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심리학
와타나베 요시유키 외 지음 | 베이직북스
유쾌한 심리학
와타나베 요시유키, 사토 타츠야 지음
베이직북스 / 2011년 7월 / 280쪽 / 13,000원
1장 과연, 성격은 바꿀 수 있을까? 성격은 정말로 바뀌지 않을까?
바뀌지 않는다고 믿으면 결국 바뀌지 않는다: "성격은 바꿀 수 있는가, 바꿀 수 없는가?" 이 주제는 성격심리학계 내에서도 오랜 논란거리였다. 다양한 의견이 무수히 제기되었지만, 그중에서도 1968년 이후 계속되어온 "인간과 상황에 관한 논쟁"이 단연 유명하다. "인간의 행동에는 상황을 초월하는 일관성은 없다."라는 미셸 푸코의 주장이 심리학계에서는 뜨거운 감자가 되어 왔다.
성격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풍조는 성격이란 원래 고정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성격심리학자들의 영향이 크다. 이들은 왜 성격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무엇보다도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어버리는 굳은 신념 탓이 크다. 예컨대, 남자라고 하면 으레 용감하고 대범해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적이다. '남자는 대담하다'는 공식이 은연중에 성립되어 있는 탓에 나약한 남자를 보면 특수한 경우이거나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리라 단정해버린다. 심지어는 '계집애 같은 녀석'이라고 제멋대로 꼬리표를 달기도 한다. 그 배경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남자는 대담하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성격에 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자신의 성격을 '소심하다'고 여기면 과감한 행동을 하고서도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설령 깨달았다 해도 의외의 상황일 뿐이라며 소심한 자신으로 돌아가 버린다. 과감한 행동을 유발한 과감한 성격이 자신의 진짜 성격일지도 모르는데도 말이다. 또 변화를 그다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우리의 가치관도 성격을 바꾸지 못하는 데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번 정해지면 끝까지 간다'는 완고한 삶의 방식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길!
어쨌든 성격은 바꿀 수 있다고 믿는 편이 이롭다: 우리는 대개 '유전적인 요인'으로만 성격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다. 그리고 환경과 교육으로 자신의 성격이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단지 상황에 따라 행동이 변하는데도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착각의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착각의 종류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기본적 귀속의 착오'이다. 이는 인간 행동의 원인을 내적인 능력이나 취향 등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성격은 바뀌고, 또 바꿀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인지 반신반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일단 '바꿀 수 있다'고 믿어보는 것은 어떨까? 바뀌지 않는다고 믿으면 삶이 너무 무미건조하고 불행하지 않을까?
인간관계 네트워크에서 다양한 나를 발견한다
나라는 존재는 주위의 모든 인간관계까지 포함한다: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인간관이었다. '나'란 존재를 단지 한 인간의 내부로만 한정지어 생각해왔던 셈이다. 그 결과, 개인성의 원인을 찾으려면 뇌나 유전자를 분석해야 한다는 외골수적 사고방식만이 생겨났다. 물론 유전자에서 성격을 읽어낸다는 발상이 열등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인간이라는 존재를 그렇게 좁은 범위로 한정지어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인간을 '주위의 모든 너를 포함한 나'로 생각하면 그 범위가 무한대로 넓어진다. 즉 우리는 방대하고 복잡한 인간관계의 그물망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네트워크에서는 개인의 존재가 뚜렷해진다: 네트워크란, 자유의지가 있는 각 개인이 필요에 의해 연결되었다가 흩어지기도 하는 개인과 개인의 거대한 연결망이다. 이들은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협조하면서 다양한 일을 처리해나간다.
네트워크는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피라미드형 조직과는 구별된다. 네트워크에는 개인의 부분적인 참여가 가능한 반면, 피라미드형 조직은 조직의 목표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만 받아들인다. 따라서 조직의 특정 부분이 마음에 안 들어도 함부로 의견을 내세우기 어려우며 개인은 조직의 명령에 일방적으로 따라야만 한다. 이에 비해 네트워크에서는 타인과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때와 장소와 관심사에 따라 언제든지 결속하거나 흩어질 수 있으며 무엇보다 '개인'의 존재와 가치가 부각된다. 지연, 혈연이나 조직에서는 '나다운 것' 혹은 '나의 생각'이 강하면 문제가 되지만, 네트워크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없을 때가 문제다. 왜냐하면 서로의 차이점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어야 비로소 네트워크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유연하게 무한히 확장되는 집결체, 이것이 네트워크이며 앞으로 펼쳐질 사회의 모습이다. 이미 '관계에 의한 성격'에서 언급했듯이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이 늘어날수록 다양한 자신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많아진다. 그리고 그에 따라 자신의 가능성이 넓어진다면 네트워크도 일종의 착탈식 신체 확장장치가 되는 셈이다.
2장 인간관계는 어떻게 좋아질까? 좋고 싫은 감정은 왜 생기는 걸까?
플러스 정서와 마이너스 정서가 좋고 싫음을 만든다: 심리학에서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플러스 정서와 마이너스 정서가 어떤 원인에 의해 개입되는 현상'이라고 표현한다. 플러스 정서가 개입되면 좋은 감정이 생겨나고, 마이너스 정서가 개입되면 싫은 감정이 생기는 것이다. 좋고 싫은 감정이 생기려면 일단 상대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태어날 때부터 그 사람이 싫다거나 전에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인데 보자마자 좋아지는 일은 없다. 즉, 우리는 타인과 만나고 관계를 발전시켜가는 과정에서 그 사람에 대한 플러스 정서나 마이너스 정서를 키워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플러스 정서와 마이너스 정서는 어떻게 생기는 걸까? 심리학 연구에 의하면 좋고 싫은 감정이 발생하는 원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좋고 싫음은 외부에서 전이된 감정이다: 누군가를 만나서 일을 하고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갖가지 상황들이 펼쳐진다. 만약 그 상황이 즐겁고 재미있다면 좋은 감정이 생길 테고, 재미가 없고 싫다면 나쁜 감정이 생길 것이다. 예를 들어 남자 친구에게 근사한 선물을 받아서 매우 좋은 감정이 끓어오를 때는 그 감정이 생겨난 원인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인 남자 친구에게 전이되어 그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해지는 플러스 정서가 생긴다. 즉, 그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선생님에게 호되게 혼난 탓에 둘 사이가 마이너스 정서로 연결된다면 선생님을 싫어하게 된다. 이런 감정 전이는 때때로 감정 발생의 원인과 전혀 관계가 없는, 단지 감정이 생겨난 그 자리에 같이 있었을 뿐인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비 개인 하늘에서 예쁜 무지개를 봤을 때 혼자가 아니라 곁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대개 플러스 감정이 연결된다. 하지만 비참한 사고를 목격한 순간에 주위에 있었던 사람에게는 마이너스 감정이 연결되기 쉽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마이너스 정서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나 그런 감정이 일었을 때 곁에 있던 사람을 싫어하게 되고, 반대로 플러스 정서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나 그 정서를 함께 공유한 사람은 좋아하게 된다. 이런 원리로 좋고 싫은 감정의 발생 원인을 해명하려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강화감정 모델'이라고 한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믿어도 될까?
왠지 싫은 것은 무엇 때문?: 좋고 싫은 감정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사물에서 사물로, 혹은 사물에서 사람으로, 사람에게서 사물로 매우 간단하게 전이된다. 그렇게 전이된 감정은 다시 다른 사람이나 사물로 계속 퍼져 나간다. 게다가 그런 감정전이는 대개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일어난다. '중이 미우면 가사(袈裟)까지 밉다'라는 속담이 그 좋은 예다. 누군가가 싫어지면 그 사람이 입은 옷까지 싫어진다는 말이다. 즉, 무언가 부정적인 사건을 계기로 그 사람에게 전이된 마이너스 정서가 그와 관련된 사소한 사물로까지 전이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지니고 있거나 그와 관련된 물건은 물론, 그와 친한 사람에게도 은연중에 같은 감정을 적용한다. 그리고 그 대상과 닮은 사람에게도 감정이 전이된다. 가끔 누군가를 보고 첫눈에 반할 때가 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보는 순간 그대로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 이유 없이 좋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불안이나 공포처럼 격렬한 감정이 일어날 때는 예외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좋아하는 혹은 좋아했던 누군가와 비슷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 대상은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예전에 사랑했던 연인에서부터 동성 친구나 부모 형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들이 바로 왠지 모르게 좋은 감정이 들게 하는 원인 제공자였던 셈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기억의 장난일 뿐: 인간은 기억이란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런 탓에 기억 속에 새겨진 모든 것을 의식하지는 못한다. 한때 너무나 사랑했던 연인의 얼굴도 가물가물 사라지고, 심지어 그런 사람이 있었던 사실조차 잊기도 한다. 그러나 기억 저변에는 그 이미지가 아로새겨져 있어서 닮은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면 오랜 감정이 그대로 되살아나 전이된다. 그것도 무의식중에 말이다. 특히 싫어하는 사람과 마주했을 때는 그 유사관계를 깨닫기가 더욱 어렵다. 사람의 기억은 컴퓨터 메모리처럼 일률적이지 않아서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은 잘 끄집어내는 반면, 불리하거나 잊고 싶은 기억은 자신도 모르게 묻어두려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누군가와 사이가 나빴거나 싸웠거나 미워했던 부정적인 경험 따위는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간다. 그러다가 기억 속의 그 대상과 닮은 누군가를 만나면 과거의 경험은 의식하지 못한 채 마이너스 정서만 되살아난다.
이런 경우, 단지 옛날의 감정만 전이된 것이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사람이 싫어진 구체적인 원인을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싫다' 혹은 '주는 것 없이 밉다'는 모호한 이유를 갖다 붙인다. 보통 '좋아하는 타입'과 '싫어하는 타입'으로 나누는 기준도 이런 구조에 기초한다. 즉, 좋고 싫은 감정은 상대와의 직접적인 관계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이전부터 내재해 있던 감정이나 지금 상황과는 전혀 관계없는 예전 누군가에게 전이한 감정이 원인으로 작용할 때가 훨씬 많다. 그러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좋고 싫은 감정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3장 의욕은 어떻게 북돋울 수 있을까? 원하는 결과를 낳은 행동은 계속 이어진다
대부분의 행동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매일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건이나 사람들과 부딪히며 다양한 행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 어떤 행동을 몸에 익히고 어떻게 실행하는가는 대부분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지금껏 쌓아온 '경험' 안에서 획득한 것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다양한 행동들을 몸에 익힐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언제 어떻게 실행하면 좋을지도 경험을 통해 배운다. 이처럼 경험을 통해 뭔가를 배우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학습'이라고 한다.
오퍼런트 조건형성으로 행동 원리를 알 수 있다: 학습의 기본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인간의 학습 원리를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인물이 미국의 심리학자 스키너다. 그는 인간의 행동이 매우 단순한 구조의 복잡한 조합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오퍼런트 조건형성'이라는 원리로 설명했다. 그 원리에 따르면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한 뒤에 따르는 결과가 자신이 바라던 결과였다면 그 이후로도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반대로 바라지 않던 결과였다면 그 행동을 서서히 줄이거나 더는 반복하지 않는다.
좋은 결과를 낳은 행동은 점차 강화된다: 갓 태어난 아기는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행동, 이를테면 숨쉬고, 먹고, 자는 등의 원초적인 행동만 한다. 그러다 생후 2, 3개월이 되면 차차 학습을 시작한다. 아기는 언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학습되지 않은 자발적인 행동들을 쏟아낸다. 울어보기도 하고, 손을 움직이거나 웃어보기도 한다. 이런 무작위적인 행동 특성은 비단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대부분의 생명체는 그대로 내버려두면 되는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무작위적인 자발적 행동을 '오퍼런트(operant) 행동'이라고 한다.
학습되지 않은 무작위적인 행동이라지만 그 나름대로 환경에 영향을 준다. 예컨대, 울면 엄마가 안아주거나 우유를 주고 아기는 안기거나 우유를 먹으면서 만족감을 느낀다. ‘운다’는 오퍼런트 행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 셈이다. 이런 경험을 두어 번 겪으면 아기는 자신의 힘으로 엄마의 손길과 우유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즉 ‘엄마의 보살핌을 받기 위해 운다’는 행동을 학습한 것이다. 이처럼 경험을 통해 긍정적인 행동을 인지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현상을 ‘강화’라고 한다.
나쁜 결과를 낳은 행동은 점차 줄어든다: 반대로 오퍼런트 행동이 나쁜 결과를 낳았다면 어떻게 될까? 예컨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불안한 걸음걸이로 뜨거운 다리미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고 해보자. 아이가 다리미에 손을 대려는 순간, "건드리면 안돼!"라고 엄마가 소리친다. 그 소리에 놀란 아이는 그 자리에서 울기 시작한다. 그 뒤로 아이는 다리미가 눈앞에 있어도 선뜻 만지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다리미에 손을 대려는 아이의 오퍼런트 행동은 엄마의 꾸지람이라는 나쁜 결과(혐오자극)를 이끌어냈고, 이 경험으로 아이는 다리미에 접근하는 행동을 꺼리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하지 않게 된다. 이처럼 오퍼런트 행동에 수반하는 혐오자극을 '처벌'이라고 한다. 이 예에서는 엄마의 꾸지람이 처벌로 작용한 셈이다.
어떤 요소가 강화인자나 혐오자극으로 작용할까?"
욕구를 채워주는 행동은 반복된다: 우리는 여러 가지 강화인자나 혐오자극의 영향을 받으면서 환경에 적응적인 행동을 익혀간다. 그럼, 어떤 요소가 강화인자나 혐오자극(처벌)으로 작용하는 걸까? 이와 관련해 미국의 심리학자 헐은 '동인저감원리'를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행동은 다양한 동인(動因)에 의해 일어나는데, 그 동인을 줄이거나 해소할 수 있는 어떤 요소가 행동에 수반될 때 행동이 강화된다는 것이다.
인간 행동의 동인 가운데 가장 원시적인 것은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생리적 욕구이다. 항상성이란, 다양한 변화에 맞서 인체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성질이다. 즉, 우리의 몸은 체내 균형이 깨지면 원상태로 되돌아가려는 항상성이 생겨나 여러 가지 것들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활동에 필요한 영양소가 부족해지면 식욕이 발동하여 음식을 찾는다. 또 몸에 노폐물이 쌓이면 배설하려는 욕구가 생기고, 피로가 쌓이면 자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말하자면, 이런 욕구를 충족해주는 요소들이 강화인자로 작용하여 행동을 강화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음식, 배설, 수면 등이 강화인자인 셈이다. 그밖에도 스킨십, 편안한 잠자리, 성적 쾌감 등과 같은 생존과 관련된 행동에 수반되는 대부분의 쾌감도 강화인자로 작용한다. 요컨대, 강화인자란 받으면 기분 좋은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의 행동은 사회적인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생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이번 주에 일어난 즐거웠던 사건들을 몇 가지 떠올려보라. 관심 있던 이성과 대화를 나눴던 일, 영업 실적이 좋아 부장님에게 칭찬받았던 일, 복권에 당첨된 일 등등 하나같이 기분 좋은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이것으로 식욕을 채운다거나 생리적 쾌감을 느낄 수는 없다. 돈을 먹을 수도, 칭찬으로 생리적인 쾌감을 충족할 수도 없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모든 사건에도 행동을 강화하는 힘이 있다. 복권에 당첨되어 공돈이 생긴 일이나 이성과 가까워진 것 자체만으로 생리적 욕구를 직접적으로 채울 수는 없지만 돈이 있으면 먹을 것을 사서 배를 채울 수 있고, 이성과 친해지면 생리적 쾌감으로 연결될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