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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천 년의 지혜를 담은 그릇

오윤희 지음 | 불광출판사
대장경, 천 년의 지혜를 담은 그릇

오윤희 지음

불광출판사 / 2011년 2월 / 398쪽 / 20,000원



1. 장(藏) 이야기




대장경은 그릇이다

- 금구옥설金口玉說은 본래 만들거나 망가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금구옥설이 담기는 곳은 그릇器입니다. 그릇이 만들어지거나 망가지는 것은 자연의 운수입니다. 망가지면 다시 만드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이라는 글의 한 부분이다. 우리나라 고려대장경에 대한 얘기를 할 때 빠질 수도, 뺄 수도 없는 글이다. '대장경 판을 새기면서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올린 기고문'이라는 말이다. 522글자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글이다. 양은 적어도 많은 내용을 함축해서 담고 있는 명문장이다. 고려 적에 만든 고려대장경,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상식이 이 짧은 글에서 유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 외에는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만한 기록이나 증거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장경은 그릇이다. 그리고 그 그릇에는 금구옥설이 담긴다. '금으로 된 입에서부터 나오는 옥 같은 말씀', 즉 부처님의 입과 그가 하신 말씀을 높여 부르는 표현이다. 부처님은 물론 석가모니라는 실존 인물이다. 보통 '금구'라는 표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칭하기도 한다. 대장경은 부처님이 했던 말씀들을 담은 그릇이다. 이 간결한 문장 안에 대장경에 대한 많은 생각들이 담겨 있다. 이규보가 가진 생각이고, 당시 대장경의 편집자들이 가졌던 생각이다. 말씀은 원래부터 있었다. 새로 만들거나 망가지는 것은 아니다. 망가지는 것은 다만 그릇일 뿐이다.

대장경은 글자를 새긴 목판을 가리킨다. 이것도 물건이다. 망가지게 마련이다. 그릇이 깨지면 새 그릇을 구하듯이, 대장경이 타버리면 새로 새기면 된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을 굳이 얘기하는 까닭은 그릇이 깨어졌기 때문이다. 금수만도 못한 달단, 곧 몽고군대가 침략하여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던 대장경을 고스란히 태워 버렸다. 대장경은 나라의 큰 보배이다. 소중한 보배가 망가졌으니 후회해도 소용없고, 일이 어렵다고 미룰 수도 없었다. 힘이 들어도 애를 써서 새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위로는 임금과 아래로 백관의 신하가 부처님과 성현, 삼십삼천에게 기원의 말씀을 고하는, 이를테면 기도문이다.

큰 대大자, 대장경은 말하자면 큰 그릇이다. 큰 그릇 안에 담긴 큰 말씀들이다. 대장大藏, 곧 '큰 그릇'의 어원은 '세 개의 그릇' 삼장三藏에서 유래한 것이다. 손오공의 이야기에 나오는 삼장법사를 통해 널리 알려진 그 사람이다. 불교는 지금의 인도 지역에 뿌리를 든 종교이다. 삼장이니 법장이니 하는 말들도 모두 그 지역 언어를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말들이다. 삼장은 트리피타카(Tri-pitaka)를 번역한 말이다. '트리'는 셋이라는 뜻이고 '피타카'는 광주리나 바구니와 같은, 무언가를 담는 그릇이다. 경은 '수트라(Sutra)'를 번역한 말이다. 수트라는 실이나 끈을 가리킨다. 엮거나 꿰기 위한 실, 여기서부터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 나왔다.해인사 팔만대장경은 'Tripitaka Koreana'라는 표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이 말은 더 어색하다. 고려대장경을 서구어로 번역하면서 만든 표현일 텐데, 트리피타카라는 범어에다 고려의 라틴어식 표현을 엇대어 놓았다. 뜻으로만 따지자면 '고려 삼장'이 되겠다. 어쨌든 대구는 잘 맞아서 서양 사람들이 부르기에는 편할지 몰라도 아무튼 이상하다. 무엇보다 삼장과 대장에는 거리가 있다. 삼장은 대장경의 일부분이고, 대장경에는 삼장이라는 그릇들, 그 범주에 담기기 어려운 수많은 문헌들, 예를 들면 사전류 목록류 전기류 역사책 여행기, 심지어 이교도의 성전까지 다양한 문헌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난이라는 그릇 - 다문장(多聞藏)

부처님은 아난을 그릇器이라고 부른다. 20여 년 동안 엎지른 말씀들을 모조리 주워 담은 그릇. 이규보가 가리킨 대장경은 목판이라는 그릇이다. 달단의 군대가 태워먹은 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이다. 해인사에 있는 재조대장경은 팔만 장이 넘는 목판대장경이다. 당시 부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의 두 배쯤 되는 목판들이 보존되어 있었을 것이다. 과연 큰 그릇이다. 목판을 그릇이라고 하는 거야 그러려니 할만도 하겠지만, 사람을 그릇이라고 하다니.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다. 당시에는 인쇄술은커녕 종이도 문자도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담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의 기억뿐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의 말씀을 아난에게 담아 두었다. 그 시절의 아난은 스승의 가르침을 노래로 만들어 늘 외우고 부르며 다녔다. 부르기도 좋고, 듣기도 좋았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렇게 함이 기억하기가 편했을 것이다. 늘 기억하고, 외우고, 부르다보면 노래도, 그 노래가 담겨 있는 가르침도 저절로 몸에 밴다는 이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외우고 부르는 일을 '가르침을 받아 지닌다'고 표현한다.

여래의 그릇 - 여래장(如來藏)

부처님을 부르는 말에 여래如來라는 말이 있다. 깨달음을 성취한 채로 중생들에게 잘 오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것을 '여래의 법장法藏'이라고 부른다. 여래가 가진 보물창고, 가르침의 창고다. 부처님이 하는 말씀을 따르고, 그것이 법이며,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르침은 부처님의 말의 창고, 법의 그릇으로부터 나온다. 그 안에 담겨진 법의 총체, 그동안 하고 다녔던 말씀들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가르침을 편다는 것은 여래의 장, 여래의 창고를 열어젖히는 일이다. 창고를 열고 그 내용을 남김없이, 감춤 없이 제자들에게 건네주는 일이다.

여래의 그릇에서 아난의 그릇으로

부처님의 창고는 한약방에 가면 볼 수 있는 약장을 닮았다. 부처님은 가르침의 기능을 의사의 역할에 비유한다. 응병여약應病餘藥,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의사는 병을 치료하기에 앞서 환자의 병을 알아야 한다. 그 후 치료 방법을 선택하여 약을 지어 준다. 약의 재료들은 빽빽하게 구분된 약장 안에 들어 있다. 감초처럼 많이 쓰이는 약재는 큰 서랍 안에, 귀한 약재들은 작은 서랍 안에 종류별로 분류가 되어 있는 것이다. 병에 따라 치료방법에 따라 서랍을 열고, 약재를 꺼내서 약을 짓는다. 그것이 부처님이 했던 일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려할 때 아난을 불러다 타이르는 말이 있었다. '그릇은 그릇으로서의 감당할 기능이 있는 것이다.'그 말씀의 기억들이 아난이라는 그릇 안에 차곡차곡 담겨 있는 것이 신비롭지 아니한가. 이것은 열어서 흘리는 일과 모아서 담는 일의 차이이다. 부처님이 하는 일과 아난이 하는 일의 차이. 부처님은 흘리고, 아난은 담는다. 그것은 부처님의 그릇에서 아난이라는 다른 그릇으로 옮겨 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은 부처님의 그릇이 망가질 때를 예비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면 아난의 그릇에서 퍼내 쓰면 된다.

그릇을 깨라, 말씀을 받아내라

아난은 그릇이다. 그게 아난의 역할이고 아난이 부처님 옆에 딱 붙어 있었던 이유다. 그릇의 역할은 담아두는 것이다. 담아두는 까닭은 언젠가는 꺼내서 쓰자는 것이다. 꺼낼 수도 없고 쓸모도 없다면 방법은 하나다. 그릇을 깨뜨려야 한다. 자발적으로 열지 않으니 억지로라도 깨뜨려야 한다. 우여곡절을 거쳐 드디어 아난이 말문을 연다. 기억들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는 말 한 마디에 대중들은 새삼 부처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렇게 아난의 그릇은 깨졌다. 그래서 삼장의 결집이 시작되었다.

결집, 모으는 일의 뒷면에는 이렇게 깨뜨리는 일, 깨지는 아픔이 있었다. 옮겨 담기 위해서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아픔이다. 이처럼 모으는 일은 깨지는 일이기도 하다. 결집의 과정에 있었던 갈등에 관한 이런 이야기들, 사실 이런 이야기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말투나 내용이 거칠기도 하거니와 기록마다 사뭇 차이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삼장의 결집이 아난의 기억을 중심으로 이뤄졌듯 이후의 전승도 기억에 의존한다. 결집의 자리에 모였던 스승들, 그들이 기억했던 이야기들이 사람을 따라, 집단을 따라 옮겨 간다. 당연히 기억의 전승에 미묘한 차이들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승과 소승의 이야기에 차이가 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전승의 계통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 다른 그릇, 성중聖衆의 기억

한문대장경의 전통에서 결집에 관한 전승은 대개 세 가지 종류의 전거에 의존한다. 첫째는 아함경과 부처님 열반 시기를 기록한 열반경류, 둘째는 율장, 셋째는 대승경론의 전승이다. 열반경도 소승계열의 것과 대승계열의 것이 따로 전해온다. 물론 내용에도 차이가 있다. 그러나 삼장의 결집이 가섭과 아난,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들을 대표하는 아라한들이 합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변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아난을 '법장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나의 법장을 담는 그릇'이라고도 했다. 그런 까닭도 자세히 설명했다. 출중한 기억력에 그릇으로서의 덕성들을 고루 갖추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백 성중은 어떤가? 개인의 그릇으로 치자면 아난에 비할 자가 없었다. 집단이라는 그릇이 갖는 덕성들도 검증된 적이 없다. 아난이 아직도 건장하고 멀쩡한데 새삼스레 왜 새로운 그릇이나, 결집이 필요했던 것일까? 아난이 건재하는 동안만이라도'법장을 지키는 사람'으로서의 기능이나 자존심 정도는 유지시킬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가섭은 아예 아난을 배제시켜 버렸다. 그릇만 깨뜨리면 된다고 했다. 완전한 기억 기계, 아난을 제쳐두고 기억력도 시원찮고 의견도 분분한 대중을 선택했다. 가섭의 선택이라고 했지만 결집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가섭과 대중은 늘 한 편으로 그려지고 있다. 가섭은 부처님과 대중이 함께 인정한 대중의 대표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섭의 의견은 개인의 의견이라기보다는 종종 '가섭과 오백 성중은'이라는 복수의 주어로 표현된다. 주어로만 따지자면 가섭과 성중은 한 몸이다. 부처님은 말년에 여래의 법장을 가섭과 아난 두 사람에게 부탁했다. 어찌 보면 오백 성중의 결집은 이미 이 부탁 안에 들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난만이 지니고 있던 법장을 가섭의 대중과 함께 나누라는 뜻이었다는 말이다. 부처님의 선택이 그랬고 가섭과 대중의 선택이 그랬다.

2. 대장경, 기억을 찾아가는 모험의 역사



구스리 바회예 디신들

2007년 4월 3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고려대장경 천 년의 해 선언식'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2011년은 고려 초조대장경 조성을 시작한 지 꼭 천 년이 되는 해, 그 천 년의 해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내외에 알리고, 천 년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 행사였다. 천 년의 생일을 맞는 고려 초조대장경의 기이한 인연을 이 이상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 인연의 의미를 고려인들의 노래 고려가요에서 찾은 것만 해도 극적이었지만, 그 노래에 담긴 부서진 구슬과 천 년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끈이라는 비유는, 천 년 초조대장경의 운명이랄까, 너무도 잘 어울리는 멋진 비유였다. -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리까 / 천 년을 외롭게 지낸들 믿음이야 끊어지리까 -

고려 초조대장경을 비장秘藏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초조대장경이 일본의 한 사찰 수장고 안에 감춰진 채 오랜 세월 동안 그 정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교토에 있는 남선사南禪寺라는 사찰이다. 바로 그 남선사의 비장에서 초조대장경의 일부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에 산질되어 전하던 초조대장경을 발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65년, 이때가 한국 학자에 의해 초조대장경의 존재가 처음으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이때까지 초조대장경은 공식적으로 '몽고군의 침략 때 소실된 대장경'이었다. 물론 이전부터도 일부 학자들 사이에는 초조대장경 인쇄본의 일부가 일본에 보존되어 왔다는 정도는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초조初雕라는 말은 '처음으로 새긴'이라는 말이다. 목판에 도장을 새기듯 글자를 새기고, 도장을 찍듯 찍어서 책을 만드는 이른바 '목판 인쇄술'로 만들었기 때문에 '새겼다'고 부른다. 초조대장경은 고려 현종 2년(1011)에 새기기 시작했던 목판대장경으로, 송나라 개보대장경開寶大藏經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새겨진 대장경이다. 이 대장경을 '초조'라고 부르는 까닭은, 두 번째로 새긴 재조再雕대장경이 있기 때문이다.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이 그것이다. 몽고 침략으로 초조대장경이 불에 타 없어졌기 때문에 '다시 새긴 대장경'이라고 한다. 세간에서는 보통 해인사의 대장경을 그냥 '고려대장경'이라고 부른다. 굳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것도 '고려시대에 만들었던, 대장경이기 때문이고, 넓은 의미로 고려대장경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한문대장경

천 년의 대장경, 고려대장경은 한문대장경이다. 한문대장경이란 말은 한문으로 씌어진 대장경이라는 말이다. 1942년, 조선기독교서회 편집총무였던 백낙준이 시라하라라는 이름으로 조선총독부도서관 기관지 <문헌보국文獻報國>에 'Tripitaka Koreana'라는 글을 네 차례에 걸쳐 연재한 바 있다. 영문으로 작성된 글을 일본어 번역과 함께 소개하였다. 일본어 제목은 물론 '고려대장경'이다. 1960년대부터 고려대장경과 영문 목록을 출간했던 루이스 랭카스터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화 위원으로 『조선불교통사』를 저술한 이능화가 이 용어를 처음 썼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분명한 근거는 없다.

대장경이라는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용어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글자, 장藏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삼장의 결집도 한문대장경의 결집도 법장의 계보를 잇고 있기 때문이다. 이규보의 정의대로 대장경이 '금구성언을 담는 그릇'이라면 금구성언이라는 부처님의 말은 부처의 기억을 담는 그릇이다. 말에는 생각이 담기고, 기억이 담긴다. 그리고 생각이나 기억은 다시 부처님의 체험, 깨달음을 담는 그릇이다. 담고 담기는 일, 부처님은 말에다 생각과 의도를 담아 얘기하고, 제자들은 말을 받아서 말로부터 생각과 의도를 해독해 낸다. 그리고 해독해 낸 생각과 의도를 자기 몸에 재현시키기 위해 실험을 계속한다. 그것이 수행이고 그 결과가 해탈이고 그렇게 가르침이 완성된다.

만국무쌍萬國無雙의 고려대장경

- 당 송 원의 세 나라의 대장경들이 오래 전에 우리 땅에 들어와 아직까지 훼손되지 않고 여러 지역 명산고찰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들 경본은 지극히 아름답기는 하지만, 지극히 완전하지는 않다. 또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당 송 원나라의 20여 종의 대장경 외에 '조선교정각판장본'이 있다. 우리나라 여러 지역, 십여 사찰에 남아 있어 간간히 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의 극치일뿐더러 완전함의 극치다. 만국에 견줄 데가 없는 완전한 경본이다. -

앞에 인용한 구절은 일본의 인징(忍 , 1645~1711)이라는 학승이 남긴 말이다.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완전한, 만국에 비길 데가 없는 완전한 경본"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정토종의 승려였던 인징은 『심지관경心地觀經』이라는 경전을 읽으면서 당시 일본에 유통하던 '황벽장黃蘗藏'에서 다수의 오류를 발견하고 교정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후 대장경의 대교對校를 필생의 과업으로 생각하다, 1706년부터 1710년까지 4년에 걸쳐 고려대장경과 '명북장明北藏'에 대한 대교를 완성하였다. 여기서 '조선교정각판장본'이 바로 고려대장경이자 재조대장경 곧 해인사 팔만대장경이다. 당 송 원 등 오랜 세월에 걸쳐 조성되었던 어떤 나라의 어떤 대장경도 고려대장경에 필적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고려대장경에 대한 인징의 평가는 두 가지 측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인징은 고려대장경이 다른 판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무결한 교정본이라는 사실을 철저한 대교를 통해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이러한 과학적인 평가가 있었기 때문에 이후 일본에서 출간한 대장경들이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삼게 되었다. '만국무쌍의 선본'이라는 선언은 말하자면 '불교문헌의 표준화'선언이었다. 고려대장경이 국제표준, 이를테면 글로벌 스탠다드였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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