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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사일 40년의 신화

박준복 지음 | 일조각


한국 미사일 40년의 신화

박준복 지음

일조각 / 2011년 4월 / 223쪽 / 18,000원



1. 미사일 개발의 꿈을 쏘아 올리다




1968년 1월 21일 31명의 북한 무장공비가 청와대 습격을 시도한 사건이 벌어졌다. 1970년대 초반에는 6.25전쟁 이후 전쟁 재발을 방지하는 안전판 역할을 해온 주한미군의 규모 축소 발표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월 6일 자주국방의 초석이 되라는 설립 이념을 부여하여 국방과학연구소를 출범시켰다. 초창기 국방과학연구소는 도전적이고 유능한 젊은 과학자들을 채용했다. 간부들은 사관학교 교수 등 군 출신 과학자들이었고, 실무 연구원들은 학교를 갓 졸업하여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이었다. 이러한 간부 체제와 인력 체계는 약 10년간 계속 팽창하면서 197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자유분방하고 도전적인 민간인 과학자들과 군과 무기를 이해하는 현역 과학자들은 기적의 기초를 닦기에 충분한 조건이었으며, 국가 지도자의 아낌없는 지원은 기적을 이루는 데 나머지 필요조건이 되었다. 1970년대에는 국제적으로 방위산업에 대한 수출통제가 느슨하여 핵심 부품과 장비를 외국에서 도입할 수 있는 운도 따라주었다.

나는 1974년 초반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홍릉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에 입소했다. 당시 내가 일했던 항공사업부는 미사일 개발 프로젝트인 XGM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XGM사업이 백곰사업으로, 다시 현무사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우리 사업부 연구원들의 중요한 일과는 도서실에서 미국의 전문 학술지를 열람하며 공부하는 것과 홍릉 연구소 옆에 있던 '과학기술정보센터'에 서 기술 자료를 찾아 복사한 후 분석, 정리하고 발표하는 일이었다. 편하고 놀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도약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미국 방산업체와 미국 육군이 발간한 책자를 중심으로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면서 더듬더듬 유도탄을 설계해 나갔다.

당시 목표는 사거리 200km 수준의 국산 유도탄을 5년 내에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도탄의 구성품인 추진기관의 지상연소시험을 하기 위한 장소가 없었다. 1974년 우리는 군의 임시 사격장인 경기도 포천의 다락대 한쪽 언덕에 임시 연소시험대를 만들었다. 여기서 호크 유도탄의 추진기관을 고정시키고 연소 시험을 하다가, 불이 붙은 추진기관이 제멋대로 날뛰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여 대피한 적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여 유도탄 개발과 제작을 위한 기술과 장비, 시설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였지만 유도탄 체계, 기체 및 공력, 유도조종, 항법 등 분야별로 백여 명의 연구원들이 설계 개발에 참여하여, 필요한 부품과 시설의 획득 방안을 찾아 고민했다. 우리는 선진국 업체들과 접촉하여 필요한 기술 도입을 시도했지만 미국정부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회사들에 압력을 넣어 한국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팔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이렇게 부족한 부분은 모험정신으로 가득 찬 연구원들이 백지 상태에서 개발하여 메워나갔다.

항공사업부는 본격적으로 유도탄 개발을 하기 위해 더 많은 인력과 장비, 시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덕 연구단지 옆에 대전기계창을 건설하는 한편, 비행시험평가를 하기 위한 시험장을 충남 안흥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시험장에는 유도탄 시험임무통제센터를 설계, 건설해야 했는데 세계 시장을 헤매던 연구소의 간부들이 미국 앨라배마 주에 있는 한 회사와 계약을 맺어 해결할 수 있었다. 충남 태안에서 안흥 항구까지 약 15km의 도로포장을 35년 전에 한 것도 오로지 안흥 시험장을 위해서였다. 이렇게 각 분야에서 유도탄 개발이 빠른 속도로 차질 없이 진행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구소에 대한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은 외부인들에게 편애로 여겨졌고, 1980년대 들어 연구소가 어려움을 겪는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1977~1978년은 새로운 인력을 많이 채용하여 조직이 팽창되어 가면서 모든 연구원들이 밤새워 일하던 시기였다. 목표는 1978년 9월 26일 안흥 시험장에서 대통령을 모시고 국산 지대지 유도탄인 백곰의 비행시험을 하는 것이었다. 1974년 개발이 시작된 XGM 후속사업을 백곰이라고 했으며, 영문명은 NHK-1이었다. 유도탄의 공개시사회도 계획하면서, 중거리 로켓, 다연장 로켓, 대전차 로켓도 개발과함께 시험비행을 하기로 했다. 내가 속한 부서는 백곰 유도탄의 축소형 비행체를 제작하여 경기도 포천 다락대에서 사격하며 초기의 비행 안정성을 점검하였다. 당시 시각에 쫓기며 다락대에서 밤낮없이 연말을 보냈다. 한겨울 추위 속에 고생하며 실시한 새끼 백곰의 비행시험은 성공적이었다. 그 결과 다음 해에 실물 크기의 비행시험을 안심하고 진행시킬 수 있었다.

연구원 모두가 백곰 개발에 매진한 결과 1997년 각 분야별로 단계별 시험을 마쳤다. 같은 해 안흥 시험장도 가동하기 시작하여 1978년 초에는 조립한 백곰의 시험가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처음이어서 각 분야에서 어설픈 점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음 몇 차례 비행시험은 실패의 연속이었고, 1978년 5월 비행시험에서는 앞으로 날아가야 할 유도탄이 발사장 뒤쪽에 떨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렇게 매달 시험비행을 하면서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수립하면서 많은 연구원들이 밤을 새워가며 토의했다. 백곰 유도탄은 1단 부스터에 4개의 추진기관이 한 다발로 묶인 클러스터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추진기관 중 하나라도 이상이 있으면 문제가 발생하게 되어 있었다. 이를 방지하려면 1단 부스터를 구성하는 4개의 추진기관이 모두 신뢰성 있게, 동시에 점화되는 것이 중요했다.

1978년 9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충남 안흥 시험장에서 실시한 국산 로켓 및 유도탄 공개 시사회는 대한민국 역사상 자주국방의 초석을 마련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날의 시험비행 성공으로 한국은 세계 7번째 유도탄 개발국이 되었고, 추후 국방과학기술이 발전해 나갈 토대를 구축했다. 2011년 11월 대한민국은 G20회의 의장국으로 선출되었는데, 미사일 개발에서는 이미 1978년 G7이라는 기적을 일궈낸 것이다. 당시 안흥시험장에 모여 있던 손님들과 연구원들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던 국산 로켓 및 유도탄 개발을 황무지 상태에서 약 5년 만에 달성해 냈기 때문이다. 한국의 성공적인 유도탄 공개 시사회를 접하고 매우 놀라 대책을 서두른 것은 북한이었다. 설마 했던 미국 또한 한국이 성공한 것을 보고 축하보다는 긴장하며 대책을 세우게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저격으로 서거했다. 이로 인해 국방과학연구소는 강력한 후원자를 잃었다. 이후 백곰 유도탄 사업은 1980년 유도탄 개발을 주도했던 연구소의 핵심 간부들이 물러나고, 1982년 대규모 해고 사태와 함께 유도탄 개발조직이 없어지며 중단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 같던 유도탄 개발 사업은 엉뚱하게도 1983년 10월 발생한 미얀마 아웅산 테러 사건을 계기로 부활했다. 1984년 현무 유도탄 개발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현무 유도탄 체계는 백곰 체계와는 내용 면에서 달랐다. 백곰이 고정 발사대인 반면, 현무는 이동형 발사대이며, 관성유도방식의 전천후 유도탄 체계였다. 현무의 1단 부스터는 4개의 추진기관을 묶인 백곰과 달리 하나의 대형 추진기관으로 개량되었다. 1970년대 항공사업부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국방과학연구소 현무체계부는 방산업체를 직접 관리하면서 현무 유도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7년 현무 유도탄의 개발에 성공하면서 현무 미사일 부대를 창설했다. 이후 '하늘을 나는 거북', 현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유도무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2. 한국, 로켓을 개발하다



1980년대 초 유도탄 개발 조직이 없어진 상황에서 나는 다연장로켓 구룡 체계 개발에 주력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세계 최초로 다연장로켓 무기 체계를 개발한 나라이다. 조선시대 신기전이 바로 그것이다. 다연장로켓은 0.5초 내지 수초 안에 한 발씩 발사되어, 기습적으로 대량 화력을 퍼부어 대규모의 병력과 물자를 파괴하는 무기체계이다. 다연장로켓은 참고할 만한 미국제 로켓이 없는, 주로 공산권에서 유행하는 로켓 체계였다. 가장 대표적인 다연장로켓은 소련이 개발하여 전 공산권에 수출한 구경 122mm BM-21이다.

우리는 BM-21을 참조하여 130mm 다연장 로켓 개발에 나섰다. 당시 유행했던 로켓 날개의 형상 패턴은 WAF라고 하는 '굴곡형의 앞부분이 후퇴한' 형상이었고, 2000년인 지금도 그러하다. 그래서 한국형 다연장 로켓 날개의 처음 형상도 WAF이었다. 하지만 로켓 시제품을 비행 시험하고 분석해보니 많이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날개를 균일하게 제작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면밀한 검토와 시뮬레이션, 풍동 실험 확인을 거쳐 과감하게 직사각형의 평판형 로켓 날개로 설계를 바꾸었다. 이것은 WAF형 날개보다 제작이 쉬우면서도 매우 큰 성능 개선 효과를 가져왔다.

1980년 나의 팀은 안흥 시험장에서 다연장로켓 수백 발을 비행 시험하면서 앞으로 육지에서 적을 정확하게 타격할 수 있는 사표를 개발하고, 군인들이 무기 체계를 운용하고 사격할 때 적용할 야전 교범과 기술 교범 등의 초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대량생산할 수 있도록 품질관리에 적용할 국방규격 등 기술자료 묶음을 만들었다. 연구원들에게 이러한 자료 개발은 첫 경험이었다. 우리는 신기술을 적용하는데 고무된 방산업체 직원들, 품질관리를 담당하는 국방품질관리소와 팀워크를 이루어 우수한 품질의 국산 로켓을 생산할 수 있었다.

전투 경험이 없는 연구원들이 설계 개발한 무기와 나름대로 작성한 교범 등을 획득하기 전에 야전에서 운용시험평가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운용 적합성과 수명 주기 등이 검증되어야 군에서 획득 여부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1981년 3월 우리는 발사대 3대와 수백 발의 다연장로켓을 가지고 최전방인 경기도 대광리 사격장으로 갔다. 지금까지는 안전이나 정확도에 크게 부담을 갖지 않고 만날 안흥 시험장에서 바다를 향해서만 사격했는데, 육지에서도 로켓이 안전하고 정확하게 표적에 도달하여 폭발할 것인지 걱정되었다. 과거 백곰을 개발할 때 시험체가 뒤로 날아가 혼비백산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격시험평가로 육상 사격을 하고 나서 탄착지의 관측자에게서 '봤다' 하는 무전을 받았을 때, 그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짜릿했다. '봤다'는 말은 명중하여 폭발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처음 개발한 사표가 계산해 주는 대로 사격하기만 하면 다연장로켓이 탄착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지난 몇 년 동안 애쓴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1982년 육군과 국방과학연구소는 130mm 다연장로켓 개량형 개발에 착수하였다. 처음에는 구룡 기본형 로켓처럼 프랑스 기술에 기반을 둔 추진체를 사용했으나, 곧 이어 장기 저장 성능이 우수한 추진체를 자체 개발하여 사용하였다. 연소관에도 최신 장비를 도입하고 신소재를 개발하여 기본형보다 훨씬 더 정밀하게 제작했다. 발사대 등의 장비는 자동화되었고 발사점화장치도 소형화했다.

로켓에서는 스핀(회전)의 컨트롤이 중요하다. 로켓에서 의도적으로 스핀을 시키는 주목적은 탄착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이다. 이때 스핀이 과도하거나 적으면 효과가 감소하므로 최적의 스핀 설계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통상 로켓은 시계 방향(+)으로만 스핀이 일어나도록 설계한다. 다연장로켓 기본형도 시계 방향으로 최적의 회전수만큼 돌다가 곧 영으로 감쇄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개량형에서는 비행 말기에 자탄을 분산시킬 계획이었기 때문에 비행 말기에도 초당 약 10회전의 스핀이 필요하여, 그 방안으로 날개에 1도의 경사각을 주었다. 그런데 1도 경사각을 주면 비행초기에 최대 스핀이 초당 30회전 이상으로 올라가는 문제점이 있었다. 나는 초당 30회전이라는 회전율이 꺼림칙하여 고민 끝에 색다른 방식으로 설계하기로 했다.

내 아이디어는 로켓의 스핀 방향을 비행 중간에 시계 방향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한 방향으로만 회전할 때 나타나는 과도한 최대 스핀 크기를 방지하면서 비행 말기에 회전수를 일정하게 유지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설계를 바꾸어 날개의 1도 경사각 방향을 1안 설계와 반대 방향으로 주기로 했다. 나는 호기심으로 가득 차 날개의 경사각 1도의 방향이 반대로 된 두 종류의 로켓을 준비하여 안흥 시험장으로 갔다. 비행 시험 결과 비행 중간에 스핀 방향을 바꾸는 로켓이 훨씬 우수한 성능을 나타냈다. 세계적인 로켓 정확도 경연대회가 있다면 출전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1986년 우리는 개량형 로켓의 시험평가를 하기 위해 전방으로 갔다. 최대사거리 사격을 할 수 있는 지역을 찾아야 했는데 국내에서는 마땅한 군 사격장이 없었다. 고민 끝에 우리는 시험 사격 장소로 포천 지역 하천변의 백로주 유원지로 정하고, 탄착지는 최전방 벌판으로 정했다. 우리는 백로주 유원지를 지나가는 시외버스를 통제하며 0.5초 간격으로 36발 일제 연속사격을 했다. 과연 위력적이고 원거리에 표시된 표적 안에 정확히 탄착했다. 성공적으로 실험을 마치고 발사장을 정리하는데 농부 몇 사람이 달려와 항의를 했다. 사격 폭음에 놀라 병아리가 죽고, 돼지가 사산을 했다는 것이다.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시험에 동참했던 로켓 생산 조립업체 대표가 모두 물어주기로 약속하고 농부들을 돌려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쏘아서는 안 될 곳에서 시험사격을 했던 것이다.

국산 다연장로켓 생산은 2000년까지 계속되었지만 연구개발 과제는 2단계까지 마친 후 중단되고 말았다. 개발 중단 배경은 보수적인 군인들의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당시 다연장로켓 단가는 약 200만원이었다. 이는 국제시세보다 낮았지만 화포 탄약에 비교하면 매우 비쌌다. 그리고 한국 포병에게 로켓은 낯선 무기 체계였기 때문에 군인들은 105mm나 155mm 화포를 선호했다. 세계적 발전 추세에 반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바꾸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2단계까지 개발한 것만 해도 한국적 상황에서 기대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한국, 초강대국 미국과 불가분의 관계



미국은 1990년 ATACMS 기본형 유도탄 개발을 완료하고, 1991년 걸프전에서 이라크군을 상대로 운용평가를 했다. ATACMS는 대구경 다연장로켓 체계와 발사대, 사격통제장치를 쓰는 전술유도탄이다. 유도탄을 개발한 시기가 우연이지만 걸프전의 주요 작전 시기와 일치했고, 미국 육군은 아예 이라크 군을 상대로 실전위력 평가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많은 돈과 시간이 소요되는 시험평가를 실제 전쟁 상황에서 짧은 기간에 값싸고 생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유혹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시험평가 된 ATACMS 유도탄을 홍보할 때 미국 측은 언제나 실전 입증을 강조했다. 불행히도 2010년 한국에서도 실전 입증 사례가 발생했다. 북한은 우리 함정을 격침시킨 어뢰를 홍보하면서 그 생생한 실전입증 결과를 제시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국 육군은 1980년대 말 미국이 개발 중이던 ATACMS 유도탄과 유사한 성능의 전술 지대지 유도무기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었다.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현무를 생산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2단으로 된 대형 유도탄인 반면, 육군은 전술용 1단 소형 유도탄 체계를 요구한 것이다. 당시 나에게 1991년은 연구소를 당장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어려운 해였다. 국방부에서 전술 지대지 유도무기 체계 개발 사업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했기 때문이다. 국방부가 연구개발을 중단시킨 이유는 전술 지대지 무기체계를 해외에서 구매하기로 계획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주한미군에 최신 유도탄 ATACMS를 배치하면서 한국 측에도 도입을 권유한 것이다.

1996년 국방부에서 지시 공문이 내려왔다. 미국 MLRS/ATACMS 체계의 도입에 필요한 기술지원을 하라는 것이다. 국내 개발을 추진하던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해외 도입을 지원하라고 하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국방부가 군의 해외 출장 팀에 나 같은 연구원을 포함시킨 것은 전과 다른 큰 발전이었다. 당시 무기 체계 도입을 준비하는 한국 팀에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이 포함된 것에 미국 측은 매우 신경을 쓰고 있었다. 출장 팀은 MLRS/ATACMS 체계를 개발한 미국의 연구소와 생산업체를 방문했는데 그 연구소는 내가 1975년 교환연구원으로 있었던 미국의 유도탄 사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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