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버트런드 러셀 지음 | 비아북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버트런드 러셀 지음
비아북 / 2011년 3월 / 264쪽 / 13,500원
PART 1 정치 정부는 아무리 불합리한 것이라도 일반인들이 믿게 할 수 있다. 만일 내게 충분한 규모의 군대가 있고 그 군대에게 일반인들의 몫보다 훨씬 많은 보수와 훨씬 좋은 음식을 제공할 권력이 있다면 장담컨대 나는 30년 이내에 "2 더하기 2는 3이다", "물은 뜨거울 때 얼고 차가울 때 끓는다" 따위의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여러 터무니없는 사실을 국민 대다수가 믿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설사 이런 믿음이 형성된다 해도 음식을 끓이고 싶을 때 솥을 냉장고에 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을 차갑게 하면 끓는다는 믿음은 주일의 진리로서 신성화되고 신비화될 수는 있으나 일상생활에 적용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신비스러운 교의를 부인하는 언사는 불법화될 것이고, 이단적인 견해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말뚝에 묶인 채 '얼어 죽을 것'이다. 공인된 교의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교단에 서거나 힘 있는 직위에 오를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최고위층만이 술자리에 마주 앉아 모두가 바보짓이라고 속닥이면서 폭소를 터뜨리고 다시 술을 들이킬 것이다. -「환영받지 못하는 에세이」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신들이 이타적인 동기에서 움직인다는 믿음을 심음으로써 직위를 손에 넣는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자극적인 요소의 영향을 받으면 이런 믿음이 더 쉽게 받아들여진다. 자극적인 요소는 관악대와 가두연설을 비롯해서 불법적인 폭력, 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발전한다. 무질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대중을 흥분 상태로 몰아넣으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그들을 속여 넘길 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나는 이런 방식을 대단히 싫어한다. 사람들이 나를 지나치게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윤리학과 정치학에서 보는 인간 사회」
조직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일의 발생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다. 우체국은 전자의 예이고, 소방대는 후자의 예이다. 이 두 조직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다지 이견이 없다. 어느 누구도 우편배달 서비스에 반대하지 않으며, 아무리 불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도 불이 나서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은 충동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막아야 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한 나라의 군대는 다른 나라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존재한다(모든 나라가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군대는 공격을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자기 나라의 군대를 두고 좋지 않은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조국의 땅이 잔인한 정복자의 발에 짓밟히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역적이다.
반대로 국가 안보를 위해서 군대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적국이 될 가능성이 있는 나라를 옹호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조국에 해를 끼치는 존재이다.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평화를 지키려는 조국의 흔들림 없는 열정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나는 1936년에 독일과 관련해서 앞서 말한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히틀러를 칭송하느라 열변을 토하던 대단히 고결한 독일 여성의 입을 통해서였다. -「과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고통도 어리석음도 인간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운명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혜와 인내와 달변이 머지않은 미래에 인류를 스스로 자청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리라고 확신한다. 물론 그전에 인류가 자멸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이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나는 늘 상당히 낙관적이다. 하기야 나이가 들수록 그 낙관주의는 점점 소박해지고 행복은 점점 멀어져가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인생은 날 때부터 고해라는 숙명론자들의 의견에는 여전히 공감할 수 없다. 과거와 현재에 존재하는 불행의 원인과 오늘날 존재하는 불행의 원인을 따져보기는 어렵지 않다. 그 중 가난과 역병과 기근은 자연을 다루는 인간의 능력이 미숙해서 생겨난 것이다. 전쟁과 억압과 고문은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품는 적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암울한 신조 때문에 자라나는 병적인 고뇌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모든 외적인 성공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깊은 내면의 갈등 속에 몰아넣는다. 이 모두는 불필요한 것이다. 이 모두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잘 알려져 있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공동체들이 불행을 겪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불행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행복보다, 심지어는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무지와 습관과 신념과 열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위태로운 이 시대에는 불행과 죽음을 열망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자기 앞에 희망이 펼쳐질 때면 분노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기억의 초상」
PART 2 심리 문명사회의 생활은 너무나 단조롭다. 문명사회의 생활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옛 선조들이 사냥으로 충족시켰던 충동을 해롭지 않은 방식으로 발산할 수 있어야 한다. 인구는 적고 토끼는 많은 호주에서는 모든 사람이 토끼 수천 마리를 죽이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원시적인 충동을 충족했다. 그러나 사람은 많고 토끼는 적은 런던이나 뉴욕 같은 곳이라면 원시적인 충동을 충족시킬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내 생각에는 도시마다 부서지기 쉬운 작은 카누를 탈 수 있는 인공 폭포와 인조 상어들이 득실대는 수영장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루 두 시간씩 이 기발한 괴물들과 함께 지내게 해야 한다. -「노벨상 수상 연설」
인류학자들은 사람을 사냥하던 파푸아 사람들이 백인 권력자들 때문에 늘 해오던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모든 의욕을 잃고 어떤 일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사람 사냥을 허용하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심리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전혀 해롭지 않은 다른 활동을 찾아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이야기이다. 정도는 다를 수 있지만 문명사회의 사람들은 미덕의 희생자인 파푸아 사람들과 비슷한 입장에 서 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공격적인 충동과 창조적인 충동이 있지만 사회는 그런 충동들을 충족시키는 것을 금한다. 사회는 축구경기와 자유형 레슬링 따위의 대안을 제시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루라도 빨리 전쟁이 사라지기를 바란다면 태곳적 미개인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본능들을 해롭지 않게 충족시킬 방법을 진지하게 고찰해야 한다. 내 경우에는 탐정소설을 읽으면서 충동을 충분히 발산한다. 나는 탐정소설을 읽을 때 살인자의 입장에 서기도 하고 사냥꾼 노릇을 하는 탐정의 입장에 서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대리 체험이 미약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을 위해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권위와 개인」
인간이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긍심을 북돋아줄 수 있는 온갖 구실이 동원되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다. 따라서 우리는 창조의 목적이다. 우리는 미국인이다. 따라서 미국은 신이 세운 나라이다. 우리는 백인이다. 따라서 신은 함과 흑인인 그의 자손들을 저주한다. 우리는 개신교도이다. 따라서 가톨릭교도를 싫어한다. 혹은 우리는 가톨릭교도이다. 따라서 개신교도를 싫어한다. 우리는 남성이다. 따라서 여성은 무분별하다. 혹은 우리는 여성이다. 따라서 남성은 잔인하다. 우리는 동양인이다. 따라서 서양은 난폭하고 거칠다. 혹은 우리는 서양인이다. 따라서 동양은 나약하다. 우리는 머리를 써서 일한다. 따라서 교육받은 계층이 중요하다. 혹은 우리는 손을 써서 일한다. 따라서 육체노동만이 기품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아주 독특한 가치를 지닌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이런 자긍심으로 무장하고 밖으로 나가 세상과 맞서 싸운다. 자긍심을 가질 수 없을 때 우리는 열등감을 느낀다. 평등의식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웃과 대등하다고, 자신이 이웃보다 뛰어나지도, 처지지도 않는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인생이 전쟁이 되는 일도, 무모한 용기를 주는 도취성 신화에 의지할 필요도 줄어들 것이다. -「환영 받지 못하는 에세이」
우리의 우울한 기분을 돋우기 위해 언젠가 태양이 폭발해서 전 인류가 눈 깜짝할 사이에 가스로 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천문학자들이 있다. 나로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지, 혹시 일어난다면 언제 일어날지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장담컨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인간은 어쩔 수 없고, 제아무리 뛰어난 천문학자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사례에서는 아무리 생각을 쥐어짜도 소용이 없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해도 상황을 변화시킬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한 가지 면에서 쓸모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신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준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우리가 신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구!"라고 분통을 터뜨리는 독자가 있을 수 있겠다. 당연히 독자들은 '우리 시대 최고의 어리석음'이라는 병을 앓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소련 공산당 정치국이나 미국 기술 관료들의 행동을 보면 무신론을 떨쳐버리고 전능한 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변화하는 세계의 새로운 희망」
PART 3 종교진화론이 풍미한 뒤로 인류에 대한 미화는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가 흔히 듣는 이야기는 이런 식이다. 진화를 이끄는 것은 위대한 신의 섭리이다. 수백만 년에 걸쳐서 진흙만 존재하는 시대 혹은 삼엽충 시대를 보내고, 공룡과 거대한 양치류의 시대, 벌과 야생화의 시대를 보내면서 신은 창조의 절정을 준비해왔다. 마침내 때가 무르익자 신은 인류(그런데 그중에는 네로와 칼리굴라, 히틀러와 무솔리니 등 괴짜 인간들도 있다)를 창조했고, 인류가 누리는 지상 최고의 영광은 장기간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합리화했다. 내 생각에 인류는 전능한 신의 최고 역작으로 찬미되어야 마땅하다는 궁색하고 무력한 결론은 지옥의 영원한 벌보다 훨씬 믿음이 가지 않고 훨씬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환영받지 못하는 에세이」
기도와 겸양에만 의지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을 진행시킬 수 없다. 원하는 대로 일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자연법칙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만 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힘은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힘보다 훨씬 크고 확실하다. 신이 호의를 가지고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일지 아닐지는 결코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더구나 기도의 힘은 뚜렷한 한계가 있다. 지나치게 많은 요구를 하는 것은 경건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과학의 힘은 이처럼 뚜렷한 한계가 없다. 예전에는 믿음으로 산을 없앨 수 있다는 말들을 흔히 했다. 요즘에는 핵폭탄으로 산을 없앨 수 있다는 말을 흔히 들을 뿐 아니라 누구나 그 이야기를 믿는다. -「과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미국인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지금까지 유럽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고 앞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것인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유럽인들만이 지닌 독특한 인생관과 세계관은 무엇인가이다.
전통적으로 볼 때 유럽인의 사고방식은 천문학에서 유래했다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밤에 양떼를 돌보면서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 별들은 인간의 통제력과는 완전히 무관한 웅장한 규칙성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회오리바람 속에서 욥에게 나타난 주의 음성은 "너는 묘성을 끈으로 묶을 수 있느냐? 또 오리온자리를 매단 밧줄을 풀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그 답은 "아니오"였다. 그보다 더 의미 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너는 하늘의 법칙을 아느냐? 또 네가 땅에 대한 그의 지배를 확정할 수 있느냐?" 욥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댈 뿐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은 복종하고 섬기는 것만이 어울리는 나약한 피조물이라는 뜻이다. 자존심은 오만이고 인간의 능력을 믿는 것은 불경이다. -「미국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
사람들은 흔히 기독교가 유사 이래로 늘 자비를 베풀어왔고 초대 교회 설립자들의 입장을 존중해온 듯이 말한다. 그러나 중세 교회의 잔학무도한 행동(예컨대 이단자와 마녀에 대한 화형)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완화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자비를 지향하는 일체의 행동에 나선 이들은 정통 세력이 아니었다. 교회는 인체 해부에 반대함으로써 의학 발전을 방해했고, 지질학의 발전에 기겁해서 현재 존재하는 산들 가운데 일부는 이 세계가 시작된 뒤에 생겨났다고 주장한 박물학자 뷔퐁을 소르본대학교를 통해 규탄했다. 최근 교회는 영원한 형벌과 관련한 교리를 서서히 완화하고 있는데 이런 변화는 전적으로 비정통 세력의 공격에 기인한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산아제한을 금지하는 교회의 정책이 효과를 거둔다면 인류는 수소폭탄에 의지하여 인구를 감소시키지 않고는 기아와 빈곤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친애하는 버트런드 러셀」
PART 4 교육 인간은 나무 위에서 생활하던 유인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유인원들은 열대우림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배가 고플 때는 코코넛을 먹고 배가 부를 때는 코코넛을 던지며 놀았다. 늘 쉬지 않고 체력 단련을 한 덕분에 몸놀림이 놀랄 정도로 민첩해졌다. 그러나 오랜 세월 이런 나무 위의 천국이 계속되면서 유인원 인구가 늘어나고 코코넛의 공급이 부족하게 되었다.
인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들이 동원한 방법은 두 가지였다. 숲 중심부에 살던 유인원들은 정확하게 코코넛을 던져서 다른 유인원들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방법을 터득했다. 코코넛에 맞아 유인원들이 죽으면 인구 문제가 조금이나마 완화되니까. 이에 반해서 숲의 주변부에 살던 유인원들은 다른 방법을 찾았다. 이들은 들판을 두루 살피다가 코코넛에 뒤지지 않을 만큼 맛있는 여러 과일을 발견했다. 나무에서 내려와 땅을 딛고 지내는 시간이 차츰 길어졌고, 땅에서 생활할 때는 코코넛보다는 돌이 훨씬 구하기 쉽고 공격하기 용이한 무기라는 것까지 터득하게 되었다. -「변화하는 세계의 새로운 희망」
피히테는 교육은 자유의지를 없애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하며, 학교를 마친 사람들이 교사들이 원하는 바에서 벗어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할 수 없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살던 시대에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이상이었다. 그가 최상이라고 여겼던 제도에서 카를 마르크스가 출현했다. 앞으로는 독재체제하에서 이런 실패작이 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규정된 식사와 주입식 수업, 훈계조의 명령이 결합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권위를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성격과 신념이 형성되어 기성 권력을 비판하는 정신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 것이다. 설령 모든 사람이 불행하게 살더라도 정부가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과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교육의 목적이 사고 능력 대신에 확신을 심어주는 것, 즉 청소년들에게 의문점을 찾게 하고 독립심을 조장하기보다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을 긍정적으로 파악하도록 강요하는 데 있는 한, 자유로운 질문이 차단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교육은 특정한 신조를 진리로 여기는 확신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을 조장해야 한다.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나는 체벌은 어떤 상황에서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벼운 체벌의 경우 그 폐해는 극히 적지만 아무 효험을 보지 못하고 호된 체벌은 잔인성과 야만성을 낳는다고 확신한다. 사실 체벌을 당한 사람이 체벌하는 사람을 전혀 원망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체벌이 습관화되면 아이들은 익숙해져서 체벌을 자연스러운 일로 여긴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 마음속에는 권위를 지키기 위해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는 생각이 자라난다. 권력을 행사하는 직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가르치는 것은 특히 위험하다. -「특별히 유아 교육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