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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비틀어버린 세기의 스캔들

운노 히로시 지음 | 북스넛


역사를 비틀어버린 세기의 스캔들

운노 히로시 지음

북스넛 / 2011년 6월 / 703쪽 / 28,000원



중세_ 그리스도교와 스캔들




카노사의 굴욕

1077년 1월 말 눈이 내려 쌓인 엄동설한, 카노사 성의 성문 앞에서 맨발에 허술한 수도복 차림의 남자가 꼬박 사흘 밤낮으로 성안에 있는 교황에게 용서를 구했다. 남자는 수도승이 아니라 황제 하인리히 4세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로부터 파문당한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을 취소해달라고 직소하기 위해 아득히 먼 눈길을 걸어 찾아온 것이다. 마치 비렁뱅이 수도승처럼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 맨발로 교황에게 넙죽 엎드린 이 사건은 '카노사의 굴욕'으로 역사에 전해졌다.

이는 로마 교회를 개혁하여 번영을 가져온 그레고리우스 7세가 세속 권력을 상대로 거둔 위대한 승리라고 한다. 그러나 사건의 배경은 복잡하여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였는지 말하기 쉽지 않다. 어쨌든 카노사에서 황제는 넙죽 엎드려 눈밭에 이마를 댔다. 그것은 분명히 '굴욕'이고 스캔들이었다. 파문의 원인은 누가 교황을 선출할 것인가의 문제를 둘러싼 분쟁이었다. 교황만이 아니라 각지의 주교 등을 임명하는 '서임권'을 누가 가질 것인가. 황제인가 교황인가, 국가인가 교회인가.

서기 800년 교황 레오 3세는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에게 서로마제국의 황제의 관을 씌워주고 그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 후 프랑크왕국은 서프랑크, 동프랑크로 분열되었다. 서프랑크는 카페 왕조가 되어 프랑스를 형성했다. 동프랑크는 제후들의 연합으로 독일을 형성했다. 선거에 의해 작센의 하인리히가 왕으로 선출되었고, 그의 아들 오토 1세가 강력한 왕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출한다.

962년 오토 1세는 교황 요한 12세에 의해 로마 황제로 즉위하면서 신성로마 제국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토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에 대한 지배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오토가 로마에서 철수하자 곧바로 교회는 제멋대로 행동하고 다른 교황을 세웠으므로, 오토는 즉시 로마로 돌아가 시내를 약탈했다. 교회는 오토를 파문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오토가 새로운 교황을 뽑아, 황제가 교황을 임명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토 1세가 죽자 로마 교회는 혼란 상태에 빠졌고 교황은 눈이 팽팽 돌 정도로 바뀌었다. 하인리히 3세(재위 1039~1056)가 황제에 즉위하여 투르의 주교 브루노를 교황으로 임명했다. 그가 레오 9세다. 그리고 레오 9세가 로마로 데려온 힐데브란트에 의해 교회 개혁이 추진되었다. 1073년 힐데브란트는 스스로 교황이 되어 그레고리우스 7세라 칭했다. '그레고리우스 개혁'에 의해 로마 교회는 번영기를 맞게 되는데, 그레고리우스 7세가 '카노사의 굴욕'의 주인공이다.

하인리히 3세는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었고 로마 교회를 후원하고 있었다. 그 결과 황제가 주교나 수도원장의 임명권(성직 서임권)을 쥐고 있었다. 로마 교회는 성직 서임권을 자신들의 손에 되돌리려고 했지만 하인리히 3세가 재위할 때는 삼가고 있었다. 1056년 하인리히 3세가 죽고 어린 황태자가 하인리히 4세로 즉위하자 교회는 그 틈을 노려 반격을 개시했다. 마침내 1059년 교회는 여섯 명의 추기경에 의해 교황을 선출한다는 규정을 발표했다. 그때까지는 로마 귀족이 교황을 뽑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독일 국왕)가 승인했다. 이 규정 발표는, 교황은 교회의 간부 성직자에 의해서만 선출되고 속인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었다. 즉 황제는 배제되었다.

1073년 그레고리우스 7세가 교황이 되었고, 1075년 속인에 의한 성직자 서임을 금지했다. 교황만이 아니라 주교, 수도원장 등도 교회만이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교회가 성직자를 뽑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중세에는 주교나 수도원장도 봉건 영주였다. 따라서 국왕과 주종관계를 맺고 있었다. 영주와 성직자가 확실히 구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 서임권을 둘러싸고 하인리히 4세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독일의 주교들은 로마 교회의 독재에 반발하여 국왕을 지지했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무시하고 주교를 임명했다. 1075년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회에 따르지 않으면 국왕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하인리히 4세는 1076년 보름스에서 국회를 열어 그레고리우스에게 퇴위를 권고했다. 이 회의에서 반그레고리우스파인 추기경 우고 칸디두스가, 그레고리우스는 교황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확실히 그레고리우스의 주변에는 여성에 관한 소문이 많았다. 그레고리우스는 반황제파인 토스카나의 여자 영주 마틸다와 친하여 그녀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타락한 교황은 인정할 수 없다. 당장 퇴위하라는 말을 들었던 그레고리우스는 곧바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다. 모든 그리스도교인에게 하인리히를 국왕으로 섬기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이 파문에 의해 형세는 역전되었다. 보름스에서 그레고리우스의 추방에 찬성했던 제후나 추기경도 하인리히를 배반하고 그레고리우스와 손을 잡았다.

그로 인해 트리부르에서 열린 제후 회의에서 1년 이내에 파문이 풀리지 않으면 하인리히는 퇴위를 당할 처지에 놓였다. 궁지에 몰린 하인리히는 할 수 없이 교황에게 사죄하기로 하고 아내와 몇 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한겨울의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의 토리노에 도착했다.

이 때 그레고리우스는 독일 아우구스부르크의 국회에 초대되어 로마를 떠나 만토바에 도착했다. 그는 황제의 일행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 습격당할 것을 염려하여 만토바의 남쪽에 있는 카노사 성으로 들어갔다. 그 사실을 안 하인리히는 고해복을 걸치고 맨발에 모자도 쓰지 않고 성문 앞에 서서 교황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아우구스부르크에서 교회의 승리를 선언할 예정인 그레고리우스는 면회를 거절했다. 황제는 눈 속에서 사흘간 용서를 구했다.

그 사이에 설득 공작이 이루어졌다. 마틸다 백작부인, 클뤼니 수도 원장 위그(하인리히의 세례 대부), 토리노 백작부인 아델하이트(하인리히의 장모)가 그레고리우스에게 하인리히와 만나줄 것을 부탁했다. 마틸다는 그레고리우스파였지만 이때는 중재자로 돌아선 듯하다. 결국 그레고리우스는 중재에 응해 하인리히를 면회하고 그의 사죄를 받아들였다. 이 '굴욕'은 국왕에 대한 교황의 결정적인 승리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 기억되었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 진정한 승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황제는 '굴욕'을 당한 덕분에 퇴위는 면할 수 있었고 잃어버린 땅을 회복할 여유가 생겼다. 교황은 황제에게 머리를 숙이게 했지만 그만두게 할 수는 없었다.황제파와 교황파는 모두 이런 식의 해결에 불만이었다. 트리부르 회의에서 교황을 지지하고 황제의 추방을 결정한 독일의 제후는 황제의 파면을 철회한 교황에게 불만이었다. 그들은 이미 하인리히에게 대립하는 슈바벤 공장 루돌프를 국왕으로 선출한 상태였다. 작센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제후의 지지를 받은 루돌프는 하인리히 4세와 격돌했다. 완전히 세력을 회복하고 다시 압력을 가해오는 하인리히에게 격노한 교황은 재차 황제의 파문을 선고하고 루돌프를 지지했으며 하인리히에 대한 성전을 호소한다. 그러자 하인리히는 1080년 브릭센 공의회에서 그레고리우스 7세의 폐위를 결정했다. 또한 추기경 위그가 등장하여 그레고리우스를 절도와 방화 교사, 위증, 살인, 이단, 마술 행위 등이 혐의로 고발했다. 그리고 대립교황(對立敎皇,antipope) 클레멘스 3세를 선출했다.

보름스 회의의 완전한 반복이었지만 이전과 다른 것은 교황파가 예전의 세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마틸다를 제외한 모든 제후들이 하인리히 쪽에 붙었다. 그리고 루돌프도 전사하고 말았다. 1081년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속죄자가 아니라 승리자로서 로마를 포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1084년 로마로 들어가 클레멘스 3세에 의해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레고리우스는 일단 피신한 뒤 노르만인 로베르토 기스카르에게 도움을 청했다. 로베르토 기스카르의 노르만군이 다가오자 하인리히는 북쪽으로 철수했다. 로마 시내로 들어온 노르만군은 약탈을 저질렀다. 그레고리우스는 로마 시민의 분노를 피해 살레르노의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은신했다. 그는 하인리히를 저주하면서 1085년 그곳에서 쓸쓸하게 삶을 마감했다. 이제 하인리히 4세는 '굴욕'의 상처를 치유하고 영광의 자리에 앉았고 마침내 제국의 평화를 쟁취한 것처럼 보였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교회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하인리히 4세의 장남 콘라트를 이용하기로 했다. 우르바누스는 콘라트에게 '이탈리아 왕'이라는 칭호를 주고 아버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콘라트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황제가 되려고 했다. 하인리히는 콘라트를 폐위하고 하인리히 5세를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하인리히 5세 역시 아버지를 등졌다.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를 유폐하고 퇴위를 강요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탈출했다. 시민에게 인기가 있었던 그는 금세 세력을 회복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1106년 마침내 병으로 쓰러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처럼 교황과 사투를 벌이고 '굴욕'을 맛보기도 한 하인리히 4세는 영광과 밑바닥을 오갔고 대중의 사랑을 받기도 했지만 자식들에게는 차례로 배반당하는 희극과 비극으로 채색된 삶을 살았다.

르네상스_ 개성적인 인간들



헨리 8세와 여섯 명의 아내

헨리8세(재위 1509~1547)는 유럽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아내를 여섯 명이나 거느린다는 건 아무래도 굉장한 일이다. 정력이 그렇게 뛰어났던 것일까? 아니 그 이상으로 많은 정부를 거느린 호색한 왕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여섯 번이나 결혼한 것은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장미전쟁(1455-1485)이라는 영국의 내란이 끝난 후 헨리 튜더가 헨리 7세가 되어 튜더 왕조를 열었다. 헨리 7세의 장남 아서는 황태자가 되었으나 1502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차남인 헨리가 후계자가 되어 1509년 헨리 8세가 되었다. 형이 죽어 황태자가 된 헨리는 형의 아내였던 캐서린 오브 아라곤과 결혼했다. 그의 첫 번째 아내다. 캐서린은 카스티야의 이사벨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양국이 합쳐져 스페인이 되었고, 게다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와도 합쳐졌다. 그리고 캐서린을 헨리 7세의 황태자 아서에게 시집보내 영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포위했던 것이다. 아서의 죽음은 충격이었지만 양국은 우호 관계를 위해 캐서린을 다시 헨리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형수와의 결혼은 근친혼으로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특면장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1509년 헨리 8세가 즉위하고 캐서린과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헨리는 열일곱 살, 캐서린은 스물세 살이었다. 몇 번의 임신도 하는 등 처음에는 이 결혼이 꽤 순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혼한 지 17~18년쯤 되자 헨리는 이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캐서린에게 아들이 생기지 않자 헨리는 후계자를 걱정하기 시작했고, 그때 앤 불린이라는 여성이 나타났던 것이다. 또한 그 무렵 왕으로서 자신의 힘을 자각하게 된 이유도 있었다. 그의 치세 중 첫 20년간은 토머스 울지 등 고관들에게 국정을 맡기고 있었다. 연상의 왕비도 그를 보좌했고, 교황에게도 충실했다.

간섭하는 늙은 신하와 나이든 아내로부터 이제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일까? 1526년 헨리 8세는 앤 불린이라는 젊은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다. 앤 불린은 왕비 캐서린의 시녀였는데 프랑스식 예법의 요염함으로 사내들을 매료시켰다. 헨리 8세도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문제는 단순한 정부(情婦)가 아니라 그녀와 재혼하여 아들을 낳고 싶다고 왕이 결심한 일이었다. 캐서린과 어떻게 해야 헤어질 수 있을까? 헨리 8세는 18년이 지난 마당에 처음부터 그 결혼이 무효라고 주장했고, 대법관 울지에게 로마 교황의 허가를 얻도록 교섭하게 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찍이 근친결혼 특면장을 주었는데 이제 와서 그것이 무효라고 인정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교황과의 교섭에 실패한 울지는 추방되고 헨리 8세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그는 토머스 모어(1477~1535)를 울지의 후임으로 앉혔다가 곧 해고하고, 토머스 크랜머를 대주교에 임명했다. 그리고 1533년 교황의 허가 없이 크랜머에게,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하고 앤 불린과의 결혼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했다. 로마 교황은 헨리를 파문했다. 그러자 헨리는 영국 교회를 로마와 절연하고 스스로 그 수장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반대하는 토머스 모어를 처형했다. 모든 일에서 왕이 절대적 권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공표하기 위함이었다.

이혼과 재혼이라는 개인적 애증 문제가 갑자기 종교와 정치 문제와 결부되어 버렸다. 헨리 8세는 어떻게든 앤과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서 결과적으로 종교적, 정치적 대변혁에 이르렀던 것일까? 아니면 결혼을 이용하여 대변혁을 의도한 것일까? 어쨌든 결과적으로 보면 헨리의 결혼 스캔들이 영국의 종교개혁을 성공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계기로 로마 교황과 인연을 끊었고 576개의 수도원을 없애 그 막대한 재산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몇 가지 문제는 남았지만, 그로써 영국은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비참한 종교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귀찮은 중신이나 교황을 정리하고 교회 재산을 모조리 몰수한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경사스러운(?)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아들의 출산을 기대했으나 태어난 것은 공주 엘리자베스였다. 실망한 헨리의 마음은 다시 앤의 시녀 제인 시모어에게로 옮겨갔다. 그리고 앤 불린이 왕비로서 횡포를 부렸기 때문에 그녀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 세력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배후에는 캐서린 오브 아라곤을 쫓아내고 왕비가 된 앤에게 반감을 가진 스페인이 있었다.

파국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앤 왕비와 남동생 로시포드 자작 조지가 체포되었다. 조지의 친구 세 명이 앤 왕비와 밀통하고, 게다가 국왕의 암살을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앤이 남동생 조지와 근친상간을 범했다는 것이다. 예전에 울지를 배반하고 앤 왕비와의 결혼을 도운 토머스 크롬웰이 이번에는 제인 시모어파로서 앤을 런던탑에 유폐했다. 조지 등은 곧 처형되었고 앤도 목이 잘렸다. 그리고 헨리와 앤의 결혼은 무효라고 선언되었다. 앤이 처형된 지 열흘 만에 헨리 8세는 제인 시모어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1537년 제인은 아들(에드워드)을 얻었다. 헨리의 바람은 달성되었다. 그러나 제인은 출산 직후에 갑자기 죽고 말았다. 비서장관 토머스 크롬웰은 다음 왕비를 찾기 위해 유럽 대륙에 사절을 파견했다.

마침내 프랑스와 네덜란드 사이에 있는 소국 클레페 공국의 안나 공녀가 왕비 후보로 떠올랐다. 거기에는 당시의 국제 정서가 작용하고 있었다. 헨리 8세는 지금까지의 세 아내와는 결혼 전부터 잘 알고 있었고, 특히 나중의 두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여 결혼했다. 안나 오브 클레페와는 첫 맞선인 셈이었는데, 아무래도 순탄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헨리는 안나를 싫어하여 손끝하나 대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나의 시녀 캐서린 하워드를 쫓아다녔다. 그 배후에는 측근들의 세력 다툼이 있었다. 안나 왕비를 지지하고 있던 토머스 크롬웰은 실각했다. 그 대신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가 등장했다. 캐서린 하워드는 그의 조카였다.

또다시 결혼이 무효라는 주장이 나왔고 안나는 이혼당했다. 헨리는 안나와의 결혼을 무효로 하자마자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했다. 캐서린은 정숙하지 못한 여자였다. 서른 살 연상의 남편에게 싫증을 느끼고 젊은 남자와 놀아나는 경솔한 구석이 있었다. 캐서린과 그녀 덕분에 권력을 얻은 노퍽 공작에 대한 사람들의 질투에서 음모가 꾸며졌다. 캐서린이 결혼하기 전에 교제한 일에 대한 밀고가 캔터베리 대주교 크랜머에게 들어왔고 그는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젊은 아내의 바람기에 격노한 헨리는 정부(情夫)들을 체포하고 끝내 왕비도 체포했다. 1543년 캐서린은 목이 잘렸다. 아직 스물한 살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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