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멋지게 내려놓는 방법, 웰다잉
김진수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김진수 지음
아름다운사람들 / 2011년 2월 / 328쪽 / 15,000원
제1장 내 영혼에 관한 발견소크라테스와 독배
삶은 어디에서 오는가? '죽음으로부터 나온다.'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으로 한 말이다. 그는 독배를 앞에 놓고 죽음의 '저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그것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고 한다. 직관으로 깨달았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논리에는 모순이 있을 수 있지만 직관에는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자의 새로운 발견은 논리가 아니라 대부분 직관에 의한 결과물이다. 인간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탐구한다는 것은, 달이나 화성, 토성, 혜성을 탐구하는 것보다 더 흥미롭다. 나는 왜 '이 세상'에 육체를 갖고 태어났는가? 탄생은 왜 있으며, 죽음은 왜 있는가? 인간은 적어도 자신이 죽기 전에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는 존재이다. 어떤 사람은 일생을 사는 동안 한 번도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또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법인지 배우지도 못한 채 어이없이 죽음을 당한다.
잘사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공부이고, 반드시 배워야 할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잘 사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잘 죽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잘 죽는 법을 배우겠다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다. 가르쳐 주는 학교도 없다. 스승도 없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인간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고정관념이다. 이런 고정관념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한, 사람은 편견에 치우친 마음의 구속을 받고, 정신적 장애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마음의 편견, 정신적 장애를 현자들은 무지(無知) 또는 무명(無明)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소크라테스는 살아생전에 무지와 무명을 말끔히 걷어 내었기에, 사회의 실정법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내려진 독배를 맑은 정신으로 마실 수 있었다.
'이 세상'과 '저 세상'
너무 분명한 사실은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해 버리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저 세상'에 다 있다.
'저 세상'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다 있다.
한 몸의 앞면은 삶이고 뒷면은 죽음이다. 만약에 삶이나 죽음이 어느 하나밖에 없다면 그것은 한쪽 면만 있는 반 몸에 불과한 것이다. 우주에 반 몸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는 하나뿐이다. 큰 우주는 작은 우주를 모두 포함하는 하나이다. 우주는 한 몸이다. 우주가 두 개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시체와 영혼이 다른 우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있는 것이다.
죽음 후에 간다고 믿는 '저 세상'은, 결국은 '이 세상'의 또 다른 표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 있을 때나 죽어 있을 때나 같은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시체가 둥둥 떠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저 세상'으로 가 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시체는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있다. 다만 존재의 형태만 변화할 뿐이다. 인생의 최종적 범주인 삶과 죽음은 우주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이를 일찍이 깨달은 사람으로 장자를 들 수 있다.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박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친구 혜시가 문상을 갔다가 기겁을 하자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음 나도 아내의 죽음에 어찌 슬프고 아득하지 않았겠나. 그러나 돌이켜보니 생명은 원래 없었던 게 아닌가? 혼돈의 흐릿함 속에서 어쩌다 기가 생겼고, 그게 형체가 되고, 다시 생명이 된 것이 아닌가. 그게 또 변해서 이제 죽음이 되었네.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번갈아 오는 것과 같은 것. 아내는 지금 천지라는 거실에 편안히 누워 있다네. 그걸 울고불고 곡을 해서 시끄럽게 해야겠나."
장자는 죽을 때가 되자 그 주위를 둘러섰던 제자들은 오랜 주(周) 문화의 전통에 따라 후히 장사를 지내고 싶어 했다. 장자는 손을 내저었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으로 삼고, 해와 달과 별을 주렴으로 삼아, 만물의 호송 속에 떠나갈 것이다. 장례 준비가 다 되었는데 뭘 더 보태겠단 말이냐?" 짐승과 새들이 뜯어먹을 것이라고 제자들이 걱정하자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땅 위에 두면 까마귀밥이 될 것이고, 땅 밑에 두면 개미 밥이 될 것인데, 굳이 이쪽 밥그릇을 저리로 넘길 일이 무어냐?"
다시 한 번 분명히 해 두자. '이 세상'과 '저 세상'은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우리가 죽는 곳이 '이 세상'이고 또 '저 세상'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이라는 표현을 계속 사용하기로 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미 귀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독자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그러한 단어를 들으면서 두 개의 세상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상을 차원에 따라 두 가지 표현으로 나누어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영혼은 존재하는가?
영혼의 존재를 인식하고 믿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아직까지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좀 더 탐구해 보기로 한다. 종교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살펴보자. 불교에서는 모든 개체적 존재는 하나의 불안정하고 부조화한 흐름에 불과한 것이고, 개체로서 존재하는 마음이나 의식은 실체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다만 그 알 수 없는 실체의 윤회가 실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나의 마음이 인간이라는 것을 붙잡고 있고, '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다른 마음들과 분리된 존재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마야(환영)의 노리개이고, 무지의 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윤회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환각 상태의 파노라마들을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계로 믿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마야와 무지이며, 현상계의 질곡에서 끊임없이 헤매게 만드는 것이라고 불교에서는 말한다. 도대체 영혼이 있다는 얘기인지 없다는 얘기인지 분명하지 않다. 불교 경전에서 하는 말은 고도의 형이상학과 깊은 심층 심리학으로 연계되어 현란하다.
한편 힌두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모든 종파들은 전통적으로 영혼의 존재를 확실하게 믿고 있다. 따라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육체가 죽은 후에도 개체가 천국에 가든 지옥에 가든 불멸한다고 믿는다. 힌두교와 이를 개혁하여 나온 자이나교 및 불교는 바탕이 탄트라 철학에 있다. 따라서 마음으로부터 오는 모든 오류와 환상의 믿음을 내던져 버려야만 존재의 근원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마야가 더 이상 지배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이 카르마의 온갖 속임수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올바른 깨달음이 스스로 문을 열고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나'라는 개체는 사라지고, '나'의 슬픔도 마지막을 고한다고 믿는다. 모든 모습은, 모든 무지는, 진리의 빛에 흩어져 버리고 무극의 속으로 녹아들어 간다. 마음과 물질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고, 드디어 세속적인 의식은 초월적 의식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 초월적 의식체가 영혼이라는 것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설명을 하였지만, 어쨌든 불교에서도 영혼이라는 단어를 얻어 내었다. 불교를 포함하여 현존하는 세계의 모든 유력한 종교에서는 영혼의 존재를 모두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신봉하는 유력한 종교가 영혼의 존재를 가르쳐 주었으며, 현대 물리학에서도 의식체(영체)라는 말로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제2장 생명과 영혼에 관한 몇 가지 궁금증임사체험자는 무엇을 보았나?
사후세계를 경험한 후에 의식이 되돌아와서 깨어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을 임사체험자라고 부른다. 의학 용어로는 NDE(Near Death Experience)라고 한다. 정신병리학자들의 '임사체험' 연구를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국제임사체험연구협회(IANDS)가 이 분야의 연구 활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해 오고 있다. 임사 체험 연구의 일인자로 알려진 미국의 레이몬드 무디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실제로 임사체험을 경험한 사람은 대학교수로 낭포 적출 수술을 받은 마샤 테드라는 환자였다. 그는 수술 도중에 심장의 박동이 멎었고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빨리 구명 기구를 가져와!” 하며 고함치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 의식을 잃고 다음과 같은 신비한 임사체험을 했다. - 내가 천장 쪽에 붕붕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수술대 주위에 있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명히 보였고 수술대에 누워 있는 나를 볼 수 있었다. - 나를 둘러싸고 모두들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고 있는 광경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 모두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려고 했지만, 내 말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 그 방에 있는 사람들과 나 사이에 무언가 알 수 없는 투명한 베일이 있는 듯했다.
- 그때 나는 어떤 통로 또는 터널 같은, 길고 어두운 굴속을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일순 주저되기도 했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불현듯이 찬란한 빛과 사랑으로 가득 찬 세계에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사랑이 넘쳐흐르고, 황홀한 빛이 나를 포근히 감싸 주고 있는 지극히 아름다운 세계였다. - 바로 그때 나는 내 생애 중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놀라고 있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을 정도로 대형 파노라마와 같은 장면이었다. - 그 빛의 장면 속에서, 일전에 죽은 친척 아저씨가 내 옆에 서 있었고, 대학 동기였던 친구, 그리고 조부, 조모, 백모도 같이 있었다. 그들은 빛에 싸여 빛나고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 나는 행복에 겨워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는데, 빛에 둘러싸인 한 남자로부터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아직 살아 있을 동안에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불현듯이 쿵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 육체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신비한 체험을 한 사람의 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다.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임사체험을 하여 ‘저 세상’을 잠깐 들여다보고 온 사람들의 증언을 분석해 보면 몇 가지 공통된 장면이 일치하고 있다. - (의식체가 육체와 분리되어 자유로이 움직이는) 체외 이탈을 경험한다.
- 터널 체험을 한다(또는 튜브와 같은 굴속을 통과하기도 한다).
- (터널을 빠져나온 후) 밝고 아름답고 찬란한 빛의 장소를 체험한다.
-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모든 생애가 순간적으로 비주얼화하는) 파노라마 장면을 경험한다.
- (친하게 지냈던) 죽은 자와의 재회를 경험한다.
(친하게 지냈던) 죽은 자와의 재회를 경험한다.
이상과 같은 임사체험자들의 묘사에 관하여, 사람들은 질식 상태의 환자들이 본 환상 증상에 불과하다고 일축해 버리곤 하는데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케네스 링 박사는 엄밀한 과학적 조사를 통하여 임사체험은 환상 증상이 아니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임사체험에는 기본적 요소의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발현되는 순서가 일정하다. 즉 체외 이탈, 공중에 부유하는 감각, 터널 체험, 빛이 가득 찬 세계 등으로 일어나는 체험의 순서와 내용은 체험자의 성별, 나이, 인종, 지역, 교육 수준에 관계없이 모두 같은 순서와 내용으로 묘사하고 있다."
환상 증상의 경우는 사람에 따라 보이는 환각이나 보이는 순서가 달라서 공통성이 없다. 그러나 임사체험은 정신병자의 환각이나 약물 중독에 의한 환상 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증언에 일관성이 있으며, 이성을 잃어버리고 하는 행동이 아닌 확실한 증언이라는 것이다. 또한, 임사체험자의 증언과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집트 사자의 서』또는 『티베트 사자의 서』가 전해 주고 있는 사후세계 묘사의 내용이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고 있는 점도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육체와 영혼을 연결하는 것은 무엇인가?
레이몬드 무디 박사의 조사 보고 중 하나를 예로 들어 보자. 이 사례에 나오는 주인공은 어느 날, 승용차를 몰고 급히 속력을 내고 달리다가 커브 길에서 도로의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차와 함께 공중으로 붕 떠오른 사건을 경험했다. "앗 큰일이다. 사고를 내고 말았다!" 하고 마음속으로 외쳤는데, 돌연 불가사의한 세계에 돌입한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순간, 주위의 공간에 대한 감각이 없어지고,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의식도 사라지고, 자신의 혼이 차 속에 있는 신체로부터 빠져나왔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내 머리 부분이 빠져나가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무언가 큰 것부터 빠져나가더니 맨 나중에 제일 작은 내 자신(혼)이 나의 신체로부터 빠져나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내 자신이 또 하나의 다른 신체 속에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내 물리적 신체와 똑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약간 반투명체라고 할까요, 그런 느낌으로 물질적인 신체는 아니었습니다. 전혀 색깔이 없는 무색으로 형체만 있는 신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손과 발 같은 것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는 모든 것이 빙빙 돌듯이 휙 지나가는 듯한 속도로 회전하였는데, 혼이 빠져나와 다른 반투명체 비슷한 신체로 들어간 뒤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어지고, 고통이라든가 육체적인 감각도 전부 일순간에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 다음 승용차는 바닥에 부딪쳤고, 그의 신체는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가 버렸다고 한다. 구급차에 실려서 병원에 옮겨지기까지의 두세 시간은 위독한 상태였다. 그동안에 그의 혼은 물리적 육체를 빠져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가를 반복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리적 육체를 빠져나와 있을 때는 얇은 투명한 신체의 틀을 가진 캡슐 같은 몸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계속하였다. "나는 누워 있는 내 육체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다른 위치에서 나의 누워 있는 신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불가사의한 경험을 한 것입니다. 나 자신(혼)은 투명하기도 하고 투명하지 않기도 한 그런 별개의 다른 신체의 머리 부분에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여기에는 주인공이 얘기하고 있는 '별개의 다른 신체'란 일본의 오하시 박사가 설명한 '주형(鑄型)'과 같은 영혼의 틀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결국, 인간에게는 '물질적인 육체'와,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우리의 육체와 같은 현상을 한 '반투명 몸체'가 또 하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에게는 추측하거나 유추하는 능력이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영위할 때, 무엇을 할 때에 그러한 행위가 어떠한 순서에 의하여 일어나는가를 살펴보자.
집을 지으려고 하거나 건물을 신축하려고 할 경우, 다음과 같은 순서의 행위가 이루어질 것이다.(가) 집을 짓자는 의사 결정이 이루어진다.
(나) 어떤 집을 지을까 하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지으려고 하는 집의 이미지를 만든다.
(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그린 설계도를 만든다. 때로는 완성 예상의 모형을 만든다.(라) 그런 다음 설계도에 의해 실제의 건축 작업이 이루어지고 실질적인 형태의 집이 완성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사항이 (가)와 (나)이다. 이 두 가지 단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작업이다. 그리고 (다)는 예상 모델로서 아직 현실화되기 이전의 단계이다. 마지막의 (라)는 현실의 우리 눈에 보이는 형태의 실행물이다. 여기에서 (다)항이 바로 '반투명의 별개의 몸체'에 해당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즉, 육체로서 현실화되기 직전 상태에서, 미리 같은 형태의 형상을 가진 모델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지고, 이런 설계도와 같은 예상 모형에 따라 실제의 육체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도 '주형'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주형이란 글자 그대로 그것과 똑같은 형태의 완성품이 만들어져 나올 수 있는 틀, 즉 물건의 원형에 해당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