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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김정미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김정미 지음

아름다운사람들 / 2011년 4월 / 434쪽 / 16,000원



1. 세계사를 움직인 여성 혁명가




에멀린 팽크허스트_ 피와 땀으로 움켜쥔 여성 참정권

흔히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고 한다. 보통, 평등, 비밀, 직접 선거의 4원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이러한 선거의 4원칙을 보장하는 참정권의 역사는 150여 년이 채 되지 않는다. 평등한 참정권을 얻기 위해 인류는 지난 세기 동안 무수한 피와 투쟁의 역사를 치러 냈다. 그중에서 여성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한 투쟁은 그 어떤 참정권 투쟁보다 길고 지루했으며 또한 과격했다.

1912년 3월 영국 런던의 중심가 피카딜리 거리를 비롯한 주요한 거리에 위치한 건물의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조리 박살이 났다. 의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2백여 명의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벌인 일이었다. 이 여성들은 모두 WSPU(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 여성사회정치동맹에 소속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주요한 건물의 유리를 깨며 주장한 것은 여성의 정치 참여를 위한 권리 획득, 즉 참정권 획득이었다.

WSPU의 참정권 운동은 10여 년째 계속되었지만 영국 정부로부터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울분에 찬 여성들은 점점 더 과격하고 파괴적으로 변해 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사회에 알리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는 입법부에 경고를 보내기 위해 폭력을 택했다. 그들은 건물의 유리를 박살냈을 뿐만 아니라, 비어 있는 건물에 불을 지르고, 유력한 정치가들에게 접근해 청원하고 설교하고 때로는 폭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목표는 영국과 영국의 남자들의 모든 삶을 불안하고 위험하게 만들어 참정권에 대한 여성들의 요구가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한지 알리는 데 있었다. 영국의 이 모든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끌고 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에멀린 팽크허스트(1858~1928)였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정치 상황과 에멀린 팽크허스트: 빅토리아 시대, 의회 민주주의의 효시이며 꽃이라고 불린 영국의 민주주의는 남성들, 그것도 돈 있는 남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초기 참정권은 일정한 금액 이상의 세금을 낼 수 있는 남성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이후 영국 정부는 보수당과 자유당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몇 차례 법 개정을 통해 참정권을 확대해 갔지만 그때마다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자는 주장은 무시되곤 했다. 참다 못한 여성들은 이제 합법적인 방법으로 아무것도 이루어 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알릴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과격하며 비합법적이었지만 그 효과와 영향은 극대화되는 격렬한 시위였다.

그 WSPU의 지도자인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맨체스터 출신으로 부유한 날염업자의 딸이었다. 그녀는 열네 살 때 영국 여성 운동의 선구자인 리디아 베커의 강연을 듣고 법적으로 남성의 소유물로 종속된 19세기 여성들의 출구 없는 삶에 회의를 품고 여성 해방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당시 상당히 급진적 생각을 가진 변호가 리처드 팽크허스트와 결혼하면서 여성 참정권 운동에 눈을 뜨게 되었다. 리처드 팽크허스트는 여성의 종속과 법적인 불평등에 대해 일찍이 문제를 제기하였던 존 스튜어트 밀의 친구였으며, 그 또한 여성 참정권 운동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결혼 후, 에밀린 팽크허스트는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남편의 급진적 정치 활동에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독립노동당에 들어가 사회 문제와 여성의 참정권 획득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의 이러한 사회 활동은 남편 리처드의 죽음으로 잠시 주춤하였지만 큰딸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가 성장하여 여성의 사회적 불평등을 직접 겪게 되자, 딸들과 함께 다시금 사회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노동당을 창당한 케어 하디의 도움을 받아 맨체스터 교육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지역 노동자 대표위원회에서도 활동하였다. 이때의 정치 활동으로 경험을 쌓은 에밀린 팽크 허스트는 노동당과 진보당이 여성 참정권 문제에 소극적인 것에 실망하고 직접 WSPU를 결성하였다. WSPU는 오로지 여성들로만 구성되었으며 그들의 유일한 목표는 여성의 참정권 획득이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의 전개: 남편 리처드의 영향과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권리 의식은 딸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세 딸 크리스타벨, 실비아와 아델라는 어머니를 도와 여성 참정권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3년 WSPU의 조직은 이 팽크허스트 모녀의 노력에 의해 가능했으며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은 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팽크허스트 가의 모녀는 폭력 시위부터 단식까지 여성 참정권 획득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어머니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1908년 처음 감옥에 수감된 이후, 1913년 한 해에 무려 열두 차례의 단식 투쟁을 통해 영국 정부의 부당함을 폭로하였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여성 참정권론자들의 의견을 입법에 수용하지 않았다. 남성 정치인들은 여성이 참정권을 가지면 결혼 제도와 가족 제도가 위태로워지며 남성들의 권위를 위협할 것이라고 두려워했으며 그러기에 여성 운동가들에 대한 탄압도 점점 강해졌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질수록 투쟁은 점점 과격해져갔다. 그러던 중 1913년 WSPU 소속의 에밀리 데이비슨이란 여인이 조지 5세의 경마장에 뛰어들어 1인 시위를 벌이다 말에 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의 처리 문제에서 여성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에밀리 데이비슨의 장례식은 거대한 시위 행렬로 변했고 여성 참정권 운동은 본격화되었다. 곳곳에서 남성의 상징이라고 여겨지던 건물들이 파괴되고 불타기 시작했다. 영국의 경찰서는 여성 시위자들로 넘쳐났다.

마침내 획득한 여성 참정권: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 정부는 인민 대표법을 성립시켜 마침내 여성들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였다. 이 참정권의 획득은 전쟁 기간 동안 노동력을 제공한 여성들의 공과 무시할 수 없게 성장한 여성들의 힘이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30세 이상의 여성에게만 주어진 불완전 선거권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남성들이 많이 사망하여 여성에게 남성과 똑같은 참정권을 부여할 경우 여성에 비해 남성들의 수가 적어 남성이 정치적으로 불리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28년 인민 대표법은 남녀 동일하게 21세부터 선거권을 갖도록 개정되었다. 마침내 영국 여성들은 남성들과 똑같은 완전 평등 참정권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자신의 평생에 걸친 운동이 이루어 낸 개정법이 시행되기 한 달 전에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민주 평등 운동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아 웨스트민스터의 영국 의사당 옆에 그녀의 동상이 세워졌다.

2. 시대를 뛰어넘은 천재적 재능



코코 샤넬_ 여성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패션 혁명가

프랑스의 오르베뉴 지방의 소뮈르에서 태어난 코코 샤넬(1883~1971)의 원래 이름은 '가브리엘 샤넬'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방 도시를 돌며 행상을 하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가브리엘 샤넬은 열두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언니와 함께 고아원에 맡겨졌다. 청소와 바느질보다는 춤과 노래가 좋았던 그녀는 스무 살에 고아원에서 나와 자신의 '끼'를 발휘할 곳을 찾아 나섰다. 가브리엘 샤넬은 기병들이 드나드는 싸구려 바 '라 로통드'에서 댄서와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즐겨 부르던 노래 코코에서 이름을 따 '코코 샤넬'로 이름을 고쳤다. 어두웠던 과거를 상기시키는 이름인 가브리엘을 버리고 그녀는 새롭게 비상하가 위해 코코 샤넬이란 이름을 스스로에게 선사했다.

그녀를 성공시킨 두 명의 남자: 샤넬의 초기 성공기에는 중요한 두 남자가 등장한다. 샤넬의 역동적이며 자유분방한 삶 속에는 한 남자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은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필요할 때 사랑을 하였고, 그 사랑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은 모두 성취하는 타입이었다. 싸구려 바에서 최초로 샤넬을 건져 올린 사람은 상류층의 부유한 남자 에티엔 발상이었다. 기병대 장교였던 그는 싸구려 바에서 샤넬을 만났고 그녀가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샤넬을 자신의 호화스러운 별장에 두고 그녀를 가꾸기를 좋아했다. 비참한 어린 시절 동안 배우지 못했던 상류층의 예절과 교양을 샤넬은 모두 이곳에서 배운다. 에티엔 발상을 통해 프랑스 상류 사회를 접하게 된 샤넬은 자신감 있는 옷차림과 개성으로 당시 최고의 미술가와 소설가, 시인, 배우, 스타일리스트 등 많은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샤넬은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꿈꿔 온 패션 사업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녀가 두 번째로 만난 남자는 영국인 부유한 사업가 아서 카펠이었다. 에티엔 발상과 헤어진 후 만난 아서 카펠은 샤넬에게 살롱과 의상실을 열 수 있는 돈을 빌려 주었다. 아서 카펠은 샤넬의 디자이너로서의 재능과 사업가로서의 능력을 알아차리고 그녀를 적극 후원했다. 아서 카펠의 도움으로 1913년 노르망디의 휴양도시 도빌에 문을 연 샤넬의 의상실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고, 그녀만의 패션 감각과 센스가 발휘된 디자인으로 샤넬의 의상실은 도빌 최고의 숍이 되었다. 샤넬은 아서 카펠의 후원 하에 마음껏 재능을 발휘했고 훗날 아서 카펠에게 빌린 돈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단순하고 명료한 디자인: 샤넬 디자인의 정수는 단순함과 명료함이다.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과감히 생략하고, 이전의 여성미만을 강조한 옷들과 달리 독특하고 중성적이지만 그 안에서 여성성이 아낌없이 드러나는 디자인을 선호했다. 샤넬의 디자이너로서의 첫걸음은 모자 디자인부터였다. 19세기 말 여성들은 모자에 온갖 것들을 다 장식하고 다녀 모자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웠으며 여성들의 행동을 제약하였다. 샤넬은 일반 여성들이 쓰는 거추장스러운 모자를 거부하고 스스로 디자인한 검은 모자에 하얀색 리본 하나만을 두른 단순한 모자를 쓰고 다녔다. 이 모자는 당시 상류층 연인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샤넬의 간단한 모자 디자인에 많은 여성들의 마음이 쏠린 것이다. 코코 샤넬은 1910년 파리의 캉봉 거리에 '샤넬모드'란 여성 모자 가게를 열었다. 영화배우와 연극배우들이 그녀의 모자를 앞다투어 쓰기 시작하면서 샤넬이 디자인한 모자를 찾는 사람들이 급작스레 늘어났고 샤넬은 일약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뛰어올랐다.

그녀는 모자에만 그치지 않고 의류 분야에까지 사업영역을 넓혔다. 1913년 샤넬은 프랑스의 도빌에 새 부티크를 열고 저지 소재를 이용한 여성 스포츠웨어를 출시했다. 활동적이고 입기 편한 저지 옷은 코르셋과 페티코트에 얽매어 있던 여성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1915년 비아리츠에 그녀의 첫 번째 쿠튀르 하우스를 열었다. 샤넬은 사업 영역을 향수와 화장품에까지 확대했다. 1921년 샤넬은 조향사 어네스트 보가 개발한 향수 'No.5'를 출시하여 상류 사회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 여세를 몰아 향수와 뷰티 라인을 제조 판매하는 회사 '라소시에트 데 파르풍 샤넬'을 설립했다. 샤넬은 모자부터 화장품까지 여성의 삶의 기준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시대의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옷으로부터의 해방: 역사적으로 서양 여성들의 옷은 코르셋을 입지 않고서는 입을 수 없는 옷들이 많았다. 특히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옷은 '버슬 스타일'이라고 하여 몸매가 과장한 형태였기 때문에 코르셋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이 많았다. 샤넬은 여성 옷의 코르셋을 과감히 생략하였다. 그녀가 디자인한 옷은 여성성을 나타내는 약간의 곡선만 있을 뿐 전체적으로 헐렁하며 움직임이 자유로운 형태의 옷이었다. 이 옷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여기에 더해 샤넬은 1920년 이른바 '샤넬 라인'으로 알려진 무릎 밑 5~10센티미터까지만 오는 길이의 스커트를 선보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여성 옷에서 다리를 드러낸 것은 샤넬의 옷이 최초였다. 이 옷은 논란이 많았지만, 당시 터진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기능적이고 활동적인 옷을 선호하게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여성들은 스커트 길이에서도 해방을 맞이했다. 1926년에는 오늘날까지도 그 명성이 자자한 야회복 '리틀 블랙 드레스'를 발표했다. 또한 같은 해에 스코틀랜드의 의상에서 영감을 얻은 클래식 트위드를 발표했다. 여성의 옷에 주머니를 달고 여성이 입을 수 있는 재킷을 만들어 낸 것도 샤넬이었고 어깨에 거는 숄더백을 디자인해 핸드백으로부터 여성의 손을 해방시킨 것도 샤넬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잘못된 행보: 그러나 승승장구하며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독보적인 위치를 굳혀가던 샤넬에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난다. 1936년 샤넬이 거느린 공장에서 4천 명의 직공들이 가혹한 노동 조건 때문에 파업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의 충격으로 샤넬은 사업을 접고 일시적으로 은퇴했다. 그리고 곧이어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 등으로 샤넬은 사실상 15년간 잠정적으로 패션계를 떠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1940년에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자 패전국 프랑스에선 친독 계열의 비시 괴뢰 정부가 들어섰다. 이때 샤넬이 취한 행보는 이후 그녀의 일생을 두고 큰 오점이 되었다. 그녀는 많은 프랑스인들이 나치에 대항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고통받는 동안 독일군 나치 장교 한스 군터 폰 딩클레지와 사귀며 안전을 보장받았다. 1944년 샤를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군과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하자 샤넬은 독일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각계의 영향력 있는 지인의 도움으로 비록 사흘 만에 풀려났지만 샤넬은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녀는 스위스 로잔으로 망명해 10년간 망명 생활을 하였다.

여제의 귀한: 1954년 전쟁의 상처가 씻기고 세간의 비난이 잠잠해질 즈음 샤넬은 스위스 망명 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온다. 샤넬은 방돔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리츠 호텔의 스위트룸을 거처로 정하고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녀는 크리스티앙 디오르, 지방시 등 이미 많은 신예 디자이너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패션계에 재도전장을 던졌다. 여제의 귀환이었다. 이후 샤넬은 과거의 눈부신 영광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세계를 착실히 구축하며 디자이너의 전설로서 스스로의 자리를 만들어 갔다. 그녀의 옷은 미국에서 새롭게 인기를 얻었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샤넬의 편하고 자연스러운 여성미를 강조한 옷들이 각광받았기 때문이다.

패션은 지나가도 스타일은 남는다: '패션은 지나가도 스타일은 남는다'라는 말은 샤넬이 남긴 중요한 말이다. 그녀가 디자인한 옷은 유행을 타고 사라질지라도 그녀가 만들어 낸 여성 옷의 기준은 영원히 남아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전해 오고 있다. 샤넬은 1971년 디자이너로서는 최고의 인생이었으나 여성으로서는 파란만장한 삶을 리츠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마감한다. 그녀의 시신은 스위스 로잔에 묻혔다. 현재 샤넬사는 칼 라거펠트라는 불세출의 남자 디자이너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샤넬이 남긴 말처럼 그녀는 떠났으나 그녀의 스타일은 샤넬사에 남아 있다.

3. 권력을 움켜쥔 철의 여인



빅토리아 여왕_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소박한 과부 여왕

유럽사에 있어서 19세기는 영국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렸다. 19세기 영국은 대표적인 선진 산업 자본주의 국가이며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인 동시에 대표적인 제국주의 나라였고 빈부격차가 극심한 나라였다. 19세기 영국의 영광은 그 영광의 그늘 뒤에 가려진 사회 하층민과 약소국의 희생 덕택에 가능한 것이었다. 빛과 어둠의 시대, 영광의 이면에 잔혹한 착취를 숨기고 있던 시대, 그 시대를 사람들은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른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광: 빅토리아 시대는 1837년부터 1901년까지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이 통치하던 64년의 기간을 의미한다. 19세기의 2/3에 해당하는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기 동안 영국은 전무후무한 역사상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다. 영국 고유의 전통은 이때 와서 비로소 정돈되었고, 세계 곳곳에 영국 식민지를 두어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확보하였다. 산업혁명을 일으킨 국가답게 선구적으로 산업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를 쓸어 담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던 의회 민주주의도 두 개의 당으로 정리하여 정착하였다. 그 이면에 무수한 사회정치적 문제들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영국은 세계 최고의, 최대의 그리고 최선의 국가였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시기, 영국의 군주는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그녀의 존재는 그 상징성만으로 19세기 영국의 행보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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