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 치유 식당
하지현 지음 | 푸른숲
심야 치유 식당
하지현 지음
푸른숲 / 2011년 3월 / 307쪽 / 13,000원
48일 동안 잠 못 든 남자당신, 오늘 하루도 너무 열심히 살았다 - 감정 받아들이기
#1 전직 정신과 의사, 하지만 이제는 '노사이드'의 주인장입니다
전직 정신과의사였던 철주가 대학가 뒷골목 지하에 문을 연 20평 남짓의 작은 가게 노사이드는 아는 사람만 아는 가게다. 워낙 외진 곳에 있다 보니, 밤이 되면 단골들만 좀비처럼 나타나서 마시고 싶은 술을 마시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듣다 간다.
"아, 짜증나. 이제 끝났네." "오랜만이에요, 보라 씨. 어디 갔다가 와요?" "안녕하세요? 과 회식을 했는데 이제야 끝났어요. 맛있는 술 없을까요? 딱 한 잔만 하고 가려고요." 철주가 요새 출근 도장을 찍으며 단골이 돼가는 보라의 잔에 얼음을 넣고 한 잔을 더 부어주는 순간 손님 한 명이 쭈뼛거리면서 들어왔다. "저, 어디 앉아야 하지요? 혼자 왔는데요." "편한 대로 앉으세요. 거기 앉아도 되고, 이리 와서 같이 앉으셔도 되고요." 바에 앉아 있던 영수가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반쯤은 의도적으로 그를 바 쪽으로 유도했다.
"아…… 그럴까요." 바의 구석 자리로 향한 남자는 서류 가방을 옆자리에 조심스레 올려놓고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동안 메뉴판을 들여다보던 남자가 말했다. "저, 좀 독한 술 없나요? 한 잔 마시고 들어가서 잠을 좀 자려고 하는데요." 남자는 지친, 그러나 예의 바른 톤으로 말했다. 철주가 잔을 꺼내 보모어를 부어주며 말했다. "잠을 자기 어려운가 봐요. 싱글 몰트 위스키예요."
술잔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남자는 두 손으로 잔을 쥐고 단숨에 들이켰다. 다음 순간 남자는 진저리를 치면서 얼굴을 찌푸리더니 말없이 잔을 철주에게 내밀었다. 철주가 따라주자마자 남자는 다시 한 잔을 마셔버렸다. 옆에 앉아 있는 보라가 물을 한 잔 따라 남자에게 건넸다. "물도 같이 마셔요. 잠을 못 잔 지 얼마나 됐는데 그러세요? 술보다 차라리 수면제를 먹지 그래요." "수면제도 먹어봤죠. 잠깐뿐이에요. 별의별 짓을 다 해봤지만 소용이 없어요. 내 불면증은 영원히 고치기 어려운 걸 내가 알아요. 오늘로 48일째예요. 오늘도 하루 종일 멍한 상태로 있다가 주문을 잘못해서 크게 손해를 봤어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저, 여기 술 한 잔 더 주실래요?"
철주는 남자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말했다. "힘드시죠? 제가 잠을 좀 잘 수 있게 도와드릴까요? 술도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제가 아는 비방이 하나 있는데." "그래요? 뭔데요?" "제가 내는 문제를 오늘 밤에 들어가서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답을 찾아내면 잠을 잘 수 있을 거예요. 단, 인터넷을 사용해서 검색해보시면 안 돼요, 알았죠? 문제는 이겁니다. 도시에 A와 B, 두 곳의 중심지를 잇는 두 개의 간선도로가 있었습니다. 통행량이 너무 많아져서 시에서는 두 곳을 이어주는 세 번째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이 세 번째 도로는 기존 도로보다 거리가 더 짧았어요, 그래서 시에서 생각하기로는 세 도로 모두 속도가 빨라질 것이고, 특히 세 번째 도로는 가장 짧으니까 더 빨라질 것으로 예상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로를 개통하고 난 다음에도 전체 통행량은 변함이 없는데 속도가 빨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상하지요? 왜 그런 것일까요? 자, 이게 문제입니다. 이 문제의 답을 구하게 되면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거예요. 저도 전에 이 문제 덕분에 잘 수 있었어요" "그래요? 어째 잠이 더 안 올 거 같은데……. 하여튼 감사합니다. 계산할게요. 얼마죠?"
남자는 조용히 계산을 하고 가방을 들고 나갔다. 보라는 득달같이 철주에게 달려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런다고 잠이 와요? 잠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문제잖아요.""불면증 치료는 대상자에게 맞춰서 해야 해. 불면증은 뇌의 병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마음의 병이기도 하지. 인지적인 면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정신과 교과서에는 안 나오는 얘기야, 지금부터 말하는 건." 철주가 말한 내용은 이렇다.
오늘 저녁 그의 옷차림을 보면 감색 싱글 수트, 저가 제품은 아니고, 그렇다고 고급 맞춤복도 아닌. 적당한 가격에 눈에 띄지 않는 정장이었다. 그리고 정장 소매 끝단으로 하얀 셔츠가 나와 있었고 커프스 단추도 달려 있었다. 단정한 머리에 젤을 바른 헤어스타일까지 감안할 때 그는 70퍼센트 확률로 금융계나 컨설트업계 직장인이다. 그리고 차고 있는 시계나 많이 닳은 구두 뒷굽으로 보아 부유한 집안 출신은 아니고 결국 현재의 직업을 갖게 되면서 그런 복장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리에 앉을 때에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더운 날인데도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지 않았다. 자신이 흐트러지면 자신의 존재도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어릴 때부터 굳게 믿어온 스타일. 한 마디로 지적 능력은 탁월하나 감정을 느끼고 다스리는 데에는 젬병일 가능성이 많은 성격 유형이다. 이런 사람이 불면의 고리에 낚이면 자신의 지적 능력을 120퍼센트 발휘하여 의지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렇지만 애를 쓰면 쓸수록 불면의 고리는 깊어져서 더욱더 잠은 오지 않는다.
#2 해가 지기 전에 시작하면 걱정이 밀려든다
민수는 오늘도 퀭한 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이로써 49일째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잠을 못 잔 적이 없었다. 완벽한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살아온 인생이었다. 다섯 시 반에 일어나 가볍게 선식을 먹고 회사에 도착하면 일곱 시가 조금 못 된 시간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해서, 저녁식사를 하고 아홉 시 뉴스를 보고 나서 잠자리에 드는 생활이 벌써 5년이 넘는다.
민수의 삶은 단조로우면서도 나름대로 바쁜 편이었지만 그것에 대해 민수는 만족도 불만도 없었다. 두 달 전에 인사이동으로 본부장이 바뀌기 전까지는 최소한 그랬다.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된 본부장은 1년 내에 파격적인 실적을 올려 재계약을 해야 한다는 지상 과제를 안고 회사로 들어왔다. 본부장은 민수에게도 이유 불문하고 영업 실적을 30퍼센트 더 올리는 업무계획서에 사인을 하라고 강요했다. 얼떨결에 사인한 민수는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더 많은 실적을 단기간에 낸다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수는 그날 저녁 집에 오는 길에 갑자기 가습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날 밤 누워서 잠을 자려 해도 잠을 잘 수 없었고 결국 밤을 새우고 말았다. 한번 밤을 새고 나자 계속해서 '오늘 밤에는 잘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밤에 제대로 자지 못하니, 낮에는 일을 해도 멍하고, 급기야 어제는 주식 거래를 하다 실수해서 몇 달 동안 벌었던 돈을 모두 날렸다. 민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들어간 것이 노사이드였다. 집으로 돌아오니 술을 마셔서 알딸딸하기는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게다가 처음 본 가게 사장이 낸 이상한 문제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서도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거다' 하고 답이 떠오르려는 순간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깜빡 잠이 들었던 것일까? 순간 답을 찾지 못한 것보다는 잠을 깼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다시 잠을 자기 어려워 서재로 가서 컴퓨터를 켜고 검색을 해보았다.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브래스 패러독스였다. 그걸 아는 순간 민수는 다시 잠들 수 없다는 공포가 엄습해왔다. 민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다시 그 술집에 들러 보기로 했다. 그나마 깜박 잠이 들 뻔했던 것도 술 덕분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3 브래스 패러독스, 이성으로는 절대 풀 수 없는 문제
"어떻게, 잘 잤어요?" 철주는 민수가 들어오자 자기 처방이 맞았을 것이라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러나 민수는 철주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바에 앉으며 말했다."술 한 잔 주세요. 어제 마신 술보다 더 독한 것은 없나요. 그래도 가깝게까지는 갈 수 있었어요. 덕분에요. 잠이 들락말락하다가 깨어났어요. 너무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답을 찾아봤거든요. 사람들이 모두 가장 짧은 새로 생긴 길로 몰리기 때문에 도리어 전체 속도는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 말이에요." 철주가 민수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말했다. "결국 인터넷을 찾아봤군요. 찾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불면증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잠에 대한 집착과 반추를 막기 위해서 전혀 다른 것에 관심을 쏟게 하는 기법이 효과적일 수 있다. 특히 완전히 모르는 문제나, 모호하거나 추상적인 철학이나 종교적 화두, 답이 나올 듯 말 듯한 문제가 불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의 악순환을 끊을 기회를 준다.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술이 그래도 도움이 되는 것 같네요. 오늘은 더 독한 술을 마셔보려고요." 철주는 진심으로 민수를 도와주고 싶었다. "오늘 저녁에는 제가 직접 손님 집에 갈게요. 환경적인 요인이 잠을 방해하는 경우도 많거든요. 손님이 불면증을 고치고 싶다면 제가 도와드리고 싶은데요."
#4 트랙에서 벗어난다고 삶이 무너지진 않는다
민수의 집은 철주가 예상했던 대로 단출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거실과 방. 침실에 들어가자 철주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여러 개의 시계였다. 벽에 큰 시계가 걸려 있고, 침대 맡에는 자명종이 달린 시계, 그리고 건너편 탁자 위에는 라디오에 시계가 달려 있었다. "먼저 시계부터 치웁시다." "네? 왜요? 시계가 없으면 몇 시인지 알 수 없어요. 늦게 일어나 지각할까 봐요……."
"하지만 시계가 있으면 잠을 잘 수 없어요. 시계가 있으면 자꾸 몇 시인지 확인하고 싶어져요. 한참 자고 난 것 같은데 5분, 10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가 많지요? 시계는 불면의 적이에요. 알람은 내가 맞춰서 방 밖에 세워놓을게요. 민수 씨는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해요. 민수 씨 같은 사람들은 성실해서 사고치지 않고 잘 살 사람들이에요. 대신 트랙에서 벗어나는 것도 힘들죠. 민수 씨는 트랙에서 벗어나면 지금까지 쌓아온 것이 모두 허물어져 버릴 거라 여길 거예요."
철주는 민수에게 옷을 갈아입으라고 말하고 그사이에 방 안을 다니면서 물건들을 조금씩 삐딱하게 놓거나 잘 정돈되어 보이는 것들을 흩뜨려놓았다. 민수가 씻고 나와 철주가 만져놓은 것들을 보고 혼비백산해서 제자리로 놓으려고 하자, 철주는 그것도 불면증 치료를 위해서 꼭 필요하니 오늘 하루만 참으라고 설득했다. "자, 지금 시간이 열 시입니다. 그런데 열한 시까지는 절대 잠이 들어서는 안 돼요. 내가 지키고 있을 거예요.""그게 무슨 소리예요? 열한 시는커녕 열두 시가 돼도 잠이 오지 않는데. 어제도 겨우 잘 만하다가 두시부터 날밤을 샜다고요." "그러면 잘할 수 있겠네요. 어쨌든 열한 시까지는 절대 자서는 안돼요. 자, 나와요."
철주는 의자를 마루에 갖다 놓고 민수를 거기에 앉게 했다. "지금부터 여기 앉아서 저랑 같이 텔레비전을 봅시다. 그리고 열한시가 될 때까지는 절대 잠이 들어서는 안 돼요. 그 시간 전에 졸면 제가 깨울 거예요. 알았죠?" 철주는 겨우 알아들을 정도로 텔레비전 볼륨을 낮춘 채 민수를 간간히 쳐다보면서 앉아 있었다. 열 시 반이 되어도 정신이 말똥말똥한 민수는 속으로 '열한 시에 잠이 올 리 없잖아'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철주는 간간이 "열한 시까지는 잠들면 안 됩니다, 절대로!"라고 말할 뿐이었다. 시간은 조용히 흘러갔다. 열한 시에 가까워지자. 절대로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라던 민수의 고개가 땅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열한 시가 되자, 민수의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 고개를 떨어뜨렸다. 철주는 민수를 부축해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히고는 알람을 맞춰주고 집을 나왔다.
#5 이해는 그만, 가슴으로 느끼면 되는 세상
철주는 패러독시컬 인텐션 테크닉(Paradoxical Intention Tech-nique)을 이용했다. 이런 사람의 불면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의 잘못된 믿음을 교정해야 한다. '잠을 못 잘 것이다'라는 굳은 믿음의 해결은 '넌 잘 수 있어'라는 위로나 암시가 아니라 '너는 자면 안 돼'라는 정반대 방향의 명령으로 풀 수 있다. 이 역설적인 방법은 특히 민수처럼 강박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에게 효과적이다.
민수는 강박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강박의 특징은 정서를 고립시킨다는 것이다. 한 가지 사고에 골몰하는 것은 억압하고 있는 내재적 무의식적 정서가 의식으로 치고 올라와서 자아를 집어삼킬까 봐 두려워 이성을 적극적인 방어기제로 동원하기 때문이다. 즉, 감성을 막는 최고의 무기는 이성이다. 물과 기름 같다. 이런 성격의 사람들은 미안하다는 감정을 느껴야 할 상황에도 "미안해요" 한마디면 끝날 일을 수십 분 동안의 설명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미안하다는 감정과 마찬가지로, 평소와 다른 감정을 느끼면 자신이 그것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될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쓴다.
감정을 가두는 것 외에도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한 노력은 여러 가지가 있다. 민수는 매일의 일상을 똑같이 반복한다. '루틴'이 중요하다. 그것이 흐트러지는 것을 참지 못한다. 고민을 하는 것이 싫다. 강박적인 사람들에게는 '루틴'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루틴' 안에 있으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최대한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을 만들어 지켜나가려 한다. 옷도 같은 옷, 비슷한 색의 옷을 입으면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옆에서 보면 참으로 재미없게 사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대가를 치른 대신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을 가두려고 노력하는 만큼 강해진, 날것의 공격성을 탑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맹수 한 마리를 마음에 가둬두고 그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민수의 경우 세상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이를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고, 일상적 삶의 여유를 포기해야만 했다. 더 나아가 잠까지 못 자게 되었으니, 민수의 경우 자기가 만든 덫에 빠져버린 셈이었다. 민수의 불면을 해결하는 길은 궁극적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봉인된 감정을 서서히 풀어서 숨구멍을 트고 그것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진짜로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머리로만 아는 것은 소용이 없다. 행동을 통해 머리가 아니라 가슴과 몸이 느껴 봉인의 문을 열어야 한다.다음날 밤 노사이드로 민수가 찾아왔다. "오늘도 독주를 드릴까요?" "아니요, 맥주나 한 잔 주세요. 그런데 도대체 제게 뭘 하신 거예요?" "그건 알 거 없어요.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 알게 되면 민수 씨에겐 더 이상 효과가 없을지 몰라요. 내가 첫날 밤에 했던 방법이 실패한 것처럼요. 그건 그렇고, 오늘 굳히기를 했으면 하는데, 저를 한 번만 더 믿어줄 수 있어요?" "뭔데요? 무려 50일 만에 잠을 자게 해주셨는데, 뭐든지 해야죠."
"윗옷을 벗고 이 티셔츠를 입어봐요. 그리고 음악에 맞춰 한번 놀아봐요.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이 있어요.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느끼면 되는 세상. 민수 씨에게 필요한 건 그거예요." 이어서 철주는 롤링스톤즈의 〈새티스팩션Satisfaction〉을 틀고 볼륨을 올렸다. "자, 따라해봐요." 철주가 고개부터 흔들흔들, 서서히 그루브를 탔다. 민수는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까닥까닥하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리듬에 몸을 맡기게 되었다. 굳어진 표정이 서서히 풀어지는 것 같아 보였다.
민수는 그동안 감정이라는 것을 괴물로 여기고 무서워했다. 감정을 마구 날뛰는 로데오 종마로 여긴 민수는 이성에 철저히 의지했다. 마치 로봇처럼 살아온 민수는 감정을 느끼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내일부터 민수의 삶은 조금 달라질 것이다. 감정이라는 맹수를 길들여서 자신을 지키는 충견으로 만드는 것이 이제부터 민수가 해야 할 일이다. 쓰러지고, 할퀴어지고, 물릴지도 모른다. 그 아픔을 민수가 견딜 수 있다면 그의 인생은 신세계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