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슈바이처들
한국국제협력단 지음 | 휴먼드림
한국의 슈바이처들
한국국제협력단 지음
휴먼드림 / 2011년 3월 / 256쪽 / 13,000원
Ⅰ. 아프리카카메룬 - 카메룬에 울려 퍼진 한국의 노래_ 김시원
꼬마야 꼬마야 땅을 짚어라.
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
꼬마야 꼬마야 만세를 불러라.
꼬마야 꼬마야 잘~ 가거라.
아프리카 카메룬(Cameroon)의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 우리나라 동요가 울려 퍼집니다. 어린 아이들과 한국 사람들이 어울려 재미있게 고무줄놀이를 하는데, 그 나라 어린이들은 한국말로 노래를 잘도 부릅니다. 2001년 KBS《한민족리포트》에 〈닥터 김의 미라클 가방〉 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습니다. 야룬데 이슬람마을 어느 초등학교의 고아들을 찾은 의사 김시원과 한국의 자원봉사자들이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마음속의 사랑을 찾아 카메룬까지 왔다는 의사 김시원. 그는 1952년에 태어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일반외과 공부를 마쳤고, 1986년 병원을 개업하였습니다. 평탄하면서도 행복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1991년 교통사고에서 기적처럼 살아나면서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제2의 삶을 결심하게 됩니다. 1993년. 아내와 세 딸을 설득해 의료기술과 시설이 낙후한 카메룬으로 향했습니다.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의사로 카메룬 야운데 의과대학부족 중앙병원에 부임하여 2007까지 15년간 근무하였습니다.
각오는 하였지만, 너무 가혹하였습니다. 지독한 아프리카식 프랑스어는 차라리 고문이었으며, 한마디로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4개월 배운 프랑스어로는 환자의 증상도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수술실을 따라 다니며 조수를 자청하고 현지의사들과 가까워지려 했지만 철저히 찬밥 신세였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태는 끝이 없었습니다. 응급환자의 연락을 받고 수술실로 달려가면 마취의사는 아예 없고, 마취의사를 데려오면 수술실 간호사가 없어졌습니다. 겨우겨우 사람을 모아 놓으면 수술포가 소독되어 있지 않거나, 산소통을 보관함에 넣은 채 수간호사는 열쇠를 갖고 퇴근해 버린 다음이었습니다.
간호사 출신인 부인 서현숙 역시 수모 아닌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서울에서 내로라하던 그에게 화장실 청소를 시켰습니다. 눈 딱 감고 이 악물고, AIDS환자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화장실 청소를 하였습니다. 멋도 모르고 따라 온 금지옥엽 세 딸이 외국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언어문제로 3일 만에 쫓겨났으며, 병원 주차장에 세워놓은 자동차는 누가 슬쩍 가져가 버렸습니다. 의사 김시원은 잠을 이루 수 없었고, 버팀목이었던 아내는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피나는 적응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환자들은 서서히 마음을 열었고, 그들만의 프랑스어에 귀가 열릴 즈음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아졌으며, 외과 의사들도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어느 날, 카메룬에서 최고의 의사라 자타가 인정하던 외과부장의 위암 환자 수술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과도하게 절제하고 수술의 기본을 무시하는 엉터리였습니다. 그가 메스를 잡아 수술을 했고, 아무런 합병증세 없이 봉합했습니다. 야운데병원에서는 어려운 췌장암 수술은 아예 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완벽하게 집도하였습니다. 수술실에는 수술기구가 없었습니다. 그는 수술기구가 담긴 가방을 메고 다녔으며, 그 가방에는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가방을 열고 이것저것 꺼내 수술을 마치면, 사경을 헤매던 환자는 살아났습니다. 소위 기적의 가방이었습니다.
환자가 입원하려면 입원비는 물론 모든 경비를 먼저 내야 합니다. 죽어가는 응급환자라 해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살려놓으면 돈을 안 내고 도망을 간다고 하였습니다. 일대 참상이었습니다. 의사인 그는 슬펐지만, 응급실과 수술실에는 장갑이나 소독약 그리고 간단한 수술기구조차 없었습니다. 게다가 약품과 의료소모품은 너무 비쌌습니다.
다음은 KOICA에 그가 보고한 1994년 3/4분기 활동보고서입니다.
진료, 치료환자 250여 명, 수술건수 110여 건 등. 진료환자, 수술건수 계속 증가. 진료 연 1,800여 명, 수술 300여 건. 총상이나 열상환자 증가. 경제난과 치안부재로 강도, 절도 사건의 증가가 원인. 충수염의 경우에도 병원에 오지 못하고 버티다가 복막염으로 악화되어야 오는 실정. 간호사도 없이 의과대학생인 조수 한명만 데리고 큰 수술도 해내야 하는 실정임.
그들은 돈 몇 천 원이 아까워 아파도 병원을 찾지 못했으며, 막다른 상황에서야 그를 찾아왔으나, 그때는 이미 치료시기를 놓쳐 고통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불행과 고통을 덜어줄 방안을 모색하여 1998년 평소 아프리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 뜻을 같이한 봉사자들과 별도 진료소를 운영하였습니다. 매주 토요일 40여 명의 환자를 무료 진료하였고, 또한 벽지농촌과 오지를 찾았습니다. 아내는 간호사를 자처하였습니다.
그가 휴가와 보수교육 등으로 자리를 잠시 비웠습니다. 그를 다시 만난 환자들이 아주 귀국해 버린 것으로 알고 많이 낙담했다가 눈물을 글썽일 때, 이들에게 내가 필요한 사람이었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음속의 진정한 사랑을 찾게 해준 것은 바로 그들이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이 그에게 더 소중하고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카메룬의 의료 인력은 주로 프랑스에 유학하였으나, 그 수는 극히 적었습니다. 야운데 중앙병원에서 배출시키는 전공의는 1년에 고작 4~5명에 불과하여 그는 의료 인력 양성에 적극 참여해 10여 년 동안 50여 명의 의사를 길러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 중부의 카메룬은 프랑스와 영국의 통치를 받다가 1961년 독립하였습니다. 부존자원이 풍부하여 수도 야운데는 비교적 기반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나, 나라는 후진국이었습니다.
수술하다가 정전이 되면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랜턴을 이리저리 비춰가며 수술을 마쳤으나 마음이 불안하였습니다. 잘 되었는지 못 되었는지 가늠을 할 수 없었습니다. 카메룬 최대 병원 응급실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게다가 1997년 한국의 IMF환란으로 대사관이 철수하여 그는 KOICA 직원도 없는 그곳에서 교민들의 주치의와 보호자 역할까지 맡았습니다.
15년의 세월을 뒤돌아봅니다.
카메룬의 푸른 신록과 붉은 땅이 환상으로 다가옵니다.
좌절을 극복하고 보람을 일궈냈습니다.
사랑을 찾았습니다.
우간다 - 받은 사랑이 더 많기에, 사랑할 수 있었다_ 유덕종
대학 입학 땐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인생을 어떻게 살더라도 의미가 없어 보였죠. 어차피 의사가 될 거라면 슈바이처처럼 아프리카에서 봉사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졸업하기 전에 결심을 했죠. 아프리카로 가야겠다고, 가서 나보다 힘든 사람을 도와야겠다고요.2010년 잠시 귀국한 유덕종이 모교인 경북대학교 웹진에 전한 서면 인터뷰 내용입니다.
유덕종은 1959년 출생하여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92년 KOICA 정부파견의사로 아프리카 우간다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린 두 딸과 임신한 아내가 눈에 밟혔지만, 그의 오랜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캄팔라 물라고 국립병원에서 16년간의 정부파견의사 임무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곳에서 머물며 캄팔라 마케레레 대학에서 의학을 강의하며 진료도 계속하였습니다. 캄팔라 외곽에 처방한 약이 환자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기초가 제대로 서 있는 병원을 세우려고 동분서주하는 의사 유덕종을 경북대학교 동문들은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런 찬사를 보냈습니다.
서른 셋, 의사로서의 앞날이 창창한 그가 처음 우간다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의 나이 쉰하나. 젊음도, 열정도, 꿈도 모두 그 땅에 바쳤다. 18년 동안 그를 붙든 것은 배고픔과 병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그곳 사람들이었다. 우간다의 열악한 의료상황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려고 병원건립을 준비한 것만도 9년째. 받은 사랑이 더 많기에,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이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는 폐결핵과 위암을 앓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인생은 뭔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하였고, 의대에 들어가 크리스천이 되면서 아프리카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아내와의 연애 시절부터 아프리카에서 사는 문제를 상의했고, 동의를 받아 결혼했습니다.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과 함께하는 삶이 그에겐 보람이고 존재 이유였습니다. 다음은 1992년 정부파견의사로 우간다에 도착한 그가 KOICA에 보낸 편지 일부분입니다.
저는 이곳에 도착하여 수도 캄발라에 있는 물라고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대학병원인 물라고 병원의 시설이 너무나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곳의 재정상태가 엉망이라 기구와 약품이 턱없이 모자라는 형편입니다. 비싼 약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약도 없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환자를 지켜봐야 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며칠 전 20세밖에 되지 않는 환자가 당뇨혼수로 죽는 것을 보고 화가 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환자가 한국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걸어서 퇴원을 할 환자인데 속수무책으로 죽는 것을 보고 한동안 무력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인구의 60%가 의사 한 번 만나 본 적이 없이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바짝 마른 결핵환자가 그를 보고 "Doctor, I am hungry.(선생님, 배고파요.)"라고 할 정도로, 환자들이 굶주려 죽어가는 그곳의 병원은 차라리 난민촌이었습니다. 모기장만 있어도 말라리아 발병률을 60% 가량 줄일 수 있지만, 모기장 구입도 큰 부담인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덕종은 한국의 앞선 의료기술과 의료기자재의 활용방법 등을 익혀 그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봉사하기로 다짐하였습니다.
1993년 7월.
의사 유덕종은 어느 환자의 조직검사를 하다가 주사 바늘에 손이 찔렸습니다. 끼고 있던 장갑에 피가 흥건히 고일 정도로 깊이 찔렸습니다. 문제는 그가 AIDS환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치료약이 없는 천형…….
"순간 손가락을 잘라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그 상황에서 AIDS에 걸린 확률이 3백분의 1이기 때문에 거기에 희망을 걸기로 했죠."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까지 기다린 5개월간 그는 정상인이 아니었습니다. 부부관계도 멀리하는 등 매사에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것을 깨달은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처음 한 달 간은 정말 우울했습니다. 그러나 감염됐다 해도 5~6년은 더 살 수 있으니 그동안 더 가깝게 AIDS환자를 치료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두려움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1994년 봄. 이번에는 폐결핵이었습니다. AIDS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아프리카였기에 결코 간단한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큰딸 주은이가 뇌염에 걸렸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거의 뇌염이 없지만, 일단 걸리면 특별한 치료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명색이 의사라는 애비가 한다는 게 링거주사를 놓는 것뿐이었습니다. AIDS때도, 폐결핵 때도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는데, 막상 딸이 뇌염에 걸리자 '왜 이곳에 왔나' 하는 후회뿐이었습니다. 집 사람은 그저 울고만 있었지요."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보면 아프리카를 떠날 수 없다는 생각에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국에서 자리 잡은 대학 동기생과 비교해 본적이 없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부동산도 집도 없다. 하지만 그런 게 다가 아니다. 사람의 가치관은 저마다 다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경제가 발전하면서 삶은 윤택해졌는지 모르지만 삶의 질을 퇴보한다는 인상이다. 내 눈길에 와 닿는 아프리카의 하늘은 아름답고, 힘과 용기를 준다. 당신은 한국의 하늘을 가끔씩이라도 올려 보는가? 행복지수로 보자면 한국보다 아프리카 나라들이 더 높을지 모른다. 나는 행복하다."
받은 사랑이 더 많기에,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행복한 의사 유덕종입니다.
Ⅱ. 아시아스리랑카 - 아름다운 촛불_ 이상호
보우머 이쓰뚜띠, 마터 고닥 싼또레이. (고맙습니다. 선생님은 내게 행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스리랑카 사람들이 그에게 전하는 영원한 인사말입니다. 자기가 가진 재능으로 남에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라 말하고, 저 세상으로 훌쩍 떠난 그는 한국과 스리랑카에서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한의사 이상호. 1968년에 태어나, KOICA(한국국제협력단) 정부파견한의사로 인술을 펼치다가 2004년 7월 8일 새벽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 트링코말리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습니다. 의료 환경이 열악한 그곳에서 하루 100~200여 명에 달하는 환자들을 보살피느라 누적된 피로가 뼈아픈 요인이었습니다.
그는 경희대학교 한의학과에서 공부를 마치고, 2003년 스리랑카 콜롬보의 보렐라 교육병원에 정부파견한의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심장마비로 순직하였으니, 1년 3개월간 그의 꿈을 뜨겁게 펼친 셈이었습니다. 이 슬픈 소식이 매스컴을 탔을 때, 국민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의 아름다운 행적을 깊이 새겼습니다.
한의대 본과 시절, 다일공동체에서 한의사인 아내 황경선과 함께 주말 의료봉사를 했습니다. 젊고 촉망받는 재활의학과 전문의 시절, 학교에 남아달라는 부탁이 이어졌지만 그의 열정은 누구보다도 뜨거웠습니다. 2001년 KOMSTA(대한한방해외의료봉사단) 단원으로 스리랑카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날씨는 더웠고 몸은 피곤했지만 당시의 감동은 여느 때의 봉사 활동에서 느꼈던 것 이상이었습니다. 2002년 다시 스리랑카에 왔을 때, 그곳 사람들에게 한의학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자기 인생에 큰 보람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는 정부파견한의사에 지원했습니다.
대학에 남아 한의학 이론을 세워 존경 받는 교수가 되어도, 한의원을 개원하여 이웃을 도우면서 명예를 쌓아도 될 터인데, 그는 자신을 태워 주위를 밝히는 촛불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길을 찾았습니다. 의서 『의방유치醫方類聚』에서 강조하는 '환자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다'는 인술을 태생적으로 갖춘 아름다운 한의사 이상호였습니다. 그는 늘 자신을 이렇게 다독였습니다. '배우고 익힌 의학 지식이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사용돼서는 안 되며,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이웃을 위해 베풀며 살고 싶다. 가난한 자가 가장 서러울 때는 제대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할 때이다.'
그는 스리랑카의 전통의학을 존중하는 아유르베딕 교육병원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대학부속 종합병원 같은 곳입니다. 그곳에서 진료실 설치, 진료 등 모든 일을 도맡아 해나갔습니다. 그리고 아유르베딕 의사들에게 한의학을 가르치고 병원에 개설된 Korea Clinic에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진료활동을 하였습니다. 경혈침구학 기본과정을 만들어 1기생 10명을 배출했으며, 2기생 18명을 가르쳤습니다.
그곳에서 구하기 힘든 약재들이 많아, 홀로 돌아다니며 구했습니다.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워도 참기 힘들었고, 불규칙한 전력공급에다가 의료기기도 지원받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늘 환하게 웃었습니다. 자녀교육에도 빠듯한 월급이지만, 아내 그리고 1남 1녀의 자녀와 너무나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주위에서는 그를 뭔가 이룩하려 하지 않고 하나하나 채워나가는 사람이라고 기억했습니다.
2005년 제33회 보건의 날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석류장을 추서했습니다. 신앙인이었던 그는 훈장을 받으며 생전에 하던 말처럼 이렇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그냥 삶입니다. 나를 낮추기만 하면 정말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