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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의 천재들

신정일 지음 | 생각의나무


우리 역사 속의 천재들

신정일 지음

생각의나무 / 2011년 4월 / 296쪽 / 15,000원



1부 변혁의 열망 세상을 뒤흔들다




새로운 백제의 부흥을 꿈꾼 난세의 영걸_ - 견훤(甄萱, 867~936)

일세의 풍운아 견훤의 흔적이 있는 곳, 견훤성문: 평지 돌출형의 산, 모악산 자락에 고즈넉이 들어앉은 금산사는 호남지방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이었다. 이는 백제 법왕 때 임금의 복을 비는 사찰로 세워졌고, 신라 혜공왕 때 진표율사에 의하여 중창되면서 큰 절의 면모를 갖추었다. 모악산 도립공원 매표소를 지나 금산사로 들어가다 보면 허물어진 성문 하나가 나타난다. 이 지역에서 견훤성문이라고 부르는 이 석성 위에 그림처럼 서 있었을 듯한 문루는 없어졌지만 홍예문의 형태는 그대로 남아 있다. 전해오는 말로는 후백제의 창업주 견훤(견훤의 견甄자가 성으로 쓰일 때는 진으로 발음된다. 따라서 견훤은 진훤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지만 이 책에서는 일반적인 관행을 따라 견훤으로 표기한다)이 쌓았다고도 하고, 그 뒷날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금산사에서 쌓았다고도 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모두 견훤이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지금의 문경)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가 태어난 문경시 가은읍 갈전 2리 아차마을은 '뭇오리가 호수에 내려앉은 형상', 또는 '금비녀가 떨어진 형상'의 명당으로 '아차'라는 이름은 오리鵝와 비녀 를 뜻한다고 한다. 견훤은 마을 앞으로는 낙동강의 지류인 영강이 흐르고 뒤로는 옥녀봉이 서 있는 길지 중의 길지인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아차마을(갈전 2리)에서 가난한 농부인 아자개阿慈介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자개의 본래의 성은 이李씨였는데 견씨로 고쳤다고 한다.

호랑이가 젖을 먹여준 견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아자개가 밭갈이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새참을 가지러 가면서 견훤을 수풀 밑에 잠시 내려두고 갔더니 그사이에 호랑이가 찾아와 젖을 먹여주었다고 한다. 견훤은 자랄수록 체격이 남달랐으며 힘이 장사였고 지혜로웠기 때문에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국역國役을 지게 되는 열다섯 살의 나이가 되었을 때 견훤은 많은 고민을 하였다. 척박한 고향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아니면 더 나은 무엇을 모색하기 위해 고향을 탈출할 것인가? 견훤은 결국 농사꾼이었던 아버지가 무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장군이라 정하고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상주)에서 호족으로 성장했듯 고향을 떠나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892년, 견훤은 자기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지금의 순천과 여수 일대를 시발로 주변 고을을 하나하나 점령해갔다. 그는 한 달 사이에 5천여 명의 무리를 모았을 정도로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이로 인해 그의 존재는 역사의 전면에 일약 화려하게 등장할 수 있었다. 그때 견훤의 나이는 26세였지만, 실제 거병擧兵한 시기는 이보다 3년 빨랐던 23세의 일로 짐작된다. 그리고 견훤은 대왕大王을 칭하면서 정개正開라는 연호를 반포하였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인 후 당나라 연호를 사용했던 것과 달리 자주적 연호를 쓴 것이다. 정개라는 연호에는 '바르게 열고, 바르게 시작하고, 바르게 깨우친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중국의 오월과 교류를 맺다: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한 견훤은, 내적으로는 호족들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그들을 포섭하면서 세력을 확장시켜나가는 한편 호족들의 견제와 통제에도 고삐를 늦추지 않아 호족의 연내에 관리와 군대를 파견하기까지 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견훤이 백제의 옛 땅을 남김없이 차지했는데 그 재력의 부유함과 갑병甲兵의 막강함은 족히 신라와 고려보다 뛰어나서 먼저 드러났다."라고 적고 있다. 견훤은 그의 해상세력을 바탕으로 옛 백제의 외교를 복원하는 데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그와 더불어 중국의 오월국吳越國과 후당後唐에 사신을 파견하여 자신의 존재를 남중국에 알림으로써 그 위상을 높이는 한편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려는 의지를 과시했다. 이는 또한 신라를 고립시키려는 전략의 일환이기도 했다.

호남 차별을 잉태한 훈요십조: 견훤과 백제는 결국 스스로의 내분에 의해 무너졌을 뿐 왕건이 거느린 고려 군사의 힘으로 멸망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삼국을 통일한 후 왕건은 고려 왕조의 정책 지침인 「훈요십조」를 남기면서 8조에 이러한 말을 수록하였다. - 차현 땅, 즉 공주 차령산맥 이남의 땅 및 공주강 이남의 산형과 지세를 놓고 볼 때 풍수학상으로 이것들은 모두 본주本主를 향해서 배역의 기세를 띠고 있다. 이러한 땅의 생김새는 곧 그곳 사람들의 마음이 반역의 뜻을 품었다는 징조다. 그럴진대 이 아랫녘 지방의 무리들을 조정에 참여시키거나 국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는 날이 오게 된다면 반드시 나라에 변란을 일으키거나 고려에 병탄당한 원한을 깊이 품고서…… 반드시 나라에 재변이 닥칠 터이니 비록 양민이라 할지라도 이곳 사람들은 결코 등용길을 열어 벼슬자리를 주지 말고 각별히 조심하라. -

역사는 항상 이긴 자의 것이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들과의 내분 때문에 나라를 잃고 그 아들마저 망하게 했다는 지금까지의 역사인식을 기반으로 견훤을 꺼리고 있다. 그런 잘못된 인식 때문에 전라도 지역 사람들은 견훤에 대한 이야기조차 꺼리지 않았는가. 그래서 후삼국의 도읍지 중 남한에 남아 있는 경주는 막대한 재원을 들여 보존과 발전을 꾀하는 것과 달리(고려-개성, 태봉국-철원) 고도古都면서도 견훤의 궁궐터라고 추정되는 전주 물왕말(중노송 2동사무소 근처) 일대는 사적지 지정도 받지 못한 채 물왕말이라는 표지석 하나만 세워져 있을 뿐이다.

변란 속에서 안타깝게 스러진 절세의 시인 - 정지상(鄭知常, ? ~ 1135)

서경에서 태어난 정지상: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문장文章」 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우리나라 문장이 최치원崔致遠에서 처음으로 발휘發揮되었다. 김부식金富殖은 풍부하면서도 화려하지는 못하였고, 정지상은 화려하였으나 떨치지는 못하였으며, 이규보李奎報는 눌러 다졌으나 거두지는 못하였고, 이인로李仁老는 단련하였으나 펴지는 못하였으며…… 이제현李齊賢은 노련하고 기운찼으나 문채롭지는 못하였고, 이숭인李崇仁은 온자溫藉하여 기운이 단촉短促하였으며, 정몽주는 순수하였으나 요약要約하지는 못하였고…… -

화려한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떨치지는 못하고 스러져간 비운의 천재시인 정지상은 서경(지금의 평양)에서 태어났다. 정지상의 어릴 적 이름은 지원之元이고 호는 남호南湖였다. 정지상의 어린 시절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청년 시절에는 가난한 집의 편모 슬하에서 자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어머니의 지시를 따라 고향을 떠난 뒤 개경(開京, 지금의 개성)에 가서 10여 년간 학문에 정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지상은 타고난 시재로 학문에 힘써 예종 7년(1114년, 임진년)의 성시省試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김부식을 만나다: 정지상은 문학을 숭상하는 임금의 총애를 받아 당시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윤관, 김부식, 곽여 등 당대의 명신 및 명사들과 교유했다. 뒤를 이은 인종조仁宗祖에도 임금의 아낌이 대단하여 인종 3년에 지제고知制誥라는 벼슬에 있으면서 왕명으로 곽여를 추모하는 글인 「동산재기東山齎記」 비문을 썼다. 이러한 시재로 정지상은 고려 12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하였다. 왕의 서행西行 때는 기린각麒麟閣에서 『서경書經』「무일편無逸篇」을 강의하였으며, 그리하여 임금은 서경 유신 2년, 왕명으로 주식을 내렸고 그의 어머니에게는 물품을 하사하기까지 하였다. 그 무렵이 정지상의 일생 중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지상은 그 무렵에 당시 개경 문단을 주름잡고 있던 김부식(1075~1151)과 불화에 휩싸이게 된다. 개경 문단에서 쌍벽을 이루며 활동하던 정지상과 김부식은 조정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정지상은 특히 오언절구五言絶句를 잘 지었다. 그런 그가 하루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 절간의 염불 소리 그치니 / 새벽하늘 빛 맑은 유리로다 -

이 시구를 전해들은 김부식이 정지상에게 이 구절을 빌려주면 나머지 부분을 자신이 채우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지상은 김부식의 제의를 한마디로 거절했다. 당시의 김부식은 명문귀족 출신으로 중견관리였지만 정지상은 미미한 가문 출신으로 초급관료였으니 김부식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겠는가. 하지만 그 사건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면 아래로 잠시 내려앉았다.

서경천도를 주장하다: 『고려사』에 의하면 정지상은 내시랑 중 김안과 상의한 뒤 "우리들이 만약 임금을 모시고 옮겨가서 서경을 수도로 만든다면 마땅히 중흥공신中興功臣이 될 것이니 비단 한 몸이 부귀를 누릴 뿐만 아니라 또한 자손을 위해서도 무궁한 복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설득에 근신 홍이서洪痍敍와 이중부李仲孚, 그리고 문공인文公仁까지 묘청과 백수한을 정사의 최고 자문으로 삼을 것을 왕에게 주청하였다. 1127년 2월, 인종은 마침내 서경에 거동하고 묘청 일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3월에 상안전에 관정도량灌頂道 을 베풀고, 유신정교維新政敎를 선포하였다. 이 유신정교의 내용은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검약을 실천하고, 백성을 고역에서 벗어나게 하는, 국가 안녕과 태평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인종은 묘청 등의 요청으로 서경으로 어가를 옮겼다. 인종 9년에는 또 그들의 주청에 의하여 대화궁에 성을 쌓고 팔성당八聖堂을 궁내에 지었다. 이때 그 축문을 정지상이 지었는데 팔성당은 여덟 성인을 모신 곳으로 호국백두악護國白頭嶽 태백선인太白仙人을 첫째로 하고, 민간신앙, 불교, 도교의 신을 두루 받아들여 선정했다. 그래서 민족 수호신의 계보를 정하고, 서경천도운동의 정신적 상징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여덟 성인을 섬겨야 국위를 떨칠 수 있다고 정지상을 비롯한 이들은 주장한 것이다.

금국 정벌을 건의하다: 그 뒤 대화궁과 그 궁성의 축조, 팔성당의 설치 및 인종의 수차에 걸친 서경 행차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1132년(인종 10년) 3월에 묘청이 주청한 칭제건원(稱帝建元, 왕을 황제로 칭하고 연호를 제정함) 문제와 주변국과 합세하여 금을 치자는 금국정벌金國征伐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묘청 일파가 내세웠던 칭제건원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육진개척을 했던 윤관尹寬의 아들인 윤언이尹彦 는 정지상과 함께 인종에게 정치개혁을 진언하면서 서경천도파의 노선에 동조했다. 다만 윤언이는 묘청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개경파에 가담하여 김부식의 막료로 출정하여 서경을 함락시키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묘청의 난이 일어나다: 인종이 서경으로 행차했음에도, 일은 묘청 일파가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묘청이 언제, 어떤 식으로 반란을 준비했는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묘청은 1135년 정월에 서경의 분사시랑 조광趙匡 등과 함께 결탁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묘청 일파는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고 하였지만 묘청을 왕으로 옹립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자겸이나 척준경의 반란과는 달리 왕을 교체하기 위한 역모가 아니라 서경천도를 실현시켜 새롭고 자주적인 독립 국가를 세운다는 것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묘청의 반란 소식이 사실임을 확인한 인종은 백관을 소집하고 회의 끝에 반란군을 토벌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인종은 김부식을 평서원수로 임명하고 내시 유경삼을 서경으로 급파하여 군사행동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유경심이 서경에 도착하자 묘청은 그들을 융숭하게 대접한 뒤 왕에게 서경으로 이어할 것을 청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변고를 당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올렸다.

토벌에 앞서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이고: 묘청의 이러한 처사에 김부식을 위시한 개경세력은 출병하기 위해 대궐로 나아가 명령을 기다렸다. 개경세력의 이 같은 강한 반발에 밀린 인종은 별 수 없이 출병을 명령했다. 인종은 토벌대장 김부식에게 "난을 일으킨 서경 사람들도 모두 내 아들딸이니 우두머리만 죽이고 다른 사람은 죽이지 말라."라고 거듭 당부하였다. 그러나 김부식은 출정하기 전에 묘청의 일파로서 개경에 있는 백수한, 정지상, 김안 등을 처형하여 후환을 없앴다. 결국 칭제건원과 서경천도를 꿈꾸었던 묘청과 정지상 일파가 일으켰던 '묘청의 난'이 평양을 발판으로 만주 일대까지 국력을 향상시키는 자주 독립의 혁명이었다면, 묘청을 비롯한 정지상 등은 웅대한 야망을 가진 영웅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묘청의 난이 서경 출신 관료들의 정치욕의 발로였다면 실패한 혁명가의 초상화가 될 것이다.

빼어난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지상은 많은 시를 썼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반란의 주모자로 처형당한 탓인지 불과 몇 편의 시만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중국의 사신들이 오면 그들이 지나는 연변에 조선 문인들이 시를 지어놓은 시판時版을 떼어놓고, 고려 때 사람인 정지상의 「대동강大同江」과 이색李穡의 「부벽루浮碧樓」만을 그대로 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만큼, 정지상의 시는 후대까지 알려져 있다.

2부. 불세출의 학문 세상을 비추다



한국적 한문학을 창조한 고려 최고의 명문장가 -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천금같이 귀한 아이: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는 효자촌 북쪽에 고려시대의 빼어난 문장가이자 문신인 이규보가 살았다는 백운곡이 있다. 백운곡은 뻘벌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뻘벌 동쪽 나지막한 산기슭에 이규보의 묘소가 있다. 풍수지리를 모르는 문외한이 보아도 묘소를 천천히 돌아다니다 보면 편안하고 아늑한 것이 과연 명당이라고 불릴 만큼 좋은 자리다. 이규보가 잠든 묘소에 들어서면 소나무 대여섯 그루가 수문장처럼 서 있고, 소박한 묘소 앞에는 석등과 망주석 두 개가 서 있다. 그의 묘소가 이곳에 있는 것은 대몽항쟁으로 인해 고려의 수도가 강화도에 있던 당시 이규보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고려 때 문신인 이규보는 1168년 12월 16일 황려현에서 호부시랑을 지낸 윤수允綏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규보의 본관은 황려(黃麗, 지금의 여주)이고 초명은 인저仁低,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이다. 만년에는 시, 거문고, 술을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불렸다. 그의 나이 열한 살 때 숙부인 직문하성 이부李富는 성랑省郞들에게 조카 자랑을 하였다. "내 조카가 나이는 어리지만 능히 글을 지으니 한번 불러서 시험해보는 것이 어떨까." 그러자 여러 성랑들이 기꺼이 운을 달아 대對를 맞추라고 하였다. 이규보는 "술잔 속에는 항상 국선생(술)이 들어 있네孟心常任麴先生"라는 글을 지었다. 아직 열한 살의 어린아이가 술을 마시는 심경을 절묘하게 표현한 것은 그 당시 술에 절어서 사는 문인들을 수없이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술에 대한 동경이 어렴풋이나마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이때부터 이미 이규보의 술에 얽힌 일생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놀기 좋아했던 젊은 시절: 소년 시절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한 이규보는 문인들의 풍류에 깊이 빠져 과거공부를 등한시하면서 4~5년간을 자유분방하게 지냈다. 그 무렵 만난 학자와 문인이 오세재吳世才, 임춘林椿,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抗, 함순咸淳, 이담李湛, 이인로李仁老 등이었다.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았던 그들은 항상 어울리며 술을 마셨다. 그들을 일컬어 사람들은 중국 진나라의 죽림칠현에 빗대어 강좌칠현 또는 해동칠현이라고 불렀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하면서도 그들은 부당한 권력에 맞서지는 못했던 유약한 지식인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모여서 술 마시고 시를 지을 때 자기들 외에는 재사가 없는 듯이 놀았다고 한다.

「동명왕편」, 고려의 희망을 노래하다: 이규보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에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 동명왕에 얽힌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26세(1193)에 개경에 돌아온 이규보는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었다. 국문학사상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는 「동명왕편」은 이규보 개인의 창작품이 아니라 민간전승으로 내려온 설화와 『구삼국사』의 「동명왕본기」를 토대로 지은 서사시이다. 「동명왕편」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건국신화를 노래한 것으로 시의 구성은 동명왕 탄생 이전의 계보를 밝히는 서장과, 그의 출생과 종말까지를 묘사한 본장, 그리고 동명왕을 계승한 유리왕의 경력과 작가의 느낌을 붙인 종장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규보가 지은 몇백 편의 시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동명왕편」은 전반기 그의 생애에서 최고의 업적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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