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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에 대한 두려움

아르준 아파두라이 지음 | 에코리브르


소수에 대한 두려움

아르준 아파두라이 지음

에코리브로 / 2011년 5월 / 206쪽 / 13,000원



01. 종족 학살에서 이념 학살로




이 글에서는 최근 문화적 차이로 인해 발생한 집단적 혹은 광범위한 차원의 무력 충돌을 다룬다. 내가 여기서 논리 전개 방식을 짧게 요약할 각각의 장들은 1998년에서 2004년 사이에 완성되었다. 나는 폭력이 지닌 두 가지 기본적인 양상을 접하면서 이 글들의 주요 논리를 발전시켰다. 우선 첫 번째 양상은 1990년대 초 구 유고슬라비아와 코카서스, 르완다, 인도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이는 1989년 이후 이 세계가 저절로 진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과 전 지구화가 국가 및 국민적 정체성이라는 성스러운 이데올로기의 핵심 앞에서 심각한 병리학적 요소를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양상은 공식적으로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항목으로 분류되는데,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버지니아의 펜타곤이 직면했던 종말론적 공격이 그 특징이다. 이 일련의 사건 때문에 지난 1990년대는 극단적인 폭력의 시대로 규정된다. 이 시기에는 여러 나라에서 내전과 도심의 무력 충돌이 일상적 삶의 한 부분이 되다시피 했고, 그 횟수 또한 꾸준히 증가했다.

1940년대와 그 이후 얼마 동안 학자들은 집단 폭력의 극단적 형태, 특히 다양한 방식으로 인체와 인간의 존엄성을 조직적으로 훼손하는 대량 학살은 전체주의, 그중에서도 파시즘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견해에 도달했고,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과 스탈린 치하의 소비에트연방 그리고 이보다 작은 규모의 전체주의 정권을 전형적인 예로 들었다. 유감스럽게도 1990년대 들어서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사회뿐 아니라 혼합적 체제를 갖춘 국가조차도 다수에 의한 강요와 문화적 요인에 의한 집단 폭력 행위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음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하필 1990년대에, 이를테면 '전 지구화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여러 사회와 국가들이 집단 폭력의 시기로 접어들었는지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한 '전 지구화의 절정기'는 냉전 종식 이후 많은 국가와 사회 그리고 공공 분야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유토피아적 가능성과 프로젝트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능성이란 시장 개방, 자유 무역, 민주적 제도 확산 그리고 인터넷이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는 광범위한 가능성을 한데 묶어놓은 개념으로서 그 목표는 한 사회 내부에서 혹은 다른 사회들 간의 불평등을 줄이고, 나아가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국가에서 자유와 투명성, 책임 의식이 뒷받침되는 정부 정책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전 지구화가 종족 청소 및 대테러 전쟁과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는지 잘 이해하기 위해 나는 서로 얽혀 있는 일련의 이념들을 제시해보려 한다. 우선 근대 국민 국가 이면에는 '민족적 종족 집단'이라는 원론적이고 위험한 이념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의 어떤 국가라도, 비록 그 정부가 대단히 우호적이며 친근하고 또 정부 대표들이 공개적으로 관용과 다문화주의 및 화합의 가치를 그럴싸하게 강조한다 해도 자신들의 국가 주권이 일종의 종족 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민족적 종족 집단이라는 이 독특한 이념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구별하는 인도인, 프랑스인, 영국인 혹은 인도네시아인은 절대로 이곳 혹은 저곳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전쟁과 희생이라는 미사여구와 단일성을 지향하는 강압적인 교육 및 언어 정책 그리고 수많은 지방과 지역의 전통을 억압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한나 아렌트를 비롯한 몇몇 뛰어난 정치 이론가들은 민족적 국민 공동체라는 이념이 근대 자유주의 국가들에게 아킬레스건이 될 것이라고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나는 민족주의 정신이라는 이념이 성스러운 국가의 전체주의적 세계론을 거쳐 결국 종족 순수성이라는 광기와 종족 청소로 곧장 연결된다고 본다.

어떤 사람들은 혈연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두는 실수를 저질렀던 근대 국가들에서만 이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혈연이라는 담론과 민족주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긴밀하게 전 세계적으로 얽혀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온갖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한 종족주의적 경향만으로는 왜 특정 국민 국가가 대규모 집단 폭력이나 내전, 혹은 종족 청소의 무대가 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서 두 번째 개념이 필요하다. 즉, 사회적 삶에서 불확실성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것이다.

불확실성의 새로운 형태는 물론 다양하다. 그중 하나는 "이런 혹은 저런 유형의 사람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해진 구역 내에서 살고 있는가?"를 조사하는 인구센서스에서 바로 드러난다. 이는 거대한 피난민 행렬과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이주 현상을 두고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금 우리 가운데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또 다른 종류의 불확실성은 이러한 엄청난 독자성이라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예를 들어, 인도의 헌법에 따라 '기타 차별받는 계급'의 일원으로 규정된 사람은 어떤 규범적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가?

그 밖에도 어떤 특정한 사람이 지금 그런 것처럼 실제로도 그러한가라는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이와 같은 종류의 불확실성은 결국 누가 공공재 혹은 국가의 혜택에 대한 권리를 갖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견디기 힘든 불안감을 조성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권리를 주장하는 근거는 대체로 그 당사자가 특정한 사회의 일원인지, 아니면 '그들'에게 속하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종류의 불확실성은 대규모 집단을 구성한 인간들이 동요할 때, 큰 단위의 종족 정체성에 새로운 보상이나 리스크가 주어질 때, 혹은 사회적 지식의 기존 네트워크들이 소문이나 리스크가 주어질 때, 혹은 사회적 지식의 기본 네트워크들이 소문이나 테러 또는 사회 운동으로 인해 균열이 생길 때 더욱 더 강해진다. 이런 사회적 불확실성의 형태 중 한 개 혹은 몇 개의 요인이 발생하면, 폭력은 소름끼칠 정도의 확실성을 드러내며 '타자'를 구별해내는, 또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별해내는 잔인한 기계로 동원된다. 확실성과 불확실성 사이의 관계가 매우 불안정해진 것은 어쩌면 우리가 바로 전 지구화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가질지 모르겠다.

02. 충돌하는 문명



미국의 반응

지금도 끝나지 않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이른바 진단적 성격을 띤 전쟁, 혹은 심지어 법적 논란이 된 전쟁이라고까지 일컬어진다. 이 전쟁은 알카에다가 무엇인지, 오사마 빈 라덴이 누구인지, 탈레반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 의문들을 밝히고자 하는 측면이 있다. 적의 정확한 정체를 규명하는 것이 이 전쟁의 최우선 목적이다. 여기에 덧붙여 이 전쟁은 또 다른 의미에서 역시 진단적 성격을 띤다. 말하자면 미국과 영국은 이 전쟁을 통해 누가 자신들의 진정한 동맹국인지를 분명히 하고자 했다.

유럽의 여러 국가와 일본은 미, 영 두 나라에 대해 자신들의 충성을 선언해야 했고, 지금까지 울타리 너머로 구경만 하던 나라들 역시 이 전쟁의 명분과 타당성 여부를 떠나 미국 편에 서야만 했다. 강력한 미국의 전쟁 기계는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을 앞두고 각국의 의사를 묻는 전체 투표를 요청한 셈이고, 여기서 기권은 없었다. 뒤이은 이라크 전쟁 역시 이런 성격을 많이 띠고 있으며, 특히 '대규모 살상 무기'의 사용에 대한 법적 논란이 대두되었다. 미국을 위시한 국가들은 자신의 적이 세계적인 테러 단체로서 이들이 드러나지 않게 다른 익명의 조직들과 연계해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자국 내에서 정권에 동조하지 않는 인사, 반국가적인 활동가 그리고 폭력을 행사하는 소수민들까지도 역시 적의 개념에 한데 뭉뚱그려 넣었다. 미국에 의해 적으로 규정된 자들에게 갑자기 세계 도처에서 자신들도 모르는 동맹 집단이 생겨난 것이다.

세포 체제 대 척추 체제

'세포적' 세계라는 아이디어는 어쩌면 정확해 보인다. 생물학에서 유래한 세포 형태와 척추 형태의 대립 모델이 모든 유추와 마찬가지로 완성되거나 완벽한 것은 아니다. 국민 국가의 근대적 시스템은 척추 구조의 가장 좋은 예다. 대부분의 국가가 남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고유한 역사를 추구한다 해도, 일반적으로 국민 국가 체제는 수많은 규정, 특히 전쟁 같은 규정을 통해 보장되는 하나의 국제 질서가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와 같은 척추적 질서의 상징은 유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꾸준히 증가하는 엄청난 분량의 의정서와 기구, 조약, 협약 등도 척추적 질서를 상징한다. 이 국제적인 합의가 모든 국가로 하여금 상호 관계에서 균형의 원칙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기능을 갖는다.

글로벌 기업의 현재 상황과 이 기업들이 활동하는 세계 시장은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일종의 정신분열증 상태를 보인다.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국민 국가 체제의 척추적 특성에 기대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포적 형태와 탈연계, 그리고 로컬의 자율성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는 실험실 역할을 하고 있다.

척추 체제와 세포 체제간의 상호 보완성과 이들이 차이에서 도출되는 구조적 측면을 통해 우리는 전 지구화 시대에 국민 국가가 직면한 위기를 살펴볼 수 있다. 이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9/11 사태 이후 구체화된 글로벌 테러리즘이 사실은 글로벌 경제, 정치의 형태가 깊고 폭넓게 변화된 하나의 사례에 불과한 것임을 인식하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일반적 변화는 순환위기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전 지구화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한 갖가지 흐름, 예컨대 이미지와 이데올로기, 상품, 인간, 그리고 부와 같은 흐름의 '탈구'로 인해 초래된 위기다.

03. 전 지구화와 폭력



우리는 이제 막 시작된, 특히 강력한 정보 기술과 통신 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새로운 산업혁명을 '전 지구화'라고 일컫는다. 우리는 이 새로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기존의 언어학적 사고를 전환해야 할뿐더러 우리가 전 지구화를 과연 통제할 수 있을지 우리의 정치력을 시험받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 10여 개국 정도에서 '전 지구화'는 경제계의 엘리트와 정치적으로 이들을 지지하는 부류에게는 확실히 긍정적인 슬로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반면 같은 국가라 할지라도 이주자, 유색 인종, 그 밖의 이른바 '북반구 내의 남쪽'이라 일컬어지는 아웃사이더들은 주류에 포섭될 수밖에 없는 위기감과 일자리 부족 그리고 날로 심각해지는 주변부화를 염려하게 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늘 그래왔듯이 아웃사이더들의 염려는 곧 엘리트 집단의 염려가 되었다. 지구상에 있는 그 밖의 국가들은, 말하자면 아직 미개발국이거나 정말로 가난 때문에 고통을 겪는 국가들은 두 가지 두려움을 안고 있다. 첫째는, 가혹한 조건을 내세우는 요구에 포섭되는 것이고, 둘째는, 배제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는 마치 역사 그 자체로부터 배제되는 것과 같다.

전 지구화와 폭력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미국의 경우, 감옥산업 성장이 어쩌면 좀더 인간적인 형식의 일자리와 부의 창출에서 소외된 지역 경제의 역학과 관련성이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왜 토착민과 국가의 지원을 받는 이주자 간에 발생하는 폭력 사태들이 왜?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로 격화되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스리랑카의 경우, 끝없는 내전이 정말로 타밀족의 글로벌적 디아스포라와 어느 정도 상관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우리는 체첸, 카슈미르, 바스크 지방 그리고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전통적 방식의 독립 운동을 떠올리며, 이들의 폭력 행사가 정말로 단지 내부의 원인 때문에 발생한 것인지 묻게 된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어떠한가? 그곳에서 자행되는 가까운 이웃에 대한 폭력이 어쩌면 대중 매체나 전 지구적 차원의 개입과 깊이 연관된 것은 아닐까? 그 때문에 팔레스타인은 영원히 하나의 '기구'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또 우리는 코소보나 이라크의 예를 보며 나토 공습이라는 잔인한 휴머니즘이 결국은 우리 시대에 무장한 신神의 모습으로 행해지는 성경적 복수의 최신판은 아닌지 묻게 된다.

이 모든 지역에서, 또 여기서 빚어지는 갖은 형태의 폭력에서 몇 가지 본질적이고도 글로벌적인 요인을 공통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그것도 아주 조직적으로 여러 사회에서 관찰된다는 점이다. 이들 사회는 내부적으로 여전히 큰 문제를 품고 있으면서 마치 미국처럼 남에게 제일 먼저 돌을 던지려 한다. 소년병을 모집하는 일은 특히 아프리카에서 두드러지는데, 이는 그 밖에도 내전을 겪고 있는 여러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아동 노동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글로벌적 폭력의 양상으로서도 나쁜 일이지만, 시민군으로 혹은 군인 갱단에 속해 전쟁을 강요하는 것은 이들을 어려서부터 폭력으로 유도하는 대단히 끔찍한 일이다.

여기에 대해 잠깐 곰곰이 따져보자. 앞서 나열한 것들이 전 지구화 자체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내가 여기서 제시한 예들은 1970년대 이후 세계 경제에 나타난 급격한 변화 그리고 원주민들의 권리, 국가 주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과 특별한 방식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자유, 시장, 민주주의, 권리 등의 경쟁적인 보편적 원리 사이의 싸움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과거에는 결코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앞서 제시한 사례들은 지난 20년간 뚜렷하게 드러난 거시적 차원의 폭력에 해당한다.

지난 20년 동안 국가 간에 발생한 폭력과 비교해볼 때, 국가 내부의 폭력이 현저히 증가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국가의 지도와 전쟁을 나타내는 지도는 과거의 실제 세계 지도와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다. 더군다나 무기, 마약, 용병, 마피아 조직을 비롯한 다양한 폭력 도구들의 전 지구적 순환까지 함께 고려하면, 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라 해도 그 의미를 지역 차원으로 제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세계 곳곳에서 소수에 대한 인종 학살의 충동이 생겨난 것일까? 소수자들은 국가 혹은 민족주의라는 특수한 조건 아래에서 탄생했다. 종종 소수자들은 오늘날의 국가가 탄생할 때 자행했던 드러내고 싶지 않은 폭력 행위를 다시금 기억하게 하고, 강제 징집이나 혹은 새로운 국가 건설 과정에서 수반된 강제 추방을 떠올리게 한다. 더군다나 소수자들은 국가에 대해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격렬한 싸움을 통해 얻어낸 국가 자원의 한낱 소모자로 간주됨으로써 실패로 끝난 다양한 국가 프로젝트를 떠올리게 한다. 이들은 실패와 강제의 상징이다. 곧 고전적인 의미의 희생양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희생양은 전 지구화 시대에 어떤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을까?

이방인, 병자, 유목민, 종교적 소수자 그리고 이와 유사한 소수 집단은 항상 편견과 제노포비아(이방인 혐오증)의 희생자였다. 육체는, 특히 소수화된 육체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바로 그 추상성을 반영하는 거울이자 동시에 도구가 될 수 있다. 글로벌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이 이들 소수자의 몸뚱이로 옮겨간다. 그러다 너무나 두려운 상황이 발생하면 그 육체들은 소멸해야 할 대상이 된다.

04. 소수에 대한 두려움



약탈적 정체성

어느 한 집단의 사회 구조와 동원 방식이 속성상 자신과 비슷한 다른 사회적 범주의 말살을 요구할 때 그 집단의 정체성은 약탈적 정체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약탈적 정체성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공동체를 말살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경우 다수의 정체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다수가 위협받는다고 여기며 이를 위해 행동에 나설 것을 주장한다. 이때 주로 문제되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만이 국가 정체성에 부합한다고 주장하거나 자신들을 철저히 국가 정체성과 일치시키고자 하는 문화적 다수자의 목소리다. 이런 주장은 때로는 종교의 이름으로 또 때로는 언어적, 인종적 혹은 그 외 다수성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달리 말하면, 다수와 소수의 역할이 역전될 위험에 처할 때 약탈적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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