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
C.V.웨지우드 지음 | 휴머니스트
30년 전쟁
C. V. 웨지우드 지음
휴머니스트 / 2011년 6월 / 728쪽 / 32,000원
1장 독일과 유럽: 1618년 헤이그에서는 두 종교(가톨릭과 신교) 파벌의 대립이 폭동으로 번졌고,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관계가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양국 정부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중요한 고갯길인 발텔리나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파리에서는 곧바로 불화가 커져 유럽 전쟁이 터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마드리드에서는 얼마 전에 있었던 안(Anne d’Autriche, 1601~1666) 공주와 젊은 프랑스 왕의 결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열일곱 살의 루이 13세(Louis 13, 1601~1643)는 에스파냐 신부가 가져온 지참금에 콧방귀를 뀌었다. 언제든 이 불완전한 결혼이 깨지면 프랑스 왕실과 에스파냐 왕실 간에 남은 마지막 우호의 보증도 사라질 판이었다. 에스파냐 왕의 오스트리아 친척들은 빈의 젊은 대공과 프랑스 공주의 결혼을 제안했다. 하지만 파리의 섭정 정부(1617년까지 루이 13세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가 섭정을 맡았다)는 그 제안을 무시하고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 두 왕실의 공공연한 적인 사보이 공작의 맏아들과 결혼 협상에 들어갔다.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를 타도하려던 에스파냐의 계획이 탄로 나고 발텔리나에서 신교도 봉기가 일어나자 이탈리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북유럽에서는 야심에 찬 스웨덴 왕이 러시아의 차르에게서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를 탈취하고, 네덜란드와 굳건한 동맹을 추진해 두 나라가 공동으로 유럽 북부 해역을 장악하려 했다. 프라하에서는 인기를 잃은 가톨릭 정부가 때마침 일어난 신교도의 봉기로 타도되었다. 국제 정계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태였으므로 그 사건들 중 어느 하나라도 뇌관이 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내막을 잘 아는 사람들은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1618년 5월 23일은 프라하에서 폭동이 일어난 날인데, 전통적으로 30년 전쟁이 발발한 날로 간주된다.
피상적으로는 유럽에 가톨릭과 신교, 이렇게 두 종교가 있는 듯 보였지만, 신교는 사실상 분열된 상태였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유럽은 세 가지 적대적인 진영으로 갈라져 있었다. 종교개혁을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는 루터와 칼뱅, 두 사람이었다. 이들의 교의에 따라, 더 정확히 말하면 교의의 정치적 영향력에 따라 신교는 두 파로 분열되었는데, 두 지도자를 계승하려 했을 뿐 보완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을 앞세웠던 루터는 지배계급의 야망에 쉽사리 희생되었다. 세속 지배자들이 그의 교의를 환영한 이유는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홀로서기에는 힘이 너무 약했던 새로운 교파는 이내 국가의 하수인이 되고 말았다.
1618년, 당시 유럽의 최강자는 단연 합스부르크 왕조였다. 그들은 "오스트리아는 세계를 지배할 운명이다."라는 구호를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오스트리아와 티롤,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카르니올라, 투르크가 장악한 지역을 제외한 헝가리 전역, 슐레지엔, 모라비아, 라우지츠, 보헤미아를 소유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부르고뉴, 저지대 지방, 알자스 일부까지 영토로 거느렸으며, 이탈리아에서는 밀라노 공국, 피날레와 피옴비노의 봉토, 이탈리아 반도 남부와 시칠리아, 사르데냐를 아우르는 나폴리 왕국이 합스부르크의 소유였다. 또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왕실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신세계의 칠레, 페루, 브라질, 멕시코를 장악하고 있었다. 가문의 수장은 장자 혈통인 에스파냐 왕이었다. 그에 따라 합스부르크의 정책은 강력한 가톨릭 우익으로서, 이그나티우스와 예수회의 노선을 취했다. 가문의 이해관계가 에스파냐 왕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자 유럽에서 가장 오랜 불화가 부각되었다.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지배자들은 서로 300년 동안이나 반목하고 있었다. 이제 에스파냐 왕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으로서 이탈리아 전역, 라인 강 상류와 저지대 지방을 장악하게 되자 프랑스는 사방에서 위협을 받게 되었다.
1610년, 결국 프랑스는 에스파냐와 강화를 맺고, 소년 왕 루이 13세는 에스파냐 공주와 결혼했다. 이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우호는 부르봉과 합스부르크의 잠재된 적대를 은폐했을 뿐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이것은 당시 유럽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최대 현안은 합스부르크 왕조와 부르봉 왕조의 관계였고, 곧장 터질 것으로 예상되는 사건은 에스파냐 왕과 북부 네덜란드 공화파의 다툼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을 몰고 온 것은 프라하에서 일어난 반란과 라인 지역 군주의 행동이었다.
독일의 불행을 초래한 원인은 첫째는 지리적 특성이고, 둘째는 정치적 전통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독일은 나라라기보다 수많은 부족과 군대가 오가는 통로였다. 그러한 이동의 물결이 멈춘 뒤에도 유럽 상인들은 고대의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상인들과 여행자들의 끊임없는 왕래는 독일의 발전에 다른 어떤 단일한 요인보다 더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상업은 독일의 존재 근거였으며, 독일에는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도시들이 조밀하게 발달했다.
폭풍의 중심은 프라하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황제 마티아스(Matthias, 1557~1619)는 노인인 데다 후사가 없었다. 합스부르크의 제위 계승이 끊어질 경우, 이참에 새로 다음 황제를 선출할 터였다. 선제후단에서 우위를 보이는 신교 측에게는 영향력을 발휘할 아주 좋은 기회였다. 가톨릭 선제후는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세 명으로 모두 주교였다. 신교 선제후도 작센, 브란덴부르크, 팔츠의 세 명이었다. 그리고 일곱째 선제후가 보헤미아 왕이었다. 과거 여러 차례의 선거에서 보헤미아 왕위는 늘 가톨릭과 합스부르크가 독차지했다. 하지만 보헤미아 왕은 세습직이 아니라 선출직이었고, 당시 보헤미아는 신교가 다수였다.
유럽의 외교는 마드리드, 파리, 브뤼셀, 헤이그를 중심으로 폭넓게 전개되었고, 독일의 외교는 황제와 보헤미아 왕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 둘을 연결하는 인물, 그리고 양측에 모두 중요한 인물이 바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Friedrich 5. 1596~1632)였다. 유럽 역사에서 한 사람의 어깨에 그렇게 중대한 짐이 지워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2장 보헤미아의 왕위: 1617~19년16세기 후반 보헤미아는 극히 암울한 혼돈에 처해 있었다. 양형영성체파, 루터파, 칼뱅파가 특권을 노리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의 왕들은 그 세 신앙을 관용하기만 하고 다시 가톨릭을 공식 신앙으로 채택했다. 그런 와중에 보헤미아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1617년 6월, 마드리드 정부는 페르디난트 대공(Ferdinand II, 1578~1637)이 알자스의 합스부르크 봉토에 대한 그의 권리를 에스파냐 왕실에 넘겨준다면, 그 대가로 자신들의 계획을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그에 따라 합스부르크 왕조가 페르디난트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대신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 왕으로서, 또 미래의 황제로서 에스파냐 군대가 독일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내주겠다는 비밀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중대한 순간에 신교 세력의 지도권이 슐리크 백작(Joachim Andreas von Schlick, 1569~1621)에게 넘어갔다. 1617년 6월 17일, 페르디난트의 선출이 표결에 부쳐졌을 때 그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페르디난트를 지지했다. 신교 귀족들은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만장일치로 그의 결정을 따랐다. 선거가 치러진 그해 가을에 두 가지 칙령이 반포되었다. 첫째 칙령은 왕의 판관들에게 지역과 전국에서 열리는 모든 회의에 참석하라는 내용이었고, 둘째 칙령은 프라하의 언론을 왕실에게 검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프라하 대주교구에 속한 클로스테르그라브라는 마을의 신교도들이 자체 교회를 건립하면서 자신들은 왕의 도시에서 살아가는 자유민이지 대주교의 수하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신앙의 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이 시민권 운동과 위험스럽게 융합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역사를 통틀어 하나의 행위가 이후의 사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례를 꼽는다면, 그 강력한 후보는 프리드리히 선제후(Friedrich V, 1596 1632)가 보헤미아 왕위를 수락한 일일 것이다. 보헤미아 왕위를 수락함으로써 프리드리히는 유럽 외교의 주역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또한 신교 독일의 이해관계에 합스부르크 왕조에게 적대적인 유럽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결합시켰다. 팔츠 선제후로서 그는 예전부터 네덜란드의 저항과 에스파냐의 진출 사이에 위치한 보루였다. 그런데 이제 보헤미아 왕이 됨으로써 그는 제국의 침탈에 맞서 군주의 자유를 보호하는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그가 이 두 지위를 제대로 유지했다면 그의 영토는 라인 강에서 오데르 강까지 합스부르크의 침략을 저지하는 장벽이 되었을 것이다.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영국, 독일의 군주들은 결정적인 순간임을 알아차리고 행동에 나서야 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지도자감이 아니었다.
3장 에스파냐의 경보, 독일의 경종: 1619~21년프리드리히의 위치는 독일에서도 취약했지만 유럽에서는 더 취약했다. 영국 왕은 사위의 즉위를 축하하면서도 유럽의 모든 군주들에게 자신은 그 계획을 지지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알지도 못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합스부르크 왕조는 조금씩 힘을 결집해 폐위된 페르디난트를 지지하고 나섰다. 결국 1621년 1월, 프리드리히는 추방령을 통보받았다. 8일 뒤에 신교연합의 군주들과 도시 대표들이 하일브론에 모였다. 프리드리히가 보헤미아 왕위를 차지한 것이 법을 어긴 행위라면, 페르디난트가 추방령을 내린 것은 더 심하게 법을 어긴 행위였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제위에 오를 때 자신이 한 서약을 멋대로 위반했고, 그럼으로써 독일의 자유라는 명분을 폐위된 보헤미아 왕의 명분과 또 다시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당장 심각한 위험에 노출된 나라는 네덜란드 연방이었다. 몇 주일 동안 불안에 떨던 오라녜 공 마우리츠는 남부의 에스파냐령 브뤼셀 정부와 불리한 평화 조약이라도 맺으려 했으나, 군사적 이점을 확신한 브뤼셀 측은 그가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에게는 또 다른 대안이 있었다. 최선을 다해 네덜란드 국경을 방어하면서 프리드리히와 그의 동맹 세력이 라인 일대를 탈환하도록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네덜란드는 서둘러 덴마크 왕과 조약을 맺는 한편 만스펠트에게 서신을 보내 신교의 대의에 충성할 경우 후히 보상하겠다고 약속했다. 1621년 4월, 에스파냐와의 휴전 기간이 종료되었다. 그 닷새 뒤 보헤미아 왕과 왕비는 헤이그에 도착해 지배 군주에 걸맞은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라인 영토 탈환을 위해서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아들이는 조약에 서명했다. 이리하여 독일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4장 페르디난트 황제와 막시밀리안 선제후: 1621~25년보헤미아에서 페르디난트 황제는 외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껏 전제 권력의 기반을 다졌다. 블타바 강 유역의 네 지역이 모두 항복했다. 슐레지엔과 라우지츠는 작센 선제후에게서 관대한 처분을 받았고, 모라비아와 보헤미아는 아무 조건 없이 바이에른 공작에게 항복했다. 막시밀리안(Maximilian 1. 1573~1651)은 반란자들의 목숨과 재산을 보전해달라는 호소에 의례적인 약속을 했다. 그런 탓에 그는 페르디난트에게도 그 약속을 무시하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나중에 그는 카푸치노 수도회의 수사를 빈으로 파견했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수사는 신의 계시를 받은 예언자처럼 처신하면서 보헤미아인들에 대한 응징은 곧 신의 명령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프라하가 함락되고 5주도 안되어 예수회가 복귀했다. 또한 추방되었던 가톨릭 관리들이 복위되고, 사람들이 무장 해제되고, 언론이 통제되고, 왕위 찬탈자의 주화가 회수되고, 반역자들의 출국이 금지되었다. 페르디난트의 목적은 탈환한 영토를 개혁하려는 것이지 인구를 줄이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모라비아와 보헤미아에서는 신교도의 이주를 막기 위한 엄중한 조치가 취해졌다. 보헤미아의 선출 군주제는 폐지되고, 왕권은 합스부르크 왕조에게 세습되었다. 페르디난트는 세 가지 방침을 정했다. 반란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을 정치, 경제적으로 파멸시키고, 민족적 특권을 폐지하고, 신교를 근절하는 것이었다. 페르디난트의 야망은 절대 권력이었다.
페르디난트를 그가 구사한 수단이나 그가 이룬 성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의 수단을 말해주는 증거는 오염되지 않은 게 없고, 그의 성과는 애초에 그가 추구했던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건국자로서 그의 평판은 상당히 불안정했으므로 19세기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와 20세기 반자유주의적 민족주의 비판을 견뎌내지 못했다. 중부 유럽을 통합하려 애쓴 마지막 황제로서 그는 온당한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비극은 그가 자신의 작업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불완전함이 후대에 남아 독일의 국가 발전을 결정적으로 저해했다는 데 있다.
리슐리외의 동맹자들은 공동의 적(페르디난트)을 향해 한발 더 다가섰다. 1624년 6월, 콩피에뉴에서 프랑스 정부와 네덜란드 정부는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숙명적 라이벌이자 적수들이 마침내 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닷새 뒤 영국도 가담했다. 7월, 스웨덴 왕과 덴마크 왕이 합류했고, 프랑스, 사보이, 베네치아가 발텔리아에서 공동 작전을 펼치기로 합의했다. 10월에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었고, 11월에는 프랑스 공주 헨리에타가 웨일스 공과 약혼했다.
그러는 동안 그리종의 신교도들이 들고 일어나 페르디난트의 동생인 티롤의 레오폴트 대공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 크리스마스 이전에 그들은 티라노를 장악하고 발텔리나를 차단했다. 1625년 봄, 눈이 녹을 무렵 사보이 공작(Carlo Emanuele 1. 1562~1630)은 프랑스 군대와 현지 군대를 거느리고 고지의 공국에서 내려와 아스티를 습격하고 제노바를 포위했다. 산악에 능한 그의 병사들은 높은 절벽에서도 방어에 문제가 없었다. 결국 에스파냐의 중대한 보급선이 가로막혔다. 발텔리나가 차단되고 영국 선박들이 영국 해협을 지키자 에스파냐 왕이 플랑드르와 오스트리아로 금을 보내던 육로와 해로가 모두 막혀버렸다. 독일 바깥에 원인이 있던 분쟁은 독일 바깥에서 끝나는 듯했다. 제국의 권위와 왕조의 권위를 결합하려 했던 페르디난트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간 듯했다.
5장 발트 해를 향해: 1625~28년독일은 아직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으나 전쟁의 확산을 어느 정도 통제하지 않으면 얼마 버티지 못할 지경이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이 패배하고, 프랑스가 에스파냐와 화친을 맺자 적대가 해소된 듯했다. 겨울에는 발렌슈타인(Albrecht Wenzel Eusebius von Wallenstein, 1583~1634)의 군대가 일부 해산되고, 장군이 해임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독일의 모든 군주들 가운데 아직까지 제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메클렌부르크의 두 공작과 마그데부르크의 신교 행정관, 추방된 프리드리히뿐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중립을 취하거나 황제 편에 가담했다. 점령된 지역은 거의 예외 없이 중립이었다.
1627년, 여름이 되기 전에 발렌슈타인의 군대는 브란덴부르크로 진격했다. 그의 가장 유능한 부관이 지휘를 맡았는데, 그는 브란덴부르크 태생의 신교도인 한스 게오르크 폰 아르님(Hans Georg von Arnim, 1583~1641)이었다. 브란덴부르크가 점령되자 발렌슈타인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신교 군대를 손쉽게 제압했다. 발렌슈타인이 북부에서 정복 활동을 벌이는 동안 페르디난트는 남부에서 굳히기 작업에 들어갔다. 같은 해에 보헤미아의 새 헌법이 반포되었는데, 이 법은 이후 200년간 통용되었다. 보헤미아는 여전히 형식상으로는 자치였으나, 왕위가 세습되고 왕이 관리를 임명했다. 의회는 모든 집행력을 잃었다. 여름에는 여전히 신교를 믿는 사람들을 즉각 개종하거나 망명해야 한다는 칙령이 반포되었다. 또한 페르디난트는 발트 해까지 장악하기 위해 또 다시 반란자의 재산을 빼앗아 동맹자에게 주기로 마음먹었다. 1628년 3월, 그는 메클렌부르크 공국과 그에 딸린 공작 직위와 특권을 발렌슈타인에게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