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와 화폐
자크 르 고프 지음 | 에코리브르
중세와 화폐
자크 르 고프 지음
에코리브르 / 2011년 5월 / 240쪽 / 15,000원
1. 로마 제국의 유산과 기독교화의 유산로마제국은 기독교 교리에 제한되긴 하지만 중요한 화폐 사용법을 물려주었다. 기독교 사회가 되고 야만스러워진 서구 사회는 동방세계에 계속해서 나무, 철, 노예 같은 각종 원자재를 넘겨주었고 그 대가로 금화를 받았다. 동방세계와 대규모 거래를 함으로써 서구 사회에 금이 비잔틴 화폐와 이슬람 화폐 형태로 어느 정도 유통된 것이다. 이러한 화폐들은 서구사회의 통치자들을 부유하게 해 주었다.
중세 초기 새로운 권력층인 대영지 소유자와 교회의 부의 기반은 땅과 농민들이었다. 농민들은 이들에게 농산물을 바쳐야 했으며, 일부 세금은 현금으로 내야 했다. 교회, 특히 수도원들은 현금으로 받은 십일조와 교회 영지 개발로 얻은 화폐를 유통시키지 않고 쌓아두었다. 주화와 거기에 들어있는 귀금속은 금은 세공품으로 변형되었는데, 교회나 수도원의 수장고에 들어있는 세공품은 일종의 통화 보유고가 되었다. 화폐가 필요한 경우 이런 물품들을 주조하여 화폐를 만들었다. 이런 관행이 이후 교회를 넘어 대영주와 심지어 왕에게 확대됨으로써 주화가 필요한 중세인들은 곤란을 겪었다. 부의 수단이자 권력의 수단이었던 화폐의 부족은 중세 초기의 특징이자 약점이다.
2. 샤를마뉴 대제 시대에서 봉건 시대까지다양한 화폐와 금과 은의 가치 비율이 변동함으로써 중세 초기에 화폐 사용이 상당히 복잡해졌다. 샤를마뉴 대제는 이러한 사태에 종지부를 찍었고 제국의 통화 환경을 정돈했다. 그는 755년부터 개혁을 시작했는데 개혁의 3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권력이 화폐를 주조한다. 둘째, 실물화폐가 된 드니에(로마제국 치하에서 주조된 은화)와 수(sou)간에 새로운 등가 체제를 만든다. 셋째, 금화주조를 중단한다. 금과 은 양본위제에 이어 은본위제 시대가 열린 것이다. 샤를마뉴 대제의 개혁조치로 중세 초기의 여러 화폐는 사라졌지만 황제가 화폐 주조를 독점한 기간은 짧았다. 9세기부터 백작들이 황제의 독점권을 찬탈했으며 백작이 활개를 친 중세에는 여기저기서 거침없이 화폐를 주조했다. 화폐 주조자들이 분산된 상황은 봉건제의 맹렬한 기세와 연관돼 있었다.
10세기 초 이전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화폐는 라인강 서쪽과 이탈리아에서만 발행되었다. 그러다가 10세기 들어 덴마크, 보헤미아, 러시아에서 화폐가 주조되었고, 10세기 말에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11세기에는 헝가리에서 화폐가 나타났다. 하지만 1020년 경 스웨덴, 노르웨이, 러시아, 폴란드 등에서 화폐 주조가 중단되었다. 이전에는 주로 정치적인 동기에 따라,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방편으로 화폐를 주조했다. 그런데 지방에서 생산되는 귀금속이 없고 무역이 성행하지 않아 화폐 주조가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작센, 바이에른, 보헤미아, 헝가리에서는 화폐 주조가 끊임없이 확대되었다. 11세기 말에 점점 더 빨리 화폐를 사용하게 한 사건인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기나긴 여정을 예감하고 어떤 전리품을 챙길지도 알 수 없었던 십자군 병사들은 무게가 적게 나가면서도 가치가 높은 현금을 찾아내는 데 전념했고, 가능하면 드니에를 손에 넣으려 했다.
3. 12~13세기의 전환기에 비상하는 주화와 화폐중세 사회의 특기할 사항은 화폐와 관련하여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우선 상업의 발전을 들 수 있다. 상업은 여러 차례의 십자군 전쟁의 영향으로, 소규모 지역 시장을 넘어 대규모 정기 시장의 개설과 국제적인 활동으로 발전했다. 12~13세기 들어 상업 발전의 가장 중요한 사례가 샹파뉴 지방에서 여러 차례 선 정기 시장이다. 이런 장이 들어선 샹파뉴 지방 백작들은 거래의 적법성과 공정성을 감독하고 상업 및 금융거래를 보증해주었다. 또한 장을 담당하는 특별 관리를 임명했다. 1284년 이후 샹파뉴를 다스린 프랑스 왕들은 그 자리에 왕실 관리를 임명했다. 금융거래를 감독하고, 환전의 공정성을 확보함으로써 청산결제소(clearing house) 역할을 부여했다. 그러한 장은 상인 계층의 부를 축적하는 원천이 되긴 했지만 화폐를 다루는 데 상당히 중요한 추동력을 제공했다.
통화 확대의 또 다른 원인은 도시의 비약적인 성장이다. 원자재 구매와 물품 판매를 촉진하는 수공업이 발전하고, 임금 노동자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더 커짐으로써 도시에서 화폐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도시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됨으로써 사회계급이 분화되어 부유한 부르주아와 가난한 시민으로 나뉘었다. 십자군 원정에 자금을 댄 영주의 중요성은 약화된 반면 부르주아는 더 부유해졌다. 도시가 자치권을 획득하면서 경제발전과 화폐의 확산을 가로막던 제후에게 바치는 각종 부과조의 부담이 사라졌다. 화폐는 도시에서 창설되는 길드나 상인조합 같은 조합에서 접착제 역할을 했다. 이렇게 해서 두 지역의 도시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하나는 유럽 북동부, 플랑드르에서 발트 해 연안에 이르는 지역이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 북부 지역이었다.
도시의 비약적인 성장에 기인하긴 했지만 화폐는 도시의 틀을 벗어나서 사용되었다. 직물업과 나사 제조업의 발달로 기독교 외부 세계와 상당한 규모의 구매, 판매, 교류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이들 산업 분야에서 번영을 구가했던 상인들 사이에서 화폐 유통이 증가했다. 화폐 수요가 늘어난 상황에서 광산이 개발되고 높은 가치의 은화, 심지어 비잔틴 금화와 이슬람 금화가 기독교 사회로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귀금속 자원이 부족했다. 그래서 12세기 화폐 경제의 진보는, 역사학자가 이 시대에 화폐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는 만큼 그 실상을 확인하는 데 제약이 따른다.
4. 13세기, 찬란한 화폐의 시대 12세기에 화폐는 활발히 사용되다가 13세기에 정점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징후는 고리대금을 둘러싼 토론이다. 교회는 고리대금업자에 대해 반감을 강화하는 태도와 어느 정도 면죄부를 주는 태도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했다. 13세기 위대한 스콜라 학자 가운데 한 명인 알베르투스는 설교를 통해 상인과 부자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지상에 반영된 천국은 수도원 경내가 아니라 도시의 대 광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성찰 속에서 도시와 화폐의 눈부신 발전을 통합한 것이다.
통화량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재정은 어려웠다. 수공업과 상업 발전으로 인한 부의 증대는 주로 개인이나 가족 차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도시는 공동체와 관련된 온갖 지출에 필요한 돈을 거두기 위해 세무 기구를 갖추어야 했다. 이런 지출에는 요새, 풍차, 우물, 운하를 짓는 비용과 시청 직원들의 임금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13세기 도시에서 가장 많은 돈을 흡수한 사업은 대규모 고딕 성당의 건설이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은 교회 자금으로 건립되었고, 아미앵에서의 성당 건설은 부르주아들이 낸 재정 분담금으로 실행되었다. 이 밖에도 툴루즈, 리옹, 스트라스부르 같은 지역에서 장인과 상인 그리고 성직자 계급의 호의와 재원을 바탕으로 성당이 건립되었다.
상당한 규모의 새로운 투자 및 운영비용을 대기 위해 도시는 권력을 가진 왕이나 영주에게 세금 징수를 허가받았다. 하지만 세금으로는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시는 신용 대출을 일으켰고 빚을 지게 되었다. 이러한 지출과 세금 문제에 직면해 도시는 상인들을 본 떠 도시 회계를 발전시켰다. 플랑드르 백작령이나 프랑스 왕국 같이 중앙집권화된 권력이 커지면서 도시재정은 점점 더 많은 통제를 받았다. 가장 놀라운 사례는 프랑스 왕 필리프가 1279년에 제정한 칙령이다. 그는 모든 플랑드르 도시의 보좌 판사에게 해마다 백작이나 그의 대리인, 민중과 부르주아의 대표자들 앞에서 재무관리 상황을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화폐는 중세 도시에서 점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도시 시장에서 필요한 화폐를 제공하던 부르주아는 자신의 안락과 위신을 위해 사람들을 고용해 부를 늘리고 싶어 했다. 도시의 주인인 부르주아 계층은 상인과 금융가였으며, 그들은 수와 계산법이 발전한 13세기에 제대로 회계하는 법을 배웠다. 또한 화폐 유통으로 이익을 취하고 화폐 유통을 고무하면서 확실히 부를 늘리는 법을 배웠다.
5. 상업혁명이 일어난 13세기의 교역, 은, 화폐1228년 베네치아 인들은 대운하에 독일 상인들을 맞아들이는 독일인 상관을 지었다. 상관을 건립한 덕에 많은 독일인들이 들어왔으며, 그들은 당대에 가장 많이 생산한 독일 광산의 주화를 가져왔다. 화폐가 독일에서 이탈리아로만 수출된 것은 아니었다. 네덜란드 남부와 샹파뉴에도 도달했고 거기서 프랑스로 퍼져나갔다. 화폐는 한자동맹 상인들에 의해 때로는 발트 해를 통과해 동쪽으로, 때로는 서쪽으로, 특히 잉글랜드 쪽으로 흘러갔다.
유럽과 동방세계의 교역에서도 화폐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3세기 동방세계로 수출된 화폐는 영국의 스털링, 프랑스의 드니에, 베네치아의 그로소였다. 서구의 화폐는 먼 거리를 오가며 동방세계의 각종 물품을 교역하는 데 쓰였다. 13세기 무역상들은 중국에 도달해 비단을, 인도 동부에 이르러 향신료와 보석을, 그리고 페르시아 만에 도달해 진주를 거래했다. 이 시기에는 종교가 화폐 사용을 촉진하기도 했다. 교황청은 교회와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돈을 거둬들였다. 교황 요한 22세의 재임 시기에 교황청 소득은 피렌체 금화로 연간 22만 8천 플로린 정도였다. 아비뇽에 교황궁을 건설했을 정도로 자금 규모는 상당했지만, 이탈리아에서 수차례 어려운 전쟁에 가담했기 때문에 수입의 상당 부분이 빠져나갔다. 13세기 종교와 관련된 또 다른 지출 항목은 몇 차례의 십자군 원정에 댄 자금이었다.
전체 기독교 사회의 무역에 점점 더 많은 화폐가 필요했음을 보여주는 신호는 순도 높은 은화인 '그로소'의 등장이었다. 그로소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등장했는데 국제 무역에서 해당 지역이 담당한 역할로 보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최초의 그로소는 1194~1201년 베네치아에서 주조되었으며, 십자군 병사들이 베네치아에 넘겨준 4만 마르의 은이 그로소 화로 주조되었다. 그로소가 많이 이용되기는 했지만 13세기 화폐의 진화 과정에서 가장 눈길을 끈 사건은 금화가 다시 주조된 것이다. 유럽의 첫 번째 금화는 1231년 시칠리아에서 주조한 아우제우스 금화였다. 하지만 이 화폐는 아프리카 산 금, 이슬람 세력과 인접한 비잔틴 제국 변방의 금화와 결부되어 있었다. 진정한 유럽의 첫 번째 금화는 1252년 제노바와 피렌체에서 나타난 '플로렌'인데, 각각 성 세례 요한의 얼굴과 백합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13세기에는 낮은 가치의 화폐 유통도 있었다. 이러한 저품위 보조 화폐는 도시에서 일상생활의 갖가지 필요를 충족시켰다. 13세기말 베네치아에서 가장 빈번하게 주조된 화폐는 콰트리노, 혹은 일반적으로 빵 하나 가격에 해당하는 4데나로짜리 동전이었다. 가치가 낮은 주화는 점점 더 중요해졌는데, 이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상당히 소소한 거래에까지 화폐 사용이 확대되었음을 입증한다.
6. 화폐와 여러 정체의 탄생13세기의 절정에서 화폐의 비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영역으로 사료에서 말하는 정체(正體)의 정립을 들 수 있다. 13~14세기의 정체는 봉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다. 이는 단지 프랑스 혁명의 결과일 따름이다. 그렇지만 군주정의 권력, 대표기구의 등장, 법과 행정의 발달은 그러한 정체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체는 특히 화폐가 13세기에 특별히 중요성을 띤 분야, 바로 세제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제후와 왕은 자신의 영지에서 소득을 얻었고, 화폐 주조권으로 이익을 취하고, 특별세를 징수했다. 이 시기에 가장 앞선 체제이자 화폐를 제일 많이 조달받은 것은 교황청이었다. 교황청은 토지에서 그리고 교황의 직접 지배를 받는 도시에서 나오는 소득을 거두었다. 교황청은 기독교 사회 전역에서 특별한 십일조를 받기도 하였다. 재무관리를 위해 교황청은 13세기부터 교황청 환전상이라는 칭호가 붙은 은행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화폐가 많이 필요했던 교황청은 교황이 승인한 면죄부에 대한 보상금을 마련했다. 이 보상금은 추후 카톨릭에서 개신교회가 떨어져 나가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13세기 초부터 재무관리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하였으며, 13세기 말 회계법원이 형성되었다. 필리프 5세의 칙령을 통해 확립된 회계법원은 두 가지 주요 기능이 있었다. 하나는 회계 확인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회계 관리 업무를 감독하는 것이었다. 13세기에는 왕의 주권 행사, 재판, 화폐 주조에서 얻는 보수가 중요했다. 13세기 프랑스는 중심 권력이 재정 분야에 행사하는 영향력에 대한 좋은 예를 제공한다. 재정 분야라면 중심 권력의 활동에 자금을 대는 일, 특별한 유형의 화폐 주조자로 처신하는 것, 군주정의 예산을 편성하는 것을 말한다.
7. 대출, 부채, 고리대금13세기 도시에서 화폐를 사용이 늘어나게 되자 유태인들이 중요한 대부업자 노릇을 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도시의 일부 직업(예: 의학 분야)에서 소득원을 찾아내 재산이 없는 도시의 기독교인들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하지만 13~14세기 유럽의 중요 지역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유태인을 대체하여 대부업자로 나서게 되었다. 대출에는 자연스럽게 이자가 따른다. 그런데 교황청은 기독교인인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이자를 징수하는 것을 금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어라.(누가복음 6장 35절)" 교회법은 대출의 대가로 이자를 요구하는 것을 고리대금으로 보았다. 고리대금은 탐욕죄이자 도둑질로 간주되었고, 고리대금업자는 구원 가능성이 전혀 없는 지옥의 사냥감이었다. 1179년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고리대금업자는 기독교 사회의 도시에 있는 이방인들이며 그들에게는 기독교식 장례가 거부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고리대금업자가 지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수단은 고리대금으로 얻은 이익을 반환하는 것이었다. 최선은 죽기 전에 반환하는 것이지만, 유서에 반환을 적어 넣으면 사후에 구원받을 수도 있었다. 이 경우에 그의 책임과 지옥에 떨어질 위험성은 상속인에게 전가된다. 하지만 13~15세기에 걸쳐 교회의 입장에 점진적인 변화가 있었다. 화폐 사용을 비난하던 사고방식이 상인들에 관한 법규가 변화하는 상황과 더불어 바뀐 것이다. 13세기 스콜라 철학자들은 이자 수령을 적법화하는 원칙들을 공들여 완성했다. 이러한 원칙은 대부업자가 겪는 위험을 정당화하여 주었다. 중세 시대 바다는 상인의 생명과 상품의 안전한 운송을 위협하는 위험요인이었기 때문에, 해상에서의 조난 위험에 대한 보상으로 이자 징수 및 고리대금 행위가 정당화되었다. 이자를 정당화하는 또 다른 이유는 대출 기간에 대부금으로 직접 이익을 취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이는 노동에 대한 보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처럼 13세기 후반 교회는 이자가 붙은 대출을 단죄하려는 전통적인 욕망과 일정한 한도 내에서 이를 정당화 하려는 새로운 경향 사이에서 오락가락 했던 견해를 보였다.
8. 새로운 부와 가난 중세 도시 경제가 발달하고 화폐 사용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성격을 띤 부가 나타났다. 새로운 부는 영주와 수도원의 토지 재산이 아니라 부르주아, 상인, 고리대금업자들의 부였다. 실물화폐든 명목화폐든 화폐가치로 표현되는 부였다. 새로운 부에는 경제적인 중요성보다 사회적인 의미가 더 담겨 있다. 새로운 부자들이 기독교 사회의 유력자로 자리 잡으면서, 그들의 활동은 탐욕과 악덕이 아니라 자선과 미덕의 반열로 올라갔다. 새로운 부에는 새로운 가난이 대립되었다. 가난은 원죄의 가난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에서 예수상의 변화와 관련하여 가치가 부여된 가난이었다. 예수는 점점 초기 기독교 교리에서 구현된 다시 살아난 신인(神人)이라는 옛 모습에서 벗어나서, 인간에게 헐벗음으로 상징되는 가난의 모델을 제공했다. 11세기 이후 초기 기독교 사상으로 돌아가자는 모든 움직임을 강력하게 선동한 것은 '벌거벗은 채 벌거벗은 그리스도'를 따르자는 권고였다. 새로운 부가 노동에서 비롯되었듯이 새로운 가난은 어떤 노력과 선택의 결과로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가난을 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