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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가 돌고 세계사가 돌고

우스이 류이치로 지음 | 북북서
커피가 돌고 세계사가 돌고

우스이 류이치로 지음

북북서 / 2008년 11월 / 262쪽 / 12,000원



01.수피즘과 커피




아라비아 펠릭스 - 행복한 아라비아

커피가 유럽에 전해졌을 때, 그 상품의 이미지에는 아득히 먼 아라비아 저편에 펼쳐진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행복감이 감돌았다. 새카맣고 전혀 새로운 종류의 음료를 눈앞에 둔 베르사유의 귀부인들은 저 먼 오리엔트에 대한 몽상에 빠졌고, 런던의 신사들은 홍해는 어떤 빛깔일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구약성서에는 아라비아의 사막 저편에 펼쳐진 풍요로운 나라의 존재를 전하고 있다. 막대한 양의 황금과 향료를 싣고 예루살렘의 솔로몬 왕을 찾아갔던 여왕 시바가 다스렸다는 땅이 아라비아이다. 로마인들은 나라 전체에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아라비아 남쪽 땅을 '아라비아 펠릭스Arabia Felix' 우리말로 하면 '행복한 아라비아'라고 불렀다.

널리 알려진 커피의 기원설 중 하나는 아라비아의 산양치기 칼디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칼디가 산양 무리를 새 목초지로 데리고 갔는데, 산양들이 흥분해서 밤늦게까지 잠들지 않았다. 당황한 칼디는 근처의 수도원을 찾아갔다. 수도원장 스키아들리가 조사를 해보니, 산양들이 어느 작은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도원장은 그 열매를 끓인 음료를 수도사들에게 마시게 했다.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수도사들이 예배 때 졸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 후로 수도원에서는 저녁예배 때마다 그 검은 음료를 마시게 되었다." 이 전설은 17세기 이탈리아 출신의 동양학자 파우스테 나이로니가 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산양과 양치기가 등장하는 목가적 이야기가 어딘지 유럽적인 냄새가 난다.

커피의 기원설에는 이슬람의 수도사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단순히 위대한 수도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종파를 지목하고 있다. 모두 '수피'라고 불리는 이슬람 신비주의 수도사들이며, 좀 더 한정을 지으면 알 샤드힐리가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샤드힐리 교단의 수피들이다. 이 교단과 커피는 깊은 관련이 있어서, 알제리에서는 커피를 '샤딜리에'라고 부른다. 따라서 동아프리카가 원산지인 커피나무에서 커피라는 음료를 만들어낸 것은 이슬람 신비주의 수도사, 즉 수피들이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커피의 탄생

우리는 여기서 '커피의 탄생'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 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도 세계 각국에서 비슷한 울림으로 불리고 있는 커피라는 명칭의 어원이 된 아라비아어의 '카와Qahwa(커피나무)'라는 단어는 커피가 나오기 이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혼란을 감수하고 써보면, 카트(커피나무 열매)도 카와이고 와인도 카와이다. 따라서 '커피의 탄생'이란 나중에 커피로 불리게 되는, 즉 아프리카의 '부누Bunnu'라고 불리는 커피콩을 이용해 만든 음료가 아라비아어의 '카와'라는 명칭과 결합되면서 이슬람 문화권에 정착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럽의 사전에는 '커피(카와)'가 본래 와인이었다고 기록되고 있고, 그 의미로 '혐오', '식욕이 없다', '조심하다' 등을 들고 있다. 게다가 카와란 커피이고 와인이고 카트이기도 하다고 덧붙인다. 커피는 참으로 별난 음료다. 대체로 몸에 나쁘다. 마시면 흥분하게 되고 잠들지 못한다. 식욕이 사라진다. 그래서 살이 빠진다고들 하지만, 그런 커피의 네거티브한 특성을 그대로 포지티브하게 받아들여서, 세계로 전파하는 데 기여한 것이 바로 수피들이다. 수피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은 8세기말,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바빌론 근처에 있는 쿠파라는 마을이었다. 수피라는 말은 양털을 뜻하는 '수프'에서 비롯됐다고 하는데, 양털로 된 하얀 망토를 몸에 두르고 황야에서 종교적 고행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하얀 양털 옷은 흰옷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 황야에서 수행하는 그리스도교 은수자(숨어서 도를 닦는 사람)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수피즘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받은 커피는, 대수롭지 않게 마셔버리는 음료가 아니다. 수피에게 있어서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이념의 카와를 받들어 누린다'는 뜻이다. 커피는 알라신의 백성이 신의 계시를 받아들일 때 마시는 것이다. 커피는 소금과 빵처럼 신성시되었다. '소금과 빵'이라는 표현이 손님에 대한 후한 대접을 상징하게 된 데 반해, 역사에 새롭게 등장한 커피가 순식간에 그 위상을 나란히 하면서 손님에 대한 충성과 안전을 보장하는 후한 대접의 상징이 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02. 커피 문명의 발생적 성격



아라비아 모카

구약성서에 전해져 오는 대홍수가 지나간 후 노아가 방주에서 대지로 내려선 장소로 터키의 아라라트산을 비롯한 몇몇 장소가 후보로 거론되는데, 아라비아에도 노아가 방주에서 첫발을 디딘 곳이라 전해지는 산이 있다. 예맨의 고도古都 사누아 옆에 치솟은 나비수아비브 산이다. 이 산기슭에서 커피재배가 시작되었다. 대홍수가 진정되고 나서 노아가 제일 먼저 행한 것이 와인을 빚기 위한 포도를 심는 일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슬람의 와인' 카와의 재배지로는 명실 공히 적합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커피나무는 연중 서리의 위험이 없는 온난한 기후와 연간 1,200mm의 강수량을 필요로 한다. 이 조건을 갖춘 계곡이나 비탈은, 아무리 '행복한 아라비아' 예맨이라고 해도 제한적이었다. 이런 한계는 앞으로 전 세계 커피재배지에서 대규모로 반복되는 현상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아라비아에서 생산된 커피가 출하되는 항구의 이름을 따서 '아라비아 모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딱히 이상할 것은 없다. 모카는 17세기 중반 무렵에 이미 연간 커피 8만 포대(1포대 60Kg)를 출하하고 있었다. 그 외의 항구에서도 모카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물량을 출하하고 있었지만 모카가 예맨의 커피를 대표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유럽중심주의의 역사관에 의한 것이다. 오직 모카 항구만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유럽선박이 직접 기항을 허락받아 커피를 매입할 수 있었다.

카이로의 거상

커피교역에 수많은 중소상인들이 관여하긴 했지만, 커피가 이슬람 세계에서 정당성을 확보하고 여러 대도시에 천 곳이 넘는 커피집이 들어서게 되자 커피교역은 전과 달리 막대한 이익을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카이로의 거상들이 커피교역을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그들은 곧바로 커피교역의 독점권을 남아라비아 상인들로부터 빼앗았다. 단순히 이익에 대해서 약삭빠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카이로의 거상들은 커피를 그들의 교역활동의 중심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역사적 필연이 있었다. 카이로의 상인층 투자르가 유럽인의 인도양 진출로 인해 피해를 입은 오리엔트교역의 손실분을 메우기 위한 대응책에 쫓기고 있던 중에 마침 신이 내려준 선물처럼 출현한 신상품이 커피였다.

레반토 상인

동지중해 연안은 오스만투르크제국에 의해 통일되었고, 그 안정된 정세를 기반으로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활약했던 유럽 각국의 상인을 '레반토 상인'이라고 불렀다. 그들도 역시 커피교역에 뛰어들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가격수준의 차이였다. 자본의 본원적 축적에 있어서 외국무역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동지중해에서 사들인 상품이 충분한 이윤을 남기면서도 유럽 각국에서 날개 돋친 듯 잘 팔렸던 것이다. 커피도 그랬다. 프랑스는 1714년에 115만Kg의 커피를 수입했는데, 이 양은 카이로가 예맨에서 들여오는 전체 수입량의 약 16~17%에 달했다.

네덜란드 상인

레반토 상인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커피교역에 참가한 것은 네덜란드인으로, 로테르담이나 암스테르담의 상업자본가들이었다. 커피에는 '행복한 아라비아'라는 변경邊境의 이미지가 늘 따라다녔는데, 변경이라 하면 세계제패를 노리는 열강들이 격전을 벌이는 접점이기도 했다. 날로 늘어가는 소비량에 비해 예맨이 유일한 산지였던 커피는 수요와 공급에 큰 차이가 있어서 엄청난 이익이 보장되었다.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의 상인은 커피를 사서 파는 것보다는 직접 생산해서 파는 편이 이익이 크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자신들의 식민지에 커피 플랜테이션을 구축했다.

03. 커피하우스와 시민사회



커피하우스와 공공성

1652년, 런던에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탄생한 경위는 이렇다. 레반토를 무대로 활약하던 상인 다니엘 에드워즈가 터키 서부의 스미르나에서 귀국했을 때, 시칠리아 출신의 파스카 로제를 시종으로 데리고 왔다. 로제는 주인을 위해 매일 아침 커피를 끓였는데, 그 신기한 습관은 많은 친구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에드워즈는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면서 환담을 나누느라 반나절을 통째로 허비하는 날이 많았다. 그는 시간을 잡아먹는 놀이에 종지부를 찍어보려고, 로제에게 커피가게를 열어주었다. 로제의 광고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본고장 최초. 공적으로 만들어 파는 파스카 로제의 커피 드링크의 효능."

하지만 그것이 커피하우스의 전부가 아니다. 런던의 커피하우스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성격은 공론 형성의 장을 마련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원거리 무역은 이익이 크지만 다양한 리스크에 시달리게 마련이고, 그런 위협에서 벗어나려면 강력한 무력이 필요했다.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 그것은 곧 국가의 조세조직으로서의 측면을 강화한다는 의미였다. 왕권과 거대상업자본이 기존의 '공적세계'를 점유하고 있었던 데 비해, 산업자본가는 '민간인'이었으며, 공권력 행사를 허락받지 못한 인간, 즉 개인이었다. 그런 그들이 왕권과 상업자본에 대해 투쟁을 전개하고 산업자본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공적세계와는 다른 '공적세계'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새로운 공적제도인 커피하우스가 생겨난 것이다.

공론의 장으로 되어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둔다는 점에서 근대시민사회의, 그리고 그 정치형태로서의 국민국가의 이념이 있다. 대중의 의견은 '여론'이라는 새로운 권력 팩터로서 자리 잡기 시작한다. 팔러먼트Parliament, 즉 의회는 그 어원을 찾아보면 '수다 떠는 장소'이다. 대중이 공권력을 향해 의견을 말하는 장소로서의 커피하우스는 필연적으로 사설국회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각각의 커피하우스에는 오피니언 리더가 진을 치고 고객의 이해득실과 관심의 대변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로타 클럽'이라는 사설국회가 존재했다. 창설자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본 따 『오세아나공화국』을 쓴 제임스 헤링턴이었다.

갓 볶은 숯검정의 패퇴

약 반세기에 걸쳐 런던 시민생활의 중심을 차지한 커피하우스는 어쩐 일인지 18세기 중반이 되면서 급격하게 쇠락한다. 1714년에 약 8,000곳을 헤아렸던 커피하우스는 1739년에는 551곳으로 줄었다는 통계가 있다. 커피하우스가 쇠락한 원인은 여러 가지로 언급되고 있지만, 그중 하나는 커피하우스의 사회적 기능을 다했다는 점이다. 커피하우스가 자유롭고 데모크라틱한 분위기였다고는 해도, 긴 안목으로 보면 클럽으로 가는 가교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하다. 공개지향적인 커피하우스가 각각 특수한 고정고객층을 확보하면서 폐쇄적인 클럽으로 변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무엇이 영국인들을 커피와 커피하우스에서 멀어지게 한 것일까?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참고가 되는 자료가 있다. 1674년, 남편들이 허구한 날 커피하우스에 들락거리는 것에 애태우던 아내들이 모두 커피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자 발행한 진귀한 팸플릿이다. 정식 제목은 "커피에 반대하는 여성의 청원. 남자들이 사막처럼 메마르고 쇠약하게 만드는 음료의 과도한 사용으로 여성들의 섹스에 발생하는 거대한 불편을 공공의 사려에 호소한다"이다. 시대가 아무리 돌고 돌아도 남자는 어쩔 수 없는 남자. 커피보다는 여성이 훨씬 중요한 법이다. 런던의 커피문화는 한때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동의를 얻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이러한 영국의 전철을 밟지 않고, 커피와 카페를 시민혁명으로까지 끌어올린 것이 프랑스다.

04. 검은 혁명



커피외교

카페라고 하면 프랑스를 떠올릴 정도로 국민적인 제도로 자리 잡기까지는, 런던에서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열었던 파스카 로제처럼 수많은 이방인들, 즉 에트랑제Etranger의 시행착오가 되풀이되어야 했다. 1672년, 아르메니아인 파스칼이 생제르맹에 최초의 카페를 개점했다. '개점'이라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해에 박람회에 가설된 간이점포였기 때문이다. 당시 생제르맹에는 매년 9월에 박람회가 열렸고, 파리 시민은 물론 먼 지방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파스칼은 이 인파 한가운데에 이스탄불의 '커피의 집'을 충실하게 재현한 간이점포를 던져 넣었다. 고귀한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는 커피를 일반 서민들도 마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커다란 반향을 부른 것은 당연했다.

한편, 카페를 열고 싶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도 나름의 시도를 반복하고 있었다. 1690년, 크레타 섬 출신의 칸디오라는 그리스인은 자금이 부족한 것을 아이디어로 커버하려 했다. 그는 하얀 앞치마를 두른 뒤 바닥이 평평한 바구니를 자신의 배 쪽으로 고정해놓고는, 커다란 커피 주전자를 들고 행상을 다녔다. 그가 소리치면 집에서 컵을 들고 나온 손님에게 커피를 따라주는 방식이었는데, 문제는 이 아이디어는 워낙 쉬워서 금세 따라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보면 파리의 뒷골목에 커피 아로마가 감돌게 한 공적은 크다고 할 수 있지만, 결국 이 방법은 정착하지 못했다.

카페오레

한편, 커피가 사람의 심신에 아주 해롭다는 풍설은 프랑스인 사이에서 독특한 커피문화를 발달시켰다. 바로 카페오레다. 커피가 몸에 나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우리 프랑스 땅에는 풍요와 청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암소와 우유가 있지 않은가! 우유를 섞어서 마셔서 커피의 독성을 없애려고 한 것이다. 단지 섞어서 마시면 되는 건 아니다. 그르노블의 모낭이라는 고명한 의사는 그 요령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사발 한 가득 양질의 우유를 불에 올려서 가볍게 끓기 시작하면 큰 숟가락 가득 커피가루와 흑설탕을 넣은 뒤 잠시 그대로 둔다. 너무 끓이면 안 된다. 이것을 마신 후 네 시간 동안은 식사를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필설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몸에 좋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커피는 가정에까지 들어가는 데 실패했지만, 이곳 프랑스에서 커피는 '결혼의 성사聖事'와 결부되어 신성시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한편, 카페의 발전도 결코 여성을 배제하는 쪽으로 흐르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받아들인 것이 베르사유의 귀족부인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녀들은 커피의 아로마에 흠뻑 취하면서, 터키황제의 후궁이나 술탄 왕비의 머리모양 등을 떠올렸을 것이다. 『천일야화』의 번역은 1704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들은 먼 오리엔트의 파라다이스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러한 경향은 훗날 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은 베르사유 귀족부인들을 목가적인 취미에 빠지게 해서 성대한 '커피모임'을 유행하게 만들고, 그것이 국가의 재정에까지 부담을 주기에 이른다.

05. 나폴레옹과 대륙봉쇄



나폴레옹

프랑스혁명 시대, 각 파의 비밀회의에 사용된 고급카페 중에 '이탈리아'라는 가게가 있었다. 총재정부의 바라스 자작은 이 카페를 즐겨 찾았다. 그 바라스 자작이 1793년 9월, 공회군 사령관으로 어느 유능한 젊은 중위를 대대사령관으로 임명한 적이 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이름의 장교였다. 1797년, 빈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강화조약을 계속 거부하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사절단에게 간담을 서늘케 하는 으름장을 놓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바닥에 떨어뜨린 뒤, 커피잔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귀하의 나라도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커피를 보면서 국가존망의 위기를 떠올리는 나쁜 습성이 밴 빈 사람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조약에 응했다. 1806년에 베를린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11월 21일 베를린 칙령을 선포하여 대륙봉쇄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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