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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성장시키는 독서법

채석용 지음 | 소울메이트


나를 성장시키는 독서법

채석용 지음

소울메이트 / 2011년 4월 / 352쪽 / 14,000원



1부 나를 성장시키는 소통의 독서법




독서란 무엇인가?

책과 소통하고,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라: 책 읽기란 '소통하기'다. 이것이 이 책 전체의 주제다. '책 읽기'라고 표현하는 것보다 '책과 소통하기이자 책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책과 소통하기'는 책의 내용 및 책의 저자와 소통하는 것을 말한다. 손에 쥔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낑낑거리는 수동적인 책 읽기 습관은 버려야 한다. 책에게 질문을 던지고 저자와 대화하고자 하는 태도로 책을 읽어야 한다.

인간관계와 책 읽기는 소통의 작업이라는 측면에서 똑같은 행위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서 어느 한쪽은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하기만 하고 다른 한 쪽은 일방적으로 말을 듣기만 하는 관계가 지속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관계라 할 수 없다. 서로 귀를 열고 말문을 트고 지내야 진정한 관계가 성립된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일방적으로 책의 내용을 파악하고자 하는 수동적 태도로 책을 읽는다면 결코 진정한 의미의 책 읽기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끊임없이 책에게 질문을 던지고 저자가 제공해주는 지식과 지혜에 열광적으로 감사해야 한다. 혹은 책의 내용에 딴죽을 걸고 저자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질 공격적인 자세가 갖춰져야 한다.

비싼 돈 주고 산 책인데 내가 그 주인이 되지 못하고 책에게 휘둘린다면 너무 억울한 일 아닌가? 저자의 권위에 눌리고 책이 제공하는 방대하고 복잡한 이야기에 휘둘리는 건 제 돈 내고 머슴살이하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책의 주인이다. 내 돈으로 책을 샀으니 책에게 당당하게 요구하라. "도대체 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느냐?", "저자, 당신의 이야기에 책임을 질 수 있느냐?", "앞뒤가 맞지 않는 거 아니냐"라며 따져라. 그리고 그에 대한 정당한 답변을 접할 경우 미친 듯이 열광하라. 이것이 책과 소통하는 진정한 독서법이다.

예컨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형제와 아버지가 신경전을 벌이는 내용이 있던데, 요즘 우리나라 막장드라마 스토리와 다를 게 뭐냐?", "스메르자코프가 자살한 게 마음에 들지 않거든", "도스토예프스키 당신은 드미트리요, 아니면 알로샤요?” …….

스토리를 따라가는 수동적 책 읽기, 책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급급한 책 읽기로는 책의 진면목을 느낄 수 없다. 책과 소통해야 한다. 줄기차게 의심하고 줄기차게 박수를 보낼 때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책이 당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또한 책 읽기는 '책을 통한 소통하기'이어야만 한다. '책을 통한 소통'은 '책과의 소통'과는 달리 손에 들고 있는 책을 세상과의 소통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었다면, 즉 그 책과 소통했다면 당신은 모종의 결론을 얻게 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 전개 솜씨에 감탄할 수도 있고, 이야기에 잠재된 종교적 색채에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다. 아무리 저자와 책에게 질문을 해도 마땅한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고 불만이 가득할 수도 있으며,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이야기라며 허벅지를 내려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책과의 소통'을 통해 얻은 당신의 결론을 세상과 나누어야 한다. 자기 마음속에만 간직한 감동은 진정한 감동이 아니다. 자기 마음속에만 웅크린 궁금증은 진정한 궁금증이 아니다. 세상에 드러내놓고 다른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자신이 느낀 감동의 진면목과 자신이 제기한 의문의 어리석음, 혹은 날카로움을 깨닫게 된다.

흔히 책을 읽으면 독후감을 써야 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헌데 나는 초등학교 시절 독후감 쓰는 걸 너무나 싫어했다. 책을 읽으면 읽는 거지 왜 꼭 독후감을 써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억지로 느낀 바를 끄집어내려니 그보다 더 큰 고통이 없었다. 누군가 어린 시절의 나에게 책 읽기가 곧 소통하기라는 걸 알려줬다면 책과 대화하고 책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 가운데 나도 모르게 연필을 쥐고 원고지에 글을 끼적거리며 즐거워했을 것이다. 책과 대화를 나누는 법도 모르고 책을 통한 소통의 의의도 모른 채 독후감을 쓰라고 강요받는 것은, 수학공식의 원리도 모른 채 무턱대고 공식을 암기해 수학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처럼 고통스런 일이다.

책을 수단으로 하는 세상과의 소통은 '책과의 소통' 과정이 충실히 진행될 경우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책을 통해 느끼는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하게 될 때 책을 통한 세상과의 소통이 시작된다. 혹은 책에게서 느끼는 배신감과 실망감이 절절해질 때 역시 세상에 대고 자기 생각을 외치고 싶어진다. 그럴 때 참지 말고 내지르는 것, 그것이 '책을 통한 소통'의 시작이며 제대로 된 책 읽기가 무르익어가는 출발점이다.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할 때 우리는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된다. 작품에 열광했지만 어느 누군가는 냉소를 보낼 수도 있다. 이 뜻밖의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묻게 된다. "왜 나쁘다고 생각하죠?"

때로는 상대가 휘두른 공격의 부당함을 냉철하게 지적해 승리감에 도취될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이 책에 대해 갖게 된 느낌의 얄팍함이나 경솔함을 깨닫고 부끄러워할 수도 있다. 혹은 별다른 성과 없이 두 가지 주장이 평행선을 달릴 수도 있다. 이 모든 과정이 책을 통한 소통의 과정이며 이 과정을 통해 당신은 성숙하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맞는 책을 고르는 방법: 무라카미 하루키는 의도적으로 일본 작가들의 글을 전혀 읽지 않았으면서도 최고의 일본 작가가 되는 역설을 현실로 만들었다. 아니, 오히려 일본 작가의 글을 전혀 읽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의 일본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일본 작가들이 구사하는 문체와 구성의 도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에 독창적인 작품을 창출할 수 있이 않았을까? 하루키에게 있어 일본 작가의 작품은 오히려 독이었던 셈이다.

하루키의 경우처럼 우리 누구에게나 독서가 때로 독이 될 수 있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책, 자신을 더 벼랑으로 떨어뜨릴 책이라면 차라리 읽지 않는 것이 낫다. 자신에게 맞는 책을 즐겁게 읽을 때라야 책 읽기는 즐겁고 유익한 작업이 된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맞는 책은 어떻게 해야 고를 수 있을까? 죄송스럽게도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여기에서 알려줄 수는 없다. 이 책의 독자가 최고의 소설가를 꿈꾸는 작가 지망생인지,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흠모하면서 독재를 꿈꾸는 수구 꼴통인지, 아니면 오래전에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공산혁명을 꿈꾸는 극좌파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원칙은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경계를 무너뜨리게 만드는 책 읽기에 도전하라!'는 것이다.

하루키는 일본 작가들의 책을 멀리하는 대신 미국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그것도 헤밍웨이나 포크너처럼 최고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작품이 아니라 레이먼드 챈들러나 트루먼 카포티처럼 상대적으로 다소 덜 알려진 인물들의 작품들이었다. 잘 알려진 작가들에게선 새로운 것을 얻기 힘들다. 덜 알려진 궁벽한 곳에서 오히려 새로운 소재와 방법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전적으로 하루키에게만 유효하다. 최고의 한국 작가를 지망한다고 해서 하루키처럼 한국 작가의 작품을 외면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하루키가 일본 작가의 작품을 외면했다는 구체적인 사실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과감한 선택을 감행하게 되었던 동기 자체다. 최고의 한국 작가를 꿈꾸는 작가 지망생들은 하루키의 독서 목록을 보지 말고 그가 그런 독서 목록을 작성하게 되었던 동기에 눈을 돌려야 한다.

하루키가 일본 선배 작가들의 글을 많이 읽었다면 그는 평범한 작가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그러나 꼭 그렇게 단정적으로 생각할 수만은 없다. 그가 만약 일본 선배 작가들의 글을 많이 읽는 대신 다른 방식의 '경계 무너뜨리기 독서'를 했다면 지금의 하루키와는 다르겠지만, 또 다른 아름다운 작품을 선사하는 하루키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일본 문학계 최고의 평론가가 되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일본 작가들의 책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경계를 무너뜨리는 독서를 감행했다는 동기 자체다.

반면에 히틀러와 스탈린은 철저히 아집에 빠진 책 읽기에 열중했다. 그들은 플라톤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이데아 정신을 구현하는 철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마키아벨리를 읽으면서 살육과 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발견했을 수도 있으며, 아퀴나스(T. Aquinas)를 읽으면서 그 탄탄한 종교 교리의 논리를 가차 없이 분쇄시키는 독단적 혁명의 논리를 구상했을 수도 있다. 그들의 책 읽기는 경계를 무너뜨리는 데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 아집에 찬 행위였으며, 오히려 경계를 강화하는 독선적 행위에 불과했다. 그들이 읽었던 책들 가운데 왜 살육과 전쟁을 거부하고 선한 인간의 본성을 역설하며 공동체 사회의 협력을 도모하는 책들이 없었겠는가? 그들은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도 철저히 경계 속의 자신들을 합리화하는 데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그것을 왜곡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소통이 없는 닫힌 책 읽기에 머물렀던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불교 서적을 읽어라. 한국인이라면 아랍의 역사책을 읽어라. 무신론자라면 성경을 읽어라. 과학도라면 철학책을 읽어라. 문학도라면 기술 서적을 읽어라. 역사학도라면 판타지 소설을 읽어라. 무엇이든 자신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과감한 도전을 감행하라. 그리고 소통하라.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하는 책, 자기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저자가 지은 책, 자신과 같은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 지은 책만 읽으면 히틀러가 되고 스탈린이 될 뿐이다. 소통하지 않은 채 자신의 신념을 정당화하는 미로에서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책은 오히려 독이 된다.

소통의 독서법

책의 빈 공간은 독자의 몫이다: 책을 지저분하게 읽음으로써 우리는 책 내용에 집중할 수 있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 권의 책에 지나치게 몰입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편견에서 빠져나올 여지를 많이 가지게 된다. 그리고 책을 지저분하게 읽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책의 빈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책과 소통하기'의 대표적인 방법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고 가정해보자. 대화를 하는 상대방이 하는 말을 끝까지 경청하기만 하고 자신은 한마디도 하지 않을 만큼 끈기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작심을 하고 책에 달려들지만 효과적으로 독서를 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실패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책과 효과적인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글만 따라가면서 읽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설교나 훈계가 대개 실패로 끝나고 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책과 대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책을 지은 사람을 직접 불러다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책의 여백에 저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내용의 글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읽다가 의문이 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밑줄을 진하게 긋고, 간략하게 빈 공간에 의문이 나는 내용을 적으면 된다. 혹 읽다가 공감하는 부분이 나오면 'Good’이라고 표시를 하거나 하트 모양을 그려넣어도 좋다.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나온다 싶으면 큼지막하게 가위표를 그려도 좋고 거기에 이유를 적어넣으면 더 좋다. 그렇게 빈 공간을 자신의 견해 및 저자와 나누는 대화로 가득 채우다 보면 어느새 책은 저자만의 책이 아닌 독자 자신의 책으로 변모해 있을 것이다.

특히 의문 사항을 빈 공간에 적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책을 읽다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거나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대목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 그런 의문을 미심쩍은 채로 그냥 넘겨버리다 보면 나중에 저자의 본의를 오해하게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고 책에 대한 부당한 편견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의문이 나는 곳에는 표시를 하고 의문점을 간략하게나마 적어두어야 한다.

책은 하나가 커다란 주제를 갖고 집필된다. 그러나 책 전체로 보면 일관된 논조이지만 부문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때 성급하게 책을 덮어버리면 소중한 내용을 놓칠 수 있다. 일단 읽기로 작정한 책이라면 최대한 인내심을 갖고 저자에게 물어야 한다. 앞에서 의문이라고 생각하고 책의 여백에 기록해놓은 적이 있다면 언젠가 뒷부분을 읽으면서 앞부분의 그 의문 내용을 다시 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때 앞에서 가졌던 의문이 시원하게 해소된다면 책을 통해 저자와 매우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셈이 된다. 아마 대부분의 경우 앞부분에서 가졌던 의문이 해소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만약 앞부분에서 가졌던 의문을 효과적으로 해소해주는 내용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책은 일관된 논조로 서술된 좋은 책이라 말할 수 없다.

동양에서는 이러한 식의 독서법을 매우 중시했다. 경전을 읽을 때 생기는 의문을 경전 자체의 맥락에서 해결하는 방법을 이경해경(以經解經)이라고 한다. 바로 고전판 '책과 소통하기 독서법'인 셈이다. 경전을 가르치는 스승들은 경전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수준까지 경전과 대화하면서 철저히 읽어야 한다고 늘 주문한다. 성글게 읽다 보면 마치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전의 전체 맥락을 송두리째 이해하게 된다면 경전의 한쪽 부분이 경전의 다른 부분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단계의 소통의 책 읽기에 도달하게 되면 그 경전 전체의 내용을 단어 하나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전체 경전이 하나의 통일된 진리를 설파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옛 선비들이나 승려들은 진정한 이경해경에 도달하기 위해 경전들을 아예 암송하는 수준에 이르도록 읽고 또 읽었다. 그래야 경전의 특정 부분에서 발생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경전의 다른 부분에서 즉각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책에 대해 아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책과 하나가 되는 수준, 즉 책이 사람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수준의 독서만이 진정한 독서라고 보았다.

그러나 현대인은 그러기 쉽지 않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책만 읽을 만큼 시간의 여유가 많지 않다. 대신 책을 읽으면서 생기는 의문을 그때마다 책의 여백에 기록해놓으면 된다. 우리 선조들에게 책은 매우 소중한 자산이었다. 함부로 책에 낙서하는 것은 금물이었다. 책 하나를 자기가 읽은 다음 동생이 읽게 하고 자식에게까지 물려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에겐 그런 부담이 전혀 없다. 아까워하지 말고 책의 여백에 마구 자신의 의문과 견해를 끼적거려야 한다. 앞에서 적었던 내용이 자신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하는 부끄러운 경험을 해야 책 읽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혹은 자신의 지적이 결국 책 전체의 논리적 맹점을 정확하게 짚은 것이었다는 환상적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소통을 통해 책과 대화하는 경험을 하게 될 때 독서는 최고 수준에 도달하게 되며 또 다른 독서로 안내받게 된다.

즐거운 독서를 위해

편식을 두려워하지 말자: 많은 교육 전문가들이 너무 한 분야의 책만 편식해서 읽으면 좋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억지로 여러 분야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느니 차라리 한 분야의 자신이 읽고 싶은 책만 읽으라고 조언한다. 중요한 것은 책을 읽으면서 소통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점이다. 한 분야의 책만 줄기차게 읽는 편식 독서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역사소설에 빠져 박종화와 조정래의 대하역사 소설만 줄기차게 읽는 것이 뭐가 나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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