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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김열규 지음 | 비아북


행복

김열규 지음

비아북 / 2011년 2월 / 240쪽 / 13,000원




프롤로그_ 행복은 어떻게 오는가?

오늘날 우리 인생은 경제적 풍요며 물자의 풍요에 얽혀 있다. 그것들에 매달려 있다. 우리는 그것에서 행복의 지표를 찾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첫째 몰골이다. 둘째 몰골은 더한층 딱하다. 행복이 선물이나 경품처럼 주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니 복이란 밖에서 주어지는 피동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복지사회니, 복지국가니 하는 말들이 그걸 부채질하고, ‘복표福票’나 ‘복권福券’이란 말에 주목한다. 복표나 복권은 요행수를 노리는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복은 운수소관이 되고 만다.

요컨대 첫째로는 돈에 겹친 물질적 풍요, 둘째로는 피동적인 요행수, 그 둘에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도 바라마지 않는 행복이 걸려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타락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람직한 행복의 모습에 더한층 마음써야 한다.

첫째, 행복의 궁극은 보람된 일의 성취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 마침내 내가 해냈구나!” 바로 이 한마디에 행복이 있다. 둘째, 누구에게나 행복은 긍정적인 자아실현이자, 자기 실천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야, 드디어 내가 여기에 이르렀구나!” 바로 이 한마디, 그 탄성에 우리의 행복이 있다. 셋째, 이처럼 일의 성취와 자아실현이 자기만족을 넘어 사회에 대한 베풂이 되고, 사회에 대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아, 결국 내가 우리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 바로 이 한마디, 그 다짐으로 우리의 행복은 완성된다.

이 세 가지를 마음에 새기고 행복을 쌓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복 짓기’가 된다. 복을 스스로 만들고 창조하는 것이 된다. 이 책은 이 세 가지 다짐을 전제로 한 ‘복 짓기’를 위해 쓰고 엮은 것이다. 그 자부가 곧 필자의 행복이 되기를 바란다.

Ⅰ 행복의 탄생



행복은 그냥 찾아오지 않는다



행복幸福!

우리 인생에서 최고의 로고이자 구호이자 외침이다. 다들 소리 없이 그러나 끈질기게 마음으로 갈구한다. 그래서 행복은 우리 삶의 지표가 된다. 최고의 그리고 지상至上의 목표가 된다. 무엇 때문에 사느냐? 그 물음에 정해져 있는 가장 큰 답은 행복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

“복 받아라!”, “행복하여라!” 이 말들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인사말에 그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 자신이 스스로 다짐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 자신을 위한 기도와도 같고 또 축원祝願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복 받았다”, 그 기쁨의 외마디에 “땡 잡았다”, 그 환호의 외침은 합창처럼 함께 메아리치게 되어 있다.이런 저런 사연으로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아니, 갈망한다. 그것은 시대가 달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고려시대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덕이란 배 고물에 바치옵고

복이란 배 이물에 바치오니

덕이며 복이며 나아오소이다.



여기에서 고려가요 〈동동〉의 ‘곰배’와 ‘림배’를 배의 뒷전인 고물과 앞전인 이물로 옮겨보았다. 배에 초점을 맞추면 ‘곰’이 뒷전인 고물이 되고 ‘림’이 앞전인 이물이 되지만 그렇게 까다롭게 따질 것 없이 그냥 ‘뒤’와 ‘앞’이라는 말로 옮겨놓아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옮겨질 것이다.

덕은 뒤에 바치옵고

복은 앞에 바치오니

덕이며 복이며 나아오소이다.



그 축복받을 배가 우리를 향해 푸른 물살을 가르고 바람결을 저으며 달려오고 있다. 그것이 가르며 나아가는 강물도 덕과 복으로 파랗게 출렁대고 있다. 큰 배에 하나 가득 실은 것이라고는 그저 덕이고 복이다. 이제 곧 물가에 닻을 내리며 우리에게 덕이니 복이니 하는 것을 한 짐 가득 풀어놓을 것이다. 그 짐을 받아들인 우리의 안방은 덕복방이 되고 복덕방이 될 것이다.

행복의 행은?

그런데 행복幸福이란 글자는 보다시피 행과 복이 짝을 이룬 것이다. 그러니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기 전에 행과 복이 무엇인지부터 묻지 않을 수 없다. 행倖은 옥편에서는 ‘다행 행’으로 표기한다. ‘요행 행’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늦가을 감나무 밑에서 낮잠 자는 사람의 입으로 잘 익은 홍시가 떨어진다면 그것은 진짜 요행이다.

그런가 하면 면흉免凶이라고 해서 흉측한 일을 뜻하지 않게 면하거나 피하는 것도 행幸이라고 한다. 누군가 비가 사납게 쏟아지는 산길을 간다고 치자. 그가 심하게 경사진 비탈 아래를 지나는데 느닷없이 바위가 굴러 떨어진다. 다행히도 바위는 불과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내리박힌다. 하마터면 그는 바위에 깔릴 뻔했다. 그렇다. 이같이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벗어나는 것, 그것이 이를테면 행幸이다.

요행은 한자로는 보통 僥倖이나 僥幸이라고 쓴다. 요僥도 ‘요행요’라고 읽으니 행幸과 이른바 이음동의어, 즉 소리는 다르고 뜻은 같은 글자이다. 그런데 행幸에 사람 인人 자를 붙인 행倖은 원래 행幸과 뜻이 같지만 굳이 둘을 구분할 때는 우연히 뜻하지 않게 얻는 행幸을 행倖이라고 쓴다. 그래서 행倖을 ‘뜻하지 않는 행’이라고도 읽게 된다. 흔히 쓰는 ‘요행수僥倖數’란 말을 우연히 덕을 본 것, 뭔가 생각지도 않게 좋은 것을 얻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행倖이다. 그렇게 행幸과 행倖이 서로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행복을 두고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 같다.

그런데 행幸은 ‘바랄 행’이나 ‘사랑할 행’으로도 쓰인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사람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것이 행복이란 의미일 것이다. 간절한 소망, 애틋한 사랑, 그것이 바로 행이고 행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幸자가 붙은 말을 좋아하고 앞서 소개한 것 외에도 행운幸運, 다행多幸, 천행天幸등과 나란히 행복이란 말을 즐겨 쓴다. 행운이니 다행이니 천행이니 하는 말에는 요행의 뜻도 있다.

그러나 행복에는 요행의 뜻이 포함되지 말아야 한다. 하긴 요행의 행복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 흔히 쓰이는 말처럼 ‘굴러 들어온 복’을 구태여 차낼 것은 없다. 두 손 들고 환영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굴러 들어오는 요행의 행복만을 멍청히 손가락 빨며 기다릴 수는 없다. 멀뚱멀뚱 기다린다고 해서 반기는 얼굴로 찾아들 행복이 아닐 테니까. 그런 행복이 있다 해도 아주 드물어서 있으나 마나일 테니까. 행복은 요행이 아니라 필연이어야 한다. 마땅히 얻을 것을 얻는 것이어야 한다.

행복은 다섯 가지 씨앗, 오복



복에는 다섯 가지가 있기에 이를 일러서 오복五福이라고 했다. 다섯 손가락을 꼽아가며 간절히 소망하는 오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그리고 고종명考終命이다. 수壽는 ‘목숨 수’로 장수, 곧 오래오래 사는 것을 의미한다. 부富는 말할 것도 없이 부자가 되는 것이다. 강녕康寧은 ‘편안할 강’에 ‘편안할 녕’이니 그냥 편안함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강이 건강健剛의 강이라서 결국 ‘몸 편함’과 ‘마음 편함’으로 이해하게도 된다. 요컨대 건강과 안녕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유호덕攸好德은 조금 성가신 말이다. 유攸는 ‘닦을 수修’와 같은 뜻으로 풀이된다. 그래서 유호덕은 좋은 덕, 이를테면 착한 인격이나 품격을 닦고 수양한다는 뜻이 된다. 고종명考終命도 글자를 하나하나 캐면 쉽지 않다. 고는 ‘사고思考한다’고 할 때의 그 고이지만 엉뚱하게도 ‘죽음 고’, ‘마칠 고’ 말고도 ‘수할 고’, 이를테면 ‘장수할 고’로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수고壽考니 고명告命이니 하면 살 만큼 살다가 삶을 마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고종명도 수고나 고명과 같은 뜻의 말이다.

다섯 가지 복 중에도 유독 관심을 끄는 말은 다름 아닌 유호덕이다. 오래 건강하게 부자로 사는 것은 누구나 소망하는 바이다. 하지만 덕을 닦고 인격을 수양하는 것을 복으로 삼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좋은 인격이 복이라니 정말 특이하다. 물론 좋은 인품을 갖추면 저절로 마음이 편할 것이다. 욕심이 지워진 마음은 봄바람마냥 푸근할 테니까. 남을 미워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고 살갑게 대하면 자신의 가슴에는 청아한 가을 하늘빛이 어릴 것이다. 그 심정을 일러서 담연자약淡然自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대체 누굴까? 인간이 누릴 다섯 가지 복 가운데 유호덕을 넣은 이가? 그의 높은 덕을 칭송하면서 우리도 그런 칭송을 들을 수 있도록 애쓰고 싶다.

어느 황소의 고종명

녀석은 무지막지했다. ‘나무처럼 단단하고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뾰족하고 날카로운 뿔’로 무장한 이 황소는 천하무적이었다. 녀석은 다른 황소를 만났다 하면 싸움을 걸었다. 지는 법이 없없다. 녀석은 패배를 몰랐다. 그 녀석이 사랑에 빠졌다. 다른 암소들보다 더 날씬하고 귀엽고 어여쁜 젊은 암소에게 넋이 빠진 것이다. 녀석은 다른 암소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일편단심으로 그 암소에게만 애정을 바쳤다. 그래서인지 녀석은 더욱 잘 싸우게 되었다. 사랑이 녀석을 더한층 강하게 한 것이다.

싸움과 사랑! 그 둘이 녀석의 목숨이었다. 어느 황소도 녀석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어떤 다른 암소도 녀석의 관심을 얻지 못했다. 녀석은 자신의 사랑을 빛내기 위해 더 무서운 황소와 상대하고 싶었다. 그러나 녀석을 대적할 황소는 없었다. 결국 녀석은 지금까지 상대했던 그 어떤 황소보다 강한 적수를 만났다. 스페인 최고의 투우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녀석은 용감하고 당당하게 투우사와 싸웠다. 하지만 투우사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는 워낙 뛰어난 투우사인데다가 날카로운 칼로 무장하고 있었다. 황소는 결국 투우사의 칼에 심장을 찍히고 만다. 녀석은 사랑하는 암소에게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숨져갔다. 천하무적의 용사답게 녀석은 떳떳하게 생을 마쳤다.

『노인과 바다』 로 유명한 미국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일편단심』이다. 원문 그대로의 줄거리는 아니고 주제를 더한층 살릴 수 있도록 살짝 각색한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평소의 용명勇名을 그대로 지키며, 아니 더한층 빛내며 녀석은 생을 마쳤다. 녀석의 마지막은 그야말로 고종명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는 꺾여서 오히려 빛이 난 것이다.

Ⅱ 일상과 행복이 만났을 때 - 한국인의 행복론



삶을 풍요롭게 사는 법_ 일과 행복



20세기 시단詩壇을 대표하는 독일의 시인 R. M. 릴케에게는 최고이자 최선의 한마디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직 일하라!”였다. 젊은 시절 무명의 시인이었던 그는 파리에서 조각의 거장 로댕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로댕은 그에게 “트라바이에 투주르!”를 가르쳤다. ‘언제나 일하라’는 의미의 이 프랑스어를 시인의 모국어로 “누어 아르바이텐!”으로 고쳐 가슴에 새겼다. 그리하여 그 한마디에 자신의 시를 걸고 인생을 걸었다. 아르바이트라는 단어는 우리 귀에도 익숙하다. 대학생 등이 돈을 벌기 위해 부업처럼 하는 일을 ‘아르바이트’라고 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일의 몫은 크고 중요하다. 노동, 작업, 수공手工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일은 사회인에게는 그 삶의 전부이다시피 하다. 그들에게는 휴식도 여가도 일을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고 학생들에게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공부가 일이다. 그러니 어른이든 아이든 누구나 일을 한다. 일에도 등급을 매길 수는 있다. 큰 일, 작은 일, 어려운 일, 쉬운 일, 재미난 일, 괴로운 일 등등. 하지만 보통은 땀과 어려움이 연상된다. ‘일 났다’고 하면 그 일은 소동이다. 한 수 더 떠서 ‘큰일났다’고 할 때의 일은 사고다. 그만큼 일은 힘겹고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일은 괴롭고 힘겨울수록 보람이 크고 수확도 늘어난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좋게 마무리될 수도 있는 것이 일이다.

일은 행복의 계기가 되고 단서가 된다. 어쩌면 일이야말로 모두에게 삶의 보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주 줄여서 ‘일이 행복이다!’라고 다짐 둘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기에 우리 한국인은 즐겨서 ‘일복’이란 말을 써온 것이다. 너무 무거운 일에 지치고 시달리면서 ‘일복 터졌다’고 말할 때는 한탄이 되겠지만, 모처럼 얻은 일거리에 ‘일복이 터졌다’고 하면 이는 즐거움의 표시가 된다. 그런 일복은 일의 크고 작음을 굳이 가릴 것 없이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복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일에는 배돌이, 먹는 데는 감돌이”라는 속담은 재미있다. 일할 때는 꾀를 부려서 배배 돌다가도 먹을 때는 빠지지 않고 감돈다는 뜻이다. 이 속담은 “일은 송곳으로 매운 재 긁어내듯 하고 먹기는 도짓소 먹듯 한다”는 또 다른 속담과 사촌지간이다. 우리는 일을 할 때 배도리가 아닌 감돌이가 될 일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동양적 행복의 극치_ 달관과 체관, 그리고 행복



죽기 살기로 땀 흘려서 얻는 행복이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을 놓아버림으로써, 아니 모든 것을 편안히 품음으로써 얻는 행복도 있다. 전자의 행복이 서양인의 행복이라면 후자의 행복은 동양인의 행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동양인의 행복은 달관과 체관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지를 설명하기란 그리 녹록지 않다. 우선 우리의 마음부터 들여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평가할 때 우리는 흔히 ‘마음이 좁다’거나 ‘마음이 넓다’는 말을 쓴다. 마음 대신 품을 써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좁으면 스스로 고생한다. 품이 좁으면 스스로 외돌아진다. 마음을 열면 소망이 이루어진다. 소견이 짧으면 세상이 비좁아진다. 소견머리가 트이면 온 세상이 환해진다. 그래서 품이 좁고 소견이 궁색하면 스스로 행복을 해친다. 성깔이 모나면 스스로 복을 내친다. 반대로 도량이 크고 넓으면 복이 지레 알아서 찾아든다.

도량度量의 도度는 길이를 재는 자를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량量은 양을 재는 되를 가리킨다. 그런데 도량은 사람의 마음을 두고도 사용된다. 생각의 길이가 길고 마음의 부피가 크면 ‘도량이 넓다’고 한다. 도량이 넓으면 사소한 일에 매이지 않는다.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심중을 이해할 줄 알고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게 된다. 그럴 때 ‘국량局量이 크다’고도 말한다. 국局은 ‘재간 국’이라고 읽는다. 그런데 이 경우 재간才幹을 재주나 꾀로만 여겨서는 안된다. 남을 헤아리는 넓은 마음의 씀씀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도량이나 국량 대신 아량雅量이란 말을 쓸 수도 있다.

이렇게 큰 아량이나 깊은 국량과 견주어서 쓸 수 있는 말로 달관達觀과 체관諦觀이 있다. 여기서 달관의 달澾은 ‘통달’이나 ‘달성’의 달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달통達通의 달과도 통해 있고 달견達見의 달과도 통해 있다. 그래서 달관은 사리에 밝은 뛰어난 식견으로 널리 보고 크게 살핀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외통수로 고집을 부리지 않고 편견을 얽매이지 않음도 의미한다. 무엇이든 한 가지 관점에 사로잡히는 대신 아량을 가지고 넓고 멀리 보는 것이 곧 달관이다.

체관의 체諦는 단념한다는 뜻을 지닌 ‘체념’의 체이다. 무슨 일을 하다가 잘 풀리지 않을 때 나 몰라라 내던지는 것이 체념이다. 체는 원래 ‘살필 체’이고 ‘자상하게 알 체’이고 ‘이치 체’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이치를 자상하게 살피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다름 아닌 체이다. 그래서 달관과 거의 같은 뜻의 말이 된다.

누군가 무엇에든 달관하고 체관하면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갈팡질팡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마음의 여유를 누리게 된다. 편견에서 벗어나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 무엇이든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해가 비치면 해그림자 짓고, 달이 뜨면 달그림자 짓고,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 설레는 널따란 호수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 달관이다. 이에 이르면 진정 복된 마음의 경지가 열릴 것이다. 그렇게 달관하는 사람은 인생의 어느 고비에나 마음이 편하다. 그의 마음은 봄날의 숲 속 같고 가을날의 맑은 하늘 같을 것이다. 잔잔한 행복감, 나긋한 행복감에 다소곳하게 마음을 맡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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