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진중권의 서양미술사_ 모더니즘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진중권의 서양미술사_ 모더니즘 편

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 380쪽 / 18,000원



들어가기 - 현대예술의 혁명




현대예술의 지형

현대미술에 비판적인 이들이 그것에 우호적인 이들보다 외려 그것을 더 잘 이해한다는 역설. 이는 아마도 제들마이어 자신에게 해당할 것이다. 현대미술에 익숙한 이들은 그것을 작품으로 보고 지나치지만, 낯설게 느끼는 이들은 거기서 충격을 받는다. 현대예술의 목표가 '감성적 쾌감’이 아니라 ‘지성적 충격’을 주는 데 있다면, 그 의도된 효과를 제대로 체험한 이들이야말로 그것의 본질을 제대로 간파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역사상 가장 급진적이었던 예술운동의 본질은 외려 그것을 불편하게 느끼는 문화보수주의자의 눈에 더 뚜렷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제들마이어에 따르면, 현대예술이라는 복잡한 숲을 이루는 그 모든 가지는 결국 네 개의 '공동의 뿌리'에서 자라나왔다고 한다. '순수성의 추구, 기술적 구축, 광기의 탐닉, 근원의 탐색'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를 제들마이어는 현대예술의 '근원현상'이라고 부른다. 순수, 기술, 광기, 근원. 이것이 20세기의 아방가르드(Avant-Garde) 운동을 추동해온 네 가지 충동의 이름이다.

순수성을 향하여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순수성의 추구'일 것이다. "전적으로 순수해지려는" 예술의 충동은 건축에서 제일 먼저 나타났다. 20세기의 건축은 순수해지기 위해 우선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 외적 요소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가령, 회화적-장식적 요소, 상징적-우의적 요소, 의인적(擬人的) 요소, 그리고 대상적 요소 들이 그것이다. 이 모든 것을 제거하면 결국 순수한 건축적 형태, 즉 '입방체와 다면체'만 남을 것이다. 여기서 아무런 장식도, 의미도, 재현도 없이 세 개의 공간적 축으로만 이루어진 순수 기하학적 건축이 탄생한다. 이 입방체와 다면체로 된 건축이 아무것도 묘사하거나 재현하지 않는 절대회화와 절대조각의 전주곡이 된다.

회화 역시 순수해지려고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조형적, 건축적 요소를 배제한다. 여기서 '조형적 요소'란 명암을 이용해 평면 속에 입체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회화는 입체를 그리는 것을 포기한다. 한편, 회화에서 '건축적 요소'란 원근법을 이용해 가상의 무대를 세우는 것을 가리킨다. 현대회화는 이 무대를 없앤다. 그 결과 그림 속의 대상이 마치 지지대를 잃고 허공을 떠도는 것처럼 보인다. 극단적인 경우, 아예 그림에서 위/아래의 구별이 사라지기도 한다. (칸딘스키는 옆으로 누운 그림을 그 상태 그대로 작품으로 인정했다.) 이렇게 건축적 요소가 흔들리고, 평면적 완결성이 득세할 때 사람들은 평면을 그림의 본질이라 생각하게 된다.

기술적 구축의 의지

1920년대에 이르면, 순수를 향한 운동이 정점에 달하여 모든 예술에서 더 이상 제외할 요소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자극을 상실한 순수예술은 이 시점에서 새로운 유행에 사로잡힌다. 바로 현대의 지배자로 등극한 기술이다. 혁명의 첫 번째 시기에 각 예술이 순수성과 절대성을 향하여 서로 떨어져 나갔다면, 혁명의 두 번째 시기에는 개별 예술들이 기술 속에서, 기하학적 구축 속에서 다시 하나로 통합되려는 경향을 보인다. 현대예술은 기술 속에 뭔가 '정신적인 힘'이 있다고 오해했다. 그리고 그 착각에서 스스로 기술 결정적이 되려고 했다. 그리고 나가는 통로를 마련해준 것은 예술의 순수화를 이끌어왔던 '기하학'의 모범이었다.

회화에서는 이미 입체주의가 자신을 기하학적 정신으로 규정한 바 있다. 1920년대에 들어와 예술은 더욱더 기하학적이며 기술 구축적인 영역으로 동화된다. 가령, 몬드리안이나 레제의 작품에서 회화는 공장에서 사용하는 기술적 청사진, 즉 기계의 도면이나 공장의 설계도와 비슷해진다. 과거의 화가는 그림을 그렸으나, 현대의 화가는 그림을 구축한다. 이제 "아틀리에는 실험실로 발전하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곧 실험을 하고 제작을 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창작은 이른바 '몽타주', 즉 공장에서 기계를 조립하는 일로 여겨진다." 이처럼 현대회화의 광대한 영역은 "자발적으로 그 정신을 예술의 창조력과는 거리가 먼 기술적 세계에 정신을 맞춘다."

자유의 도피처로서 광기

초현실주의는 '순수'하지 않다. 그것은 여전히 구상적이기 때문이다. 살바도르 달리는 초현실주의를 "구체적인 비합리성의 천연색 즉석 사진"이라고 불렀다. '구체적 비합리성'이란, 가령 '수술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의 즉흥적인 결합(로트레아몽)'처럼, 삶 속에서 발견되는 꿈을 가리킨다. 사물을 엉뚱한 맥락에 놓을 때 일상은 불현듯 몽상처럼 느껴진다. "실제적인 것과 몽상적인 것이 더 이상 모순적 대립으로 여겨지지 않는" 상태를 만드는 것. 그것을 초현실주의자들은 '혼란의 체계화'라고 불렀다. 사물을 제자리에 떼어내어(ent-stellt), 엉뚱한 맥락에 놓을(ver-ruckt) 때, 일상은 왜곡(entstellt)되고, 정신은 광기(verruckt)에 다가간다.

근원적인 것을 찾아서

표현주의도 과학주의와 주지주의의 세계를 거부한다. "영혼의 적수로서의 정신." 이것이 표현주의의 전형적 구도였다. 하지만 표현주의의 거부는 열정적일지언정 다다이즘의 그것처럼 냉소적이지는 않았다. 초현실주의가 일체의 도덕을 억압으로 여겨 거부했다면, 표현주의는 모종의 에토스를 유지하려 했다. 표현주의 역시 절대예술처럼 순수함을 추구했으나, 현대예술처럼 그 과정에서 공허해지지는 않았다. 표현주의의 영혼은 근원적 일자(Ur-einem), 근원적 순수(Ur-Reinem)에 대한 열망으로 차 있었다. 그것을 찾으려면 모든 사물의 모태, 정신과 영혼과 감각이 분화되지 않는 곳, 예감이 가득한 세계로 들어가야 했다.

제들마이어는 표현주의에 내재된 모순을 지적한다. 표현주의적 창작의 전형적 특징은 '의식적인 순수성'이다.(이는 초현실주의의 '의도적인 정신 분열'과 대비된다.) 표현주의는 순진해지기 위해서 아직 선악의 구별을 모르는 어린아이의 상태로 돌아간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죄 없이 악하다." 하지만 이 순진성은, 그것이 의식적 노력의 산물인 이상, 이미 순진한 게 아니라 가장 가공된 것이다. 그것은 죄 없이 악한 것이 아니라 그냥 악한 것이다. 순진해지려고 노력한 결과 인간은 외려 더 악해지고, 그럴수록 순진함에 대한 열망은 더욱 강해진다. 여기서 표현주의는 결국 악순환에 빠져든다.

야수주의(1904) - 원색의 향연, 색채의 해방



세잔이 20세기에 속하는 만큼 아직 19세기에 속했다면, 야수주의와 더불어 최초로 20세기의 예술운동이 시작된다. 야수주의 운동의 요체는 회화의 논리를 전통적 '인상론'에서 현대적 '표현론'으로 바꾸어놓은 데 있다. 야수주의 이후 화면 위의 이미지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인상(im-pression)'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표현(ex-pression)’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야수주의의 화면은 모사 대상의 색깔을 닮을 의무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원색의 향연이 된다. 야수주의가 일으킨 이 색채의 해방이야말로 20세기 회화가 르네상스 이후 400년 동안 예술의 공리로 군림해왔던 재현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다.

회화의 자기 충족성

마티스의 야수주의 양식은 후기 인상주의의 여러 흐름을 두루 실험하는 가운데 탄생했다. 가령, 그는 세잔에게서 '총체화하는 장場으로서 회화적 표면'의 개념, 말하자면 모든 요소가 회화의 에너지를 증대시키도록 화면을 구축해 나가는 법을 배운다. 쇠라에게서는 분할주의, 즉 시냑이 "원색의 점이나 면을 가지런히 병치시키는" 법이라고 표현한 점묘법을 배운다. 고흐에게서는 선의 두께와 간격을 조정해 선의 효과에 미세한 차이를 주는 법을, 고갱에게서는 사물의 객관적 색깔에 관계없이 대담하게 주관적 색채를 구사하는 법을 배운다. 원근법을 없애서 화면을 장식적 단위로 응축시키는 것도 그가 고갱에게서 배운 또 다른 교훈이다.

마티스의 말이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표현이다. 표현은… 인간의 얼굴이나 분노로 뒤틀린 동작에 투영된 정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표현적인 것은 내 그림 속의 전체적 배치다. 인물이나 다른 물체들이 차지하는 화면, 그것들을 둘러싼 여백, 비례 등 모든 것이 각기 제 역할을 한다. 구성이란 화가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표현 요소들을 제 재량대로 장식적 방법으로 배치하는 기술이다. 하나의 그림에서 모든 부분은 각기 부여된 역할을 한다. 그림에서 유용하지 못한 부분들은 장애가 된다. 하나의 예술 작품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입체주의(1907) - 형태의 해방, 원근법의 해체



색채의 해방은 형태의 해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때 야수주의에 가담했던 브라크는 야수주의를 떠나 피카소와 더불어 입체주의 운동을 시작한다. 입체주의가 분석적 단계에서 색채를 포기하고 모노크롬에 가까워진 것은 이 운동이 처음보다 형태의 문제에 집중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입체주의의 목표는 그보다 더 높은 데 있었다. 그것은 르네상스 이후 400년 동안 회화를 지배해왔던 원근법적 공간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입체주의는 글자 그대로 회화의 '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야수주의의 영향이 비교적 제한적이었다면, 입체주의는 20세기에 나타난 거의 모든 예술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세잔의 회의

브라크는 세잔에게서 "회화로부터 기교적 완성이라는 개념을 제거한 업적"을 본다. 세잔은 회화를 '아름다움'에 관한 예술이 아니라, '자연과 지각의 관계'에 관한 예술로 재再정의했다. 세잔의 화면은 별로 아름답지 않은데, 이는 그가 원근법과는 전혀 다른 규약을 따랐기 때문이다. 원근법에서 전제하는 것과 달리, 지각은 한 눈(monocular)이 아니라 두 눈(binocular)으로, 고정된 위치가 아니라 안구와 신체의 움직임(kinaesthesia)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이를 화폭에 옮길 경우 화면에는 당연히 여러 개의 시점이 공존하게 된다. 원근법에 익숙한 눈에는 이 혼란이 아름다워 보일 리 없다. 하지만 세잔은 그 혼란을 기꺼이 감수했다. 원근법의 해체

흔히 입체주의의 출발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 작품은 그리 입체주의적이지 않다. 피카소의 관심은 형태에 있었다. 그의 말대로 저 형상들을 오려서 다시 붙이면 정말로 "앞에 조각을 갖게 될 것"만 같다. 공간의 해체라는 측면에서 세잔의 중요성을 먼저 인식한 것은 브라크로 보인다. 브라크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에는 촉각적인 공간이 있다. 나는 그것을 손의(manual) 공간이라고 부르고 싶다. …… 내게 그것은 대상을 그저 보는 게 만지고 싶은 욕망을 의미했다. 나를 강하게 잡아끈 것은 바로 그 공간이었다. 왜냐하면 최초의 입체주의 회화란 공간에 대한 탐색이었기 때문이다."

순수추상(1911) - 형태와 색채의 교향악



색의 해방과 형의 해방, 나아가 원근법적 공간의 해체 속에는 또 다른 회화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는 순수회화의 가능성이다. 입체주의가 포기한 것은 '원근법적' 재현일 뿐, 그것이 재현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입체주의의 분석적 단계에서 화면은 거의 순수추상에 근접한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거기서 한 걸음 물러나 다시 재현을 강화하고, 그로써 입체주의의 종합적 단계로 이행한다. 하지만 칸딘스키는 거기서 용감하게 걸음을 내디뎌 최초로 순수회화에 도달한다. 일체의 재현을 포기하고 순수한 색과 형의 유희가 됨으로써 회화는 완전한 자율성에 도달한다.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

추상에도 위험은 따른다. 칸딘스키도 이를 안다. "자연과 맺은 유대를 폐기하고 … 순수한 색과 독립적 형태를 배합함으로써 만족을 얻으려 한다면, 넥타이나 양탄자 같은 작품을 만들지도 모른다." 물론 칸딘스키는 형식주의자가 아니었다. "색채와 형태의 미는 그 자체로 예술의 충분한 목적이 되지 않는다." 유미주의자도 아니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예술가의 힘을 무산시킬 뿐이다." '예술가는 무엇인가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가의 임무는 형식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내용에 적합한 형식을 만드는 데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전달해야 할 '무엇'이란 물론 제재(대상)가 아니라 "예술의 영혼, 즉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을 가리킨다.

점 선 면

회화는 교향악이 된다. 칸딘스키는 자신의 교향악적 구성을 세 단계로 구별한다. 첫째는 외적 자연의 인상을 즉각적으로 기록한 인상(Impression)이고, 둘째는 내적 자연, 즉 내면의 과정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즉흥(Improvisation)이며, 셋째는 이 안팎의 인상을 치밀한 실험을 통해 의식적, 의도적으로 완성하는 구성(Composition)이다. 이는 마티스가 작품에 제목을 붙이는 기준이기도 하나, 본인 스스로 그 구분을 엄격히 지킨 것이 아니어서, 사실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 셋 중 어느 쪽에 속하든, '청기사' 시절의 작품은 피카소보다 마티스가 가깝다는 그의 말대로 형태의 경계를 넘어 풍부한 색채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절대주의(1913) - 회화의 영도



회화가 비재현적 예술이 될 때, 그것은 음악에 가까워진다. 그리하여 칸딘스키에게 회화의 구성(Composition)은 곧 음악의 작곡(Composition)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추상을 향한 회화의 운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구성은 형태 및 색채 요소들의 존재를 전제하나, 말레비치의 화면에서 모든 형태는 하나의 정사각형으로, 모든 색채는 흑백의 무채색으로 환원된다. 이때 사라지는 것은 바로 '구성' 자체다. 칸딘스키에게 회화는 여전히 형태 및 색채 요소들의 자유로운 유희를 의미했으나, 말레비치의 화면에서 회화는 마침내 형태와 색채마저 사라지는 절대주의로 이행한다. 절대주의는 그 너머로는 더 이상 예술일 수 없는 회화의 극한이다.

붉은 사각형

절대주의는 한마디로 회화의 영도(zero degree), 즉 그 너머로는 더 이상 회화일 수 없는 경계, 혹은 회화의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근원에 도달하려는 기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획을 통해 말레비치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것이 정사각형이라는 형태였다. "정사각형은 잠재의식적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직관적 이성의 창조다. 그것은 새로운 예술의 얼굴이다. 정사각형은 살아 있는 왕자이자 예술에서 순수한 창조를 위한 첫걸음이다. 그 이전에는 소박한 변형과 자연의 모방만이 있었을 뿐이다." 정사각형이 형태의 영도라면, 당연히 색채에도 그에 해당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미래주의(1908) - 아방가르드, 미래를 향한 질주



미래주의는 미학적 급진성에 정치적 과격함을 결합한 본격적인 아방가르드 운동이었다. 미래주의 선언이 발표된 것은 1909년의 일이나, 미래주의가 제 언어를 갖게 된 것은 입체주의의 영향을 흡수한 1911년 이후의 일이었다. 이렇게 양식보다 강령이 앞선 데서 미래주의자들의 성급함을 엿볼 수 있다. 이탈리아 사회의 후진성에서 비롯한 이 조급함은 미래주의자들을 맹목적인 기술 숭배자로 만들었다. 미래주의는 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파시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나, 파시스트 정권은 대중의 선동을 위해 외려 고전고대의 양식으로 돌아감으로써 미래주의자들의 이상을 배신하게 된다.

미래주의 화가 선언

이때만 해도 미래주의는 마르네티(이탈리아의 상징주의 계열의 시인, 1876~1944)가 주장한 시인들의 운동이었다. 1910년 2월, 밀라노를 찾은 보초니(1882~1916)는 마리네티의 방법론에 깊은 인상을 받고 거기서 자기가 "그림으로 해야 할 일"을 본다. '창조적 직관'이라는 관념의 바탕에는 니체와 더불어 미래주의에 영감을 준 베르그송의 철학이 깔려 있다. 베르그송은 '상대적' 지식, 즉 가시적 현상에 관한 과학적 인식과 '절대적' 지식, 즉 자연의 본질을 꿰뚫는 내적 직관을 구별한다. 이 '직관'에 의거하여, 보초니는 물체의 운동감(상대적 운동)을 넘어 물체의 생명력(절대적 운동)까지를 포착하려 했다. "절대적 운동과 상대적 운동, 한데 합쳐져서 환경과 전체의 모습을 형성하는 오브제, 즉 환경+오브제 사이의 끝없는 상대성의 표명 속에서 해석되는 서정적 형식 개념" 이것이 그의 목표였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