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열전
박영만 지음 | 프리윌
인생 열전
박영만 지음
프리윌 / 2011년 8월 / 350쪽 / 16,000원
1장 당신의 표상오직 한 순간 동안만 나의 것이었던 그 모든 것들 ‘엘리자베스 1세’
"나는 영예로운 여왕의 권한에 끌린 것이 아니라 신의 진리와 영광을 지키는 수단이 된 것이다." 이 말은 영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든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신의 왕위에 대하여 한 말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빛나는 치적과 함께 끝까지 품위와 권위를 잃지 않은 여왕이다. 그래서 세실 경은 그녀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부인하면 왕국의 누구도 여섯 단어 이상을 써서 주장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여섯 명의 왕비를 맞은 것으로 유명한 헨리 8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인 앤 블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앤 블린은 황실을 자주 출입하는 상인의 딸로서, 1522년 열 여섯 살 때 캐더린 왕비의 시녀로 처음 궁정에 들어왔다. 그녀는 키가 작고 몸집이 마르긴 했지만 까무잡잡한 피부와 반짝이는 검은 눈을 가진 매력적인 여자였다. 당시 헨리 8세의 왕비였던 캐더린은 여섯 차례에 걸쳐 임신했으나, 모두 사산과 유산으로 정상 출산을 하지 못하였고, 유일하게 낳은 자식은 메리 공주 하나뿐이었다. 이러한 불행에 대하여 헨리 8세는 자신이 형수와 결혼한 불륜 때문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괴로워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그의 눈에 뜨인 매력적인 앤 블린은 왕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아 버렸다.
이윽고 헨리 8세는 앤 블린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에게 푹 빠져버렸다. 하지만 앤 블린은 선뜻 국왕의 사랑에 응하지 않고 애를 태웠다. 헨리 8세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힘을 빌려 그녀를 설득한 다음. 1533년 1월 자신과 앤 블린의 결혼식을 서둘러 거행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앤 블린을 왕비에 봉해버렸다. 이것은 이미 임신 4개월째인 앤 블린을 위한 배려였다. 이로써 헨리 8세는 캐더린과의 이혼을 매듭 짓지 않은 상태에서 중혼한 꼴이 되고 말았다. 결국 교황의 노여움을 사게 된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게다가 앤 블린은 그 해 9월 왕자가 아닌 공주를 낳아 국왕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국왕은 캐더린 왕비에게서 낳은 메리를 사생아로, 앤 블린에게서 낳은 엘리자베스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였다. 그리고 이 결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국왕은 얼마 후부터 앤 블린에게 싫증과 권태를 느껴 다시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1535년 12월 앤 블린이 두 번째로 임신한 아이가 유산된 것에 크게 실망한 국왕은 이번에는 형제가 많아 왕자를 낳아 줄 확률이 높은 시녀 제인 시모어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 애인과 결혼하기 위해 앤 블린에게 불륜을 저질렀다는 누명과 함께 역모 죄까지 뒤집어 씌워 처형시켜 버렸다. 그녀의 나이 겨우 30세 되던 해의 일이다. 어머니 앤 블린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후, 엘리자베스 공주도 한때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했으나 가까스로 25세에 이복 언니 메리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그녀가 바로 엘리자베스 1세이다. 부왕의 파행적 결혼 생활과 모후의 비운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는 탁월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그녀의 치세 기간 중 영국 절대왕정은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그리고 그녀는 여러 번 결혼할 기회가 있었으나 정치적, 종교적, 개인적 이유로 끝까지 독신으로 지냈다. 그녀는 의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추밀원 중심의 정치를 펴는 한편, 지방의 명망 있는 사람들을 치안판사로 임명하여 지방행정을 맡게 하였다. 사회, 경제면에서는 그레샴의 제안에 의한 통화개혁, 도제 조례의 발포, 구빈법의 제정, 각종 공업 독점권 부여 등 중상주의 정책을 펴 나갔다. 또 무역 정책에서는 모직물 공업을 발전시켜 상인의 해외 진출을 촉진하였고, '모험상인조합'에 독점적인 면허장을 교부하여 보호하였다. 또 스페인의 구교에 대하여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한편 영국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588년에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시켜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영국이 일개 섬나라에서 세계적인 해상제국으로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문화면에 있어서도 영국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국민문학의 황금시대가 도래하여 셰익스피어, 베이컨 등이 배출되는가 하면, 그녀는 국민들로부터 '훌륭한 여왕'이라 불리며 존경을 한 몸에 받아 영국 영광의 상징이 되었다.
1602년, 69세의 나이에도 엘리자베스 1세는 10마일 가량 승마를 즐긴 후 사냥을 나갈 만큼 활동적이었다. 그러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불면증과 류머티즘이 악화되었고 기력이 떨어졌다. 그렇지만 그녀는 의사들이 권하는 약을 거부했다.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건강 상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03년 3월 22일, 엘리자베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한 다음 이틀 동안 침대에 누워 있다가 마침내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하여 대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여왕은 잘 익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그리고 순한 양처럼 눈을 감았다."
이와 같이 어린 시절의 시련을 극복하고 45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 중 빛나는 치적으로 전성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아온 훌륭한 여왕이기에, 마땅히 그에 걸맞은 무덤과 묘비명이 남아야 하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묘비에는 다만 그녀의 뜻에 따라 다음과 같은 짤막하지만 의미심장한 말이 새겨졌다.
"오직 한 순간 동안만 나의 것이었던 그 모든 것들!"
모든 것을 영원히 소유하려 했던 진시황은 긴 오명(汚名)을 남기고 빈손으로 떠났지만, 오직 한 순간 동안만 모든 것을 소유하려 했던 엘리자베스 1세는 긴 선명(善名)을 나기고 역사에 살아남았다. 신의 진리와 영광이 오래도록 그녀의 묘비명과 함께 할 것이다.
2장 한 평 전설영혼은 신에게, 육체는 대지로 ‘미켈란젤로’
1542년 시스틴 대성당의 벽화 〈최후의 심판〉이 거의 완성되어갈 무렵, 교황 바오로 3세는 벽화에 나체상이 너무 많이 그러져 있다고 하여 그것을 수정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마무리 작업을 진행 중이던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다. "교황은 그림을 수정하기보다는 세상을 수정하는 일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으로 불리는 미켈란젤로는 그때까지만 해도 직공 정도로 취급받던 화가와 조각가의 위상을 예술가의 경지로 끌어올린 사람이다. 그는 상당한 배짱과 고집이 있던 사람으로, 당시의 물주인 교회에서 일을 받을 때도 언제나 대등하게 대했다.
미켈란젤로의 대부분의 작품은 미술품이라기보다 기념물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4년여에 걸쳐 완성한 시스틴 성당 천정화는 구약성서의 〈천지 창조〉 외에 343명의 인물을 배치시켜 그린 장대한 그림이다. 조각을 해도 그 규모가 등신대 이상의 것이어서 때로는 3m이상 되는 조각들이 무리를 이루는 구상도 많았다. 메디치 예배당의 묘비는 1524년부터 10년간에 걸쳐 제작한 것으로 수십 개의 거상을 조합한 조각과 건축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비는 40개 이상의 거상으로 조합한 최대 규모의 구상이었는데, 이 구상은 율리우스 2세의 사망과 정치 불안으로 여러 차례 중단을 거듭하다 결국 미완성인 채 끝났다. 이렇듯 미켈란젤로가 그의 예술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한 것은 조화가 아니라 운동과 율동, 즉 힘이었다.
만년의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기의 마지막 사람인 냥 교양 있고, 재기가 넘치고, 우아한 귀족같이 지냈다. 그래서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프랑소와 1세나 카트린 드 메디시드도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그를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예술도 결국 헛된 것이라고 여겨, 끝내 절망해야 하는 인간 존재를 고민하였다.
미켈란젤로는 여러 제자들 중에서 특히 율리우스 2세 묘비의 조각 일을 도왔던 프란체스코 다마들레를 사랑했다. 그는 자신이 죽고 난 뒤 다마들레의 궁핍한 생활을 염려하여 미리 2천 에퀴나 되는 거액을 주고 위로하였다. 그러나 그 제자는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밖에도 미켈란젤로가 좋아했던 사람들 중에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1564년 2월 15일 밖에는 억수같이 비가 내렸다. 이때 미켈란젤로는 벌떡 일어나 마치 망령처럼 쏟아지는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한참 걷다가 옛 친구를 만나자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죽을 때가 된 것 같네, 왜냐하면 이제야말로 예술 속에서 태초의 울림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지!" 그로부터 사흘 뒤인 1564년 2월 18일, 그는 32년 동안이나 우정과 사랑을 지속해온 화가 카발리에르의 팔에 안겨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영혼은 신에게, 육체는 대지로 보내고 죽어서나마 그리운 피렌체로 돌아가고 싶네."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피렌체의 산타크로체성당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그의 시가 기념비로 남아 묘지를 찾는 사람들에게 숙연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수치와 불명예가 우리들 곁에 머무는 한
돌 같은 내 삶에 있어서 잠이 유일한 안식처라오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아무 것도 듣지 않는 것만이
진실로 내가 원하는 것이라오
그러니 제발 깨우지 말아다오
목소리를 낮춰다오
그리고 제발 조용히 떠나다오
인쇄술이 발달하여 책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그림과 조각, 건축이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가장 중요한 매체였다. 미켈란젤로는 그림과 조각을 통해 르네상스기의 인간 정신과 기독교 정신을 표현한 중세의 거장이다. 그는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자신의 삶에 수치와 불명예가 있었음을 자인하고, 세상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며 목소리를 낮춰 달라고 주문했다.
인간이 무엇인가 성취하기 위해 매진할 때는 그것을 몰입하여 꿈을 꾸지만, 일단 성취하고 나면 열정을 쏟은 만큼 허탈감을 느낀다. 특히 예술가들은 더욱 그러하고, 예술가가 아닐지라도 누구나 죽음에 직면해서는 온 힘을 다해 추구했던 돈이나 명예, 권력도 한낱 부질없는 것임을 느낀다. 이것이 어쩌면 인간이 인성(人性)에 신성(神性)을 개입시키려는 원초적 단초인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는 인간성 회복을 기치로 하는 르네상스기의 한 복판에서 활약한 조각가이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누구보다도 더 신성(神性)을 그리워하는 피가 흐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떠나 달라는 그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의 '피에타 상'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나보다 현명한 사람을 ‘앤드류 카네기’
훗날 철강왕으로 불리게 되는 앤드류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13세 때 가족과 함께 미국 펜실베니아주로 건너와 방적공, 전기기사 등 여러 가지 일을 전전했다. 그러던 그가 실업가로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은 아주 조그마한 일이 계기가 되어서이다.
피츠버그에서 전기기사 일을 하고 있던 그는 어느 날, 기차 안에서 한 발명가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발명가는 '이것이 내가 최근에 발명한 신식 침대차입니다'라고 하면서 카네기에게 그 모형을 자랑했다. 당시의 침대차는 화차의 양쪽에 선반을 매단 어설픈 것이었지만, 그 발명가가 보여준 새 모형은 현대의 침대차와 꽤 비슷한 것이었다. 선견지명이 있던 카네기는 '이 발명품은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다'라고 판단하고 빚까지 내어 신식 침대차 제조 회사의 주식을 샀다. 아니나 다를까 높은 배당이 붙었다.
카네기는 불과 25세 때에 침대차 제조 회사와 석유 회사의 투자 배당으로 연 5천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리고 1865년 철강수요의 증대를 예견하고 철강업을 시작한 것이 크게 발전하여 1870년대부터는 선반과 철도에 이르는 대단위 철강 트러스트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8개 회사를 합병하여 만든 '카네기 철강회사'는 철도 경기의 붐을 타고 철광석에서부터 완제품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를 취급하는 대형 회사로 성장했고, 그는 마침내 세계적 대재벌이 되는 한편 철강왕으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사실 철강왕이라고는 하지만 카네기의 철강 지식은 매우 빈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철강 전문가들을 몇 백 명씩 고용하여 그들을 부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대부호가 된 비결이었다. 애초부터 사업가의 기질을 타고났던 카네기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어느 날 어떤 사회주의자가 카네기를 찾아왔다. 그는 오랫동안 한 사람이 수만 명 몫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부당하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카네기는 비서를 불러서 물었다. "내 재산의 총액을 세계 인구수로 나누면 얼마나 되는가?" 잠시 후 계산을 마친 비서는 1인당 16센트라고 말했다. 그러자 카네기는 비서에게 지시했다. "내 재산에서 이 손님 몫인 16센트를 봉투에 넣어 드리게!"
또 어떤 사람이 카네기에게 물었다. "노동과 자본, 그리고 지식 중에서 무엇이 사업을 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카네기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반문으로 대답했다. "세발의자의 세 다리 중에서 어느 다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심이 깊었던 카네기는 교육사업이나 사회사업에도 열심이어서 많은 돈을 사회에 환원했다. 기꺼이 공익단체나 교육단체의 후원자로 나서는 한편 직접 카네기공업대학, 카네기재단, 카네기 홀 등을 건립하여 사회에 부를 환원했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에 2천 8백여 개의 도서관을 세워 기증한 것도 그의 특기할 만한 업적이다.
카네기는 노령에 접어들자 자신이 죽은 후의 묘비명을 이렇게 새기게 했다.
"여기, 나보다 현명한 사람을 주위에 모으는 기술을 알고 있던 한 사람이 잠들다."
비교적 장수한 카네기는 1919년 8월 11일 평안한 가운데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탁월한 수완으로 부를 축적한 다음 그 돈을 가치 있게 씀으로써 후회 없는 인생을 보내고 편히 잠든 것이다.
3장 영혼의 풀무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시오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밍웨이는 1899년 미국 시카고 교외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수렵 등 야외 스포츠를 좋아하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음악을 사랑하고 신앙심이 돈독한 크리스천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부모의 상반된 성향은 그의 인생과 문학에 미묘한 영향을 주게 된다. 헤밍웨이는 고교시절에는 풋볼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고, 그때부터 시와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이미 그의 유명한 문체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전부가 나타난다.
191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헤밍웨이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캔자스시티의 《스타 Star》지 기자가 되었다가, 1년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의용병으로 이탈리아 전선에 종군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 중에 다리에 중상을 입고 밀라노 육군병원에 입원하였다가 휴전이 되자 1919년에 귀국하였다. 그 후 헤밍웨이는 캐나다 《토론토스타》지의 특파원이 되어 유럽으로 건너가 각지를 여행하는가 하면, 그리스와 터키간의 전쟁에 뛰어들어 이를 보도하기도 했다. 그런 뒤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거트루드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 등과 친교를 맺으며 그들의 창작 기법들을 배웠다.
1928년 헤밍웨이는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그 해에 아버지의 권총 자살 등 몇몇 불행한 사건을 겪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그는 이듬해에 전쟁의 허무함과 비련을 주제로 한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를 발표하여 국내외적으로 큰 방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그는 공화파 정부 지지를 표명하고 스페인에까지 가서 내란에 참전하였다. 그리고 이 체험을 바탕으로 걸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에는 자신의 전쟁 체험과 인생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는 오랫동안 스페인 내전이 제2차 세계대전이 전주곡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예견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