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대화론
데이비드 봄 지음 | 에이지21
창조적 대화론
데이비드 봄 지음
에이지21 / 2011년 2월 / 264쪽 / 15,000원
01. 커뮤니케이션에 대하여라디오, 텔레비전, 비행기, 인공위성 등을 위시한 현대기술 덕분에 최근 수십 년 동안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든 거의 즉각적으로 다른 지역과 연락이 가능한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세계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발전된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커뮤니케이션은 오히려 유례없는 규모로 붕괴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처에서 커뮤니케이션이 붕괴되는 것을 우리 모두가 절감하고 있다. 경제 혹은 정치체제가 다른 국가의 사람들은 전쟁이 아니고서는 소통할 기회가 거의 없다. 같은 국가 내에서도 사회계층, 경제적 지위, 정치적 성향이 다르면 서로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대다수 현대인들은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불만 또한 팽배한 상황이다. 때문에 소위 '커뮤니케이션 문제'라는 것을 해결하려는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들을 살펴보면 자체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람들이 자기 집단 이외에 다른 사람들의 말에는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히 한다면서 혼란만 가중시키는 사례도 드물지 않으며, 좌절한 사람들이 이해와 신뢰가 아니라 오히려 공격과 폭력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보도록 하자. 커뮤니케이션은 '공통의', '공유의' 등의 의미를 가진 라틴어 단어 'Commun'에 접미사 'ie'를 붙인 형태다. 접미사 'ie'는 'fie'와 유사하며 '만들다. 혹은 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커뮤니케이션의 동사 형태인'전달하다(to communicate)'의 한 가지 의미는 '뭔가 공통된 것을 만든다(to make something common)'이다. 즉, 정보나 지식을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가능한 정확한 방식으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의미는 커뮤니케이션이 나타내는 모든 내용을 포괄하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대화를 생각해보자. 대화에서는 한 사람이 뭔가를 말한 다음, 상대방이 그에 대해서 반응을 한다고 해도 의미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의미가 비슷할 뿐,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대화에서는 참가자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특정 개념이나 정보를 그대로 공유하려고(make common)하지 않는다. 오히려 참가자들이 공동으로(in common)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 간다고 말 할 수 있다. 함께 새로운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있다고.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혹은 힘을 모아 공동 행동을 하기 위해 모인 장소에서 참가자들 각각이 자유로운 듣기를 '가로막는' 자기 내면의 미묘한 두려움과 희열을 감지할 수 있을까? 이런 의식 없이 들리는 모든 내용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자신을 다그쳐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참가자들이 전달되는 내용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으로,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는' 내면의 움직임에도 온전한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새로운 무엇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개인과 사회의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의의를 지닌 무엇을.
02. 대화에 대하여대화 집단(dialogue group)을 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경우, 첫 번째 화제는 보통 '대화'가 된다. 구체적으로는 대화가 무엇이며, 대화를 하는 이유와 의미는 무엇인가 등등을 토의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대화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와는 다르다. 단어의 유래를 알면 심층적인 의미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대화라는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도록 하자. 대화라는 영어 단어 'Dialogue'는 그리스어 'Dialogos'에서 유래했다. 'logos'는 '말(Word)'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말의 의미'라고 생각할 수 있다. 'dia'는 영어로 'though', 즉 '통과하여, 사이로' 등의 의미다. 특히 'dia'가 '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대화가 반드시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다는 생각은 버려라.
대화를 토론, 즉 'discussion'이라는 단어와 비교해보자. 'discussion'은 'percussion(충돌)', 'concussion(충격)' 등의 단어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 'discussion'은 정말로 뭔가를 나눈다는 의미이며, 분석이라는 개념을 중시한다. 토론에서는 다양한 관점들을 분석하고 나눈다. 토론에는 분명 나름의 가치가 있고, 제한적이며, 다양한 관점을 넘어 멀리는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각자의 아이디어를 던져서 주고받으며, 게임의 목적은 점수를 따고 이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자신의 아이디어를 뒷받침하는 용도로 활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토론의 가장 흔한 형태이다.
하지만 대화에서는 누구도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이기면 결국 모든 사람이 이기는 격이다. 대화의 정신은 토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대화에서는 점수를 얻으려는 시도도, 자신의 견해를 지배적인 견해로 만들려는 시도도 없다. 오히려 누군가의 실수를 발견하고 시정하면 전원이 점수를 얻게 된다. 모두가 승자가 되는 소위 '윈윈(win-win)'상황이다. 다른 게임에서는 항상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지만 대화는 공동 참여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대화와 사고 : 우리가 갖고 있는 다른 의견들은 예전 사고(thought)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경험, 다른 사람한테 듣거나, 듣지 않았던 내용 등이 우리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관계로 우리의 의견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무조건 지키려고 하는 반응을 보일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사실 무의미하다. 만약 옳지 않다면 굳이 고수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옳은가의 여부에 상관없이 그것을 고수하려고 한다. 의견이 도전을 받으면, 자신이 공격을 받는 것처럼 느낀다. 이처럼 의견은 각자의 가정이고, 각자의 경험에 불과한데도 '진리'처럼 느끼고 싶은 경향이 있다.
사실 대화의 목적은 전체적인 사고 과정을 고찰하고, 집단적으로 일어나는 사고 과정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과정에서 사고에 진정으로 깊은 관심을 기울여본 적이 없다. 사고에는 열심이었지만 내용에만 주목했을 뿐 과정에는 아니었다. 왜 우리는 사고 과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가? 우리가 기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작동시키면 기계는 망가질 것이다. 우리의 사고도 역시 하나의 과정이며,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계가 고장 나듯이 사고도 멈출 것이다.
대화에 참가하기 : 대화의 기본 개념은 아마도 사람들이 둥글게 앉는 것이리라. 이런 자리 배치는 누구도 특별대우를 하지 않으며, 참가자가 누구와도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원칙적으로 대화를 이끄는 지도자와 의제 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도자가 있고 의제가 있는 모임에 익숙하다. 때문에 대화에서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불안에 맞서고, 이를 극복하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한두 시간 대화라는 것을 하다보면 그런 불안은 사라지고, 오히려 더욱 자유스럽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사실이다.
대화에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의미를 공유하는 일이다. 사회란 사람들과 조직들의 연결망 같은 것이다. 사회 덕분에 우리는 함께 살 수가 있다. 하지만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우리가 같은 문화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의미를 공유해야 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의의, 목적, 가치 등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붕괴된다. 현재 우리 사회는 일관성이 없으며 의미의 공유도 원활치가 않다. 과거에는 잘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우리가 가진 각기 다른 가정들이 암묵적으로 의미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문화 : 사회는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살기 위해서 만든 인간관계의 결합물이다. 사회는 규칙, 법률, 제도를 비롯한 다양한 것들로 결합되어 있다. 인간들은 그런 것들을 가지자고 생각하고, 동의했고, 실행에 옮겼다. 또 그 배경에는 문화가 존재한다. 문화란 바로 공유한다는 의미이다. 정부 건설을 예로 들어보자. 사람들이 정부를 건설하려 하는 경우, 그들은 어떤 유형의 정부를 원하는지, 어떤 정부가 좋은 정부인지, 무엇이 옳은지 등등에 대한 공통의 의미에 동의해야 한다. 때문에 문화가 다르면 정부가 하는 역할도 달라진다. 사회의 일부가 이런 의미에 동의하지 않으면 정치투쟁이 벌어지고, 정치투쟁이 심해지면 내전으로까지 발전한다.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고 존속하려면 의미의 공유와 일관성으로 이끄는 '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 전체가 붕괴될 것이다. 공유하는 의미야말로 사회를 진정 하나로 묶어주는 시멘트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우리 사회는 아주 질이 낮은 시멘트로 접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질 시멘트로 건물을 지으면 금세 금이 가고, 결국에는 무너진다. 지금 우리에게는 역할을 제대로 해줄 질 좋은 시멘트와 접착제가 절실하다. 구성원이 공유하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대화를 넘어서 : 우리가 의미를 소통하고 공유하지 못한다면 사랑은 없어질 것이다. '아인슈타인과 보어' 사이에 사랑은 그들의 소통이 불가능해지면서 서서히 증발해버렸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소통한다면 동료애, 참여, 우정, 사랑을 키우고 또 키우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이다. 여기서 제기해야 할 진짜 질문은 이렇다. 이런 과정의 필요성이 느껴지는가? 핵심 질문은 그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무언가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대화에서 우리가 이처럼 일관성 있는 높은 에너지를 발산할 경우, 단순히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집단 이상의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 내부에서 새로운 변화가 가능해지고, 우주와의 관계에서도 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이런 에너지는 흔히 '영적 교감(communion)'이라고 불려왔다 '참여'의 일종이다. 초기 기독교들이 그리스어로 'Koinonia'라고 부르던 것인데 어원이 바로 '참여하다'이다. 전체를 나누어 가지고 동시에 거기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집단 전체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우주 전체에.
03. 집합 사고의 본질현대 세계에는 어떤 문제들이 있는가? 사실 너무 많아서 목록 작성조차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는 전쟁, 기아, 고문, 약탈, 질병, 정치적으로 자행되는 온갖 더러운 속임수들을 볼 수 있다. 동서로 나뉘어 대립하는 일종의 양극화 현상도 보인다. 서양은 개인과 자유의 가치를 주장하고, 동양은 모두와 보살핌을 받는 집단 사회(collective society)의 가치를 주장한다. 또한 남과 북의 양극화도 보인다. 여기서 북은 부유하고 남은 가난하다. 구체적으로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남아시아 등지에는 엄청난 문제들이 산재한다. 심각한 빈곤과 부채, 경제 파탄, 총체적 혼란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어쩌자고 우리는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파괴적이고, 위험한 상황, 불행과 직결된다는 것이 빤히 보이는 이런 상황을. 모두가 뭔가에 홀려서 판단 능력을 상실했나 싶을 정도다. 정상으로 보기에도 힘든 상황이 지속되고 있지만 누구도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 같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뭔가 해결책이 나타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예를 들면 민주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이념, 혹은 종교 같은 것에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 희망은 과거에 비해 훨씬 약해졌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아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사고의 작용 방식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실 진정한 위험은 눈에 보이는 사건들, 즉 전쟁, 범죄, 약물, 경제위기, 오염 등에 있지 않다. 진정한 위험은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사고 안에 있다. 특정한 경우가 아니라 항상 그렇다. 누구든 그런 사고에 대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 누구나 사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중대한 오류에 빠져 있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생각한다. "저런 모든 것을 생각하는 것들은 그들이지, 내가 아니야. 나는 올바르게 생각하고 있다고." 나는 이런 태도야말로 잘못이라고 본다. 사고는 우리 안에 스며들어 있다. 이는 바이러스와 비슷한 상황이다. 어찌 보면 세계 곳곳에 사고, 지식, 정보의 질병이 퍼져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바이러스의 확산을 멈출 면역체계를 우리가 갖추고 있는가? 이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인지하고, 인정하고,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사고를 관찰하기 시작하는 순간, 문제의 근원을 보게 된다. 이는 누구한테도 공통되는 사항이다. '저기 있는 어떤 사람(혹은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된 사고를 하는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의 근원은 이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다. 사고 전체 과정에서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는 것이 원인이며, 이는 집단적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의문을 품어야 하는 핵심 가정은 사고가 개인의 것이라는 가정이다. 사실 어느 정도까지는 그렇다. 우리는 어느 정도 사고의 독립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보다 신중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개인적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딱 잘라 말하기에는 사고는 너무 미묘한 무엇이다. 전제 없이 사고는 진정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동안에 진정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일반적인 형태의 사고 대부분은 사실은 개인적이지 않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사고는 우리가 경험한 것의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을 보여주는 능력이 있다. 사고의 이런 속성에 주의를 기울이고 깊이 생각한다면, 개념과 이미지들이 그렇게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 이유를 보다 깊이 통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영어 단어 'Representation'은 이런 맥락에서 참으로 적절한 단어이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re-present', 즉 다시(re) 제시한다(present)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차적인 인식이 뭔가를 제시하고(present), 사고는 그것을 추상적인 형태로 다시 제시한다(re-present)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말하자면 표상은 단순하게 보여주기만 하는 '제시'와 융합되고, 따라서 '제시된' 것이 많은 부분에서는 이미 '다시 제시된' 표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감 없이 '제시된'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알고 보면 감각, 사고, 어쩌면 약간의 통찰 등이 결합된 산물일 수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의 '제시'에 통합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뭔가를 경험하는 방식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represent)'에 달려 있다.
04. 문제와 역설지금까지 우리는 인류가 직면한 다양한 범주의 문제들을 살펴보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무한대로 확산하고 있으며, 결국에는 세계적인 무질서로 치닫게 될 것이다. 이런 총체적인 상황을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가망이 없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인간의 지적 능력과 공동 노력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한 난관에 직면했다는 절망감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문제'라는 단어가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갈등과 혼란 등을 표현하는 데 적절한 것일까? '문제'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거기에 의문을 품을 충분한 근거가 있음을 알게 된다. 나아가 현재의 난관들을 '문제'로 규정하고 대처하는 것이 오히려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