라의 대장군 등애에게 대패해 군대는 뿔뿔이 흩어지고 수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촉한의 조정 대신들은 약속을 어기고 오지 않은 호제를 질책하지 않고 오히려 강유에 대한 원망만 늘어놓았다. 어쩔 수 없이 강유는 스스로 관직을 강등해야 했다. 촉한 말기 장익을 비롯한 대부분 장군들은 강유의 거듭되는 원정을 반대했다. 강유는 원래 제갈량보다 못한데 사람들의 지지와 협조까지 얻지 못했으니, 그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특히 황제 유선이 강유를 신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치명적이었다. 환관 황호는 걸핏하면 강유의 흉을 보며 야심가였던 우대장군 염우와 그를 없앨 음모를 꾸몄다. 결국 강유는 화를 피해 답중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강유의 아홉 차례 중원 정벌은 제갈량의 육출기산보다 더 부득이한 선택으로 비극적이고 격정적인 색채를 띤다. 그런 이유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를 제갈량의 후계자로 보았다. 사실 두 사람이 했던 노력은 본질적으로 똑같다. 단지 제갈량의 재능과 외부 조건이 강유보다 더 나았을 뿐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강유가 죽은 뒤 패잔병들이 그의 배를 갈라보았는데 담이 계란만큼 컸다고 적고 있다. 물론 이것은 소설가들이 지어낸 허구이다. '강유가 죽은 뒤 배를 갈라보았더니 담이 됫박만큼 컸다'란 『세어』의 기록에서 비롯한 이야기로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가깝다. 어쨌든 강유가 확실히 대담하기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그는 과감하게 모험을 감행해 여러 차례 승리도 얻었지만 되돌릴 수 없는 실책을 남기기도 했다.
한중은 촉한의 대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으로 유비가 살아 있을 때 장수 위연을 보내 지키게 했다. 위연이 보루를 쌓아 바깥의 적을 막고 경비를 철저하게 한 덕분에 사천의 안전을 지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강유는 그런 방식이 너무 소극적이기 때문에 적을 막을 수는 있어도 승리는 얻을 수 없다고 여겼다. 후일 그는 가능한 포위를 풀고 보루를 허문 뒤 군량을 감추고 수비군을 한성, 악성으로 퇴각해 적을 깊은 곳까지 유인했다. 강유는 적군이 천 리를 오느라 지친 데다 군량까지 구할 수 없기 때문에 기다리기만 하면 쉽게 적을 섬멸할 수 있다고 여겼다.
현재의 유격 전술과 비슷한 그 전술에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있었다. 첫째, 촉한의 영토가 남북으로 최전선에서 후방까지 연결되어야 적을 깊숙한 곳까지 유인해 유격전과 기동전을 펼칠 수 있었다. 둘째, 유격전을 펼치는 한쪽은 반드시 충분한 기동성을 구비하고 자신의 급소를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그렇지만 촉한의 정권은 유격전에 적합하지 않았다. 강유는 성도가 공격을 받으면 촉한의 군사 조직 전체가 마비된다는 점을 소홀히 했다. 현실은 잔인했다. 적을 깊숙이 유인한 결과, 적군이 끊임없이 밀고 들어왔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강유는 물밀듯 쳐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황급히 대군을 이동시키고 검각에서 위나라 장군 종회와 대치했다. 그러는 동안 위나라 장군 등애는 이미 음평으로 들어와 성도를 장악하고 촉한의 황제 유선에게 투항을 강요하고 있었다. 결국 강유가 황제의 조서를 받고 투항했다. 그러나 강유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박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