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바로보기
류모세 지음 | 두란노
유대인 바로보기
류모세 지음
두란노 / 2010년 9월 / 272쪽 / 12,000원
유대인들에게는 관용을 보인 로마가 왜 기독교는 잔인하게 핍박했을까?
- 유대교와 기독교의 '마이웨이' 선언 유대교라고 하는 한 지방아래 있던 나사렛파 공동체가 유대교의 틀을 벗어나 오늘날의 기독교 모습과 흡사해진 것은 두 차례에 걸쳐 로마에 대항한 유대인 봉기 때문이다.
1차 봉기(66~73년): 유대땅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들의 학정이 점점 도를 넘어서면서 소수의 열심당(Zealot)과 다수의 평화파의 구도가 바뀌었고, 수많은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열심당의 무력 봉기에 합류했다. 마지막 총독 플로루스(64~66년)는 장난기가 발동해 대제사장의 예복을 입고 음담패설을 했다. 그러잖아도 로마를 증오하던 유대인들은 종교적 모독까지 당하자 급기야 대규모 봉기에 나섰다.
봉기의 선봉에는 전직 대제사장 하난의 아들인 엘르아살과 마사다의 요새를 함락해 헤롯 왕의 무기고를 열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므나헴이 있었다. 열심당은 쉽게 예루살렘 외곽의 요새를 장악했고, 그 불씨는 에돔, 사마리아, 갈릴리 전 지역으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시리아의 총독 갈루스가 의기양양하게 폭동 진압에 나섰다가 절름거리며 퇴각하자, 황제 네로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당대 최고의 명장인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당시 로마의 최고 정예부대를 맡기고 반란군 토벌을 명한다.
1년간의 갈릴리 전투에서 베스파시아누스는 훗날 역사가로 더 유명해진 갈릴리 총사령관인 요세푸스의 항복을 받아낸다. 그는 로마 장군의 참모진에 배속되어 유대인 반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면서 유대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 찍히게 된다. 봉기 3년째인 68년에는 대부분의 유대땅은 로마군에 떨어졌고 마지막 남은 예루살렘 성을 함락하기 위하여 로마군은 점점 압박의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이때 예루살렘 성에서는 2개의 의미 있는 탈출행렬이 있었다. 첫 번째 탈출행렬은 나사렛파로 알려진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이다. 임박한 종말신앙 가운데 살아간 유대 기독교인들은 로마군의 예루살렘 포위가 임박하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다.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눅 21:20- 21)
로마군의 예루살렘 성 포위를 보고 임박한 세상의 종말을 확신한 유대 기독교인들은 요단 동편 펠라 성으로 집단 탈출을 감행했고, 민족의 위기 상황에서 탈출로 연명한 이들의 행동은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1차 정죄를 받는 빌미가 되었다. 두 번째 탈출행렬은 바리새파 유대교인들이다.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바리새파 지식인으로서 처음부터 승산없는 무모한 봉기가 유대인 대학살로 이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랍비 요하난이 이끄는 바리새파 무리는 스승이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열심당 지도부를 속이고 유유히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왔다. 요하난의 장례 행렬은 골고다 언덕의 공동묘지가 아닌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있는 로마군 참모부로 향했다.
이듬해인 70년 결국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고 이스라엘 땅의 무더위 속에 3년간 조롱당한 무적의 로마 군단은 처참한 살육과 학살로 앙갚음을 했다. 남은 패잔병들의 항전은 한 편의 영화로 제작될 만큼 드라마틱했다. 염해 서편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 마사다로 피신한 960여명의 열심당원들은 다시금 3년간 세계 최강 로마 군단을 조롱했고, 결국 960명 전원이 자결함으로써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2차 봉기(132~135년): 117년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어 헬라 문화에 심취한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즉위했다. 그는 다양한 문화권으로 갈기갈기 찢긴 로마제국을 헬레니즘을 통해 사상적 통일을 완수하고자 했다. 그는 예루살렘을 '엘리아 카피톨리나'란 이방도시로 개명하고 성전에 있던 자리에 주피터 신전을 세우려고 했다. 이쯤 되면 유대인 봉기를 위한 외부조건은 모두 충족된 셈이다.
132년 바르 코흐바 장군과 랍비 아키바의 합동작전으로 2차 봉기가 시작된다. 랍비 아키바는 본래 문맹의 가난한 목동이었지만 부자의 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 후 부인의 권유로 어린 아들과 함께 예쉬바를 수석 졸업한, 이스라엘판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아키바는 봉기 중 바르 코흐바 장군을 메시아로 지목하며 유대 저항 정신을 한껏 고취시켰다. 그러나 아키바의 메시아 선포는 봉기에 참여한 다수의 유대 기독교인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의 빌미가 되었고, 예수를 유일한 메시야로 믿고 고백하던 유대 기독교인들은 봉기 막판에 불참을 선언한다. 1차 봉기에 이은 이들의 막판 배신은 유대 공동체에서 유대 기독교인들의 최종적 단절을 가져온 계기가 된다.
당대의 슈퍼 파워인 로마제국에 맞선 두 차례의 유대인 봉기와 실패는 유대 정신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일대 사건이었다. 대로마 봉기 이전의 1세기 유대교는 바리새파, 에세네파, 사두개파, 열심당, 나사렛파 등 다양한 종파를 아우르는 '한 지붕 다섯 가족'의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봉기의 실패와 이에 대한 진압 과정에서 유대교는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한 '랍비 유대교'로 획일적 통일을 이루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차 봉기의 진압 과정에서 유대 광야의 에세네파 공동체가 궤멸되었고, 티투스 장군에 의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파괴는 성전의 희생제사를 주관하던 종교적 특권층인 사두개파의 몰락과, 아울러 봉기를 주도한 지도부인 열심당의 파멸을 초래했다. 반면 예루살렘 성의 멸망 직전에 극적으로 탈출한 바리새파는 랍비 요하난을 중심으로 '랍비 유대교'를 나사렛파는 '기독교'를 탄생시키며 유대교의 한 지붕을 벗어난 '마이웨이'를 선언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왜 기독교를 공인했을까?
- 나사렛파 유대인이 거대한 로마를 집어삼키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부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까지 300년 동안 초기 기독교인들이 버텨 낸 생존 투쟁은 기적에 가깝다. 네로(54- 68년)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284- 305년)까지 기독교인들은 '외부적으로' 극심한 박해를 받아야 했고, '내부적으로'는 기독론 논쟁으로 스스로 에너지를 소모하며 자칫 사라질 운명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1세기에는 원형경기장의 '사자 밥'이 되었고, 2세기에는 제국 내 위험한 '불순분자'였으며, 3세기에는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과 함께 4세기는 '제국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등장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왜 선왕들이 그토록 박멸하고자 한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로 공인한 것일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등장하기까지: 시저 옥타비아누스(주전 27- 주후14년) 때부터 시작된 로마제국은 '팍스로마나'로 불리는 평화의 200년을 누렸다. 특히 오현제로 알려진 다섯 명의 선하고 지혜로운 황제가 다스리던 로마는 최고의 절정기를 누리게 된다.
네르바(96- 98년) / 트라야누스(98- 117년) / 하드리아누스(117- 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138- 161년)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 180년)
그러나 오현제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코모두스(180- 192년)부터 로마는 본격적인 내리막길로 치닫는다. 특히 '군인황제시대'(235- 284년)로 불리는 혼란기를 거치면서 자칫 로마는 종말을 고할 뻔했다. '군인 황제시대'로 불린 짧은 50년의 기간 동안 무려 26명의 군인들이 무력으로 황제가 되었고, 천수를 누린 황제는 단 한명 뿐이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암살당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가!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러한 난세에 태어나 세상을 평정한 영웅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등장으로 로마는 멸망을 2세기 가량 늦출 수 있었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드넓은 제국을 혼자서 다스리기가 벅찼다. 그래서 로마를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고 서방은 막시미아누스에게 맡기고 자기는 당시 막강한 경제력을 지닌 제국의 동방을 맡았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부황제 제도를 도입해서 자신 밑에는 갈레리우스를, 서방에는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를 임명했다.
<로마제국 드림팀>
- 동방: 디오클레티아누스(정황제) + 갈레리우스(부황제)
- 서방: 막시미아누스(정황제) + 콘스탄티우스(부황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죽으면서 서방의 공동황제였던 막시미아누스도 동반 은퇴하고 제국은 부황제들에 의해서 통치된다. 그러나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이후의 정황제들은 서로를 제거하고 1인자가 되기 위하여 암투를 시작한다. 이런 숨막히는 권력투쟁 끝에 결국 최후 승자는 콘스탄티우스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에게 돌아갔다. 콘스탄티누스가 서방의 1인자 자리를 놓고 막센티우스(막시미아누스의 아들)와 최후의 결전인 밀비안 다리 전투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전투를 앞둔 전날, 콘스탄티누스는 태양신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그가 태양을 바라보자 십자가로 보였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 표적으로 승리를 얻으리라"
수적으로 열세였던 콘스탄티누스는 전날의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통하여 승리를 확신했고 그의 이런 믿음대로 놀라운 대승을 거두었다. 그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을 공포함으로써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밀라노 칙령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로 하여금 기독교를 공인하도록 만든 당시 몇 가지 역사적 이유가 있었다.
첫째,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헬레나 아우구스타의 영향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소아시아 지방에서 장군으로 복역하던 중에 술집 하녀에게서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얻었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는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신임을 받고 고속 승진을 통해서 마침내 부황제까지 올라갔다. 당시 부황제는 정황제의 딸과 결혼해 '장인- 사위'관계를 맺음으로써 결속력을 강화했기 때문에, 콘스탄티우스는 어쩔 수 없이 아내를 버리고 황제의 딸과 결혼했다. 이때 버림받은 헬레나는 훗날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황제가 되면서 황궁으로 돌아온다.
둘째, 동방의 황제인 갈레리우스는 원래 기독교를 무자비하게 핍박하던 황제였는데, 자신이 구상한 박해 프로그램의 종말을 보지 못하고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런데 죽으면서 정신을 차렸는지 콘스탄티누스에게 기독교인에 대한 관용을 보일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셋째,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예수님과 태양 신과의 큰 차이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274년 로마의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정복되지 않는 태양'을 로마제국의 종교로 만든 이래 태양 신은 제국의 최고의 신으로 자리매김했다. 콘스탄티누스의 혼동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의의 태양'으로 불렀고, 태양신을 섬기는 축일(sun- day)에 기독교인들도 함께 예배했기 때문이다.
넷째, 네 토막으로 분리된 제국의 사상적 통일을 위해서 기독교를 이용하고자 했다. 그는 이미 제국의 20%까지 급성장한 기독교를 보면서, '상대를 제압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상대에 가담하라'는 경구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십자군 운동이 왜 유대인 공동체를 파멸로 몰아갔을까?
- 십자군 운동으로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희비가 교차되다 십자군 운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초기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봉건제도 자체의 취약점을 십분 발휘하여 자유롭고 부유하게 정착촌을 이루며 살았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으로 촉발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근대화를 위한 진통을 겪으며 나름대로 황금기를 누리던 중세 초기의 유대인 공동체는 파멸로 치닫게 된다.
유대인 공동체의 궤멸로 이어진 십자군 광풍
십자군 자체의 기원은 당시의 종교, 정치, 사회적 구조에서 기인한 것으로 유대인들의 역사와는 실로 무관한 것이었지만, 그 불똥은 그때까지 안정된 삶을 구가하던 유대인 공동체로 광범위하게 튀었다.
당시 서로마제국의 교황이던 우르바누스 2세는 십자군에게 죄용서와 추가구원을 약속해 주었고 1096년 1차 십자군이 조직되어 대장정의 출발을 알렸다. 선전공세로 모집된 십자군은 정열과 힘이 넘쳤지만 규율과 보급품의 부족으로 행군 도중에 무지막지한 폭도들로 변하고 말았다. 그들은 특별히 평소 시기하던 부유한 유대인 마을에 들어가 약탈과 강간, 이윽고 살육으로 이어지는 유혈 폭동의 주인공이 되었다. 폭도로 변한 십자군들이 유대인 공동체를 집중적인 표적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십자군 운동의 광풍과 당시의 사회적 혼란기를 틈타 초대교회 때부터 교부들이 설교해온 '유대인은 메시야를 죽인 흉악한 민족'이라는 반 유대적인 악령이 되살아난 것이다. 폭도로 변한 십자군들은 굳이 먼 곳에 있는 무슬림을 치러 가기 전에 자기들 안에 있는 반기독교 세력인 유대인들을 먼저 치는 게 낫다는 상당히 그럴듯한 주장을 폈다. 군중 가운데 한 명이 이렇게 외쳤다.
"유대인을 죽이고 네 영혼을 구원하라!"
둘째, 임박한 종말을 의식하면서 당시 금융업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에게 상당한 돈을 차용한 사람들은 100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기대하던 종말은 오지 않았고 때마침 십자군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십자군 폭도들은 유대인 공동체를 약탈하면서 살인을 자행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의 '채권채무법'에 기인한다. 당시의 채권채무법은 채권자와 채무자 가운데 한명이 죽는 순간 채권채무 관계가 자동으로 소멸되는 구조였다. 당연히 유대인 금융가들은 살육의 위험에 노출되었고, 십자군 폭도들은 유대인 금융가들이 보관하고 있던 채권- 채무 증서를 불태워 증거인멸을 확실히 한 것이다.
루터는 왜 반유대주의자가 되었을까? - 유대인, 종교개혁 시대의 캐스팅보드
중세 초기 교회와 봉건국가는 서로 '체제 유지'라는 밀약 하에 지루한 중세 유럽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그러나 카톨릭교회와 봉건국가의 끈끈한 유착 관계는 11세기 후반에 시작돼 2세기 동안 전 유럽을 휩쓴 십자군 '광풍'과 르네상스로 불린 문화혁명의 '훈풍'으로 인해 크게 균열되기 시작하였다. 십자군 원정은 봉건 영주와 제후의 세력권에서 '농노'를 해방시켰고, 르네상스는 기독교 교리와 스콜라 철학으로부터 인간의 '이성'을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십자군, 르네상스에 이어 마르틴 루터가 점화한 종교개혁의 불씨는 중세의 종말을 고하는 확인사살이 되었다. 16, 17세기는 종교개혁의 불씨가 활활 타올라 종교전쟁으로 번져 전 유럽 대륙을 태워버린 슬픔의 세기였다. 종교개혁 초기에 탈무드의 소각을 반대할 정도로 친유대적 성향을 보이던 마르틴 루터는 왜 임종을 맞기 3년 전 무서운 반유대주의자로 돌변한 것일까?
유대인, 종교개혁 시대의 '캐스팅보드'로 부각되다: 신교와 구교 간의 전투가 밀고 밀리는 상황에서 그동안 애물단지 취급을 받던 유대인들이 양측에 중요한 존재로 부각되었다. 사회적 재앙이 닥칠 때마다 늘 희생양으로 유대인이 지목되었지만, 평상시에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의 지식과 학문적 이상 그리고 윤리적인 행위를 존경하고 있었다.
신-구교측은 비록 소수이지만 유대인 그룹이 자신들 편에 가담해 줄 경우 수백 만의 주저하는 백성을 설득할 수 있는 회심의 '히든 카드'가 될 것으로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카톨릭보다는 종교개혁을 외치는 신교도들을 우호적으로 바라보았고, 루터도 유대인들이 신교도들을 지지해 줄 것을 강력히 호소했다.
유대인들의 매몰찬 거절과 루터의 싸늘한 변신: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개신교로 인해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장벽이 사라졌다고 믿었고,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개종을 기대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과연 루터가 내민 화해의 손을 잡았을까? 아쉽게도 대답은 '노'였다. 유대인들은 루터의 진심 어린 제안을 거절했고, 이때 심한 상처를 받은 루터는 이후 싸늘한 반유대주의자로 변했다. 한때 친유대적 논문을 발표했던 루터는 그로부터 20년 후인 1543년,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루터는 유대인을 향한 악의적인 독설을 퍼부었다. 심지어 유대인 박멸을 권하는 끔찍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