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인문학
구효서 외 지음 | 경향미디어
구효서 외 지음
경향미디어 / 2011년 4월 / 288쪽 / 13,000원
1부. 사람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인문학, 퇴계의 길을 따라 걷다_ 신창호
인문학, 삶에 관한 열정: 삶에 관한 열정은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이라는 우주를 아우르는 모든 존재를 살리는 길과 연관된다. 특히, 20세기 후반부터 왕성하게 펼쳐진 다양한 캠페인, 시민운동이나 대안교육, 녹색정치, 평화운동 등 생명을 옹호하는 활동은 '살림生'의 지평을 확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우주적 화해和諧는 물론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해와 신뢰는 어떤 양식이 되었건, 인간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그것을 학문적으로 다루는 핵심에 인문학이 자리하는 것이다.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을 한마디로 정돈하기에는 난점이 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을 탐구하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인간성이나 인간다움과 연관된, 포괄적 의미의 인간에 대한 성찰! 문화를 창출하는 인간의 속성은 도덕, 종교, 미학, 철학적 가치 추구 및 역사적 자기반성의 경험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경험은 문학과 예술, 종교적 믿음과 실천, 철학적 사유로 표현되고 기록된다. 따라서 인문학의 대상은 현재까지 존재하는 문학작품과 예술작품, 역사/종교/철학/인류학적 저서들이다.
동양의 전통 학문에서 말하면 인문학은 이른바 '문학, 역사, 철학'이라는 문사철文史哲로 대변된다. 유교儒敎의 《사서오경四書五經》이나 《사기史記》, 《자치통감資治痛鑑》, 불교의 여러 경전, 도교의 노자나 장자가 그 내용의 주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유儒 불佛 도道에서 추구하는 가르침은 그들의 종지宗指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공통으로 추구하는 핵심 영역은 수양修養이다. 그것을 심신수련心身修練이라고 해도 좋고, 정신수양精神修養이라고 해도 좋고, 마음공부라고 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선인들이 보기에 각각의 경전에는 인간이 온전하게 사람다움으로 성숙할 수 있는 핵심적이고 거의 절대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것이다.
퇴계와 《자성록自省錄》: 퇴계의 성姓은 이李씨이고, 이름은 황滉이다. 어릴 때 집에서 별도로 쓰던 이름을 자字라고 하는데, 경호景浩라 불렀다. 그리고 퇴계退溪는 호號, 즉 또 다른 이름이다. 우리 조상들 중 유명한 사람들은 대부분 호가 있다. 어떤 사람은 수십 개를 가지고 있기도 한데, 퇴계의 호도 도유陶臾,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본관과 고향을 나타내는 관향貫鄕은 진보眞寶이다. 퇴계는 조선 역사에서 국보급 유교 사상가로 불린다. 왜냐하면, 공자가 유교를 창시한 이래 맹자孟子, 주자朱子를 거치고 난 이후 유학자 중에서 특히 뛰어난 지성이기 때문이다.
《자성록》은 특히 이러한 퇴계 선생의 덕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저술이다. 많은 편지 가운데 자신의 사상적 원숙기라고 할 수 있는 58세 때 22통을 엮은 《자성록》은 형식적으로 선생의 '자기 성찰','자기 반성'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유교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담고 있으면서, 유교의 공부론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훗날 일본의 야마자키와 오오스카, 다카가에게 전해져 일본 유교의 기초가 된다. 야마자키는 이 책을 숙독함으로써 마음의 눈을 뜨고, '신명神命과 같이, 부모와 같이'《자성록》을 존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오오스카는 본래 양명학자 였는데, 《자성록》을 읽고 정주학의 참뜻을 깨달아 주자학으로 전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퇴계의 《자성록》은 일본 유교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퇴계의 학문은 유교가 추구하는 '위기지학僞己之學'을 기본으로 한다. '위기지학'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데, 인격함양을 위한 수양과 더불어 사회생활을 위한 올바른 도리와 질서를 탐구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다. 자기의 재능과 본분을 알고 그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자기 공부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함께 나누는 공부이다. 이것이 유교의 전통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다.
공부에서 마음의 병, 즉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를 없애는 방법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휴식과 여가를 즐기며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퇴계는 그러한 방법을 통해 세상에서 일할 때의 곤궁함, 출세 지향, 이해득실에 대한 집착, 명예욕 등을 버리라고 권고한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스트레스의 근원이다. 욕심을 줄일 때, 혹은 욕심을 나눌 때, 스트레스는 이미 저만큼 물러나거나 줄어들게 된다. 마음을 비우고 산과 들을 산책하며 시내의 물소리와 산천의 새소리, 한가로이 노니는 금붕어나 비단잉어를 감상하는 여유를 가져 보라. 일할 때는 일하고 그 사이사이에 휴식과 여유를 가져서 기쁜 마음으로 삶을 영위하라. 신바람 나게 사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지 않겠는가!
추사 김정희 선생과의 대담_ 한승원
하늘의 이치를 따라 흘러가는 것(天理流行): 추사와 나와의 인연은 보통으로 두터운 것이 아니다. 추사에 관한 기록을 구해서 읽고, 그의 발걸음 닿는 곳을 쫓아다니고, 추사의 삶을 소설로 형상화시키느라 두 해 동안을 내내 나부댔다. 잠자리에 들면서도 추사 생각, 산책을 하면서도, 여행을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추사 생각을 했다. 새 한 마리 날아가는 것, 벌레 한 마리 기어가는 것, 먼 바다에서 달려오는 파도, 구름 한 장 흘러가는 것을 추사의 눈으로 보고, 들꽃 한 송이에서 향기가 풍기는 것을 추사의 코로 냄새 맡고, 솔바람 소리, 풍경 소리, 염불 소리, 버들 숲에서 우는 꾀꼬리 소리를 추사의 귀로 들으면서, 추사의 뇌파로 사유했다. 그러다가 추사가 된 꿈을 꾸었다.
추사와의 만남: 어느 날 한낮에, 잠을 자다가 선잠을 깨어 밖으로 나갔는데, 토굴 마당가의 감나무 숲 그늘 아래 평상에 연한 회갈색의 삿갓에다 잿빛의 도포차림에다 갈색의 나막신을 신은 조선조의 70대 초반 늙은 선비 한 사람이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 그 노인에게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르신은 어디서 오신 누구십니까?"그가 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추사일세." 자그마한 독 안을 울리고 나오는 듯싶은 목소리에 쇳소리가 들어있었다. 추사는 미리 준비하고 온 말을 나에게 던져주었다. "나, 추사는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까지 잠깐 과천 청계산 밑의 초당에서 머물렀는데, 항상 짙푸르면서도 텅 빈 하늘(太虛)의 이치를 따라 흘러가고(天理流行), 구름 속을 노닐었네."
추사 글씨의 기괴함과 고졸함에 대하여: 나는 추사의 글씨에 대해 물었다. "언제부터인가 이 땅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기괴하게 글씨를 쓰면 '추사체 같다'고 말해버립니다. 선생 글씨의 특징을 기괴함과 고졸(古拙, 예스러우면서 못나 보이고 서투름)함에 있다고 말하는데, 무슨 뜻입니까? 선생께서 남기신 '추사체'라는 것은 일부러 독특하게, 기괴하게 쓴 글씨라는 것입니까?"
추사가 대답했다. "억지로 기괴하고 고졸하게 쓰려고 하는 것, 그것은 진실로 기괴함과 고졸함이 아니네. 사실 기괴함과 고졸함이란 것은 내 몸의 우주 속에 들어 있네. 가령 금강산의 기괴함과 고졸함은 우주라는 자연 속에 들어 있는 기괴한 모습, 고졸한 모습이 드러난 것이네. 글씨는 붓으로 쓰는 것이지만, 사실은 붓이 쓰는 것이 아니네. 원래 먹물 속에 그 글씨가 들어 있었지. 붓은 먹물을 묻혀 종이 위를 지나갈 뿐이지만, 종이에 영원히 남은 것은 먹물이네. 나는 먹물 속에 들어 있는 글씨를, 물 흐르듯이, 꽃 피듯이 종이 위에 꺼내 건져놓고 있을 뿐이야."
명작 세한도歲寒圖에 대하여: "줄기는 없지만 칼 같은 잎사귀와, 봉이나 흰 코끼리의 눈 같은 꽃으로 기품을 드러내는 난초가 도학자풍이라면, 줄기가 튼실하고 헌걸찬 소나무는 유학자풍입니다. 세한도는 대단한 명품입니다. 그 그림을 그리게 된 내력을 말씀해주십시오."
추사가 대답했다. "소나무가 지맥 속에 뿌리를 깊이 뻗고, 짙푸른 하늘을 푸른 가지로 떠받치고 있는 것을 보면 공자의 모습이지만, 그것이 드리우고 있는 거무스레한 그림자를 먼저 보고 짙푸른 하늘에 우듬지를 묻고 사유하고 있는 자세를 보면 석가모니의 모습이네. 하늘과 달과 별과 구름과 안개와 바람과 새들이 소통하는 소나무의 몸은 신화로 가득 차 있네. 나는 문득 겨울 한파와 적막과 침잠 속에서 다사로운 몸피를 둥그렇게 키우고 있는 우주의 시원을 형상화시켜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네. 그렇다 할지라도 세한도 속에는 당시의 내 처지(실존實存)가 다 함축되어 있네."
불이선란不二禪蘭에 대하여: "추사선생의 또 하나의 명품인 '불이선란'에 대해 한 말씀해주십시오." "상여도 덮지 않은 한 어부의 널이 쓸쓸하게 청계산 기슭으로 가는 것을 보고 온 이튿날, 나는 문득 난이 치고 싶어졌네. 하얀 종이를 펼쳐놓고, 먹을 갈고 붓을 들었네. 한동안 흰 종이만 들여다보았네. 머리와 가슴에 속에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고 오직 하얀 텅 빈 시공만 있었네. 그 시공은 하얗게 눈 덮인 신들의 세상 같았네. 내가 걸어 나온 태초의 시원의 태허만 있었네. 그 속에서 난초 한 촉이 솟아나왔네. 그것은 난초인 듯 싶은데 난초가 아니었어. 그 난초가 말했네. '그대는 나를 그리되 나를 그리지 말고 그대의 태허 같은 텅 빈 마음을 그리시게' 나는 '아, 그렇다'하고 속으로 부르짖었지. 가슴이 떨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기를 거듭했네. 떨리던 가슴이 가라앉았고, 태허의 텅 빈 시공 속에다 마음 한 자락을 그어갔던 걸세."
흘러가는 흰 구름 한 장: "여기 오신 김에 오탁악세五濁惡世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말씀을 해주십시오." 추사는 말없이 턱으로 먼 하늘을 가리켰다. 나는 추사의 턱이 향하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하늘은 텅 비어 있었다. '저 하늘이 어떻다는 것인가'하고 생각하다가, 그의 시 한 대목 '꽃의 있음을 들어 달의 없음을 증명하리'가 떠올라 앞에 앉아 있는 추사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추사가 앉아 있던 평상은 비어 있었다. 어디로 가셨을까,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추사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재빨리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끝없이 깊고 짙푸르렀다. 추사가 하늘이 되어 있었다.
강진 푸른 물에 다산의 마음이 흐른다_ 정민
동천여사東泉旅舍의 사의재四宜齊: 유배지의 첫 거처(1801년 겨울~1805년 가을) 동천여사는 다산이 처음 귀양 와서 머물던 강진의 동문 밖 우물 겸 주막집을 일컫는 말이다. 사학邪學 죄인이란 말에 모두들 두려워 아무도 다산을 받아주려 들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는 주막 노파가 그를 받아주었다. 동문 밖에 찬 우물곁에 있던 주막이었으므로, 다산은 이곳을 동천여사로 불렀다. 동천여사 시절은 신산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의재에서 쓴 다산의 글은 그의 성정을 뚜렷이 드러낸다. 다산이 말하는 4가지 의로움이란 담백한 생각, 정중한 외모, 과묵한 말, 무거운 몸가짐을 가리킨다.
다산초당茶山草堂: 네 번째 거처(1808년 봄~1819년)인 다산초당은 다산이 본격적으로 초당의 공간을 경영하기 시작한 곳으로 이곳에 정착한 이듬해인 1809년 초봄의 일이었다. 가장 먼저 조성한 것은 채마밭이었다. 산자락의 경사가 심해 흙이 쓸려 내려가므로, 돌을 쌓아 단을 만들어 비탈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층마다 각기 달리 채소를 심었다. 다음은 초당 동편의 못을 정비했다. 방아확처럼 좁아 볼품없던 못을 산 밑까지 닿도록 크게 넓혔다. 잡목들을 찍어내고 덤불을 걷어내어 그 자리에 단풍나무와 느릅나무를 심었다. 담장이 터진 곳은 대나무를 심어 보충하고, 언덕 쪽은 버드나무를 심어 가렸다. 혜장(당시 황상이 스승으로 삼았던 스님)은 확 바뀐 초당 풍경을 보고 감탄하며 돌아가 연뿌리를 보내 못에 심게 했다.
연못 정비를 마치고 나서는 못 위쪽 산허리에 바닷가에서 주워온 기암괴석들을 쌓아 석가산 구역을 조성했다. 여러 기록과 <다산도>를 참고할 때 석가산은 현재 다산초당의 모습처럼 못 가운데 삼신산처럼 쌓은 것이 아니다. 무론 정착 초기에 지은 <다산화사> 제2수에 작은 못 중앙에 삼봉三峰의 석가산을 둔 기록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다산화경첩>에 보이는 석가산의 규모는 작은 연못 가운데 세우는 정도의 규모가 아니었다. 초의가 그린 <다산도>에도 이 석가산 구역은 명확히 별도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듬해인 1810년에는 새로 두 칸짜리 작은 띠집을 지어 송풍루松風樓, 또는 송풍암松風菴이라 이름 짓고, 2천여 권의 서적을 갖춰두었다. 송풍루는 책을 갈무리할 서재 공간의 확장을 위해 새로 세운 것이었다. 다산은 동암에 들어설 때면 가득 쌓인 2천 권의 서책 때문에 얼굴이 절로 환해진다고 적고 있다. 그러니까 초당 정착 초기에는 동암이 아닌 서각西閣을 서각書閣이라고도 하여 이곳에 책을 두고 강학을 했는데, 공간이 너무 옹색한데다 해남에서 2천 권의 책을 실어오면서, 동암을 크게 넓혀 서재와 생활공간을 겸하고, 서각 즉 초당은 전처럼 강학 공간으로 활용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다산이 노래한 <다산십이승>을 차례로 꼽으면 이렇다. 1경은 당미묵도當楣墨圖, 즉 처마 밑에 담묵으로 그린 춘산도春山圖요, 2경은 강진만의 연범구파烟帆鷗波다. 3경은 지당어락池塘魚樂, 4경은 장근석천墻根石泉, 즉 담장 아래 돌샘물이다. 5경은 차 끓이는 조그만 부뚜막에 감도는 다연茶煙인 다조뇨연茶 烟이요, 6경은 여앙석구如 石臼, 곧 물동이처럼 생긴 약 찧는 돌절구다. 7경은 거문고를 타는 송단석상松檀石床, 8경은 꽃밭 가의 대나무인 화체종죽花 種竹이다. 9경은 연지홍련蓮池紅蓮, 10경은 대변석경臺邊石俓, 즉 서대西臺 곁 정석丁石 쪽으로 가늘게 난 돌길이다. 11경은 매화나무에 걸린 술병인 노매괘병老梅掛甁이요, 12경은 작약조홍芍藥照紅이다. 다산 12경의 명칭은 따로 표제화 된 것이 없는데, 시의 내용에 따라 필자 임의로 붙여 본 것이다.
2부. 역사의 흔적을 따라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서울 성곽, 그 역사를 걷는다_ 전우용
신성하고 높이 솟은 도시, 서울: 한반도 중앙부에 있는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면적 605.33킬로제곱미터, 인구 1천여만 명의 대도시. 서울에 대한 사전적 정의이다. 지금 서울이란 말은 고유명사이다. 설령 수도가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해도 서울은 서울이다. 그러나 서울이라는 말은 본래 '수도'를 뜻하는 순우리말 보통명사였다. 그래서 고구려의 서울을 평양이라 해도 맞고, 미국의 서울이 워싱턴이라 해도 된다. 서울이라는 말은 높이 올라간다는 뜻의 접두어 '솟'과 너른 들이라는 뜻의 '벌', 또는 울타리라는 뜻의 '울'이 합쳐진 말이다.
신에게 바친 땅과 다른 땅을 구분하려면 표지가 필요했다. 그 표지가 바로 울타리, 성벽이다. 울타리는 '우리'라고도 하고 그냥 '울'이라고도 한다. 백제의 첫 수도 이름 '위례 禮'는 아마 '우리'의 한자 표기일 것이다. 한울타리 안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가 되고, 그밖에 남겨진 사람들이 '남' 또는 '나머지'가 된다. '나'는 '우리' 안의 '낱낱'일 뿐이다. 성벽을 쌓는 일은 '경계'를 그어 우리와 남을,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일이었다. 우리와 남이 싸울 때면, 성벽은 당연히 전선戰線이 되었다. 성벽 안에 사는 사람들은 도시민이자 신성한 땅에 사는 사람들로서, 스스로를 그저 그런 땅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과 구별했다. 선민의식이라 해도 좋고 특권의식이라 해도 좋다.
서울의 성벽과 큰 문, 작은 문: 지금 서울의 강북 지역에 한양군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8세기 중반인데, 한양이란 '한산 이남, 한수 이북의 땅'이라는 뜻이다. 조선 왕조는 백악 아래 궁궐을, 궁궐 좌우에 종묘와 사직을 각각 지은 뒤, '백악 - 낙타 - 목멱 - 인왕' 네 산의 능선을 이어 도성을 쌓고 문을 내었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인 18세기에 이중환은 《택리지》에 이렇게 썼다. "외성外城을 쌓으려 했으나 둘레의 원근遠近을 결정짓지 못하던 중,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곧 녹아 사라지는 것이었다. 태조가 이상히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 모양이다." 서울은 눈(설, 雪)을 따라 쌓은 울타리, 즉 '설울'에서 변한 말이라는 속설을 다시 풀어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